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후서' + 30

(베드로후서) 마지막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후서 Date : 2019. 1. 25. 08:38 Writer : 김홍덕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이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그리스도에게 배운 대로 사는 삶을 마감하기에 앞서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권면하고 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전제가 있다. 이 베드로후서는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직접적인 교훈이 되고, 이 말씀을 읽었을 때에 자신이 같은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사실을 고백하고 시인할 때에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단지 교회에 다닌다고, 또 복음에 대하여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 하나를 근거로 자신이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초대를 받으면 말석에 앉으라고 하셨다. 사람이 아무리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이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 삶과 말에서 나타날 것은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신을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이 서신에서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옛 신앙>이기 때문이다.


흔한 생각으로 이전에 절에 다니다가 이제 교회에 다니게 된다면 불교는 옛 신앙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지금의 새로운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물론이고 모든 사도와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제 아무리 다니는 성전이 교회라도 이전에 절에서 빌든 것을 교회에 와서 똑같이 기도하고 빌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옛 신앙일 뿐 아니라 간음이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며,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것이다. 절에서나 성당에서나 교회에서나 심지어 무당 가릴 것 없이 그 구하는 바가 육신의 어떠함에 대한 기대에 귀속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옛 신앙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신들(사람들이 신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지만)에게 사람들이 빌고 있는 육신이 바라는 바에 대하여 들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의 주권에 달린 것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모든 인생들에게 그 삶을 주실 때 이미 다 주시고 예비하신 것이다. 사람은 그 안에서 살면 된다. 살아가면서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부실하다고 항의하는 것이고, 그것을 채워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와서 밥 달라, 돈 달라, 배우자 달라, 사업 잘 되게 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의와 신앙을 좇아 누구나 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육신의 정욕이다. 그리고 그것을 좇고 그것이 있어야 한다고 의로 여기는 것이 간음이다. 이 모든 것이 옛 신앙이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의 성품의 참예함은 고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같은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이러한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구분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이것을 연구하거나 조사나 비교로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경계를 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분명한 구분이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최전방 초소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군인들은 적과 아군을 분명하게 구분할 뿐 아니라, 누구라도 아군인 것을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불분명하거나,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경계를 맡기지 않듯, 베드로 사도 역시 옛 신앙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옛 신앙을 경계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옛 신앙을 구분하는 사람이요,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라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이제 삶의 마지막을 인지한 대 사도가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까지도 새 하늘과 새 땅은 물리적으로 임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아직 때가 안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에서 볼 자가 있다고 하셨다. 그 말씀만 믿는다고 해도 재림이라는 것이 물리적인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어둡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는 것은 새 생명, 그리고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며, 옛 신앙 안에서 이전 것과 그 의와 옛 생명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언제나 오래되고 낡았으며 문제가 많고 누군가에 의하여 천지개벽이 일어나야 할 정도로 문제가 많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과 그 눈으로 세상을 볼 것이고, 그 보는 것은 그 안에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의 눈과 안목으로 보기에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기에 땅과 하늘도 새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 땅과 이 하늘이 새 것으로 보이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다스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추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그 생명과 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은 육신의 삶을 살거나 그 육신의 장막을 벗거나 어차피 하나님의 의가 그 정체성의 본질이고, 그 생명의 본성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미국에 가도 대한민국 국민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이러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육신 가운데 있기에 같은 믿음 안에 있을지라도 때로 그것이 분명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음을 알기에 그 사랑하는 사람들, 같은 믿음을 가졌고,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들에게 분명한 보증을 하고 있는 것이 이 베드로후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베드로후서를 신학과 같은 학문적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안목으로 봐야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삼는지, 그것이 가장 본질이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에 있어 가장 온전하고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의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이나 신앙이 아니라 상식이다.


베드로 사도가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신학적 지식 없이 성경을 보는 것을 사사로운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사로움이다. 성경은 모든 만민을 위한 것인데 공부를 해야 한다거나 공부를 해야 더 잘 할 수 있다는 논리 그 자체로 이미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복음을 부인한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사사롭지 않다면 성경을 보는 것에 있어 사사로움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들이 가진 그 생명이 형제에게 사랑을 공급할 지경에까지 자라나면 그 과정에서 새 하늘과 새 땅도 임할 것이고, 성경이 어렵지 않을 것이며, 옛 신앙이 분명하게 구분이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안목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생명의 이름이 <그리스도> 그 생명의 신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지 않았다면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으며, 그 하나님 아들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성경을 온전히 볼 수 없다면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제 남은 것은 과연 오늘 나 자신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 인지, 아니면 <옛 신앙의 안목을 가진 자>인지에 대한 보증 혹은 시인함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베드로후서가 손에 쥐어진 이유일 것이다.


  1. 이기중 2019.02.03 11:53

    갈수록 더 성령으로 충만해져가는 김홍덕님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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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하고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 베드로 사도가 사랑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비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주셨고,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들이며 이 베드로후서의 수신자들이다. 이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짧은 서신 안에서 성경을, 또한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있어 함부로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말씀과 예언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에게는 풀릴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이러한 일에 대하여 사랑하는 바울 사도가 또한 그렇게 썼다고 말하면서, 무식한 자들이 다른 성경을 임의로 풀어서 멸망에 이르렀다고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이러한 말씀을 하는 것은 오늘날 신학이란 성경에 없는 학문을 공부했거나, 어디 산 속에서 부처가 각성하듯 성령을 받았다면서 그 위세를 가지고서 성경을 함부로 풀지 말라고 하거나, ‘그런 것이 있다!’며 모르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때로 복음이라는 것이 그 믿음의 분량대로 깨닫는다는 것을 고려해서 말씀을 전할 수는 있지만, 어떠하든 결국은 수신자의 몫이기 때문에 말하고 전하는 사람이 감출 것은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울 사도가 쓴 글 중의 어려운 것을 임으로 해석하듯이 다른 성경도 억지로 풀다가 멸망을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성경이나 말씀을 억지로 푼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는데 자기 밖에 있는 신학이나 철학이나 심지어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옛 신앙의 가치관으로 성경을 풀고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열쇠도 가지지 않은 체 문을 열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특히 그런 시도의 대상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런 시도는 그 자체가 이미 멸망에 이른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이 두 번째 서신을 기록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그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변화산에서 있었던 사건을 언급하면서 예언에 대하여 어떻게 풀 것인지를 말씀하고 또 억지로 풀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서 성경을 봐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단 베드로 사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성령을 받아 사도가 되고 또 그 사도들과 같은 믿음을 가졌던 교사들, 집사들 또 성도들이 전하고 나눈 말씀들은 그 어느 한 절도 십자가에 달리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본성이 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신학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푸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근본도 없는 자들이 신학 없이 푸는 것을 오히려 사사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모든 사도와 그 족보를 따라 지금에 이른 온전한 성도들, 곧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성도들은 성경을 보고 푸는 것 뿐 아니라 성경의 어떤 것도 억지로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자고 아침을 맏이하면 아침마다 새로움을 아는 것이다. 생명으로 아침을 맞는 것이 새로운 날을 맞이하듯,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이 이끌어가는 모든 순간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이미 학습되었다면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매일 전혀 살아보지 못한 날을 매일 같이 만나도 그 날들은 항상 살아왔던 것처럼 점도 없이 흠도 없이 또 미숙함 없이 언제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어떤 날을 만나도, 성경의 어떤 부분을 만나도 심지어 성경이 없어도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것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와 문화를 다 이해한다는 것과 같이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으로 보증되었기에, 정말로 성경을 알고 자기 것이 되었다면,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을 고대한다고 말씀한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온 세상의 모든 것에 하나님의 의와 그것이 표현되어 형식을 가지게 된 아들과 같은 교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근본 됨을 안다는 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또 그것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고 있는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삶은 그야말로 점과 흠이 없고 온전하며, 성경이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죄(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이기에 사람의 가치 기준이나 세상의 법과 윤리와 같은 것으로 볼 때 실수 같고 때로 죄를 짓는 것 같아도 그것이 온전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와 많은 사도들이 말씀하고 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그것이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자를 보고 죄 없다면 돌로 치라고 하시고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모든 인생들은 육신으로 간음과 같은 죄 이전에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아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우선되는 죄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죄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육신의 죄나 세상이나 국가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죄는 가이사의 것이므로 그 법대로 심판을 받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그러면 예수만 믿으면 육신의 행실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번거롭지만 다시 한 번 언급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세상의 법을 마구 어기면서 죄를 짓는 그런 본성과 생명이 아니라, 오히려 그 법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므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는 본성임을 설명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미안하게도 그런 의문을 가졌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는 사람, 곧 거듭남이 없는 사람이다. 자기 안에 없으니 그리스도만 믿으면 행실을 맘대로 해도 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본성 없이 성경을 보는 것이 성경을 사사로이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성만 있으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법대로 심판을 받으면 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리스도만 믿으면 죄를 맘대로 지어도 되느냐고 묻는 것은 그 순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자기 맘대로, 말 그대로 사사로이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바울 사도의 말씀과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 예언과 또 그와 같은 맥락에서 어려운 성경과 말씀을 <억지로(자기가 가진 그리스도의 정의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멸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멸망에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점도 흠도 없는’, 혹은 ‘온전한’이나 ‘장성한’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단순하게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생각되지만, ‘그럼 어느 정도가 되어야 그 수준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것과, ‘그렇게 되면 끝나는 것인가?’하는 문제가 있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 성경이 말하는 수준이 되는가의 문제도 문제지만 정작 더 궁금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되고 나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에 대하여 노력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을 때,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 문제도 문제지만 달성하고 나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과 같이 노력한 신앙의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점도 없고 흠도 없어지면 신앙에서 은퇴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물론 근원적인 문제는 도대체 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근원적으로 신앙이라는 것을 노력하는 것으로 보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자나? 그러니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거지?’라는 그 일상적이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한 그 생각과 말이 어느 정도 노력해야 인생으로서 할 만큼 한 것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사람이기에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을 하려면 적어도 어느 수준까지는 해야 한다는 가이드도 같이 제시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 안에서 그런 답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없다.


행여 그런 것을 언급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문제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조차 이르지 못할 지경이나 수준을 제시한다. 그러니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굴레에 다시 갇히게 되고, 그렇게 사람들은 교회에서 인생을 착취당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라도 가르치고 요구할 때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 목표는 달성 가능한 것이어야 하는데 교회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신학이라는 성경에서 그 족보를 찾을 수 없는 수학(修學) 증명인 목사라는 라이센스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신앙은 이런 것’이라고 설교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이 말하는 단계에 이른 사람이 없음에도 다들 육신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려고 하는 옛 신앙에 매몰되어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예수를 믿으려면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것인지는 알고 믿어야 할 것 아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그럼 그 장성한 분량은 도무지 어디며, 또 바울 사도가 말씀한 푯대는 어디인가?


그렇게 보면 우리가 어디까지 이를 것인가의 문제는 육신의 정욕을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성취하려는 간사함에서 시작되고, 지혜로울 것 같은 간사함은 정작 자신이 무엇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어두움 속을 헤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교회와 자아 속의 요구를 만들어 낸다.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이 문제를 간단하게 정의하면 <구원이 신앙의 목적인가? 아니면 시작인가?>로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예수 믿고 천국가고, 하는 일이 형통하게 되는 구원을 말한다. 그 하는 일 속에는 선교활동과 같이 세상의 경제적인 부를 추구하는 것과는 분리된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인생을 주신 목적이 아닌 것인데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교묘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간과하면 안 된다.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어 천국을 가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목적이 이루어진 결과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문제의 근원은 신앙이라는 것은 구원이 목적이나 지향점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 인식이나 구분 없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대하면 여지없이 노력하는 신앙으로 다시 빠지게 된다. 이는 어떻게 보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인데, 구원을 목적으로 보고서 그 목적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는 옛 신앙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는 대상인 베드로후서의 수신자들은 기본적으로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벧후 1:1)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으니 베드로 사도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착각하고 있는 오늘날의 신앙인들도 그냥 힘을 써 보기는 하지만 언제 이루어질지, 어떻게 되어야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잠깐 멈추고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묻든지 아니면 더 근원적으로 자신이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는 한지를 반문해 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목적은 죽어서 천국을 가기 위함도 아니고 이 땅에서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추구하고 이루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창조하신 이가 있음을 믿는다. 창조하신 이를 믿는다는 것은 창조하신 이가 창조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 안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 시작이고, 그 시작이 완성이다. 그렇게 되고나면 그 시작이고 완성이라는 것이 생명의 세계인 것을 알게 된다. 생명은 나는 것이 다가 아니라 나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만 안다면 우리의 신앙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생명은 나서 그 생명의 본성을 발휘하면서 산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더 그 생명이 생명답게 표현할지를 고민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다. 그게 생명이다. 여자로 나면 평생을 여성스럽고 아름답고자 노력한다. 남자가 볼 때 가히 놀라울 정도로 그것에 집착한다. 그것은 여자가 사치스럽거나 꾸미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남자가 평생 있어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도 그렇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지를 늘 고민한다. 그야말로 쉬지 않고 기도한다. 살아가면서 집중해야 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되면 바로 그 생각에 빠져든다. 그것은 물속에 있는 물체에 빈틈이 생기면 물이 스며들 듯, 육신으로 살아가는 본성을 인하여 육신이 집중해야 하는 일이 있는 중에 잠깐 여유, 생각의 여유, 시간의 여유,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묵상하며, 그것을 어떻게 전할까 힘쓴다. 여자로 나서 틈만 나면 꾸미듯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힘쓰라고 했으니 노력해보자고 마음먹고 시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끝도 없이 살아 있는 동안 하는 것이기에 미완인 것 같지만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그럴 수 있는 생명으로 온전하고 완전하게 났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온전한 생명으로 났기에 그 생명다움으로 살아가려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것이 바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주님 앞에 서려고 달려가는 삶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잡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온전한 것이고 점도 흠도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괜히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 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이 나면 그 생명의 유전자로서 온전하고, 또 그 생명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듯,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온전한 것이고, 점도 흠도 없는 것이로되, 반대로 잡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비밀이기에 그 비밀에 합당한 열쇠를 자기 안에 유전자와 같이, 생명의 본성이 되어 있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냥 교회에 다닌다고, 아니면 신학을 했다고, 아니면 방언한다고, 아니면 기도 중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간혹 육신의 장래에 대하여 미리 안다고, 성경을 100번 읽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이름 외에 구원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이름은 생명의 정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제 베드로후서도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베드로후서는 단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수신자가 아니다. 교회에 가서 밥 달라, 돈 달라, 직장 달라, 배우자 달라, 자식 잘 되게 해 달라 기도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씀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자들은 다 옛 신앙에 속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을 논할 수도 없다. 잉태되고 나지 않았는데 생명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생명이 아니기에 온전하면서 또 힘쓰는 세계를 알 수도 없는 것이다. 단지 온전해지려 힘쓰기는 할지 모르지만…


베드로 사도는 이 두 번째 서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볼 수 있는 안목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것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먼저 그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과정 그 이후에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갔던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그것을 간곡히 다시 설명하고 또 부탁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은 사람들의 개성이 다양한 만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모양도, 그 성장의 과정도 다양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풍성함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만 알아도 교회에서 일관된 신앙의 형태를 유지하고 추구한다는 것에서 교회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하다. 그렇듯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은 아주 다양하지만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출애굽을 기준으로 보면 된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게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존재는 원래 백성이나 애굽과 같은 세상의 종살이를 하는 단계에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세례, 곧 물세례이자 홍해를 건너는 과정이 있다. 그때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과정이라 생각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과 무관하다 여기고 자기의 의를 좇아 살지만 그들의 그 의가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내려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듯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게 하는 도화지가 된다.


그렇게 홍해를 건넌, 물세례를 받은 여정을 지나면 광야를 지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광야에서의 삶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이라는 신호와 보호 아래에서만 삶이 유지되고 방향을 진행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법도 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고, 또 하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길가다가 볼 수 있는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여정이다. 그리고 이 여정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알지만 그들이 아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알기 전에 육신이 바라던 것을 이제 하나님께 구하는 것만 바뀐 여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늘 ‘무엇을 할까?(Do)’, 하는 것과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아래 있어야 육신이 생존할 수 있고, 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진행해야 자신의 길도 갈 수 있는 것과 같이, 신앙생활에서의 의와 기준이 자기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목사에게 물어보고, 그 목사들은 그것에 답하거나 그 질문을 받는 권위를 얻기 위하여 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 또 기도하여 영발을 강화하는 등의 행위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가진 숨겨진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러게 무엇을 할까 하는 것을 탐구하는 목적이다.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이며, 예배는 어떤 형식으로 드려야 하는지를 궁금해 하고, 살아가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신경 쓰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일어날 불이익을 피하기 위함이고, 반대로 그것을 잘 지켜서 세상에서 혹은 그것으로 안 되면 죽어 천국에 가서 세상의 성공 기준과 같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얻으려는 속셈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가 가르치는 것으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대안을 가르쳐 줄 수도 없다. 모르기 때문이다. 알면 자랑 하는 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이 베드로 사도가 옛 신앙이라고 하고 또한 성도들에게 심히 경계하는 신앙의 여정이다. 물론 따지고 들면 베드로 사도가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는 성도들이야 그런 과정을 지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두 번째 베드로 서신이 기록되고 오늘날까지 전해져서 우리가 읽고 묵상하는 것은 그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 밝힘으로서 이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이 어떠함을 알게 하여 고백하도록 함이다.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기록된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옛 신앙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교회에 다니다가 다시 이전 종교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지만 베드로 사도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바라던 것을 동일하게 바라고, 그 바라는 것을 위하여 이전에 숭배하던 것에 하던 행동과 같이 성경을 지켜내려는 것을 말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사람이 바라는 의와 선함과 소망이 동일한 상태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늘 육신이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순교를 앞두고 이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기를 아주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구분하려면 그것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자기가 그 속에 있는 상태로 다른 것을 구분할 수는 없다. 사람이 자기 고집에 빠지면 남의 말은 고사하고 자기 상황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베드로 사도가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잘 구분하는 사람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은 그런 자리에서 벗어나서 충분히 자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여정으로 가나안의 여정이 있다. 이는 마지막이 아니라 사실은 시작이다. 이 가나안에서의 삶을 위하여 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온 것이다. 단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세가 바로에게 백성들을 데리고 떠나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구원이 목적이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 또한 같은 것이다.


신앙의 마지막 아니 본격적인 시작인 가나안 땅의 여정은 밟는 모든 땅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땅이요 생명의 여정이다. 땅을 밟으러 다니는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없고 오직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가고 서며 머무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자기 안에 그 마음이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을 표현해낼 것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밖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안에 그것에 대한 가치와 안목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자기가 그 일에 대하여 인지하고 옳다고 여기는 대로 고집하게 된다.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좋은 예이다.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귀한 줄로 모르면 그냥 돌덩이와 같이 여기듯,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그 생명이, 그 생명의 의와 비밀이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도, 교회도, 기도도, 성경도 모두 자기가 바라는 대로 취급한다. 육신의 복락을 추구하면 그 추구하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도 성경도 모두 종속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사도들이 그렇게 목숨을 버려가면서 전하고자 한 것이 바로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하나님을 단지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복락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하여 의지하는 신들 중에서 급이 다른 능력자로 의지하라고 그렇게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바울 사도의 전한 것을 언급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이나 바울 사도나 모두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전하고자 한 것을 서로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서로에게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늘날 기독교, 혹은 그와 유사한 종교(기독교나 천주교나 다 인간의 종교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아니다.)들을 보면 교리의 조금만 달라도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서로 안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 안에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면, 둘 서로 안에 하나이신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다면 서로 다르다고 할 이유는 고사하고 주장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서로가 같지 않고, 그리스도의 정체성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성경을 보는데 서로 다른 의견들이 난무하고, 이를 바로하기 위하여 다시 더 신학으로 연구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잘못된 방법으로 잘못된 것을 더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성경을 동일한 안목으로 보지 못하는 집단들과 주장하는 모든 자들이 바로 성경을 사사로이 풀고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온전히 있다면 공부하지 않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 수 있다. 갓 태어난 병아리가 독수리를 피하는 것은 독수리의 종류와 습성과 피하는 법을 배워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 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본성이 되었다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민해본들 왜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데 왜 그러겠는가? 가나안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던가?


그러므로 성경이 풀리려면 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것이 육신을 가진 인생의 운명이라는 것이 보이고, 그 본 것이 자기 안에 들어오고, 그 들어온 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자기의 안목과 가치관과 삶이 되어 살아가다보면 그 모든 것이 자기 안에 있는 것임을 알고, 그것으로 보게 되는 그 여정과 생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으니 성령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것보다 더 온전하게 풀리는 것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이 아니면 교황 아니라 교황 할애비라도 다 사사로이 성경을 푸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은 자기 육신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종말이 오고, 심판이 있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재림을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또 믿는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은 하늘에서 구름이 땅에 내려오듯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을 생각한다. 아니 그것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오시겠다고 하셨으니 오실 것이다. 모두의 상상과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형상으로 오실 것이다. 내용이 있으면 형식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다만 우리는 그 때와 시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시와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이지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체험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있고, 그 의가 형식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는 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또 세상으로 표현된 것과 같이 우리 심령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의가 또한 형식으로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체험하여야만 종말을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되는 것이면 상당히 곤란하다. 우선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기 있는 자들 중’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볼 자도 있다고 하신 것이 문제가 되고, 또 하나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미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떠난 이들이 수 없이 많은데 그것을 살아생전에 보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의 답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형식으로 표현되는 법을 알면 해결이 된다. 예수님의 재림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오래 전 승천하신 예수님의 영이 다시 오늘날 자기 심령에 임하시는 것이 재림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재림이 체휼된 사람들이어야 실제로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간혹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한다. 보여주면 믿겠다고 한다. 그러나 전 세계의 실황을 생중계할 수 있는 이 시대에 만약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시고 그것을 방송으로 중계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다 하나님을 믿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뉴스들도 다 믿지  않는데 그럴 리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 안에 있는 의와 가치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의와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은 것은 봐도 믿지 않고 음모론이나 조작설로 치부하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금 못 박힌 손과 발을 가지고 이 땅에 재림하시고 그 모습을 방송으로 생중계를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자기 안에 예수님의 심령이 생명이 되지 않았다면 믿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과 본성이 자신의 의와 가치관과 본성이 되지 않는다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가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 안에 있는 사람, 그것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요, 삶의 목적이요 의미라는 것을 알고 순종하며 받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가시면 오시겠다고 한 성령이 자기 심령에 오셔서 그렇게 순종한 십자가의 이미지가 생명이 되게 잉태케 하시므로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시 오신다고 하신 재림인 것이다. 


그 재림이 자기 안에 없으며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시든, 우주선을 타고 오시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과 다른 의에 기준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 예수님이 오셔봤자 옛날 유대인들처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시는 이와 같은 의가 자기 안에 없으면 어떤 이가 와도 오시는 이를 오신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자기 심령 안에 오시는 재림이 없다면 세상이 천지개벽을 해도 자신이 가진 의를 주장하는 것이 바뀌지 않을 것이고, 지금과 같이 사람들이 모두들 자기가 옳다는 것을 여전히 주장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의가 또 충돌하고, 그 의를 좇아서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려고 애쓸 것이기에 지구가 몇 번을 바뀌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본성이 된 사람은 그 의가 하나님의 의와 같아서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 아들의 본성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볼 것이니, 이전과 다르게 세상이 보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사는 동안의 그 세상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새롭게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구가, 우주가, 세상이 천 번을 바뀌든 만 번을 바뀌든 언제나 그 세상이고 그 하늘이고 그 땅일 뿐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다. 이사야 43장에도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베드로후서에도 또 우리가 늘 궁금해 하는 요한계시록에도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이 있다. 그런데 그 말씀들 어디에도 새 하늘과 새 땅을 그 시점에 창조하신다는 것은 없다. ‘나타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것이다.’, ‘바라 볼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것이다.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지, 세상 끝 날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시 만들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처음부터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새로운 것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는지, 생명이 있는지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답은 ‘신의 성품’에 있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안목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신의 생명이 새롭게 되면 하늘과 땅이 새롭게 보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이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면 절대로 세상이 새롭게 보일 수 없는 것이다. 새롭다면 고쳐달라고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자신의 생명이 새롭게 되면 되는 것이다. 그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세상이라도 새롭게 되는 것이다. 입사하는 회사나 직장은 어제도 있었지만 새롭게 입사한 사람은 가족들에게,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새 직장’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듯 자기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있다면, 신의 성품이 있고, 예수님과 같은 본성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자기 안에서 풀리는 사람에게는 어떤 세상이 와도, 어떤 하늘을 만나도, 또 어떤 날을 만나도 언제나 새롭고, 날마다 새로운 것이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