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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성화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었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로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한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말을 조롱한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조롱했다. 그리스도라면 그곳에서 내려와 보라며.

 

십자가를 지는 초라한 그리스도를 향한 비난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어느 시대나 그리스도는 높고 귀한 존재고, 그를 믿는 사람을 세상에서 높고 귀하게 만드는 메시아다. 가난하고 초라한데 그리스도라고 하는 건 언제나 비난의 대상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잘 살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이유다. 그리고 그 믿음을 빌미로 십자가를 진 초라한 예수님께 세상의 영광을 구한다.

 

사람의 이런 비난과 실망은 사람 스스로가 가진 기대와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이 낳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의 비난도 그렇다. 그들은 한 번도 매 맞고, 또 매 맞는 지경이 된 자신조차 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힘없이 끌려가 매 맞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이라 말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로마 군인도 비슷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개념의 대상이 아니지만, 말을 들어보면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잘될 것이라고 하더니 초라하게 망한 모습은 언제나 조롱거리다.

 

우리가 다시 성경을 생각해 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하는 유대인들이 불과 며칠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며 환호한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의 반전이다. 이는 그들이 기대한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한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했고, 죄인으로 끌려가 채찍질 당하는 모습으로 확정했다.

 

그러니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가룟 유다의 판단은 그나마 나았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종 정도로는 봤지만, 유대인들은 강도 바라바만도 못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게 마땅한 죄인으로 보았다. 그러고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리스도라면 내려 와 보라고 조롱했다.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라 믿었던 기대를 배신했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의 분노였다.

 

지금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 대부분은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자신의 삶을 풍족하게 해 주는 신으로서 예수님을 믿는다. 그들에게 구원은 가난한 저주의 삶에서의 구원이다. 사람으로서의 정체성 회복이나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구원이 아니다. 그들의 거듭남은 삶의 축복을 얻는 자격이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걸 존재의 목적으로 믿고자 함이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유대인처럼 돌변할 수 있다. 세상적 실패는 곧 교회와 믿음을 떠나는 정당한 이유가 된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에 의지해 성공하지 못하는 삶에도 믿음을 지키겠다고 신념으로 견디는 사람들은 사후 세계에서의 축복에 기대거나 감나무 밑에 누운 사람이지 예수님처럼 십자가 지는 삶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무식하다.

 

예수님을 세상 문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언제든지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숨긴 사람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믿음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희롱과 모독이다. 세상 초라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성공을 구한다는 게 얼마나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아주 고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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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속국인 이스라엘에는 사법권이 없었다. 예수를 죽이고 싶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당시 총독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종용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이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고 하셨다.

 

앞서 종교적인 심문 받으실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에 "내가 그로라" 답하셨고, 지금 정치적 재판에서는 "내가 왕이다"라는 반역에 해당하는 답을 하셨다. 이로써 당시 사회를 이끌던 종교와 정치 두 분야 최고의 범죄를 자인하신 게 되었다. 거짓 송사를 비롯한 여러 고소 고발이 있었지만 딱 죽임당할만한 것만 확실하게 답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빌라도의 입장에선 이 일이 어이없는 일이었다. '내가 왕'이라는 반란을 일으키려면 백성의 지지가 있어야 할 텐데 지지는 고사하고 오히려 백성에게 잡혀 와서 강도와 바꾸자고 하는 사람을 반란 수괴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 일이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하고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었다.

 

빌라도의 뜰에서 사형 선고받는 예수님의 모습은 단지 인류 구원을 위한 메시아의 사역 장면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즉 이 모습은 곧 나와 우리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모습이 나의 모습인지, 내 삶에 어떤 게 이런 모습인지 알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경험하고 살고 있어야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다.

 

오늘 나는 빌라도의 뜰에 서 있는가?

 

아마도 사람들은 빌라도의 뜰에 선 예수님의 모습에 자신을 치환해 본 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물리적인 상황으로 보면 웬만해선 사법 법정에 서는 일도 흔치 않은데, 반란 수괴로 재판을 받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화된 국가에선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당하는 일도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습에 나를 치환한다는 건 물리적인 송사나 재판에 관한 게 아니다. 가치관과 의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뜰에 서신 건 반란을 꾀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의로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즉 의의 반란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의 왕이지 높이 올라가는 것을 의와 선으로 여기는 세상 가치관의 왕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께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의를 주도적으로 주관하고 이루는 사람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12)

 

예수님과 우리는 같은 본성으로 사는 존재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창에 찔리시므로 육신 속에 있던 말씀인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본성을 보이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구원을 얻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면에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같은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나서 노력한다는 게 모순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 나도 지고, 예수님께서 제사장의 뜰에 서면 나도 서고, 빌라도의 뜰에 서면 나도 설 수밖에 없다. 이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세상 가치관 앞에 나의 육신을, 육신의 수고를 내어줄 수밖에 없고,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유로 종교적 심판을 받으며,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야 비로소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분명히 하는데 이건 노력할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빌라도의 뜰에 섰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건 차비 대신 내어주는 위함이 아니다. 죄는 내가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구조가 아니다. 예수님이 하셨다면 우리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데 어두워서 하지 못하니 하나님의 본체가 이 땅에 오셔서 몸소 보이신 것이다.

 

이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위함이다. 우리도 빌라도의 뜰에 서야 한다. 그것도 피할 수 없는 본능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걸 스스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오늘 내 삶에서 '이게 바로 제사장의 뜰에 선 모습이구나!', '이게 바로 빌라도의 뜰에 선 모습이구나!'라고 부인할 수 없는 인식과 경험이 있을 때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확인될 때 구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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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듯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베드로가 자기가 살려고 예수님을 부인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으나 그는 대제사장의 뜰까지 예수님을 보러 갔다. 그리고 로마 식민지 백성으로 독립을 도모하는 열심당 당원으로서 칼을 품에 품고 다닌 사람이다. 자기 살려고 배신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건 사람들의 생각처럼 자기가 살기 위한 배신이 아니다. 그가 모른다고 한 건 그리스도다. 채찍질 당하고 심문받는 그리스도는 생각도, 상상도 해 보지 않은 도무지 모르는 존재이기에 모른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배신의 부인을 한 게 아니라 자기 심정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변화산 사건 즈음부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를 질 것이란 말씀을 하셨다. 제자들에게 이건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기대한 나라의 독립과 가난 해결이 요원해진 건 차치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진다는 걸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건 세상에 없던 개념이었다.

 

이로 인한 제자들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면 좋은 자리를 달라고 했을 때나, 처음 십자가를 진다고 하셨을 때 적극적으로 만류했을 때 예수님은 아주 단호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시며 만류하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하기까지 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제자들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이런 갈등 속에 가룟 유다는 결국 예수님은 자기가 기대한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조급한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사람이 원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았다. 어쩌면 가장 먼저 인정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하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기준으로 갈등했다. 베드로도 그랬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그리스도인지 끝까지 확인하고 싶었다. 다른 면에서 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건 확실히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매 맞는 그리스도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기에 매 맞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너도 저와 한패다" 했을 때, 매 맞는 그리스도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는데 그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고 시인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음과는 어쩌면 별개로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모른다고 답한 것이다.

 

베드로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했다. 그리스도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부인이다, 배신이다' 말한다. 하지만 배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게 아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말하는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오늘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지, 내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가 정말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정말 오늘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를 알고 있을까? 오히려 그들은 알지도 못하는 그리스도를 안다고 거짓 증거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사실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를 모른다. 베드로는 그런 그리스도를 솔직하게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기독교인들은 그런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정작 평안과 성공을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에게 구한다.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를 안다면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일인데 그러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은 그리스도를 안다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말한다. 적반하장인 셈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를 진 패배자 예수님께 세상 성공을 구하는 게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아니 그건 부인이 아니라 모독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매 맞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는 모른다고 했다. 사실 몰랐다. 몰라서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말한다. 정작 자신은 세상의 실패자로 십자가를 진 예수님께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는 모순 속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말한다. 정말로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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