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 + 1343

사도와 성도가 서로 그 사정을 아는 것은 같은 생명의 본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면 동상이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도들을 세상의 가치로 낮아지는 것을 전하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힘입어 세상에서 잘 되려고 하는 것이 바로 동상이몽인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생각이 다른 동상이몽은 해프닝이 아니라 죄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성도가 같은 생명의 본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 이는 서로에게 위로가 됩니다. 모든 위로의 시작과 본질은 같은 형편에 속한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가 자신을 이해하는 같은 족속이라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와 다른 예수님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신비한 능력을 가졌으니 그럴 수 있지?”라고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되지만 우리는 사람이니까 노력할 뿐이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능력이 자기가 바라는 문제 해결로 위로가 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동상이몽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의 사정을 알기 원하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 성도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은 이와 같이 바울사도의 심령과 성도들의 심령이 동일하고, 본성이 동일하고, 가치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옥에 갇힌 사람이 위로가 된다는 것은 성도들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위로를 전하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된 연고를 인하여 세상의 가치 앞에 종이 되어 육신을 소비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사정을 아는 것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바울사도가 옥에 갇혀 곤고한 중에도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하나님을 빌어 육신이 평안하고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자신의 꿈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곤고함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옥에 갇히면서까지 복음을 전한 것과 같이 세상에서 힘들더라도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고 살면 육신의 복락은 물론이고 천국에서도 금면류관을 쓰고 다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형편은 그것이 아닙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한 것을 원인으로 옥에 갇혔다는 것은 세상과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사회와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심판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반대로 낮아지는 것을 의로 여기는 탓에 옥에 갇혔는데 그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을 육신으로 지켜서 세상이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 여기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가당치 않은 것인데도 오늘날 그것을 신앙의 골격으로 삼고, 그 방법에 대한 학문이랍시고 신학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바울사도의 사정과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바울사도를 감옥에 가두는 가치관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옥에 갇힌 것을 가지고 오늘날 자기 신앙의 위로를 삼는다는 것은 도적질인 것입니다. 자기 것 아닌데 자기 것인 양 하니 그것이 도적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의 전하는 바와 같은 의를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 성경을 믿고 아는 기본이자 모든 것입니다. 바울사도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이 하나님의 의가 충만하고 그것을 전한 것이고, 그 전한 것을 순종한 사람들은 또한 같은 의를 가진 사람이기에 서로가 같은 생명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의 형편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축복이 유효한 것입니다. 낮아지는 의를 가진 자의 축복이 유효하고 복이 임하려면 단연히 낮아지는 가치를 가진 생명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에베소서와 또 성경을 대함에 있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사도들과 자신의 정체성이 동일한지부터 솔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자신은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제 아무리 성경을 다 외우고 행동으로 지켜낸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낮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전하는데, 하나님을 힘입어서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더 이긴 자가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사도들과 정체성이 같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정체성이 다르다면 사도들의 사정도 위로도 아무 의미 없고 축복도 전한 말씀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먼저 사도들과 본성과 가치관이 같은 생명이 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인생의 목적이 되는 것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사도들의 서신서의 진정한 수신자요, 그 위로와 말씀과 축복이 의미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에베소서를 마칩니다. 그간 구독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편부터는 유투브를 통해 한 번 공지한 바와 같이 <질그릇의 선택>이라는 제하의 책을 쓰는 과정에서 먼저 일부를 조금씩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일이 없다면 한동안 성경책 한 권을 이어서 강해하는 것을 잠시 쉬게 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다만 그 사이에 이미 기록된 글을 일부 전자책으로 편집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급적 큰 공백없이 계속 글을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늘 감사한 말씀을 드리며 에베소서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