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 + 1530

요한1서 022(2:7-11) 새계명과 옛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21. 7. 28. 13:54 Writer : 김홍덕

 

 

사도들의 서신 속에는 많은 염려와 훈계 그리고 책망들이 있다.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바울 사도의 서신 속에도 책망과 염려가 있다. 행위냐 믿음이냐에 대한 서신을 보내는 것 자체가 갈라디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행위에 대한 혼동과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사도들의 책망은 그 문장 자체로만 보면 모두가 구원을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구원에서 떨어질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시기도 했지만, 누구도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가 구원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갈라디아서의 내용만으로 본다면 믿음이 없는 것은 곧 구원을 얻지 못하고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이라는 의미기 때문에 우리에게 혼돈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과 믿음이 온 사람은 사도들의 책망을 소화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 책망이나 훈계에 관한 말씀을 듣고 더 나아지려 한다는 것에서 표면적으로 같아 보이지만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은 더 노력하고, 믿음이 온 사람은 더 성장하게 한다는 것이 다르다. 노력과 성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성장이라는 것은 생명에 사용하는 말이라는 점이 근본적 차이다. 성장은 이미 있는 생명의 본성이 자라는 것이고, 노력은 없는 것을 가지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완전히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보이지만,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의 서신 속에는 분명히 우리너희가 있다. 그리고 책망의 대상이자 미혹하는 무리가 있다. 당연히 서신을 기록한 사도들의 공통적인 방향성은 너희가 우리 같이. 서신서의 주된 수신자는 우리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너희라는 것이다. 이것은 서신을 기록한 목적 그 자체이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에 이르러야 하는 너희가 존재하며, 너희라는 사람들의 성숙도는 다양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각 사람의 신앙의 여정, 신앙의 성숙도가 다양함을 대변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롸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갈 4:12)

 

따라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어찌하여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은 미혹하는 무리에게서 우리와 같이 되어야 할 너희를 권면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갈라디아교회, 고린도교회, 골로새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미혹하는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구분해야 한다. 앞서 설명한 대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이다. ‘~~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사람을 권면하는 것이 바로 미혹그 자체다. ‘~~하면이라는 가정과 조건에는 반드시 기도나 봉사와 같은 행함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은 항상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서 반응하신다고 믿기에 책망 앞에서도 더 노력한다.

 

반면에 바울 사도와 사도들이 자신들과 같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책망과 교훈이 의도하는 바가 자기 안에 생명의 본성으로 있는 사람이다. 근원적으로 믿음은 노력을 요구하지 않으므로 교훈을 주는 사도들의 의도는 너희안에 이미 있는 것을 지키고, 그 생명 본성이 장성한 분량이 되는 것이다. 이미 있는 정체성을 더 확고히 하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점에서 노력과 엄연히 구분된다. 노력은 그 자체가 없는 것을 도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망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요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자신이 거듭난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책망을 인하여 구원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책망이 의도하는 바가 이미 거듭날 때 얻은 생명의 본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을 지키려고 또 예수님처럼 노력하는 신앙에 속한 사람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자신이 행여 구원에서 끊어질까 염려한다. 그리고 또 노력한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에게 왜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하는지 반문한다. 다시 돌아가려고 묻는다는 것은 이미 있는 자리에서 이전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에서 바울 사도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너희라는 부류의 정체성과 책망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런 책망이나 교훈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란다. 스스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어림을 인정하고 거듭났을 때 이미 얻은 생명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자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의도에 반응한다. 이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교육이란 말은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끌어낸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이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본성이 된 사람은 사도의 교훈과 성경의 말씀이 그리스도로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 예수님께서 목욕한 자라고 하신 사람이라면 성경 말씀에 비추어 부족한 자기 삶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더 자라는 계기가 된다. 형이 동생을 잘 보살피지 못할 때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나 언제나 형이기에 깨달으면 더 형다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형이 아니라면 노력한다 해도 형이 되지는 않는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왜 성경이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하는지 또 확인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경의 교훈들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함을 지양하도록 권면한다. 구원은 시작이고, 그 시작이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유일하게 여기시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난 사람이라면 성경의 모든 권면, 심지어 질책이라도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이끈다. 성경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들의 권면이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때로 어떤 말씀들은 마치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을 질책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 안에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구원의 문제나, 더 많은 신앙적 행위와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믿음, 율법이 지나고 난 다음에 온 믿음을 끌어내는 것임을 스스로 안다. 사도들의 교훈은 그렇게 와 닿아야 한다.

 

 

(갈 4:1-7) 율법 아래 나신 예수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7. 22. 16:37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예수님이 율법 아래에서 났다고 말한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던 우리가 속량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속량은 우리가 율법에 속했던 세월을 유업을 이을 자가 후견인 아래 있던 것 같은 시간과 상태라고 정의한다.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를 믿음으로 이끌었다는 말씀의 연장이다. 그러나 범법자를 위한 것이라고 한 율법 아래서 예수님이 났다는 것 우리에게 쉬운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율법 아래 났다고 하심은 우리 역시 율법 아래에서 나고 사는 세월이 있다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이 우리가 육신을 가졌기 때문이듯,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나셨다는 것은 우리 역시 율법 아래 났음을 말씀하시고자 함이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범법자를 위하여 주신 율법의 세월을 지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말씀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전 과정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람이 육신으로 나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세월이 가진 의미,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에 대한 온전한 의미,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우리 인생의 목적을 보이시기만 하시고 사람이 그 보이신 목적에 순종하는 선택을 할 때 구원을 얻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법부터 자신의 이야기여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강제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에서 다양한 말씀으로 설명되어 있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 그 천지창조의 말씀도 이 과정이고,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도 사람의 신앙 여정의 모형이자 본질이다. 아브라함의 여정이나 야곱의 여정도 그렇고, 심지어 요한계시록의 모든 묵시도 이것이 바탕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육신으로 날 때는 그 누구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생의 존재 목적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를 인지하지 않은 상태로 난다. 사람은 살면서 그것을 스스로 선택하여 자기 안에 담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선택이나 순종 없이 강제적으로 아바타처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람이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창세기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야 한다.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땅 곧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흙으로 창조된 사람의 인생에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때가 있다는 의미다. 이 시간이 바로 율법의 시간이자 믿음이 오기 전의 시간이다. 그리고 범법자 곧 죄인으로 사는 때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나기 전까지 예수님이 죄인이었다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죄인인 예수님을 보고 광야에 들린 놋뱀을 보았을 때 자신도 뱀으로 비침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함께 그렇게 육신의 삶이 세상의 가치로 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대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발견하므로 믿음이 온다. 십자가 아래 있던 백부장이 죄인으로 달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발견하고 고백하므로 이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사람의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되고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사람이 되며,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하나님께서 의도한 존재가 그리스도이므로 이런 천지창조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이라고 한다.

 

이같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능력으로 생각하고 교육받고 고민하며 사는 인생의 여정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났을 때까지의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이 창세기 1:2절이 말씀하시는 혼돈의 시간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말하는 후견인 아래 있는 시간이고 율법이 관장하는 시간이다. 율법의 시간인 셈이다. 그러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자신의 삶이 죄인이었음을 깨닫는 시간이 온다. 이 기회는 반드시 누구에게나 온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인하여 심판을 받는 이유다. 모든 인생이 위로 올라가는 것에 한계를 반드시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구도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범법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모습을 설명하신다는 말씀이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들린 놋뱀이 이를 설명한다. 놋은 당시 거울의 재료인데 그 놋으로 뱀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것을 보고 자신이 뱀 곧 죄인인 것을 고백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생을 위해서 자신도 이렇게 들려야 한다고 니고데모에게 십자가를 설명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여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

 

 

(갈 3:23-29) 율법 아래 있을 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7. 8. 17:52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믿음이 오기 전은 율법 아래 매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한 마디로 구원을 받기 전은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씀도 의미가 있으려면 믿음이 온 사람, 즉 자신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율법 아래 있는지 분간조차 하지 못한다. 믿음이 온 사람은 분명히 율법의 인도함이 있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을 꼭 분간할 수 있어야 하는가?’라는 의문과 반문을 자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앞서 구원을 받았다면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을 만났을 것이라는 논리처럼,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알기 어렵다. 이것은 논리적 논쟁이 아니라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 신앙인은 사실상 율법 아래 있다. 물론 자신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구원은 쉬운 것이란 말씀에만 매몰되어 확실한 증거도 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경향이 짙다. 율법과 믿음이라는 주제 역시 그렇다. 구원을 받았다면 분명히 율법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율법적인 가치관과 삶을 청산했다는 의미다. 즉 행함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음을 알고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안전을 보장하신다고 여기는 것과 같이 어떤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을 보장받으려 한다. 그것은 분명히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임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율법 아래 있지만 믿음 안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고, 율법을 만났지만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율법은 몽학선생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한다. 몽학선생은 학생을 혹독하게 몰아서 교육하는 스파르타식 교수법을 가진 선생이라 할 수 있다. 율법이 우리가 죄를 깨닫도록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는지를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지키다 하나를 범하면 모든 것을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는 것은 더 이상의 엄격함이 없을 정도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그런 혹독한 세월이다.

 

누구라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또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했었다면 그 엄격함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엄격함 앞에 타협하지 않았다면 크나큰 낙심을 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노력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수시로 회개해도 또 죄를 범하는 자신을 용납하고 타협하는 것에 분명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율법 아래의 삶은 그렇다. 적어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정말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려는 진실한 마음이 있다면 그렇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행위로 지켜내려고 하면 반드시 절망하게 된다. 이것은 중력의 법칙처럼 예외가 없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그렇다. 이런 세월과 간증이 없다면 율법을 벗어난 것 아니다. 성경을 육체로 지켜내려고 노력하다가 절망을 만난 적 없이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도 없고, 율법이 의도하는 대로 율법을 떠나 약속을 좇아 지시할 땅으로 갈 동력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렇게 우리를 믿음으로 이끈다. 행여 기도하지 않고 운전하면 사고날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신앙은 어느 순간 정말로 기도하지 않거나 아니면 기도했음에도 사고가 난다면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했던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 그러면 기도한다고 사고가 안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듯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면서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고 그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살아도 인생은 언제라도 원치 않는 길로 접어들게 되면 육체로 성경을 지키는 공로로 하나님의 의를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적어도 율법은 분명히 그렇게 이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인도함을 대체로 거부한다. 금식기도를 시도하다 실패하면 자신을 자책한다. 그리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육체로 성경을 지키고, 육체의 공로를 드려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사는 것이 실패하면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라 받아들인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의도보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아 사망에 이르는 법이 그것이다.

 

율법 혹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은 행하지 않으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까 염려하므로 억지로 또는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다. 더욱이 원하는 결과가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라도 세상에서 높아지고 이기는 자가 되려는 것이라면 더더욱 문제다. 그때는 육체로 성경을 지키게 하는 동력이 율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육신의 정욕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율법을 인하여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죄를 깨닫게 하고 믿음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신앙적 불행이 아니다. 정말로 온전한 율법 아래 있다면 분명히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예외 없이 믿음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따라서 범법자를 인하여 주신 율법 역시 당연히 그렇다. 또한 실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므로 사람이 제대로 율법 아래 있다면 반드시 믿음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그 믿음을 인하여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 회칠한 자기 욕심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지키는 것은 온전히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율법 아래 있다면 반드시 믿음으로 이끄심을 받는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바로 그런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율법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갈 3:23-29) 믿음이 오기 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6. 30. 18:05 Writer : 김홍덕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므로 율법의 효력은 절대적으로 범법자에 한정된다. 또한 죄를 고백하고 시인한다는 것 역시 범법자라는 의미다. 바울 사도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까지 있는 것이라고 했다.(3:19) 그리고 이 자손은 예수님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 역시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전까지의 세월은 범법자라는 말이다.

 

이는 구원의 법과 결을 같이한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므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이다. 구원받기 전까지 죄인이었기에 죄인임을 고백하므로 구원이 시작된다. 그리고 거듭난 생명의 정체는 바로 그리스도.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다시 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물과 성령으로 된 거듭남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전의 시간은 율법의 시간이자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하지 않은 범법자로 산 시간이다.

 

이 시간은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을 알고 교제한다고 했다가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에 하나님의 세계가 없다는 말이다. 즉 천지창조 이전이라는 말이다. 정리해 본다면 율법의 시간, 율법으로 죄를 깨닫기 전 범법자로서의 시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간이기에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천지창조 이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핵심은 우리가 죄를 깨닫는 것이다. 그 시점 이전은 분명히 죄 가운데 있다.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이 죄 가운데 있었다는 말이다. 범법자로서 살았다는 말이다. 율법 아래 있었다는 말이다. 죄를 고백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은 약속 밖에, 그 이후는 약속 안에 속한다. 이로써 율법으로 죄를 깨닫기 전까지는 구원을 받지 못한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 가운데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목적과 목표는 전적으로 우리가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에 있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우리의 절대적인 목표다. 특히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시므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것은 창조하신 목적을 아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피조물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 곧 성품과 이미지를 표현하시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을 안다는 것은 창조주를 아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의 믿음은 이 약속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자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내 삶의 존재 목적이자 의미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결국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자 우리 존재의 목적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 목적은 예수님께서 아주 상세하고 온전하게 보이셨다.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까지 보이셨다. 따라서 우리가 믿어야 하는 내용은 십자가의 도 이외에는 없다. 그것 외에 우리를 의롭게 할 것이 없으므로 그것 외에 믿을 것은 없는 것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렇다면 우리는 또다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우리 인생의 목적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이것은 착각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 죽임을 당하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것은 엄연히 착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갈라디아서의 주제 안에서 보면 사람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을 원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의롭게 여기실 것)이란 믿음으로 성경을 육신으로 지켜내는 공로를 드리려 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다. 즉 오늘날의 보편적 기독교 신앙관은 율법의 시간 아래 있는 것이자 범법자의 모습이며 아직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믿음이 오기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