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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난 성도는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에 이어 성도는 모든 것이 가한 사람, 즉 뭐든 해도 되는 사람이라 말씀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어마어마한 특권이라 생각할 여지를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난 자는 십자가를 지는 본성으로 산다.

 

바울 사도 역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게 유익한 건 아니라는 말로 절제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난 사람은 근원적으로 자유하나 그 자유를 유익하게 쓰는 본성을 가졌음을 설명한다. 이건 말로는 간단해 보여도 소위 말하는 성도들이 체감하기에 쉬운 건 아니다. 모든 것이 가하다는 의미를 방종의 허용인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 몸을 들어 설명한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은 이 모든 걸 폐하신다고 했고, 성욕이 있는 몸은 음란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있으나 또 주는 몸을 위하여 있다는 말로 모든 것이 가하지만 유익을 위하란 말을 설명한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는 말과 몸은 주를 위하고 주는 몸을 위한다는 말은 이른바 상호관계다. 이는 마치 남자라는 존재가 없으면 여자라는 개념조차 사라지는 것과 같은 관계다. 우리 육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렇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와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창조한 존재가 바로 육신 가진 사람이다.

 

다소 난해해 보이는 이 말씀들의 속 뜻은 620절에서 확정된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이자 형식이란 것이다. 이는 스스로 주관하는 권한을 가졌고, 우리가 맘대로 할 수 있는 이 육신의 삶에 허락된 선택의 자유는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쓰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음식과 배는 서로에게 의미 있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폐하신다고 하셨다. 즉 우리가 가진 형상들, 육신이란 몸과 이를 지탱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음식은 물론이고 마치 내 것처럼 주관하는 우리의 의지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수렴하는 것이란 의미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육신의 삶은 영원할 것인데, 영원하지 않다는 건 우리가 목적 아래 소비되고 소멸되는 존재라는 의미다.

 

이를 설명하는 중에 간음을 소환하고 창기와 합하는 행위는 창기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경고가 포함되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남녀관계의 기본은 내용과 형식의 하나됨이다. 의를 대변하는 남자와 형식을 대변하는 여자가 한 몸이 되어 의가 형식이 된 존재인 아들을 얻는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여자,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해 내는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존재다.

 

그런데 창기는 한 남자의 여자가 아니다. 여러가지 잡다한 의를 수용하는 인생의 모습이다. 그리스도 로마 신화처럼 다양한 신을 섬기는 게 곧 창기와 하나된다는 말씀의 표본이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 기적이나 세상의 가치와 같은 게 함께 하는 게 좋다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창기와 합하는 것이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의 의라는 단 하나의 남자, 단 하나의 의, 단 하나의 말씀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라는 말씀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결국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의 이유적 설명이다.

 

창기와 음란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면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는다는 말도 그렇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의 아닌 다른 것을 수용하기 위하여 주신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고린도전서 전반에 흐르는 세상 지혜를 의지하는 것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지만 어느 시대라도 하나님의 의 외에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식으로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신앙에 접목하는 모든 시도는 음란이다. 우리 몸은 그런 음란을 위하여 주신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몸을 주시고 우리 몸을 주관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청지기다. 그러나 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것이라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현재 자기 육신대로 선택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몸은 아름답고 건강한 유명인처럼, 신분은 왕으로 선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주어진 목적이 있다. 주신 이인 하나님께 목적이 있다. 그건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품이 무엇인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 주셨다. 낮아져서 너의 옳다는 주장 앞에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성품, 곧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우리 몸은 이를 위하여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 몸은 자기 옳음을 주장하는 이에게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낮아짐을 위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게 유익하지 않다는 말씀에서 유익함은 나를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을 기준으로 한 유익이다. 우리는 우리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같아도 육신의 삶의 모든 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야 하는 존재다. 여기에 더해 세상을 판단할 존재로 거듭난 하나님의 영은 더 유익함을 위하여야 한다. 예수 믿으면 도둑질해도 된다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아는 존귀함으로 스스로 낮아지는 유익함을 위하는 게 성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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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변화되신 산에 오르기 전,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후에 처음 십자가에 죽임을 당할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고 다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신다. 다만 이번에는 부활도 말씀하신다. 하지만 제자들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처럼 여전히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제자들은 왜 자기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칠 수 없는지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고 하신다. 하루에 최소 세 번, 밥 먹을 때마다 하는 기도가 귀신 들린 것을 내쫓는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놀라운 일을 하고 있음을 알고 기도하고 있을까?

 

하루에 세 번 이상 하는 그 기도가 귀신을 내쫓는다고?

 

소위 예수 믿는다는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한다. 아마 모든 종교를 통틀어 신도가 기도하는 것으로 치면 가장 많을지 모른다. 언급한 대로 웬만하면 하루에 세 번은 기도하지만 다른 종교의 기도와 그 내용, 간구하는 바가 다르지는 않다. 예수를 믿든 부처를 의지하든 결국 기도하고 바라는 건 육신의 일이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마켓에 간다는 건 생필품이 필요한 같은 존재란 이야기다. 이런 기도는 명백히 주기도문과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기도의 정의를 분명히 하셨다. 그건 우리가 아는 주기도문이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본질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 귀신을 내쫓는 능력 역시 이 기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면 육신이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기적과 율법 준행에 매몰된 귀신 들린 삶에서 벗어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 말씀에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란 절대적 배경도 함께 있다. 결국 이것이 기도다. 산 위에서 하나님이 저의 말을 들으라해서 보니 예수님만 보였다는 건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는 뜻이다. 들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회개를 외치실 그날부터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까지다. 변화되신 산 위아래 전후에 하신 말씀에 한정된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들으라고 하신 말씀 속 기도는 하늘의 뜻이 땅, 곧 흙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듣고(믿고) 너희도 그와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율법과 기적에 의지하는 귀신 들린 삶을 살지 않을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란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는 존재임을 다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으니 우리 역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이게 우리의 구원이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정체성 설명을 포함한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걸 증명하는 자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구원이 필요한 존재다. 그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간다고 말씀하신 건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러 오셨고, 그건 십자가에서 드러나고, 그렇게 드러난 그리스도가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존재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 물론 지금도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하지만 여기엔 양심이 필요하다. 이 양심이 없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인지 양심적으로 인지해야 한다. 세상에서 겪는 육신의 문제를 이기게 돕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여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가 필요하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기도, 이 기도가 육신의 문제를 삶의 본질로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물과 모세로 대변되는 율법을 잘 지켜내어 하나님께 보상받으려는 율법적인 믿음을 가지거나 육신의 능력 이상의 기적을 통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불로 대변되는 기적적인 믿음에 빠진 귀신 들린 삶을 벗어나게 하는 게 바로 하늘의 뜻인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이란 게 하나님이 들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모든 걸 정리하면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해 그릇되게 알고 있다. 그리스도는 마치 엘리야 같고 모세 같은 존재라 생각한다. 그리스도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고, 율법을 모두 준수하는 삶을 산다고 믿는다. 이런 생각이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을 본질로 여기는 생각과 결합해서 그리스도를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믿는다. 그리고 사람이 생각하는 육신의 문제, 그 뿌리는 바로 세상에서 낮아지는 것, 비교 하위에 유치되는 것이다. 바로 이 생각과 믿음에서 벗어나는 게 놀랍게도 우리의 구원이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간다고 했을 때 제자들이 극구 말렸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사람들이 조롱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라는 걸 믿어야 한다. 믿는다는 건 그 그리스도가 바로 내가 거듭나야 하는 나의 모습이란 걸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게 하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는 것이고, 들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귀신을 내쫓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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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새해 인사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23. 1. 1. 07:46 Writer : 김홍덕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2022년은 복음적 관점에서 세상과 사람을 조명하다 그것이 다른 편견이 아니었나 반추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복음의 가치관으로 사람들의 노력이 무의미한 맞지만 동전에 앞뒤가 있고, 하나의 정의는 다른 개념을 수반한다는 것을 다소 간과한 생각으로 다투는 시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분명 하나님의 의를 외면한 삶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 하나하나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안다고 모든 복음적 관점으로 재단하는 하나님 주권에 대한 침해 혹은 도전임을 다시 상기해봅니다. 모든 사람 각자의 인생은 행여 자기 삶이 유익하진 않다고 해도 하나님의 세상 경영에 나름 이바지하는 분명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근심하는 베드로가 요한이 어떻게 것인지 물었을 예수님은 내가 다시 까지 그를 살게 할지라도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하신 말씀이 저의 2022년을 정의하는 같습니다.

 

[요21:20-22, 개역한글]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하나 투철한 내적 다툼은 아마도 먹을 , 입을 것은 천부께서 아신다고 하신 복음의 ABC와의 다툼이었나 봅니다. 삶의 풍요나 안정이 인생의 목표나 의미는 분명 아닌 삶이지만 피부너머로 침투해 오는 살고 있는 지구촌의 다양한 변화에 다소간 크게 민감하게 대응한 해였다 돌아봅니다.

 

그리고 어려워질 것이라는 뉴스와 함께 새해를 맞이 했습니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Happy New Year 뇌까리지만 사실 정말 어려운 해가 같습니다. 그렇지만 블로그를 방문하시는 독자 여러분과 저에게는 이전보다 하나님의 복음,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삶이 성숙해지는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3년에는 정결한 복음의 말씀을 함께 나눌 있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들이 여러분의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북돋우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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