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 96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통해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수 외에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아니면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회복되는 구원을 받을 방법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죄와 사망 혹은 어려운 상황에서 구제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처한 상황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구원이 필요한 상황이 무엇이며, 또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해당이 되는 곤고하고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겪게 되지만 그런 일들은 인류 모두에게 공통된 난제가 아니다. 더욱이 이미 죽은 사람이나 앞으로 살아갈 사람, 그 누구라도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가지고 있는 곤고함, 그 구원을 받아야 할 공통의 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회고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그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과 또 그것과 궤를 같이하는 질문들이다. "왜 사느냐?",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모든 해답을 주시는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말씀하고 그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발견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인류, 오고 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존재의 이유와 목적,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 정체성은 생명이다. 이 정체성이 회복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생명은 태어나기만 하면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는 그 의만 알게 된다면 수련하듯 하지 않아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의 말씀인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 호흡이 있다는 의미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자연은 살아 있다'와 같은 말들이 그것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살아 있다는 가장 근원적인 의미는 목적 안에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시계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시간을 제대로 알려 주는지 아닌지를 말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비단 이것은 시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들고 사용하는 모든 물건이 다 그렇다. 사람이 목적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은 것이 되어 버려지는 것이 모든 만물에 있어 살아 있는지 아닌지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즉 존재의 목적 안에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고, 존재의 목적이 상실되면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역시 살아 있다는 것이 단순히 의학적인 생존의 의미에 국한된 개념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사망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기준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이자 사람에게 원하시는 존재의 목적이 한 사람에게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사람과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런 생명의 개념, 즉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기준으로 생명이 있는지 아닌지를 인정하는 개념(이것을 신앙이라 한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라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없이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이 자신에게 진정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인생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신앙하는 시작은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요한복음, 요한일서를 시작할 때 말씀하시는 <태초>의 정확한 개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생의 존재 목적을 가지신 분으로 믿는 시작이고 그것은 그 목적을 아는 것이 바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믿는 시작이 되는 것이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에게 있어 그 시작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유대인이었던 요한 사도, 어려서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알았던 요한 사도지만 예수님을 만난 그 시점이 하나님을 만난 세계의 태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요한일서의 시작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존재 곧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자신이 그 분을 만남으로 생명의 말씀의 세계가 열렸다는 것을 말하고 그것을 전하고자 요한일서를 기록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만남이며 그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셨고, 요한 사도는 그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인생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서는 이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없기에 그것을 부인하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적그리스도라고 단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기 까지 하면서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신 것을 사랑이라,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였다. 이 사랑에 대한 요한 사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바울 사도의 표현과 동일하다. 즉 사람의 정체성을 알려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위하여 어떤 수고와 희생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 사람을 통하여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창조와 존재 목적,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사랑이다. 사람이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 만한 사랑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사귐이 있을 뿐 아니라, 영생이 있고, 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을 알며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으로 전하고 있다.


요한 사도가 이러한 모든 것을 전한 배경에는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사상들을 엄히 경계하기 위함이 컸는데, 이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면 육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신 뜻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실제로 신앙의 근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에 있어 예수님께서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 우리와 다른 초인적인 분이고 내가 예수님께서 그렇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예수님과 유대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신앙관이 얼마나 허술한 신앙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요한일서의 말씀이다.


지금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두 가지의 큰 오류가 있다. 하나는 성경을 행함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아들과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율법적인 관점이다. 이는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 된다는 단순한 발상일 뿐 좋은 신앙의 풍조는 아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군인이라 군복을 입고,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으로 사는 생명의 법에 관한 말씀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오류는 요한일서의 말씀과 많은 상관이 있는데, 언뜻 생각하면 이 시대에 무슨 영지주의가 있겠는가 싶겠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신으로 지으시고 죄악뿐이라는 이 세상과 사회 속에 살게 하시는 뜻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무시하고 사람이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연약함을 정죄하는 신앙의 모습이다.


이러한 신앙의 풍조는 세상이 흉흉하다고 생각할수록 교회에만 몰입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부모라도 멀리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데, 많은 이단들이 이러한 신앙적 오류에서 시작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전혀 이상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도, 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약하는 이 육신을 주셔서 살게 하신 것도 우리가 보기에는 안타깝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육신을 하나님은 심히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도 바로 그 육신을 가진 상태로 이 땅에 보내셨고,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죄악을 뒤 엎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법에 의해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정말로 살아 있는 생명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었던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 특히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것을 망각하고 있다. 세상을 고치려 하고 있다. 또 교회를 위해서 사람을 버리기도 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영지주의에서 멀지 않다. 왜냐하면 전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방법이고, 그것은 세상과 타협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세상의 법으로 죄인 되어 십자가 지신 법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요한일서가 주는 교훈은 초대교회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어야 한다. 정말로 예수를 잘 믿고 싶다면 또한 그러해야 한다. 세상이 신앙을 몰라준다고 배척하고 무시하고 가르치려만 한다면 그것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신앙이라 하기 어렵다. 그냥 신념일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요한일서를 통하여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요한일서에 대한 포스트를 하였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일수록 육신으로 사는 삶으로부터 멀어지려 하는 이 시대의 신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요한 사도의 의도를 통하여 진정한 대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적지 않은 분들이 이 글들에 관심을 가져 주심에 감사한 마음을 표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믿는 신앙을 가지고 싶어 하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라 생각이 된다. 그런 모든 분들에게 신학이 아니라 오늘 나의 말씀과 나에게 의미가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삶으로 충분하고 넉넉하게 표현할 수 있는 믿음과 신앙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다음부터는 이전에 포스팅하다가 중단이 된 골로새서를 이어서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