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 96

(요한일서) 요한일서를 마치면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5. 1. 22. 10:31 Writer : 김홍덕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통해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수 외에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아니면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회복되는 구원을 받을 방법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죄와 사망 혹은 어려운 상황에서 구제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처한 상황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구원이 필요한 상황이 무엇이며, 또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해당이 되는 곤고하고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겪게 되지만 그런 일들은 인류 모두에게 공통된 난제가 아니다. 더욱이 이미 죽은 사람이나 앞으로 살아갈 사람, 그 누구라도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가지고 있는 곤고함, 그 구원을 받아야 할 공통의 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회고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그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과 또 그것과 궤를 같이하는 질문들이다. "왜 사느냐?",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모든 해답을 주시는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말씀하고 그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발견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인류, 오고 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존재의 이유와 목적,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 정체성은 생명이다. 이 정체성이 회복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생명은 태어나기만 하면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는 그 의만 알게 된다면 수련하듯 하지 않아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의 말씀인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 호흡이 있다는 의미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자연은 살아 있다'와 같은 말들이 그것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살아 있다는 가장 근원적인 의미는 목적 안에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시계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시간을 제대로 알려 주는지 아닌지를 말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비단 이것은 시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들고 사용하는 모든 물건이 다 그렇다. 사람이 목적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은 것이 되어 버려지는 것이 모든 만물에 있어 살아 있는지 아닌지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즉 존재의 목적 안에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고, 존재의 목적이 상실되면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역시 살아 있다는 것이 단순히 의학적인 생존의 의미에 국한된 개념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사망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기준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이자 사람에게 원하시는 존재의 목적이 한 사람에게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사람과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런 생명의 개념, 즉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기준으로 생명이 있는지 아닌지를 인정하는 개념(이것을 신앙이라 한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라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없이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이 자신에게 진정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인생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신앙하는 시작은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요한복음, 요한일서를 시작할 때 말씀하시는 <태초>의 정확한 개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생의 존재 목적을 가지신 분으로 믿는 시작이고 그것은 그 목적을 아는 것이 바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믿는 시작이 되는 것이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에게 있어 그 시작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유대인이었던 요한 사도, 어려서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알았던 요한 사도지만 예수님을 만난 그 시점이 하나님을 만난 세계의 태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요한일서의 시작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존재 곧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자신이 그 분을 만남으로 생명의 말씀의 세계가 열렸다는 것을 말하고 그것을 전하고자 요한일서를 기록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만남이며 그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셨고, 요한 사도는 그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인생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서는 이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없기에 그것을 부인하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적그리스도라고 단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기 까지 하면서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신 것을 사랑이라,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였다. 이 사랑에 대한 요한 사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바울 사도의 표현과 동일하다. 즉 사람의 정체성을 알려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위하여 어떤 수고와 희생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 사람을 통하여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창조와 존재 목적,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사랑이다. 사람이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 만한 사랑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사귐이 있을 뿐 아니라, 영생이 있고, 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을 알며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으로 전하고 있다.


요한 사도가 이러한 모든 것을 전한 배경에는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사상들을 엄히 경계하기 위함이 컸는데, 이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면 육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신 뜻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실제로 신앙의 근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에 있어 예수님께서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 우리와 다른 초인적인 분이고 내가 예수님께서 그렇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예수님과 유대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신앙관이 얼마나 허술한 신앙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요한일서의 말씀이다.


지금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두 가지의 큰 오류가 있다. 하나는 성경을 행함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아들과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율법적인 관점이다. 이는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 된다는 단순한 발상일 뿐 좋은 신앙의 풍조는 아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군인이라 군복을 입고,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으로 사는 생명의 법에 관한 말씀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오류는 요한일서의 말씀과 많은 상관이 있는데, 언뜻 생각하면 이 시대에 무슨 영지주의가 있겠는가 싶겠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신으로 지으시고 죄악뿐이라는 이 세상과 사회 속에 살게 하시는 뜻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무시하고 사람이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연약함을 정죄하는 신앙의 모습이다.


이러한 신앙의 풍조는 세상이 흉흉하다고 생각할수록 교회에만 몰입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부모라도 멀리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데, 많은 이단들이 이러한 신앙적 오류에서 시작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전혀 이상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도, 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약하는 이 육신을 주셔서 살게 하신 것도 우리가 보기에는 안타깝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육신을 하나님은 심히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도 바로 그 육신을 가진 상태로 이 땅에 보내셨고,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죄악을 뒤 엎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법에 의해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정말로 살아 있는 생명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었던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 특히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것을 망각하고 있다. 세상을 고치려 하고 있다. 또 교회를 위해서 사람을 버리기도 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영지주의에서 멀지 않다. 왜냐하면 전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방법이고, 그것은 세상과 타협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세상의 법으로 죄인 되어 십자가 지신 법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요한일서가 주는 교훈은 초대교회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어야 한다. 정말로 예수를 잘 믿고 싶다면 또한 그러해야 한다. 세상이 신앙을 몰라준다고 배척하고 무시하고 가르치려만 한다면 그것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신앙이라 하기 어렵다. 그냥 신념일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요한일서를 통하여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요한일서에 대한 포스트를 하였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일수록 육신으로 사는 삶으로부터 멀어지려 하는 이 시대의 신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요한 사도의 의도를 통하여 진정한 대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적지 않은 분들이 이 글들에 관심을 가져 주심에 감사한 마음을 표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믿는 신앙을 가지고 싶어 하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라 생각이 된다. 그런 모든 분들에게 신학이 아니라 오늘 나의 말씀과 나에게 의미가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삶으로 충분하고 넉넉하게 표현할 수 있는 믿음과 신앙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다음부터는 이전에 포스팅하다가 중단이 된 골로새서를 이어서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요한일서 5장 13-21절) 우상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5. 1. 17. 07:30 Writer : 김홍덕

요한일서의 마지막 말씀은 문맥적인 측면에서 보면 좀 생뚱맞아 보일 수 있다. 좀 난데없이 '우상을 멀리하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고 그 예수님은'참 하나님과 영생이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으로는 언뜻 연결이 잘 안되어 보일 수 있다.


우상, 그것은 '신앙의 본질을 파괴하며 신앙의 대상이 되는 상징 내지 형상 혹은 전도된 신념을 고집하는 것'이라고 위키백과(wikipedia)에 나온다. 간단하지만 아주 훌륭한 정의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리고 아울러서 '우상=편견'이라고 정의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관점으로 우상을 본다면 이는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혼돈과 편견을 가진 편향된 신앙 아니 고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데 어떤 형상을 두고 그것이 하나님이라 생각하면 그 형상이 바로 우상이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번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본질이 왜곡되거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거나 있어야 할 것이 없음에도 있어야 할 것이 함께 있는 것과 같은 여김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거나, 하나님의 의와 뜻이 없는 것임에도 하나님을 믿는 일로 고집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와 가까운 의미의 이 시대적 표현은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영웅은 사람이 처한 곤고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때로 '나의 우상'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그리스도와 우상은 비슷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우상은 전혀 다른 존재이다. 우상이나 영웅은 모든 사람이 그것에 이를 수 없다는 절대적인 정체성이 있다. 모든 사람이 슈퍼맨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그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감동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상이 우상인 것은 본질은 망각하고 어떤 형상이나 이념이나 생각 속 인물과 같은 것이 그리스도와 같이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고 곤고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 기대하는 대상은 전부 우상인 것이다.


돈이 우상이라는 말이 있다. 돈이 있으면 인생의 곤고한 문제들을 벗어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이 우상일 때도 있다. 즉 그 사람과 같이 되면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두신 본질적인 정체성과 존재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형이하학적이고 재화와 용역에 관한 문제들을 기대는 것이다.


즉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형식에 관한 것에 대한 영웅이나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에 관해서 기대하는 모든 기대의 대상과 희망을 이루어줄 것이라 기대하는 모든 이념이나 형상은 다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상은 한 마디로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아닌데 신앙의 대상이나 근원으로 여김을 받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없이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내는 삶의 모습을 잘 지켜 행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우상이다. 즉 성경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성경말씀을 우상취급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금송아지 안에 하나님의 뜻과 의가 없고, 또 금송아지가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음에도 그것을 하나님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향기를 낼 수 없는 꽃 그림 같은 것이다. 즉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가 어떤 삶과 어떤 표현을 하는 것인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기록한 것임에도 그런 삶을 살게 하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의, 곧 사람이 지어진 목적은 외면하체 행동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그렇게 본다는 것은 성경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는 흡혈귀가 나타나면 십자가를 들인 댄다는 식의 개념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본질이 흡혈귀를 내어 쫓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인데 그 정체성은 제외하고 모양 자체가 어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은 내용과 형식 중 어느 하나가 없는 상태인데 하나가 된 것과 같이 섬기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인 것이다. 내용이 없는 형식을 내용의 본질로 섬기는 돌이나 나무를 조각한 것을 하나님이라 섬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형상은 없이 본질만 고집하는 생각 속에 있는 이상과 같은 것 역시 다 우상인 것이다. 형상 없는 이상을 우리는 허상이나 허영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내용이 없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형식만 섬기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우상 취급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이다. 십계명의 1,2,3 계명이 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다 뜻이 있는데 그 뜻은 외면하고 만드신 것 자체를 하나님과 같이 섬기는 것은 전부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책도 마찬가지다. 책을 기록한 목적 즉 행간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 문구대로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뿐 아니라 영지주의와 같이 형식을 벗어버린 존재인 천사를 그리스도와 같이 신앙하고 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무시한 체 하나님의 아들은 몸이 없는 존재라 믿는 그 생각도 우상인 것이다. 


요한 사도는 자신의 영적 자녀들에게 이 우상을 멀리하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난 삶을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난 삶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보여주신 삶이다. 그 결정체는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로고스)이 육신으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기에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하나님께로 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나타내는 이 신앙의 본질을 파괴하고 형상화하거나 전도된 신념을 고집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기에 요한 사도는 이것을 멀리하라고, 그것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을 많이 기록한 사도바울과 요한사도는 약간은 다른 관점에서 말씀을 전했다. 사도바울은 율법을 형식으로 지키는 것과 조각된 어떤 형상을 섬기는 형식주의에 대하여 많은 경계의 말씀을 전했고, 요한사도는 그와는 좀 다르게 영지주의와 같이 형식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에 대한 말씀을 많이 전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모두 우상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사도는 초대교회 당시에 큰 이단적인 문제였던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이 요한일서라는 서신으로 전했다. 이는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실재로 예수님을 봤던 사람들이 많이 살아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 영향을 미쳤다.


즉 실재로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었는데 얼마 후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사를 생각해보면 '어떻게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존재가 그럴 수 있겠는가?'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으로 오심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던 것이다.


반면에 바울사도는 상대적으로 예수님을 실제로 본 사람들이 적은 지역을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혹은 자신들의 신이라 여기는 형상과 형식을 깨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내용을 전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와 같은 말씀을 많이 한 것이다.


반면에 요한사도는 요한복음이나 요한 서신들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그리스도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에 집중했다. 요한사도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많은 곳에서 말씀을 전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런 관점과 또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서신중의 하나가 바로 요한일서이다. 이 요한일서는 단순히 영지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목적 같지만 기록된 말씀은 성경, 아니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본질적인 말씀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신앙들의 모습 중에는 세상적인 것을 교회와 결합하여 교회를 시스템화하고 자본주의화 하는 형식에 치중된 신앙적 편향이라는 우상도 크고,


또 반면에 신앙의 순수성과 순도를 지켜야 한다며 세상을 무시하고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점을 간과하여 육신의 한계와 본성을 제어하는 것,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여기며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신앙적 형태를 보이는 신앙도 많다.


전자를 타락해가는 교회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면, 후자는 광신적 신앙이라 느껴지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는데, 특이한 것은 후자의 경우들은 쉽게 이단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의 순도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시고, 또 한 없이 타락했다 여겨지는 이 세상 속에 살게 하신 이유를 버리면 쉽게 광신도와 이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까지 요한일서가 우리에게 읽혀지는 이유이고, 필자가 다른 성경에 앞서 요한일서를 포스팅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은 버리고 크고 화려한 교회의 형식으로 승부하는 타락은 이미 교과서가 된 지경이고 눈에 띠게 드러난 것이라 경계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세상과 단절하고 세상을 무시하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이라 생각하는 신앙의 풍조는 경계하기 어렵다.


그것은 요한사도의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동일한 것 같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영지주의적인 관점과 신앙관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혼합된 모습으로 있는지 말로하기 힘들다. 이 요한일서에 대한 블로그의 글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이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표현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면서……


<끝>

(요한일서 5장 13-21절) 우리가 아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5. 1. 14. 07:19 Writer : 김홍덕

사도 요한은 이제 서신을 마무리 해 가고 있다.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형제들에게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먼저 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과 끝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영생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 일서의 앞부분에서 영지주의에 대하여 경계를 했던 내용의 결론이다. 요한 일서는 먼저 태초부터 있는 말씀이 만질 수 있는 육신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 육신으로 오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함으로 육신을 부정하는 신앙에 대하여 경계한 것이다.


이러한 요한 사도의 의도는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이고 실존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이 세상의 법으로는 죄인이 되나 하나님의 법으로는 아들이 되는 것을 알게 하심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 사귐이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 되고 사귐이 있는 삶이 바로 죄 사함을 받은 삶이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할 육신을 가진 존재로 지어졌다는 목적이 달성된 것이기 때문에 목적과 의도가 수용된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 살아 있고 구원을 받은 존재가 되는 법을 설명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안에서 사는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사는 사람은 사랑하는 삶을 산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사랑은 존재의 이유를 알게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고, 또한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수고와 희생을 치르며 사람에게 존재의 이유를 알게 하는 참 사랑을 전하심과 같이 계명을 지키는 삶, 곧 사랑하는 사람의 삶 역시 다른 사람에게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는 수고와 희생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형제가 궁핍한데 재물로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들어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한일서의 전반적인 흐림은 일관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요한 사도가 가진 개인적 신앙관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내용, 예수님을 만나고 전하는 모든 사도들의 말씀이 하나 같이 이것을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당시에는 육신이라는 형식만 중요하게 여겨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야 한다는 유대인과 반대로 육신은 중요하지 않다며 형식을 포기하는 영지주의가 만연했다.


이러한 신앙들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내용이신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둘 다 어긋난 것이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심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있고 그것을 알게 하심이며, 내용이신 하나님이 형식인 사람의 삶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 하나 되는 것이고, 사귐이며, 구원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풍조는 초대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신앙도 그러하다. 이 시대에는 그런 것이 없다면, 이 시대의 사람들이 영지주의나 율법주의에 대하여 경계해야할 이유가 없다면 그런 말씀이 이 시대로 전해질 이유가 없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이 시대의 신앙도 잘 살펴보면 그 두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말로 세상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용과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만들고 사용하는 모든 물건이 그렇고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으니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의 방식이 그런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사람이 만든 스마트폰은 하드웨어라는 형식이 있고, 통화나 정보의 전달이라는 목적이자 내용이 있고, 사람이 만든 자동차는 이동이라는 목적과 쇠로 만든 차체가 있는 것이 바로 그렇다. 그리고 그 둘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죽은 것이라 한다.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 굴러가지 않는 자동차, 전화가 되지 않는 휴대폰, 그런 것은 다 죽은 것이다. 즉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다. 사람이 만든 물건이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그 법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인생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는 창조하신 분이 계시고 창조하신 분이 있다는 것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육신의 삶에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도 의학적으로 아무리 살아서 숨 쉬고 멀쩡해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그 안에 없으면 죽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죽음과 사망의 실체이다.


그 하나님의 목적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육신이라는 형식이 어떤 내용과 하나가 되어야 살아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표현하고 내용으로 삼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 사람의 존재 목적인 내용과 육신이라는 형식이 사귀고 하나가 된 사람을 하나님은 아들이라 하시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이 표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표현되어야 할 내용,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모습이다. 세상의 법과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도 왕도 될 수 없고 오히려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신 사람의 모습인 것을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다.


율법주의 곧 내용은 없고 형식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죄인이고, 십자가에서는 잠깐 기절했고 마술 같은 것이라며 형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사람의 육신이 가진 욕망과 연약함과 고상하지 못한 것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도 만연한데 지금도 성경을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형식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이 완연하고, 반대로 세상은 종살이라며 무조건 떠나고 배척하며 이 세상에서의 삶은 대충 살아도 신앙만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에 뿌리를 둔 신앙들이 만연하다.


하지만 요한 사도가 전한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라고 경계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고 사귐이 있는 사랑의 상태를 전했다. 그리고 이것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시작했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상태를 살아 있다고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고 한다. 사람도 호흡과 육체가 하나로 있을 때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 숨 쉬고 산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이름, 곧 사람이라는 유전자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표현하자면 사람은 사람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려고 한다는 것은 사람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내용이자 목적이며 존재의 이유이신 하나님과 사람의 삶이 하나가 된 삶이 살아 있는 삶이다. 그 삶은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밝히 안다. 사람이 사람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아니 오히려 그것은 알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유전자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사람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시는 창조의 목적이 사람의 육신 가진 삶이라는 형식과 하나가 된 삶을 사는 사람은 존재 목적을 이탈한 죄와 무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당연하고, 그 상태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임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당연하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기록에 남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인데 어떻게 예수님을 모르고 그 삶을 살겠는가? 고로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내용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영생은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이 영생은 사람이 영원하신 또 시간적으로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 목적을 아는 세계에 속하고 하나 되는 것이 영생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와 세계 안에 들어갔는데 어떻게 영원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간의 영원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 한 것은 생명이 그 안에 있어 금할 수 없게 표현되고 아는 것이다. 병아리는 포식자가 나타나면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을 배우지 않아도 안다. 그것이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삶의 내용으로 하나가 된 생명 있는 삶은 범죄도 않고 하나님 안에 있고 영생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 사도의 말씀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에 이어서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고 하고 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참으로 성경은 앞뒤가 잘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사도 요한의 말씀하시는 바가 이렇게도 같다는 것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보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형제가 사망에 이르는 죄 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구하는 것이 기도인지 다시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 사도의 말씀 중에 사람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고 그렇지 않고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구하라고 하고 사망에 이르는 죄 범하는 것에 대하여는 구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면, 요한 사도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보여준 디테일이 여기서는 좀 약하다는 점이다. 아주 상세하게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하여 설명해 온 것에 비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항에 대하여 상세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좀 의아하긴 하다.

(사실 이러한 말씀은 신학적 고찰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이 없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형제>이다. 사람이 사망에 이르는 죄에 빠지고 그렇지 않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그럴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형제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무엇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고 정체성이라는 것을 고백한 사람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서로에게 형제가 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이 있고, 사회적으로 또한 나라의 법이나 회사의 규칙과 같은 것에 명시된 죄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모든 것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그 안에 있으면 아무리 세상의 법을 잘 지키고 법 없이 살 사람이라 여겨져도 죄인이다. 그것은 멋있는 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해적 사회에서 아무리 법을 잘 지켜도 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상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은 어떤 범죄들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형제라 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어떤 죄 범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상실되지 않은 상태에서 범하는 어떤 범죄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형제라 할 수 있는 정체성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망에 이르는 죄는 형제라는 범주를 벗어나는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누구하나 예외 없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인가 싶겠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형제라고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가 그것을 버리고 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던 사람이 이를 버리고 이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에 앞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이렇듯 용서 받지 못하는 죄와 같이 그것에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자리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을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로 가야할지 염려만 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의 대표가 어쩌면 <예정론>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했다면 다 된 것이지 사람이 할 것이 있냐 하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했다면 이미 종친 것인데 더 이상 세상 선하게 살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좀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예정론이라는 것이 자신이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라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삶을 살게 된 사람이 자신의 여정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는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간구도 체휼도 없는 사람이 '나는 예정되었을까?' 고민하는 것이 예정론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모든 사람, 오고 가는 모든 역사 속의 어떤 사람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허투루 지은 사람이 없고, 어떤 생명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은 사람이기에 모든 사람은 다 예정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이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을 믿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따라 맘대로 사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예정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 그 경륜 안에 들어 간 사람은 돌아보면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있었다고 말하고 고백하고 예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망에 이르는 죄, 사함 받지 못하는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삶,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삶, 성령의 감동으로 사는 삶 안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지,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고민일 뿐이다.


그런 것을 잘 알 수 있는 비유가 바로 달란트 비유라 할 수 있다. 주인이 어떤 사람이라 스스로 규정한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정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예정론을 논하고, 죄 사함을 받지 못했는데 사함 받지 못하는 죄를 고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알고 이 사도 요한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 또 이것을 디테일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 역시 알 수 있다. 생명이 있고, 형제라 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굳이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구하는 것인지도 알고, 형제가 무엇인지 안다면 어떤 것이 사망에 이르는 것인지 아닌지를 본능처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설명하자면, 형제라 할 수 있는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버렸느냐?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의 정체성에 관해서 말이다.


죄와 사함에 관해서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면 모든 죄를 사하신다는 대 전제가 기본이다. 다시 말해서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굳이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면 이것을 알고도 여기서 떠나는 것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맛본 사람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 개로 태어난 강아지가 세월 보내면서 고양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서 그것을 버리고 스스로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데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의 주가 되시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래서 이어 나오는 5장 18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곧 형제라 할 수 있는 사람들,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범죄치 않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해 보지 않고 어떤 것이 사망에 이르는 죄인지, 예정된 것이 무엇인지 궁리하는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그것을 스스로 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에 이르는 죄와 그렇지 않은 죄는 머리로 연구하고 신학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인지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고 그 뜻 안에 순종한 사람은 사망에 이르지도 않고 자신이 예정되었다는 것도 알고, 또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지도 알고,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지도 알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많은 기도를 한다. 성경에서는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이 많다. 하지만 앞뒤 정황을 잘 살펴보면 <그의 뜻대로>, <내 이름으로>와 같은 조건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말씀들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은 들어주시는 구조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절대적인 요소로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사람은 그릇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채워 주소서'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사람이 담아내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라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많다.


이러한 표현이 함축된 말씀이 바로 <순종>이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은 아주 수동적인 것이라는 것 역시 신앙을 깊이 상고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또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시작한 것이 아니기에 삶의 어느 한 절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는 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많은 기도를 한다. 밥 달라, 배우자 달라, 돈 달라, 명예를 달라면서 말이다. 그런 것이 없어서 삶이 힘드니 곤고함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런 것이 잘 갖추어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서 달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좌지우지 하면 <쿼바디스>같은 영화를 찍는 사람도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하면 들으신다고 생각한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육신의 문제, 돈이나 배우자, 명예나 합격과 같은 것을 들어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그런 것이 왜 하나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닌가 하면 단편적으로 봐도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기도 하지만, 정말로 생각해보면 그런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다 얻을 수 있도록 사람에게 육신을 주실 때 이미 함께 주신 만물과 사회의 규칙으로 주셔서 그 안에 맞게 살면 다 얻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5-28)


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름은 생명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생물학적으로 봐도 생명의 특성을 규정하는 이름을 말한다. 기린, 코끼리와 같은 이름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구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3-15)


요한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 역시 이 안에 있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뜻은 삶의 어떤 선택에 있어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궁금해 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어쩌면 한 가지로 모을 수 있다. 하나님께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답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필요한 재화와 용역에 대한 아쉬움을 떨칠 수 없고,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정말로 돈이 궁한 사람에게 재벌 갑부의 자리는 갈 수 없는 소위 말하는 넘사벽이다. 그러면 이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신께 기도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럴 때 양심상(?) 재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의 궁함을 벗을 정도의 해결을 바라면서 자신은 겸손하고 양심적이라는 생각까지 덧붙인다. 하지만 그건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돈에 관해서는 어떤 사회든 그것을 버는 법이 있다. 그것에 순종하면 된다. 물론 그 법 안에는 잘 벌리는 것과 망하는 것이 공존한다. 그런 양면성이 공존한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더 부자가 된다. 망하는 것을 겁을 낸다는 것은, 망하는 것은 나쁜 것이고, 악한 것이며, 자신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선악 간에 판단하는 기준이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사회에 속해서 살면서 사회가 가진 양면성 중에 자신에게 유익한 단면만이 선이고, 자신에게 일어나야 하며, 반대인 면은 나쁜 것이기에 자신에게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선악과를 먹은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 선악과의 관점을 벗은 눈으로 세상을 살면, 그야말로 부유함에도 궁핍함에도 거할 수 있는 세계 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순종을 아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그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망할 만하면 망하고 죽을 만하면 죽는 것이 인생이다. 자신이 사회의 일원으로, 아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살도록 하신 뜻을 알고 그 삶에 순종하는 사람은 사회의 법으로 열심히 살고 그러함에도 부유해지지 못했을 때 순종하고 사는 믿음이 있는 삶을 산다. (이것은 필자 역시 보고 체휼한 바이기에 확신하는 바이다.)


물론 그런 순종이 있다고 삶이 곤고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곤고함이 자신이 육신을 가진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또한 그런 것이 어우러져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세상에 속한 이 육신을 가진 삶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해 가는 삶에 더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모습, 열심히 살아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니 '법 바꾸자', '정치 잘해라' 외치거나 구국 기도회를 하는 공격적인 방법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 모습이 오히려 세상을 바꾼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세상을 구한 것처럼 말이다.(어쩌면 한국교회가 이것만 알아도 나라를 구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살게 하신 이유이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다 주셨고, 그 법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꼭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가난하면 하나님께 민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부자면 복음 전하기 편리한 것이지 유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은 성령의 감동으로 전해지는 것이지 돈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고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만 본다면, 서울역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고, 수만 명이 모이는 화려한 교회의 건축물이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겪는 삶의 형편에 순종하면서 그 삶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표현해 가는 그 모습이 보는 사람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는 그 법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안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명확하게 밝아지는 빛이 비취는 것이다. 하나님께 사람이 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삶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면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방에 불을 밝힌 것 같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과 세상의 법과 모든 것이 방 안의 비품들을 그 용도대로 사용하듯 사용법을 밝히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하는 것을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구하고 그것을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다스리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 지으신 목적이 모두 하나님의 표현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인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삶을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왕이다. 세상의 권력과 정치로 다스려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왕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하는 왕의 법 안에 있는 삶을 사는 왕이다.


바로 그런 존재가 되기를 기도하라는 것이다. 바로 그 기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는 소리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으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고, 그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 까지 들어 주시려 작정하신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