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하고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 베드로 사도가 사랑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비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주셨고,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들이며 이 베드로후서의 수신자들이다. 이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짧은 서신 안에서 성경을, 또한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있어 함부로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말씀과 예언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에게는 풀릴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이러한 일에 대하여 사랑하는 바울 사도가 또한 그렇게 썼다고 말하면서, 무식한 자들이 다른 성경을 임의로 풀어서 멸망에 이르렀다고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이러한 말씀을 하는 것은 오늘날 신학이란 성경에 없는 학문을 공부했거나, 어디 산 속에서 부처가 각성하듯 성령을 받았다면서 그 위세를 가지고서 성경을 함부로 풀지 말라고 하거나, ‘그런 것이 있다!’며 모르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때로 복음이라는 것이 그 믿음의 분량대로 깨닫는다는 것을 고려해서 말씀을 전할 수는 있지만, 어떠하든 결국은 수신자의 몫이기 때문에 말하고 전하는 사람이 감출 것은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울 사도가 쓴 글 중의 어려운 것을 임으로 해석하듯이 다른 성경도 억지로 풀다가 멸망을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성경이나 말씀을 억지로 푼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는데 자기 밖에 있는 신학이나 철학이나 심지어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옛 신앙의 가치관으로 성경을 풀고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열쇠도 가지지 않은 체 문을 열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특히 그런 시도의 대상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런 시도는 그 자체가 이미 멸망에 이른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이 두 번째 서신을 기록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그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변화산에서 있었던 사건을 언급하면서 예언에 대하여 어떻게 풀 것인지를 말씀하고 또 억지로 풀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서 성경을 봐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단 베드로 사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성령을 받아 사도가 되고 또 그 사도들과 같은 믿음을 가졌던 교사들, 집사들 또 성도들이 전하고 나눈 말씀들은 그 어느 한 절도 십자가에 달리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본성이 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신학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푸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근본도 없는 자들이 신학 없이 푸는 것을 오히려 사사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모든 사도와 그 족보를 따라 지금에 이른 온전한 성도들, 곧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성도들은 성경을 보고 푸는 것 뿐 아니라 성경의 어떤 것도 억지로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자고 아침을 맏이하면 아침마다 새로움을 아는 것이다. 생명으로 아침을 맞는 것이 새로운 날을 맞이하듯,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이 이끌어가는 모든 순간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이미 학습되었다면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매일 전혀 살아보지 못한 날을 매일 같이 만나도 그 날들은 항상 살아왔던 것처럼 점도 없이 흠도 없이 또 미숙함 없이 언제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어떤 날을 만나도, 성경의 어떤 부분을 만나도 심지어 성경이 없어도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것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와 문화를 다 이해한다는 것과 같이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으로 보증되었기에, 정말로 성경을 알고 자기 것이 되었다면,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을 고대한다고 말씀한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온 세상의 모든 것에 하나님의 의와 그것이 표현되어 형식을 가지게 된 아들과 같은 교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근본 됨을 안다는 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또 그것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고 있는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삶은 그야말로 점과 흠이 없고 온전하며, 성경이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죄(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이기에 사람의 가치 기준이나 세상의 법과 윤리와 같은 것으로 볼 때 실수 같고 때로 죄를 짓는 것 같아도 그것이 온전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와 많은 사도들이 말씀하고 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그것이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자를 보고 죄 없다면 돌로 치라고 하시고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모든 인생들은 육신으로 간음과 같은 죄 이전에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아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우선되는 죄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죄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육신의 죄나 세상이나 국가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죄는 가이사의 것이므로 그 법대로 심판을 받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그러면 예수만 믿으면 육신의 행실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번거롭지만 다시 한 번 언급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세상의 법을 마구 어기면서 죄를 짓는 그런 본성과 생명이 아니라, 오히려 그 법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므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는 본성임을 설명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미안하게도 그런 의문을 가졌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는 사람, 곧 거듭남이 없는 사람이다. 자기 안에 없으니 그리스도만 믿으면 행실을 맘대로 해도 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본성 없이 성경을 보는 것이 성경을 사사로이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성만 있으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법대로 심판을 받으면 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리스도만 믿으면 죄를 맘대로 지어도 되느냐고 묻는 것은 그 순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자기 맘대로, 말 그대로 사사로이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바울 사도의 말씀과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 예언과 또 그와 같은 맥락에서 어려운 성경과 말씀을 <억지로(자기가 가진 그리스도의 정의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멸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멸망에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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