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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무익함은 성경의 일관된 말씀이다. 문제는 무엇이 우상인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같이 조각한 목상이나 석상 또는 나무와 돌 그리고 바위와 같은 것에 절하고 빌면 그 대상이 우상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우상의 본질은 아니다. 우상의 본질은 사실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이 자신의 문제나 소망을 이루어줄 대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우상의 뿌리고, 그 마음으로 기대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형식과 도구로 육신을 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씀의 본질적 의미다. 형상은 image고 이는 육신 가진 사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사람의 존재 목적, 삶의 의미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인 하나님의 이미지 곧 성품을 표현하는 도구와 형식이지 인생의 본질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목적을 버리고 도구이자 형식인 육신을 본질로 보고, 육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문제로, 그 육신의 평안과 안식을 도모하는 것을 소망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 마음과 소망을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 그것이 우상이다.

 

그러므로 우상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의 마음을 기대는 모든 대상이 우상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아닌 것을 바라는 대상은 모두 우상이라는 의미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상대가 다 하나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부르는 것과 기대하는 것은 상호간 동일한 목적, 동일한 본성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훈련소 훈련을 마친 아들 면회를 간 부모가 아들 이름을 부르면 자기 아들만 부모의 부름에 화답하는 것과 같다. 설사 아들의 이름이 같아서 돌아볼 수는 있어도 서로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이내 무의미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육신의 일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면 여호와 하나님은 답하지 않으신다. 무엇보다 사람이 육신의 일, 곧 육신의 정욕을 좇아 부르는 하나님은 자기 생각에는 하나님 같지만 그 하나님이 사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우상이다. 사람이 이것을 모른다. 하박국에서 새겨 만든 우상에 관한 말씀에 여호와는 성전에 계신다는 말로 답하신 것도 여기에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육신의 일, 곧 육신의 정욕을 좇아 부르는 하나님이 진정한 우상

 

새겨 만든 우상이 무익하다고 말씀하시는 끝에 여호와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하고 있다는 것은 눈에 띄는 말씀이다. 이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상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자 정체성을 자주 언급하신다는 것도 모를 가능성이 크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이 육신의 정욕을 기대며 새겨서 만든 우상은 전혀 다르다. 존재의 하나님 여호와는 존재의 목적으로 관계가 형성되는 하나님이고,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매개로 관계를 형성하려는 하나님은 육신의 정욕이 새겨 만든 무익한 우상이다.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고 우상은 새겨서 만든다. 성전에 계신다는 것은 내용과 목적과 의미와 영으로 거하신다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며, 유언자가 가진 본성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생명과 같이 속에서 밖으로 나타나는(영광 = 나타나다) 하나님이시다. 반면에 새겨 만든 우상은 기계와 같이 겉만 조각하여 만든 조각품이며, 속에서 밖으로 나올 것이 없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신다는 것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바울 사도는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신다고 했는데 바로 그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낼 형식으로 질그릇과 같은 사람을 지으시고 그 속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순종했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의미며, 무엇보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그에게는 우상이란 없다는 의미는 덤이다.

 

너희 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야(고전 3:16)

 

하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을 외면하고 육신이라는 겉모습을 본질로 보는 신앙을 가졌기에 육신의 일을 구하고, 육신의 일을 구하는 대상이자 신이다보니 조각한 것과 같이 겉모양만 새겨서 만들기에 우상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나 성당을 다니며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은 돌이나 나무로 하나님을 조각하지 않으니 자신들의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계속 설명한 것과 같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기도하고 있다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생각으로 빚고 새긴 우상일 뿐이다.

 

육신의 일과 세상에서의 성공은 겉모습과 형식에 관한 것이고, 그것을 의탁하고 해결하는 신(해결하지도 못하지만)은 형상의 유무와 무관하게 개념 자체가 우상이다. 이것을 부인하면 안 된다. 조각상이 없다고 우상이 아닌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기도가 육신의 문제와 세상의 문제라면 자기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자기 하나님이란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전 안에 계시는데 그들은 오늘날 교회의 겉모습을 화려하게 건축하는 것과 같이 성전의 겉모습, 육신이라는 인생의 겉모습만 보기에 성전 안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이들의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당연히 응답하시지 않는다.

 

하박국에 나오는 하나님 심판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 각각에 대한 능동적인 심판을 하신다는 개별적인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뜻을 벗어난 삶 자체이다. 자기가 옳다는 것을 좇아서 높은 곳에 이르려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겨야 하므로 높이 오르려는 가치관끼리 충돌하고 높이 오려는 가치관 안에서 더 높은 자가 높이 오르려는 가치관을 가진 자를 심판하게 된다.

 

이것이 이방인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이유다. 낮아지는 본성을 나타내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와 반대로 높아지려는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이 이방인이고, 그 이방인들은 서로를 이기기 위하여 서로 심판한다.

 

이러한 이방인 상호간의 심판은 어떤 경우에도 의롭지 않다. 영화에서나 심지어 현실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사회의 불의에 맞서는 헌신적인 투쟁이나 수고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지 않다. 사회 불의에 맞서는 헌신적 투쟁이나 수고의 목적은 사람이 공정하게 높은 곳에 이르고, 공정하게 평안을 얻기 위하여 수고할 수 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공정과 의로움을 이루려고 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의는 모든 사람이 바라는 높은 곳에 이르는 과정이 공정하고 평등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잘못된 생각이다. 높은 곳은 넓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공정하게 혹은 평등하게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분노를 더하여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이웃을 벌거벗겨 수치를 당하게 한다. 사람이 생각이나 상상으로 만든 그 어떤 높은 곳도 하늘 아래 있기에 결국 올라 갈 높은 곳은 없는데도 사람은 높은 곳에 오르려 한다.

 

그러나 사람이 오르려고 하는 높은 곳에는 거할 곳이 적다. 사람이 서로를 이겨야만 하는 이유다. 그래서 상대를 취하게 하고 수치스럽게 한다. 이는 사람이 생각하는 높은 곳에 오르려면 취하거나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2:15)

 

사람의 부끄러움은 선악과을 먹었을 때 나온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서 자신이 벗은 것을 보고 부끄럽고(무화과로 가리려 했다) 두려워 숨었다는 것이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낀 처음 사건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다가 얻은 결과다. 즉 하나님과 같아지지 않는다는 것, 즉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의 본질이란 말이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3:10)

 

따라서 언제나 높은 곳에 오르려는 사람이 이웃을 부끄럽게 한다는 것은 이웃을 낮은 자리로 몰고 자신은 높아졌다는 의미다. 사람은 그렇게 한 단계씩 높아질 때 마다 높아짐을 영광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영광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말은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박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영광이 아니라 수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할례 받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라고 말씀하신다. 할례는 오늘날의 포경수술이다. 껍질을 벗겨내는 의식이고,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외식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생명이 된 백성이라는 증거가 할례다. 그런데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자 이웃을 부끄럽게 하고 얻은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웃을 부끄럽게 하여 영광을 얻으려는 이방인에게 할례 받지 않았음을 드러내라고 하셨다는 것은 이방인으로서 가진 외식과 눈에 보이는 형식을 본질과 생명의 근원이라 여기는 생각을 의로 여기고 있음을 실토하라는 말이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고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 은혜의 척도로 믿는 사람 역시 이 말씀의 대상인 이방인이자 외식하는 자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기도는 모두 길 거리에 서서 외식하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같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으니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8: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은 다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와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이방인이요, 외식하는 자요,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높아지려는 이방인은 언제나 높아지려는 서로를 이겨서 상대를, 이웃을 부끄럽게 하는 사람이기에 자신 역시 그런 다툼 속에 있으므로 언제라도 높아지려는 기준 앞에 자신도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박국 2:9-14) 물이 바다 덮음 같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하박국 Date : 2021. 2. 20. 07:57 Writer : 김홍덕

하박국을 통하여 심판을 선언하시는 하나님께서 몇몇 부류의 사람에 대하여 특정하시듯 말씀하신다. 먼저는 교만한 자였고 다음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 높은 곳에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라고 특정하시고 불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들은 피로 읍을,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들과 함께 동일한 심판을 받는다고 하신다.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2:9)

 

이 심판은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한 이방에 대한 심판이라는 점과 이방인이란 하나님과 의가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방인이란 하나님과 다른 의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율법을 해이하게 만드는 사람이나 그런 그들을 심판하는 이방인이나 하나님과 의가 다르다는 점에서 같은 종족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일부의 모습들을 특정하고 분류하는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성령의 다양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다른 의를 가진 사람 역시 다양한 악함으로 하나님과 다른 의를 가진 본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양하게 특정되었다고 해도 그 뿌리는 이방인 곧 하나님과 의가 다르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소멸된다는 점에서도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먼저는 교만에 대하여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재앙을 피하려고 높이 오르려고 하는 것과,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를 행하는 것, 피로 읍을 쌓고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들은 모두 화를 당하고 불로 소멸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생각하는 재앙은 모두 육신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 누구도 죽어서 지옥 간다는 것을 심판으로 여기지 재앙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은 재앙을 육신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재앙을 피하려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한다는 것은 육신이 평안해지려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높은 곳에 이르려고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는 사람의 본질적 모습의 하나다.

 

또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를 행한다고 하셨는데 사람에게 자기 집은 평안의 터전이다. 자기 집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육신의 삶의 평안을 위한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를 행한다는 것은 육신의 평안을 위하여 하나님과 다른 의를 추구한다는 말씀이다. 성경이 말하는 불의는 세계를 정복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의가 다르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피로 읍을 건설하고 불의로 성을 건축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읍과 성 역시 육신의 평안과 삶의 안보를 위한 것들이다. 피로 읍을 건설한다는 것은 일면 특이한 것 같지만 결국 같다. 피는 생명이기에 피로 육신의 평안을 도모한다는 것은 자기 삶, 자기 생명을 모두 육신의 평안을 담보하는 것에 쏟는다는 의미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의와 반대이므로 이 또한 불의한 것이다. 불의로 성을 건축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면 된다.

 

이렇게 사람의 모습을 특정하여 말씀하심은 특정한 사람, 사람들 중 어떤 부류를 구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본성에 관한 말씀이다. 재앙을 피하려고 높이 오르려는 사람이 따로 있고, 피로 읍을 건축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의를 저버린 사람의 삶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특정한 부류가 형성되기도 하는 것은 사람 안에 그런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매개로 모이는 것일 뿐이다. 초식동물이 썩은 고기가 있는 곳에 모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소비하라고 주신 육신을 보전하고 그 평안을 도모하는 불의를 좇는 사람은 모두 이방인이기에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이 오르려 하고 자기 집을 위하여 또 성을 건축하기 위하여 불의를 행하는 일에 자기 생명을 다하며 살아간다. 자기 생명이 다하도록 하나님의 의와 반대로 산다는 의미다.

 

이런 사람의 모습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한다. 사람도 자기가 목적하고 의도한 것이 있어 만들고 구매한 것이 목적대로 되지 않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데, 그런 본성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서할 리 없다. 더더욱 사람이 가진 본성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대로 주어진 특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눈에 보이는 육신의 일을 본질로 추구하는 것을 용서하시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불심판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하박국을 통해 말씀하신다. 불로 사른다는 것은 재기 불능의 소멸상태가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다시 할 필요가 없는 심판이란 의미다. 다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반복성이라는 관점이 주된 관점이 아니라 그것이 유일하게 정해진 것이라는 점이 주된 관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의가 아닌 것을 좇는 모든 이들에게 정해진 것은 소멸되는 것이 유일하게 정해진 것이라는 것은 사람이 추구하는 것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사람이 육신의 평안을 위하여 도모하는 모든 것은 불로 살라지는 것일 뿐인데 사람이 그렇게 무의미한 것을 도모하며 인생을 보내는 것은 그 자체로 끔찍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을 받는 것이 된다. 굳이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화학적인 불로 사르지 않아도 하나님의 의를 떠나서 산다는 것 자체가 자기 스스로 인생을 불살라 소멸시키는 심판 속에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살 뿐인데 그 자체가 소멸되는 심판이 되도록 하셨다는 말씀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고 사는 것을 헛되고 소멸되는 심판에 스스로 들어간 것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경영하신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이 다스리는 곳이니 하나님의 의와 다른 뜻으로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소멸될 수밖에 없는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족들이 불 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2:13)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생들이 추구하는 것이 불로 소멸되는 것같이 헛된 것이 되도록 하심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넘치게 하려 하심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의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눈에 보이는 육신을 본질로 보고 그 평안을 좇는 마음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 각 개인 안에 있는 불의함을 소멸하시고 각 개인의 심령 안에서 여호와를 인정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이다. 한 마디로 사람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소멸되는 헛된 것임을 각 개인이 알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인정하게 하심이라는 의미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8)

 

앞서서 재앙을 위하여 높은 곳에 오르려는 것이나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그런 부류들이 있다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저버린 각 사람 안에 그런 모든 불의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의 연장선에서 한 사람 안에 있는 헛된 본성들이 심판을 받아 소멸되게 하신다는 의미다.

 

여호와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각 사람 안에 있는 불의함,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의를 버리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목적을 정하고 추구할 바를 정하는 교만과, 육신의 평안을 위하여 높이 오르려는 세상의 가치관에 매몰된 불의함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조성하신 목적에 순종하는 것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여호와를 인정하게 하심이 바로 하나님 심판의 목적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렇게 한 개인의 심령 안에서 육신의 평안을 위하여 추구한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불의한 것으로 드러나 심판을 받고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죄를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러므로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하심은 한 사람 안에 자신의 존재 목적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함이 시작되면 그 사람의 모든 심령, 그 사람의 모든 세계가 물이 바다를 덮은 것과 같이 여호와 영광, 곧 여호와의 성품과 의와 뜻이 드러나는 것이 그 사람의 세상에 가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2:14)

 

아울러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인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요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상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넘쳐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세상은 어차피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하박국 2:4-8)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하박국 Date : 2021. 2. 12. 09:49 Writer : 김홍덕

교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인생의 목적을 부여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높아지려는 마음을 좇아 살기에 얼마 없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하여 사람 스스로 가진 선과 악에 대한 기준으로 서로를 이기려 하는 것 자체가 심판이다. 물론 아무리 높아 올라도 의로워지지 못하는 것도 빠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해이하게 하는 자들을 심판하는데 사용된 교만한 이방인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시는 서두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씀을 하시므로 교만한 자와 대비시켰다. 교만과 믿음이 대비가 되는 것은 교만은 자기 뜻대로 인생을 사는 것인 반면 믿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삶 자체가 믿음이라는 의미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어떤 순간, 결정의 순간이나 유혹의 순간에 믿음을 선택한다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산(離散)적인 것이 아니라 숨 쉬는 모든 순간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사람의 평생은 사람이란 유전자로, 또 태어날 때 받은 혈통으로 사는 것과 같이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연속된 순간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얻은 그 생명의 본성으로 숨 쉬는 어느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사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엄격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생명으로 났으면 그 생명의 본성으로 사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났는데 유전자가 개나 고양이가 되지 않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말씀과 의를 자기 삶의 존재 목적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심령에 심기게 되고 그 심긴 것을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신다.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본성이 삶을 이끈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을 주관하는 생명의 유전자와 본성이 되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무조건 순종하는 삶이 되고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삶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의 본성이 된 의인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삶의 유전자와 본성이기 때문에 그것에 이끌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어느 한 순간도 예외 없이 그렇게 산다는 것이 절대적인 구분 기준이다.

 

따라서 자신은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말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을 어떤 결정의 순간이나 유혹의 순간에 성경적 선택을 하는 것으로 아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 혹은 상황을 마주했다는 것은 그 마주한 순간까지는 성경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 순간까지 성경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적인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미 성경대로 살고 있다면 삶에서 성경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나 상황을 마주할 리가 없다. 구원과 영생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것은 한 번이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삶의 모든 삶을 사는 사람이 의인이다. 믿음은 바로 그 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순종하는 그 자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자 뜻이 곧 하나님의 의고 그 의로 거듭난 사람은 그 의가 생명 본성이 되었으므로 숨 쉬는 모든 순간을 그 의대로 사람이 의인이며 그 의인의 삶 자체가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씀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서도 인용된 익숙한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의인의 믿음은 심판을 받는 자들의 교만과 대칭점에 있다는 점을 먼저 이야기 해 볼 필요가 있다. 심판을 논하는 중에 믿음이 있는 자가 의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교만한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일반적으로 교만은 육신의 지위나 재물의 정도와 같은 것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과, 또 가진 것 이상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싫어하신다는 말씀을 수없이 하셨기 때문에 교만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16:5)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육신의 어떠함을 가지고 의인이라 여기거나 교만하다고 말씀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상기하고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교만을 생각해 봐야 한다.

 

교만이라는 것이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대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할 때 예수님의 모습도 겸손이라 말하기 힘든 부분이 많지만 성경은 예수님을 지극히 겸손한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일반적 관점에서 보면 교만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일을 지극히 겸손한 것이라고 말씀하심이 그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2:6-7)

 

이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다가 또 한편으로 부모를 버려두고 나를 좇으라고 하시는 말씀같이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일한 가치관의 세계 안에서 서로 충돌하는 모순이 아니라, 표면상 말과 표현은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다른 가치관으로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교만이라는 것이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자신을 스스로 높인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동일할지 모르지만 사람은 육신에 관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존재 정체성에 관한 것을 기준으로 교만을 논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육신에 관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존재 정체성에 관한 것을 기준으로 교만을 논한다.

 

사람은 육신이 가진 재물이나 능력이나 가치를 스스로 가졌다고 자랑하며, 그렇게 가졌기에 또 스스로 높은 자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교만이라고 하는 반면 하나님께서는 정체성, 존재의 목적을 기준으로 교만을 이야기 하신다.

 

물론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난 피조물인 사람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인 것처럼 자랑하는 모든 것이 교만이지만 사람을 창조하신 분의 입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피조물이 창조의 의도대로, 창조한 목적과 뜻대로 존재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자기 스스로 나거나 조성한 인생이 아닌데 인생의 목적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존재의 목적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가장 큰 교만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교만에 대하여 특히 터부시 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뿐 아니라 선악과를 먹을 때 하나님처럼 되려고먹었던 그 마음도 목적을 기준으로 교만에 해당하고, 성경이 말하는 도둑질 역시 자기가 조성하지 않은 인생을 자기 것으로 삼은 것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지 않는 사람의 인생 전체가 교만이다. 이는 목적이란 관점에서 보면 목적을 이탈한 것이다. ()라는 말이 자리를 벗어나다라는 말인 하말티아에서 온 이유다. 즉 사람이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인생의 목적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은 그 자체가 모두 죄다. 숨 쉬는 자체가 죄다. 따라서 심판을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사람도 자신이 목적을 가지고 만들거나 사거나 또 용역을 구매했는데 그것이 목적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큰 싸움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인생을 심판하시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런 이유로 교만은 죄고, 죄기에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앞선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능동적으로 벌하시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과 다른 목적으로 산다는 자체가 괴롭고 힘든 일이기에 그 자체가 심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심판하시지 않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사람을 기다리시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심판이 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간첩으로 사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그 자체가 심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스스로 정한 인생의 목적을 추구하는 삶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아닌 삶을 사는 이들 서로를 늘 심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심령에 있는 낮아지므로 이기는 본성, 낮아지므로 얻는 가치를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더 낮아질 수 없는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 인생의 목적이 그것임을 보이셨다. 그에 반해 사람들이 스스로 정립한 자기 인생의 목적과 가치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언제나 높아지는 것에 있다.

 

당연하게도 높은 곳은 자리가 좁다. 누군가를 이겨내지 않으면 오를 수 없는 곳이 높은 곳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면서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 낮아질수록 땅은 넓고 거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높아지려 하므로 서로를 이기려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긴 자가 되어야 하는 기준을 스스로 정한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선과 악의 기준은 괜히 정하는 것이 아니다. 선을 장려하고 악을 심판하기 위함이다. 자신이 조성하지 않은 인생의 목적을 스스로 정하는 교만으로 일어난 악순환이다. 사람이 그 속에서 헤매는 것을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고 하며, 바른 방향이 아니니 어둡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이 자기가 조성하지 않은 자기 인생의 주권을 스스로 가진 것으로 여기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만이며, 이는 선악과와 죄 이 모든 것과 뿌리가 같다. 그리고 그 교만 속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스스로 높아지려고 동일한 세계에 있는 서로를 늘 심판한다. 그렇게 교만한 자들은 늘 심판 아래 있다.

 

 

 

 

  1. 2021.02.13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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