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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0-34) 겨자씨 비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6. 23. 16:51 Writer : 김홍덕

겨자씨 비유는 비유 자체로는 어렵지 않다. 다만 하나님의 나라가 혹시 숨이라도 크게 쉬면 날아가 버리는 작은 겨자씨처럼 작은 것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믿는 건 어렵다. 하나님 나라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하나님 나라는 크고 위대하다는 게 사람의 생각이다.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는 게 하나님의 영광이라 말하는 이유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선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정할 수 없다. 결국 이 생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결국 교회를 화려하게 건축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란 생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하나님 나라는 크고 위대한 업적으로 세워진다는 사람의 생각이 그렇다. 많은 봉사와 십일조 그리고 헌금이 천국에서 고래 등 같은 집을 상으로 받을 것이란 믿음도 이 생각의 산물이다. 이게 사람이 가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심이다.

 

겨자씨 비유는 이런 생각이 고착된 사람 앞에 예수님께서 던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가치 없는 게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이룬다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는 위대하다 믿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가치관의 연장선 위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하여 풍성해진다는 걸 알려주신 게 겨자씨 비유다.

 

지금 읽고 듣고 있는 말씀을 예수님 말씀처럼 헤아려본다면 겨자씨는 바로 십자가란 걸 알 수 있다. 사람의 생각에 겨자씨처럼 함께 살아갈 가치가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을 보내는 곳이 십자가다. 십자가를 진 당사자인 예수님의 말씀이니 더욱 그렇다. 그렇게 천한 자리에서 풍성한 안식과 만족을 누리는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높이 오르려는 사람에게 낮아지는 십자가는 겨자씨와 같이 보잘것없는 것

 

사실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다. 높이 오르려는 몸부림 속에 지쳐 있고 그 삶에 안식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잘 헤아려보라고 하셨다. 어디까지 올라야 만족스러운 인생이 되는지조차 모르면서 하염없이 위로 오르려는 게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의 그런 모습이 곧 공중의 새다.

 

그런 인생에게 안식과 만족을 주는 자리가 십자가다. 예수님 말씀은 결국 여기에 귀결된다. 이걸 아는 게 성경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걸 알기까지 헤아려야 한다. 묵상해야 한단 뜻이다. 사람이 보기에 터무니없는 말씀, 낮은 곳에 만족과 안식이 있다는 이 겨자씨 같은 말씀이 사람의 심령에 심겨서 자라면 그 사람으로 인하여 정처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안식을 누린다는 게 하나님의 법이다. 그리고 이 법이 다스리는 나라가 풍성한 하나님 나라다.

 

(마가복음 4:26-29) 묵상이 필요한 이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6. 19. 16:16 Writer : 김홍덕

묵상이란 언뜻 보기에 천국에 상급을 쌓는 것이라는 기도, 봉사, 전도와 달리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 그래서 묵상만으로 어떻게 신앙이 자랄까 의심한다.(사실 이 정도 의문이 든다면 신앙에 대해 상당한 고찰이 있는 사람이다. 대부분은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신앙이 삶의 옵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땅에 심긴 씨가 모르는 사이 싹이 나고 열매가 되듯이 묵상함으로 신앙 열매가 열린다고 말씀하신다. 땅에 심긴 씨가 열매가 되는 자연의 법칙으로 비유하셨다는 건 신앙이 자라는 것 역시 묵상만으로 풍성하게 되는 게 불변의 법칙이란 뜻이다.

 

예수님께서 계속 농부와 씨 그리고 열매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열매를 맺는 건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이다. 그래서 <거듭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나고 장성하여 열매 맺는 건 사람이 알고 있는 생명의 법, 그대로다.

 

생명은 유전자와 본성이 있다.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다. 사람이 어떤 재주를 부려도 사과를 심어 놓고 복숭아가 열리게 할 수는 없다. 그건 역설적으로 생명은 자기 본성대로 자란다. 하나님 말씀은 사람의 심령 안에서 되새김질하듯 묵상하므로 자란다. 그게 말씀의 본성이다.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동물만 먹으라고 하신 뜻도 여기 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의 말씀도 이 본성을 바탕으로 말씀하시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 자꾸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대표적인 게 기도다. 예수님께선 단 하나의 기도만 가르쳐 주셨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 말씀의 본성에 순종하고 수용하라는 게 전부다. 사람의 생각처럼 육신의 문제를 구하거나 신앙의 자람을 구하는 게 기도가 아니다. 기도 역시 하나님 말씀이 그 본성과 정체성대로 나를 주관하시도록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신앙 성장은 사람이 알고 있는 기도로 되는 게 아니다.

 

사실 하나님 말씀은 사람이 금방 수용하기 힘들다. 하나님 말씀이 어렵거나 별나서 그런 게 아니라 항상 높아지는 걸 추구하는 사람에게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란 말씀은 반대기 때문에 낯설고 수용하기 어렵다. 그래서 묵상이 필요하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가?’,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제자들과 사도들은 어떤 과정을 겪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 묵상 없이 말씀이 단번에 자기 게 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 하나님 말씀을 듣기 전까지 추구했던 삶의 방향과 하나님 말씀의 방향은 반대다.

 

항상 높아지는 걸 추구하는 사람에게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란 말씀이 만났는데 “왜 그런가?” 묵상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여기엔 충돌이 발생한다. 낮아지는 것과 높아지려는 게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여기 있다. 땅인 사람에게 떨어진 육신이 된 말씀은 씨와 같이 죽으므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씨가 열매가 되려면 땅에 떨어져 섞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리고 예수님께선 십자가를 진다는 말에 깊은 혼돈에 빠진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곧 배신하고 떠나고 부활한 자신을 만난 다음에도 도망갈 제자들이 자신을 영화롭게 하였다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들 안에 심긴 하나님 말씀의 생명 본성, 그 능력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 자신이 그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시니 확실하게 아셨다.

 

예수님께선 제자들에게 생명이 풍성해지기 위해 무언가를 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 정말로 기도하라고도 하신 적 없다. 오히려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셨다.(변화산 아래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 말씀이 놀라운 생명이 된다는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다. 그 예수님께서 생명이 풍성해지려면 필요한 건 묵상이라고 하고 계신 것이다.

 

듣고 있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헤아리고 묵상하라는 게 예수님의 당부다. 그러면 말씀이 심령 안에서 생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심령에서 생명이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들린 말씀은 이미 십자가에서 썩었고 죽었다. 그 말씀이 생명이 되기까지 우리는 그 말씀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급하다. 아니 예수님 말씀을 귓등으로 듣는다. 그래서 자꾸 뭔가를 하려 한다. 봉사하고 외치고 노력한다. 더 안타까운 건 그 노력과 외침이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이미 전해진 하나님 말씀은 십자가에서 썩었다는 것을 믿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묵상해야 할 말씀은 넘친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 전 우리가 추구했던 것, 진리로 알고 주장하고 외쳤던 것들과 말씀을 비교해 본다면 욥의 세월에 버금가는 묵상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린 하나님 말씀과 반대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기에 이 말씀이 심령에서 생명이 될 때 감동은 평생의 감동이 되고, 생명이 되면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 해도 다신 그럴 수 없는 자신이 된 걸 너무 밝히 알 것이다. 빛을 만나는 게 어떤 건지 너무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이게 단 하나의 구원, 그것이다. 그리고 자고 깨는 중에 열리는 열매, 풍성한 열매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막 4:24)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기적도 행하고 놀라운 말씀을 선포했다는 사실만으로 예수님을 빛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심령 안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있어 줄탁동시처럼 연결될 때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밝아지고 진정한 빛이 된다. 한 마디로 나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예수님으로 인한 밝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빛이란 걸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심도 궤를 같이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예수님과 연결된 사람, 그래서 온전히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 심령에 예수님과 같은 본성이 있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어렵지 않고 밝히 이해될 수밖에 없으니 예수님이 빛이 된다. 결국 빛이 드러난 사람과 귀 있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예수님께선 지금 무엇을 듣고 있는지 스스로 삼가라고 말씀하신다. 되새김질하는 짐승만 먹으라고 하심 같이 말씀을 묵상하란 의미다. 말씀을 듣고 자기 안에서 밝아질 때까지 묵상하고 또 묵상하란 말씀이다. 그렇게 하면 이어지는 자고 깨는 중에 말씀이 심령에서 자란다는 비유 그대로 심령에서 말씀이 자라고 밝아진다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헤아리고 측정하고 묵상하면 들은 이상으로 더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수가성 여인에게 하신 네 속에서 생수가 흘러넘칠 것이라 하신 말씀같이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면 말씀이 더 풍성해진다는 의미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그나마 들은 것마저 다 잃게 될 것이라 하신다. 길가에 뿌려진 씨가 새에게 먹히듯, 돌밭에서 난 싹이 햇볕에 마르듯, 또 가시의 방해로 자라지 못한다는 말씀이 그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묵상한다는 건 결국 좋은 밭이 되기 위해 심령을 개간하는 것과 같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 17:11,12)

 

더 받을 것이라 하신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과연 그런가?’ 끊임없이 묵상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된다는 건 말씀하신 하나님과 같은 의가 자기 안에 있다는 증거다. 따라서 말씀이 이해되기까지 묵상하는 과정은 심령에 심긴 말씀이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가 본성인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그 거듭남이 예수님을 온전한 빛임을 깨닫게 한다.

 

사람들의 생각처럼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음을 믿습니까?”란 질문에 라고 대답하는 그 간편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최소한 자기가 받은 구원이 무엇인지는 명확해야 한다. 받았다는 데 명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는 건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자리로 구원을 받았다는 건지, 죄는 무엇이며 구원이 죄를 깨끗이 씻는다면 일상에서 죄 없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또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자기 안에 있어야 구원받은 것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는 건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자리로 구원을 받았다는 건지, 죄는 무엇이며 구원이 죄를 깨끗이 씻는다면 일상에서 죄 없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또 무엇인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 혹은 의문에 대해 묵상함으로 밝아짐이 없는데 구원이 있을 수는 없다. 이건 성경이나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논리의 문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묵상하라고 하신 이유다. 그렇게 묵상할 때 묵상한 내용대로 구원받은 사람, 예수님의 빛이 밝게 비췬 사람으로 대우받는다. 우리의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는다는 의미가 이것이다.

 

 

 

(마가복음 4:21-23) 등불은 등경 위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6. 13. 11:00 Writer : 김홍덕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막 4:21)

 

이 말씀은 등불을 말 혹은 평상 아래 두지 않는 것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존재 정체성 역시 빛이므로 높이 들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이처럼 바로 인식하려면 먼저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게 곧 구원이다.

 

그러나 성경의 행간을 읽기보단 문자 그대로 보고, 세상 역시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보는 일반적인 사람은 빛을 물리적 광원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빛은 인식이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신 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사람에게 시작된다는 의미다.

 

사실 사람은 빛이 인식이란 걸 무의식중에 알고 있다. ‘컴맹과 같은 표현이 그렇다. 컴퓨터에 밝음이 없는 것을 어둡다고 하는 게 그 예다. 문맹 역시 같은 맥락이다. 무엇보다 죄에 빠진 사람, 구원이 없는 사람을 두고 성경이 어둡다라고 하심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는 상태가 어두움이고 혼동의 흑암이며 구원이 없는 죄의 상태다.

 

이처럼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 목적에 대해 어둡고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기에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정체성이 사람 중에 높이 들려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신이 빛으로서 높이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건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다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연히 드러날 빛인 예수님과 말씀이 감춰져 있다는 의미로 아직 사람들이 예수님을 빛으로 온전히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등불이 들려져 있지 않은 상태란 말이다.

 

실제로 성령이 오신 다음에야 극히 일부 사람에게서부터 온전한 그리스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온전히 사람에게 비췬 건 성령이 오신 이후이므로 그 이전에 예수님은 분명 감춰진 빛이었다. 성령이 오시긴 전엔 심지어 제자들조차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물론 예수님은 처음 오실 때부터 온전한 빛이셨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겐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죄 가운데 있으므로 알지 못했다는 의미다.

 

성령이 오시기 전엔 빛이신 예수님께서 높이 들리지 못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서 제대로 등경 위에 올려진 건 바로 십자가다. 하나님의 아들이 금면류관 쓰고 왕이 되어 높이 들린 게 아니라 십자가에 들리신 게 빛으로 높이 들리신 일이다. 등불을 등경 위에 놓아야 한다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놋뱀과 같이 높이 들려야 한다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높이 들린 등불이 모든 사람을 비추듯 십자가에 들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에게 영생이란 빛이 비췬단 것을 말씀하심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15)

 

구원은 있어선 안 될 어떤 자리, 위험에서 해방되었단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었다고 하려면 구원 이전의 상태부터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이 구원이 필요한 것인지도 알지 못한 상황에선 누구에게 어떤 구원을 청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놀랍게도 구원받았다는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어디서 구원받았는지 사실상 모른다. 말이야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구원받았다면서 기도할 때마다 죄를 회개하는 건 너무 명백한 모순인데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어두운 게 사람이다. 빛이 비취고 모든 걸 인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 모든 걸 알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들리시므로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이고 십자가에 들리심이 등불을 높이 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의 핵심은 역시 십자가다.

 

사람이 구원받아야 할 자리는 자기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바로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데서 구하시는 구원이다. 그리고 이 구원은 예수님께서 등불처럼 십자가에 들리시므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아 높이 들린 등불이 비취므로 모든 것을 바로 인식할 수 있는 빛이 비취듯,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서 자기 삶의 목적을 바로 인식하게 된다. 그게 구원이고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신 이유다. 등불과 같이 십자가에 들리신 이유이기도 하다.

 

(마가복음 4:1-20) 씨 뿌리는 비유 (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6. 9. 11:27 Writer : 김홍덕

좋은 땅

교회는 씨 뿌리는 비유를 가지고 성도들에게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면서 그 방법을 설교한다. 하지만 백배의 열매를 맺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좋은 땅이 되는 거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땅은 길가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심기지도 못할 심령, 자기 의로움이나 세상 걱정이 많은 심령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이건 쉬운 게 아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사람들의 생각이나 기대와 달리 오늘날 기독교인 대부분은 새가 와서 씨를 다 먹어버리는 길가와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기도 하니 씨가 뿌려져 싹이 나고 있다고 여기지만, 십자가를 지고 낮아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힘입어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심령에 심길 리는 없다. 즉 심령에 하나님 말씀이 심기지 않는다. 그나마 떨어진 흔적 정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설교하는 백배의 열매 맺는 방법은 모두 신기루고 희망 고문이다. 백배가 아니라 최소한의 열매라도 맺으려면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 싹이 나야 하는 데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을 싹트게 하는 말씀이 높아지고 이기려는 마음에서 싹을 피울 순 없다.

 

또한 교회가 추구하는 방법이 성경을 지키는 거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성경을 지킨 공로로 인해 세상에서 이기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믿음을 가진 심령에서 십자가를 지는 말씀이 백배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명백히 방향이 반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가능하다고, 그렇게 하라고 외치는 게 설교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백배의 열매를 맺는 방법이라 말하는 말들은 사실상 무덤에 회칠하는 것에 불과하다. 생명이 없는 곳에 생명의 흔적을 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열매가 무엇인지도 중요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는 당연히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열매다. 그 기준을 가진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세상의 실패자가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는 열매라는 믿음은 열매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거듭난 생명의 삶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는 십자가에서만 열린다. 따라서 좋은 땅,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를 삼십 배, 육십 배, 백배 맺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열매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며, 또 그 삶을 통해 거듭나게 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이 열매는 지겹도록 설명한 바와 같이 낮아지는 삶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더 옳지만 옳지 않은 자들의 주장 앞에 자기 육신을 내어주는 본성, 더 온전하지만 온전하지 않은 자들의 주장에 자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낮아지는 삶의 모습이다.

 

이런 삶이 열매고, 이렇게 낮아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좋은 땅이다. 그 좋은 땅은 시절을 좇아, 삶을 살아가면 갈수록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하루하루를 산다는 게 십자가를 지는 삶이므로 살수록 열매가 배가 된다. 그렇게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의 본성, 낮아지고, 어리석은 주장 앞에 육신의 수고와 육신을 내어주는 삶을 사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땅이고, 그 삶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