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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6:10-24) 끝인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4. 30. 22:11 Writer : 김홍덕

디모데에 관한 언급과 몇몇 동역자에 관한 언급과 함께 고린도교회로 보내는 첫번째 편지는 마무리된다. 이 마무리 인사 중에도 바울 사도는 의미 있는 말씀을 전한다. 깨어 있어 남자 답게 강건하라는 말씀과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말씀이 그렇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 찌어다라는 말씀이 압권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물론 바울 사도의 의도는 저주가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권면이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문제가 있어 바울 사도의 권면을 잘 듣지 않을 것 같아서 강하게 말씀한 것도 아니다. 알고 보면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예수님이 자기 인생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건 곧 저주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는다는 건 그 자체가 저주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건 예수님과 내가 의미 있는 관계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나에게 전부인 의미, 나는 거듭남으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십자가를 지심이 의미 있는 일이 되도록 하는 사람이 되는 관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사람인 우리에게 사람으로 사는 의미, 인생의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게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전한 모든 말씀도 이것이다. 바울 사도 뿐 아니라 모든 사도와 그 사도로부터 복음을 이어온 모든 사람이 전하는 바가 이것이다.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과 우리 또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 고린도 교회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복음이다. 이 복음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믿지 않는 건 존재의 목적도 모르면서 사는 저주 속에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고린도전서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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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일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함께 전해질 것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긴 시간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몰라도 전도할 때 이 사건을 중심으로 전도하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렇다는 식의 접근이 아니다. 복음이 전해진다는 건 곧 향유 옥합 사건이 있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된 소식이 복음이라면 사람이 생각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부유하고 평안하게 살게 되는 게 복이라면 그리스도가 그렇게 해 주신다는 소식이 복음일 것이다. 그리고 복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복을 주는 그리스도 역시 이를 복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셨고, 자기 죽음과 장사를 위한 일이 복음으로 전해진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복을 주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일이 육신의 복락을 복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될 수는 없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앞서 정리했듯이 이 향유 옥합 사건은 그 자체가 복음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향유 옥합 사건은 데칼코마니다. 흙으로 만든 옥합이 깨어지니 그 속에 있던 향유의 향기가 넘쳐나서 모든 이들이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듯, 흙으로 만든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깨어지니 그 속에 있던 물과 피가 쏟아지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 게 데칼코마니다. 예수님이 쏟으신 물은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피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이다. 옥합이 깨어져 감춰있던 향기가 넘쳐났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니 육신이 된 말씀과 그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온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해진다는 건 향유 옥합의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난 한 사람의 육신이 누군가는 옥합과 같이 깨지는 일이 있어야만 복음이 전해진다. 육신이 깨진다는 건 종처럼 수고하고 낮아지는 일이 있었다는 뜻이고, 향기가 퍼지듯 드러난 육신이 낮아진 모습에 성령으로 감동한 또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게 진정한 복음 전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향유 옥합이 깨어지는 일은 자기 죽음이 왜 복음인지를 설명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이 일이 과연 복음인가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복이 과연 이와 같은지, 십자가를 진다는 게 복음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런 고찰도 없이 예수님의 복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건 경솔함을 넘어 예수님을 욕보이는 일이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세상에서 높아지는 복을 주신 것이라고 믿고 구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향유 옥합 사건은 복음 그 자체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갈등이 종결되는 사건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가난 해결은 고사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우리의 복음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같은 운명에 귀속된다는 말씀이 우리의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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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6:1-9) 헌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3. 4. 26. 11:04 Writer : 김홍덕

부활에 대한 말씀을 끝으로 권면을 마친 바울 사도는 인사와 계획과 동역자들에 대한 당부로 고린도 교회로 보낸 첫 편지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헌금에 대해 잠깐 언급한다. 아마 당시 바울 사도가 세운 교회들은 바울 사도가 들릴 때마다 헌금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 당부했듯 고린도 교회에도 지금의 주일(일요일)에 해당하는 첫날에 헌금을 해 두었다가 자신에게 달라고 당부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 보내는 두번째 편지(고린도후서)에서는 헌금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한다. (고후 8) 사람들은 헌금에 대해 살짝 민감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헌금은 문제 있는 제도가 아니다. 사도를 위해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서, 전도 사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헌금을 모아 사용하는 건 은혜로운 일이다. 구약성경에서도 곡식을 떠는 소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셨는데, 복음 전도 과정에서 혹은 이를 위해 어떤 수익을 얻는 건 하나님을 위한 일의 부속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헌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할 때 은혜롭다. 사람 생각에 하나님의 일 같아도 진정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시는 일이 아니라면 헌금을 사용하면 곤란하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는 게 어려울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지 많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분명한 사례가 있다. 십자가를 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이를 만류했을 때의 일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하신 말씀 속에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십자가를 지는 게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막 8:3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지 묻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게 하나님의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이를 종합하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는 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일을 위하여 헌금을 사용한다면, 또 이런 일을 위해서 헌금을 모은다면 은혜로운 일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일반 상식이 된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 혹은 벌을 내리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내는 헌금은 투자지 헌금은 아니다. 자기가 낸 얼마의 헌금으로 물질적인 축복을 기대하니 명백히 투자다.

 

사용하는 것 역시 그렇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임을 전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를 믿으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는 헌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은혜로운 일이지만, 세상 기준으로 높은 위세를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헌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화려한 교회를 건축하는 일과 같은 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일을 위한 헌금 사용도 아니다.

 

이렇게 바울 사도가 헌금을 언급한 것을 빌미로 간략하게 헌금을 이야기했다. 결국 결론은 그리스도다. 십자가를 지는, 너 옳다며 육신이 한 걸음 더 수고하는 본성으로 사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런 그의 모든 수입과 지출은 다 헌금이다. 이런 사람, 이런 그리스도가 되는 게 바로 복음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전했기에 헌금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한다. 오늘 우리도 바른 헌금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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