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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이 있었다. 이것을 본 제자가 예수님께 고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위하는 것이라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이름에 의지하여 능력을 행한 사람이 예수님을 비방하지는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이 말씀에서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름’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게 무엇이냐다.

 

예수 이름이 가진 능력

예수님의 이름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능력이 어떤 능력인지도 함께 생각해야 제대로 된 믿음일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이 가진 능력에 대한 사람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문장이 기도를 완성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예수’라는 이름, 아니 단어를 자기가 바라는 바를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암구호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라고 하신 뜻은 그게 아니다. ‘예수’ 단어가 핵심이 아니라 예수라는 생명이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된 생명의 이름이다. 따라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건 곧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어 기도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건 우리의 유일한 기도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 그것은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흙으로 창조된 사람의 삶이 되는 것이다. 이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유일한 기도다. 예수 이름으로 구하라는 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기를 구하라는 뜻이 ‘예수’라는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라는 의미는 아니다.

 

또 하나는 ‘예수’라는 이름이 가진 능력이다. 사람이 가진 예수 이름의 능력을 대변하는 말이 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이다. 때로 기도원 같은 곳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은 퇴마로 대변되는 분야가 아니다. 이 능력의 핵심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능력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게 있다. 이 능력은 육신으로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대상인 능력이다. 즉 육신의 죽음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 목적을 상실한 죽음에서 하나님의 뜻이 삶이 되는 생명과 의미 있는 삶으로 바꾸는 능력이다. 예수님 이름의 능력은 육신의 질병 치유나, 귀신이나 가난 퇴치와 같은 능력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능력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다. 이는 곧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기도의 이루어짐과 같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나타나는 능력과 이루어짐이 육신의 일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되게 하는 능력이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

이와 같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게 무엇인지와 그 능력은 무엇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단서가 된다. 예수님이 어느 방향으로 가셨는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면 어느 방향으로 삶이 향하고, 무엇을 향한 삶을 사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그게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예수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이유로 물 한 그릇, 즉 작은 대접을 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상이 크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으로 누가 예수님 말씀 속 우리며, 누가 반대하는 사람인지를 확정하신다. 예수님 말씀 속 ‘우리’는 그리스도며,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예수님을 위하는 자인 반면 그리스도로 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리스도로 났다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 같은 본성을 가진 것이므로 예수님처럼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생명이다. 이게 아니면 그리스도가 아니다. 생명이 바뀌지 않아도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리스도로 났다고 말한다고 해도 높은 곳을 추구하면 그 또한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다.

 

물 하나 잔이 사소한 것 같아도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주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했을 때 로마 군병과 유대인들은 쉰 포도주를 주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게 물 한 잔을 대접하는 건 예사롭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은 높아지는 걸 의로 여기기 때문이다. 높아지는 것을 선과 의로 삼는데 낮아지는 그리스도를 대접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이유로 대접한다는 건 대접하는 이 역시 그리스도라는 의미다. 그리고 천국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이들의 나라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의,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살았다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반대로 높아지려는 사람은 갈 수 없고, 낮아지는 그리스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다. 예수님을 위하는 사람들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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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에는 결혼, 간음과 연관된 바울 사도의 권면이 많이 있다. 고린도전서가 기록된 시대는 육신적인 간음 문제가 제법 있었다는 걸 역사적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시대적 상황이 바울 사도의 권면과 무관하진 않겠지만 바울 사도의 권면은 육신에 한정된 권면은 아니다. 육신의 간음 방지를 위해 혼인하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한다.

 

결혼에 대한 바울 사도의 권면의 본질은 육신의 간음 방지 차원의 말씀이 아니다. 우선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 아닌 다른 걸 사람이 믿고 수용하는 것이다. 간음이란 자기 짝이 아닌 것과 하나되는 것이라는 게 간음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다.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존재가 하나님의 성품 아닌 것을 사모하고 따르고 수용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이다.

 

남편이나 아내가 스스로 자기 몸을 주관하지 못하고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주관한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내용과 형식은 같이 있어야 존재한다. 내용만으로 혹은 형식만으로 의가 온전할 수 없다. 남편과 아내는 내용과 형식처럼 서로의 존재 의미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으면 사망과 죽음의 상태인 반면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구원인 이유다.

 

이처럼 하나님의 정의와 남녀 간의 간음은 결이 같다. 자기 짝이 아닌 남자 혹은 여자와 관계하는 행위와 하나님의 의 아닌 다른 걸 사람이 믿고 순종하는 건 같다. 사람에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정한 삶의 목적과 의미가 자기의 짝이고 진정한 배우자이므로 다른 것을 목적으로 삼고 믿으며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삶 자체가 바로 간음이다. 이런 삶을 산다면 비록 육신의 삶이 아무리 순결하다고 해도 성경은 창기와 같다고 일갈한다.

 

에에 바울 사도는 앞에서 육신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나는 말씀을 했다. 그 말씀 역시 설명한 간음의 본질과 궤를 같이 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본질적 의미 위에서 결혼이란 삶의 요소에 대해 설명하고 권면한다. 인생 자체의 본질, 삶의 진정한 짝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삶 자체가 순결한 사람이다. 이처럼 본질이 순결한 사람은 육신으로도 순결한 삶을 산다. 이런 게 생명의 본성이고, 성경 말씀의 프레임이다.

 

바울 사도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씀한 배경에는 이같이 삶이 순결한 사람이 되라는 근원적 권면이다. 이 세상의 결혼 제도와 이를 바탕으로 한 순결과 간음의 정의는 사람으로서 존재의 목적이 회복된 삶을 설명하는 육신의 규범이다. 율법이나 절기, 규례가 모두 이런 법칙이 표현된 삶의 요소다.

 

따라서 본질이 회복된 사람에게 결혼이나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려는 시도와 노력은 의미 없다.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일단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본성이 되었다면 그 삶 자체가 순결한 결혼이고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루어진 사람이며 그의 삶 자체가 성경을 다 이룬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게 생명의 법이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의 모든 규범과 율법과 주기(절기)를 지켜낸다. 여기에 노력은 1도 필요 없다. 그리스도로 거듭나고 그 거듭난 삶이 복음임을 전하는 바울 사도가 자신을 본 받기를 원한다고 한 이유와 본받아야 하는 표본이다. 인생으로서 온전한 결혼이므로 이를 설명하는 제도로서 육신의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결혼하지 않는다는 신부나 수녀와 같은 신분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는 자기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수도한다. 그리스도로 나서 결혼의 의미를 완성했다면 그렇게 수도하고 노력할 이유가 없다. 마차가 말을 끄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정한 결혼의 본질, 사람에게 정해진 존재의 목적이 삶의 짝이 된 사람에게 육신의 결혼은 선택적 요소다. 경제, 사회적 이유로 결혼이 필수에서 선택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과 완전히 결이 다른 선택의 이유다. 그리스도로 났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육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의 목적의 일환으로 결혼은 선택적 요소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인생의 존재 목적을 이루어가는 삶의 한 도구로써 선택사항이다. 바울 사도는 이 바탕 위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명령이 아니라 권면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정말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결혼의 본질적 의미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에게 육신의 행태는 자유의 영역이다. 가감없이 말한다면 사회적 관념에서의 간음이 본질을 그르치진 않는다. 다윗과 같은 구약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육체의 간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버린 사람이 되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나 오늘날 육신의 노력으로 성경을 지키려는 노력을 신앙이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질적 결혼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이 아니다. 이건 생명의 법인데 노력한다는 자체가 이르지 못했다는 분명한 증거다. 이들에게 육신의 삶의 한 형태인 결혼을 자기 뜻으로 재단하여 결혼을 정의하고 선택할 권한이 없다.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오히려 사회적 관습과 제도다. 사회는 노력으로 이르는 세계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육신의 정욕을 참지 못하면 결혼하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여기 있다. 육신의 정욕을 참지 못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육신의 정욕이 자기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이므로 육신이 속한 세계의 법이라도 지키라는 뜻이다. 이 권면의 대상인 고린도 교회의 성도는 이미 세상의 지혜를 좇고 있어 고린도전서가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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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지금 낮고 낮은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중인데 동행하고 있는 제자들은 다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십자가를 진다는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이유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면 왕이 되실 것이라 생각했다. 향유 옥합을 이야기할 때 나오겠지만 예수님은 왕이 되러 가시는 게 아님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은 가룟 유다다. 어쨌든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된 세상을 꿈꾸며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여정 중에 누가 큰지를 논했다. 이에 예수님께선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앞에서 첫 번째 가는 사람이 되려면 뭇사람의 끝이 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단순한 역설법이나 첫 번째가 되기 위한 비법 혹은 수단이 낮아짐이라고 가르치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높고 낮은 기준이 다른 세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임을 알고 보아야 한다. 겸손하면 사람들이 높이 추켜세울 것이란 말씀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는 세상이 보기에 낮은 존재일 뿐 실상은 하나님이 귀하고 높게 여기시는 생명이란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낮아지라고 말씀하셨으니 다른 사람보다 어느 방면에서나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다스려 낮은 자세를 취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단순하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니 너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일 뿐이다. 다만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는 삶은 세상이 볼 때 아주 낮은 삶으로 보일 것이란 말씀이다. 사실 십자가보다 더 낮은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음에도 십자가를 지신 것은 부모가 힘과 능력이 아이보다 월등함에도 아이에게 지는 건 부모라는 본성 때문이듯 그 잔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기도로 다스리신 게 아니라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자기 옳다는 주장 앞에 내 육신의 수고와 생명을 내어주는 게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이 생명이 된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

 

하지만 사람은 사회에서, 세상에서 비교 우위에 서는 걸 성공이라 믿는다. 심지어 신앙도 이 공식에 대입해 놓았다. 그래서 강대상이 높다. 높이가 아니라 가치가 높단 이야기다. 본성은 이런데 육신의 말과 자세가 낮아짐은 본성으로 인한 게 아니다. 이런 낮아짐은 진심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짐을 통해 높아지는 속임수일 뿐이다.

 

세상과 사회에서 높아지고 이기기를 바라는 신앙은 거듭난 게 아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건 어린아이는 세상에서 더 큰 자, 더 높은 사람이 되는 걸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본성이 높아짐을 추구하지 않기에 아이를 본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핵심은 본성에서 비롯된 낮아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몸이 어른임에도 세상에서 경쟁해서 이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을 두고 어린아이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세계나 높은 것을 추구한다. 가치란 게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이 살았다고 말씀하시는 생명에게 가치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우리나라에선 헌법적 가치지만 북한에선 반국가적 이념인 것처럼 세상 기준으로 보면 십자가는 정말로 낮고 천한데 하나님이 보실 땐 영광스러운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관점에서 서로 누가 크고 높은지를 논하는 제자들에게 낮아짐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리고 본질은 몸의 자세나 말로 낮아지라는 게 아니라 낮아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나라는 말씀이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임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낮아짐은 곧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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