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 40

미가를 마치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1. 17. 09:42 Writer : 김홍덕

미가는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과 같이 자주 회자되거나 언급되는 성경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미가를 포스팅하고 싶게 만들었던 것은 ‘사마리아’라는 단어였습니다. 사마리아라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야곱의 수치라고 비유하신 말씀 때문에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야곱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일 것이고, 그들에게 사마리아와 같은 수치가 있다는 것은 그들이 세상과 간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세습을 하며, 말로는 경건한 척 하지만 굵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도, 비판을 받는 기독교나 그것을 비난하는 기독교 안팎의 가치관도 알고 보면 사실은 같은 세계입니다. 언행일치라는 측면에서 본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위>가 그 뿌리인 것은 같기 때문입니다.


각종 비리를 일으키는 교회와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교회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결국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거룩함과 그 거룩함 때문에 화려해지는 교회에 맞는 행위 규범을 보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본질적인 것은 교회가 사회봉사를 하고, 청렴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같은 세계에서 누가 더 잘하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지금으로 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책망하시는 것은 도덕적 타락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성적 타락과 부정한 저울과 같은 책망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책망이기에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심령을 가졌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결국 그 사람 안에 있는 의와 생각이 표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앙에 대한 책망은 단지 행위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교회를 필요 이상으로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는 것은 크고 화려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크고 화려한 것이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치관이라면 예수님은 하늘에서 황금마차를 타고 내려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나셨는데, 그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면서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교인 많은 교회의 목사나 장로가 노회나 총회에서 큰 소리 낼 수 있는 것은 성경을 바로 보는 사람들의 행사가 아닙니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크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관과 간음한 탓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 곧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진 큰 수치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락은 전부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보면서 먹음직하고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 생각한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았더니 네피림이란 위대함이 나왔다는 것은 물론이고, 구약성경의 많은 선지자들이 경고한 타락 모두가 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세상의 가치관과 혼합 곧 간음한 것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식하신 다음에 시험을 받으신 것도 그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 돌을 떡으로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으며, 세상의 모든 영광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유혹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회는 이 시험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크고 유명한 교회, 많은 공부와 신학을 했다는 유명한 목사일수록 더 쉽고 깊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란 것을 덥석 잡고서 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크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신앙적 요소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도해서 병자를 낫게 한다거나, 신학을 했다거나, 성경을 많이 봤다는 것과 같은 신앙적 공로나 능력도 잘하면 잘 할수록 더 좋은 신앙이라고 하고 있는 것 역시 크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타락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보여준 모습이고, 예수님이 왕이 되면 좌우에 자기 아들을 앉혀주기를 청원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런 죄악 속에 있으면서 오히려 그것을 잘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은 능력도 말씀도 다 버리고 얼마 되지 않는 옷가지마저 다 벗겨져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우리의 모습 보여주고자 하신 예수님을 믿노라 말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에 대한 더 이상의 모독이 없는 것임에도 경쟁적으로 그것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은 오늘까지 미가 선지자의 말씀이 성경에 있어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타락이라는 것을 늘 행실의 부정함에 둡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는 어디까지나 마음에 있는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존재입니다. 즉 행위는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는 생각과 뜻이 본질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생각과 뜻은 무엇을 옳은 것으로 여기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의 하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책망은 행실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는 의와 뜻과 생각을 보시는 것입니다. 행실은 어디까지나 종속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책망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무엇을 옳은 것으로 여기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완전한 지혜는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고 한 것은 여호와가 사람이 그 마음에 가져야 하는 의로움의 기준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 그 아들이 이 땅에 올 때 말구유로 보내시고, 하늘로 들려 올리실 때에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의 그 의가 자기 안에 모든 행실을 결정하는 의로움으로 순종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의 의가 되고, 말구유에서 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 운명과 삶의 목적과 의미로 순종하는 그 하나만이 하나님의 앞에 의로운 것이고, 반대로 그 하나가 없어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하는 모든 것을 인하여 늘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이 세상에서 위대하고 좋은 것을 좇는 것에 종과 같이 매여 있으므로 그것을 추구하고, 그 추구한 결과와 성과와 공로를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사람의 타락의 정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야곱의 수치라고 말씀하신 세상과의 간음인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 역시 이 부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며 가르치고 교회를 크게 건축하고 유명 인사나 많은 사람이 다니는 교회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오늘날도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미가서인 것입니다.


(미가 7:14-20) 진정한 두려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1. 16. 11:17 Writer : 김홍덕

미가 선지자는 야곱의 수치라고 말한 사마리아와 같은 신앙의 결국은 뱀과 같이 티끌을 핥고 땅에 기는 벌레와 같이 되며 결국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잘못되었다는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생사화복을 쥐고 계시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큰 재앙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시니 원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 삶의 생사화복을 관장하시기 때문에 잘못 보여서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생사화복을 가진 것은 당연한 것이고,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창조주가 자신을 어떻게 처분하든 하등 관여할 것이 없고, 감정조차 가질 이유나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이 정도는 알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마리아와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사화복을 쥐고 계시니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도록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조심조심, 그리고 워하시는 것을 어떻게든지 이루어내려고 노력한 삶을 산 것이 하나님을 온전치 창조주로 믿지 못했다는 것임이 들통이 나면서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지옥도 그와 비슷할 것입니다. 다시 살 수 없는 인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는데 자신이 살았던 삶과 하나님을 믿었던 신앙이 틀린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두려움은 아마 사람의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생 중에도 후회스러운 일을 생각하면 되돌릴 수 없음에 몸서리치는데 인생 전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알게 된다면 그것 자체로 영원한 지옥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는 것은 일생일대의 과업이고 유일무이한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좋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에 부가하여 더 좋은 것, 더 귀한 것, 더 성공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신앙은 언젠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의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진정한 두려움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살면서 자신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알고 크게 두려워하고 몸서리치듯 놀라고 괴로워하며 돌이킨 시간이 있었다면 오히려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은 삶은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시는 “나는 여호와(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부르는 것)를 우러러 볼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갈렙이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한 것 역시 같은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변심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결 같으신데, 사람이 자기가 가진 의와 기준으로 하나님을 정의하고 대하는 것 그것이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 어떤 공로를 드릴 것인지 궁리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정체성에 맞지 않게 하나님을 대하는 것, 그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자기 존재의 창조주로 온전히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해와 기쁨으로 사람을 대하시는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그렇게 대하시니 그 하나님의 의에 맞게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 아니라 능력과 힘이 되시는 것입니다.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는 하나님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누리지 못하고, 자기 행실이 행여 하나님을 노엽게 할까 노심초사하며 신앙생활하고, 행여 하나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까 조심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두려움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잘못 신앙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인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온전히 바로 믿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창조주로 알고, 자기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의 삶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행실이, 자기 삶의 어떤 모양이 하나님을 진노케 할 것이라는 두려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창조주기 피조물을 자기 맘대로 한다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며, 설사 하나님께서 성경의 모든 약속을 손바닥처럼 뒤집는다 해서 사람이 항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 자기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실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신앙하는 사람에게 있어 유일한 두려움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맘대로 하시는 범주 속에 두시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도록 방치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진노하실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방향이 반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그 하나에서도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어떠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 것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있고, 하나님의 의가 자신에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염려하는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결 같으시니 그 하나님의 의가 자신에게 이루어지도록 자기 의를 버리고 있기만 하면 하나님은 전혀 두려운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나에게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행하심이 때로 우리 육신을 곤고하고 또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해도 그게 두려운 것은 아닌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순교를 견디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기 삶을 드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행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미가 선지자의 말씀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가진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아가고, 그 가치관이 서로 달라서 혈육끼리도 서로 비방하는 죄악 속에 살아갈지라도 자신은 여호와를 섬길 것이라고(미 7:7) 말씀하고 그런 자신과 같은 모습이 자기 가치관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 조롱과 경쟁자 소멸이라는 기쁨으로 살 것이지만 결국 그런 삶들은 황무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지만 혈기가 있고 왕성하며, 자기 힘이나 뜻대로 되는 몇몇 일을 자기 정체성과 명찰처럼 생각하며 살지만 육신이 소진하여 감에 따라 그 자랑하던 것은 기억만 남고 다시 그렇게 하려해도 육신이 따르지 않는 허무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자기 생각에 옳은 일이나 자기 육신으로 하지 못하는 것을 입으로 주장하면서 이른바 꼰대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모습들이 바로 인생의 황무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이 어떠하더라도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본질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회복하게 하시고 그 회복된 모습에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신다는 것과 애굽 땅에서 나올 때의 기적을 보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신다는 것은 풍요로움과 회복(도피성)을, 애굽에서 나올 때는 세상의 종살이를 벗어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산과 길르앗은 풍요로운 지대이기도 하고 길르앗에는 회복을 상징하는 도피성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신다는 것은 풍요로운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은 말할 것도 없는 구원과 회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회복은 세상적인 회복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으면 경제적 상황의 회복과 세상에서 하는 일이 회복되는 그 회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회복은 인생이 황무해지는 지경에서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르는 황무함에서 자신이 존재하게 된 이유와 목적 그리고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살아가는 형편은 그 다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삶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은 인생 최대의 성공입니다. 어떤 것이라도 그 존재의 목적을 알아야 활용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선풍기 날개를 고정하는 나사가 왼나사인 것은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날개를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왼쪽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만든 이들의 생각과 기술에 감탄하기까지 하는 것처럼 사람도 자기 삶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면 그 삶에 어려움이 없을 뿐 아니라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든 다른 신을 믿든 일단 삶은 곤고한 것, 고난인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신앙의 이유가 곤고한 삶의 위로와 극복, 그 가운데서 뜻대로 되지 않는 자기 생각을 이루어주는 신으로서 신앙을 합니다. 그러니까 삶, 그 자체가 감사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으려면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을까 싶은 마음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삶이 감사한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경제적인 문제나 삶의 여러 어려움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인생의 곤고함으로 여기는 문제들을 문제로 여기는 것은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인생의 허무함인 것입니다. 출근을 위해 새벽에 눈을 뜨고 억지로 일어나서 씻으러 가면서 ‘언제까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살며, 병드는 것, 육신으로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 맘대로 되지 않는 자식이나 사업과 같은 것들을 대하면서 어렵게 느끼고 그것이 인생의 곤고함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인생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런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까를 고민하고 그 도움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을 신앙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이 미가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의 핵심인 것입니다.


인생은 곤고한 것이라는 기초 위에서 그 곤고함을 이기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믿는 하나님이 자신의 곤고함을 이기는 도우심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가 고민한 결과 수양의 기름과 같은 신앙이라 회칠한 자기 행위와 공로를 드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로를 드리기 위하여 무엇이 좋을까 하여 궁리하는 중에 찾게 되는 것이 바로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 성공이라 칭하여 지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려 하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사마리아라는 야곱의 수치라는 것이 이 미가 선지자 말씀의 근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가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야곱의 수치라는 사마리아와 같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여호와, 곧 존재의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 그 존재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되는 세계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인데, 사람이 믿거나 믿지 않거나에 따라서 창조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심을 믿는다면, 이 세상을 가장 잘 살고 평안하게 또 성공적으로 만족하면서 사는 방법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을 알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설사 그 뜻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육신에게 어떤 불편함이나 그 이상의 문제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온전하고 성공적인 것입니다.


자동차 브레이크가 엄청난 마찰을 견디는 것은 일면 불편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인 이상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이 온전한 것이고, 자기 존재의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는 온전한 것임과 같이, 사람도 육신으로 수고하는 것이 때로 불편하다고,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지 않고 자기 육신의 불편을 해소해주는 신으로 여기고, 그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하여 육신으로 하나님께 공로를 드리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불온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산과 길르앗으로 비유되는 풍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으로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곳이 하나님이 보실 때 풍요로운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삶의 어떤 부분은 실제로도 아브라함과 같이 풍성하게 됩니다. 존재가 존재 목적대로 사는데 형통하게 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복음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가지신 의를 알고 살아가면 잘 풀리게 되어 있는 것이 이치입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서 그 풍요가 순교와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고, 오늘날 많은 선진국에서 누리는 풍요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하나님의 복이고, 어떤 것은 죽어서의 영광을 담보로 하는 시련이라는 식의 사고는 바로 사마리아와 같은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보이신 것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나 예수님의 그 신분이나 행위가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용납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보일 수 없는 능력과 말씀을 하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죽이려고 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본성이 되어 그 육신으로 그 본성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는 용납할 수 없고 조롱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보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보이셨고, 선지자들은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예언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에.


미가 선지자는 온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자들이 “너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조롱한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곳에서 내려오라!”고 외친 것과 같고,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역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는 것에서 결국 사탄이나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의 삶을 조롱하는 것은 같은 것임까지도 엿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 곧 행위로 하나님을 믿기에 더 좋은 공로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하여 세상의 좋은 것과 간음한 사람들이 가진, 위로 가야 더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그 신앙으로 보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조롱거리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지금도 만연한 신앙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기만 하면,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 누가 되었던 반드시 “그럼 예수님만 믿으면 도둑질을 해도 되냐?”는 식의 반문을 하는 이가 꼭 나타나는 것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에 걸맞은 행동이 수반되어야 좋은 신앙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나 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모든 신앙의 암묵적이고 가장 큰 계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사람의 행위를 판단합니다. 그 행위는 단지 도덕적인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적인 예식과 규례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교단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추태가 유전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을 모르기에 행위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과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기에 온전한 존재라고 말하면 다들 “그 신앙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미가 선지자의 말씀과 같이 성을 쌓고 지경을 넓히듯 그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 못해 넘쳐나고, 교회와 성당 절이나 또 세상 사람마저 이단이라 여기는 각종 신앙의 공통분모로서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가져가야 한다하기에 그 지경은 참으로 넓은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가 아주 결정적인 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황무해진다는 것의 주어이자 주체는 땅이고 그것은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인생들이 황무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나이 들고 살만큼 산 다음에 인생의 허무를 느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벽만 보고 도를 닦던 유명하다는 한 중이 죽으면서 “인생은 무(無)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죽었더니 모두들 대단하며 난리 법석을 떤 적이 있었는데, 그 말대로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뭐한다고 밥도 먹지 않고 벽보고 도를 닦았을까? 싶기도 한데 그런 생각조차 못하는 것은 모두의 인생들이 그와 같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비단 불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숨을 거두어가는 부모 앞에서 “예수님 꼭 붙잡으세요.”라고 외는 것에서 보듯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평생 기대했던 천국에 대하여 희미해지고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과 같은 행위의 열매가 늘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에 뭐라도 더 해보려 몸부림치는 것은 정말로 황무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도 자기 신앙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평생의 수고를 독촉하는 것에 의지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황무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이것의 이면에서는 신앙이 온전함에서 시작하고 그 온전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버리지 못하는 신앙의 무지함이 있습니다. 그 무지함과 어두움이 평생을 행위로 만회하는 수고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롱하던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섬기는 신앙, 예수만 믿어서 되겠냐고 조롱하던 신앙은 하나님의 의가 그 심령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있으므로 살아가면서 그것을 표현하면서 살기만 하면 됩니다. 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하나의 행위라도 더 이루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 이루어진 것을 누리고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무엇을 더 이루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행위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행위는 존재의 본성만 온전하면 나타나는 불가분의 것인데 왜 그것을 챙기려 하겠습니까? 그것이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반문하며 조롱했지만 정작 하나님은 그들이 조롱하는 그 사람들 자체였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그렇게 가까이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있었다는 것도 모른 체 인생을 마감하는 황무함만 남는 것입니다.


(미가 7:7-13) 엎드러진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1. 9. 09:31 Writer : 김홍덕

앞선 말씀에서 미가 선지자는 혈육들이 서로를 원수와 같이 여기게 된다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혈육이 가진 존재 정체성으로 서로를 대하지 않고 행위로서 서로를 대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서로를 대함에 있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을 기반으로 대하면 참다운 신뢰가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신뢰는 유리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 간에 일어나는 갈등이 있을 때 그것을 성토하는 말에는 거의 예외 없이 “어떻게 그 사람이 나에게 그럴 수(Do) 있느냐?”가 들어 있습니다. 이해가지 않는 행동을 할 때도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의 평소 인격이나 사람됨을 기준으로 ‘뭔가 뜻이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것인데, 단지 행동에 주목하고 그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문제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실수도 없이 세상과 자신의 삶을 경영하시는 분이라는 그 정체성 하나만 제대로 믿고 있어도 삶이 근원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달라질 것입니다. 뭘 해 달라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달라는 것조차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 알아서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니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일면 아주 거룩한 것 같지만 한 편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무엇이 좋은 일인지도 모르는 치매 걸린 노인과 같으니 자신이 알려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무엇이 자신에게 영광이 되는지를 모를 리 없고, 행하실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의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 그 하나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대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육신으로 통하여 나타나도록 순종하는 것, 그 하나 외에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에 가서 나무뿌리를 뽑을 듯이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의 기름을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크고 화려하고 비싼 재료로 지은 교회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그런 성공을 거두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정체성 그 하나를 믿고 그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에 자기 육신의 삶을 순종하는 그 하나를 원하시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대할 때도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 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기적이나,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표적을 보여야 하나님을 믿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다보니 잎이 무성하지만 과실 하나가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고, 회칠한 무덤과 같은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렇게 믿으니 사람도 당연히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가 가진 가치관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혈육을 대할 때마저도 행위로 판단하다 보니 원수가 되는데 바로 그런 가치관이 세상에서 온 가치관이고,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선지자들이 늘 이것을 경고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이 재앙이라고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진 그 가치관을 인하여 십자가의 삶이 나타나는 놀라운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의 성공이다 실패다 가늠하는 기준은 그 가치관에 종속된 것입니다. 행위로 판단하는 자들, 하나님께서 어떤 표적을 행하심이 있으면 하나님이 있다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지고 엎드러진 것과 일어선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명하게 표현하신 성경이 바로 욥기입니다. 욥에게 일어난 일 그 하나로 빌닷과 소발과 엘리바스라는 요즘 말로 절친들이 하나님께 욥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하신 것은 욥이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 행동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닦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여기는 곳 역시 그런 가치관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세상 일 꼬인 사람 보면 교회에 가야 풀린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 가치관의 실증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어떤 표적이 없어도, 또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공로를 쌓으려고 노력하는 중에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을 신뢰하면 그로부터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 엎드러진 자 곧 실패자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가 ‘나는 여호와를 의지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 바로 세상이 그렇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을 의지하며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존재로서 대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세상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이 환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도 사람들이 자신의 엎드러짐을 기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오히려 그것이 여호와의 빛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성전의 휘장을 찢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위로 하나님께 의로워지려는 가치관과 신앙이 볼 때 하나님을 존재로서 신앙하는 것은 엎드러진 실패자와 같고 조롱거리 같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빛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구원이라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