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존재적 관점으로 보자)

주님의 재림에서 시작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의 마지막 권면은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멀리하라는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물론 그 뒤에 형제들 그러니까 사도들을 위한 기도와 그리스도의 평강을 기원하는 문안이 있다.

 

이 블로그는 성경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다. 행위가 본질이 아님을 설득하고 있다. 행위는 본성, 정체성에서 비롯된 표현이지 주체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걸 늘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게 행동의 무의함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구원받았다면 도둑질해도 괜찮냐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건 존재론적 관점의 의도가 아니다.

 

오늘 본문이라 할 수 있는 데살로니가 전서 마지막 권면 중에 있는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멀리하는 말씀을 존재론적 관점으로 조명한다면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을 멀리하는 존재가 되면 이 말씀은 그저 이루어진다는 게 성경을 존재론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되느냐는 문제가 있는데, 그 답이 바로 <거듭남>이다. 거듭난다는 건 생명이 바뀐다는 말이다. 생명이 바뀐다는 게 바로 존재가 바뀌는 것이다. 성경이 굳이 거듭난다는 표현과 새 생명이 되라 말씀하시는 의도가 여기 있다. 성경의 말씀들을 읽고, 듣고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그런 존재가 되는 건 근원적인 차이가 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실패와 실패를 대하는 태도다.

 

거듭남이란 구원의 은혜는 존재를 바꾸는 은혜다. 성경은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악한 것인 줄 알지만 나름의 유익이 탐이 나서 망설이다 성경에서 악을 멀리하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내적으로 갈등하다가 어렵게 악을 멀리하는 건 존재가 바뀐 게 아니다. 거듭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부류의 사람들 대부분이 이렇게 성경을 지키려 한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 그렇게 해야 복을 받는다고 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렇게 사람을 강제하고 바꾸려 한다. 노력해서 바뀌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인 거듭남이 버젓이 있다. 우리가 거듭남의 은혜를 누리도록 하시려고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었다. 그렇게 존재가 바뀌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 삶의 모양과 행동을 바꾸는 건 거듭남의 은혜가 아닌 노력을 말한다. 노력해서 은혜를 받거나 외면해서 벌을 받는 중에 선택하라고 말한다. 이건 심하게 말하면 가스라이팅이다.

 

가장 큰 문제와 피해는 그렇게 해서는 성경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패만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실패한다는 게 기특한 노력이 아니다. 계속 실패만 한다면 결국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신앙의 궁극적 목적,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달리 손해 보면서까지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인생 전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 이런 심각한 위험 앞에서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 괜찮다며 안심할 문제가 아니다.

 

바울 사도의 많은 권면의 본질도 열거한 행위에 관한 권면을 빠트리지 말고 행하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행동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런 본성을 가진 생명은 우리가 다 아는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생명의 본성이다. 그런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게 거듭남이다. 바울 사도를 비롯한 모든 사도의 권면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존재에 관한 말씀으로 읽고, 듣고, 전해야 한다. 그게 성경의 의도다. 성경은 그 거듭난 존재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하나님 아들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존재론적으로 성경을 보지 않고, 행위와 소유의 말씀으로 본다. 어떤 행위가 소유의 변화를 불러온다는 인류 공통의 집단 지성으로 성경을 본다.

 

바울 사도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은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전했다. 어느 시대나 그건 참 힘든 일이다. 그래서 서신의 마지막에는 늘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자기 일행과 동역자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한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린다면 오늘 우리도 성경을 존재론적으로 보면서, 어떤 행위를 권면하고 있는 지를 주목할 게 아니가, 그렇게 권면하는 행위는 어떤 존재의 본성인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 존재가 바로 거듭난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도 거듭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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