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 15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의 의미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2. 18. 11:04 Writer : 김홍덕

주기도문에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 없다. 하지만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라고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신 부분이 있고, 이를 모든 한국 교회에서 기도의 형식으로 채택해서 기도의 마지막에는 꼭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는 말을 넣고 있다. 그렇게 기도를 구성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 그것에 대하여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여겨서 이 내용까지 이번 책에 포함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든 마지막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하면 그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 시행하신다는 데는 어떤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르시기를 “너희가 또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14:13)” 하셨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했을 때 들어주시는 이유는, 아버지가 아들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하심이라고 분명히 하셨다.

 

영광의 원어는 Doxa라는 말이라고 한다. 이는 ‘표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본성을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은 밥 달라, 돈 달라, 이성을 달라 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로 살게 되는 것에 관한 모든 것을 시행하시겠다는 말씀이시다. 그런데 큰교회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가난도 해결되고, 병도 낫고, 아들도 좋은 대학 갈 것이라고 가르친다. 정말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신에게 어떤 것이 필요한지는 다 아신다.(마 6:33~34)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믿는다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준비안하셨다고 믿는 것은 참 믿음이 없는 것이다. 세상 살면서 육신의 삶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기도해서 얻으려 한다는 것은, “하나님! 당신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준비를 덜 하셨군요. 그래서 지금 이런 저런 것이 필요하니 좀 보내주셔야겠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시니 그렇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AS를 요청하는 꼴이다. 그러면서 마치 그래야하는 것을 명시한 계약서를 내밀 듯이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필요에 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에 따라 육신에 관한 일을 주관하셔서, 때로는 부유하게도 하시고, 때로는 궁핍하게도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다 이유가 있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두신 목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표현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목적이고,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 진 빚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심으로 아들이 되신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목적이다. 그래서 그것을 위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기를 구하는 것과, 그렇게 살기 위하여 필요한 은혜를 구하는 것에 관하여 기도하면 다 들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구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것이 바로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구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안에서 그 세계에 필요하고, 그 세계가 목적으로 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의 어떠함에 관하여 우리가 때로 기도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 목적에 관하여,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에 관하여 구함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결과에 대하여 늘 순종하여야 한다. 부흥강사들이 말하듯 떼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은 소유와 공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일을 감당 했습니다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큰 상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건 받으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더 영광을 받으신다고 한다면, 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차피 상은 1등에게만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럼 그 한명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그러니까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되니 그것은 만민을 위한 복음이 아닌 것이다. 만약 복음이 그런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가신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가 되었어야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표현하신 하나님,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신 자리는 십자가의 자리이다. 이 십자가가 어떤 자리인가? 죄인의 자리이고 발가벗겨지고 손과 발에 못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자리가 아닌가?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빚진 죄인이라는 말씀이고, 벗겨졌다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가지는 그 어떤 겉옷, 즉 신분도 나를 구원할 수 없으니 다 벗겨진 자리요, 손과 발이 못 박혀서 묶임은 우리의 손과 발의 모든 공로와 육신의 모든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자리요, 머리에 쓴 가시관은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모습과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리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사는 빚을 진 자입니다 고백하는 것이요, 우리의 육신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리, 그리고 그것인 인생의 운명이요 목적이요 정체성이라는 고백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바로 그 자리, 그 안에서 구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요, 그것을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들어주신다는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상 들어주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육신의 필요를 구할 때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보증서처럼 여겨서 아무 때나 사용하고 있는 것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며, 주님이 기도를 가르치신 목적도 모르는 것이며, 주기도문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생각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 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떠난 것, 곧 죄(하말티아 : 과녁을 벗어난 자리)의의 자리이며, 그 안에서 어떤 것을 해도 하면 할수록 다 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하여 기도한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곧 소유와 공로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고백하는 세계 안에서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형광등이 조명을 밝히기 위하여 주인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은 다 들어주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 그것이 기도고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인 것이다.



(주기도문) 기도한다는 것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2. 12. 17:14 Writer : 김홍덕

몇 번의 포스트를 통해 <주기도문>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았다. 주기도문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지만 성경에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주기도문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굳이 꼭 ‘기도’라는 표현이 아니더라도 ‘구하라 주실 것이요’와 같은 말씀들도 있고,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고, 신앙 생활에 있어 정말 중요한 기도라는 것은 도무지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 함으로 주기도문에 대한 포스팅을 마무리할까 한다.

 

먼저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하시는 말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데, 무엇을 구하고 찾으면 어떤 문을 두드릴 것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뭐든지 자기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 그것은 아니다. 육신이 먹고 사는 것에 관해서는 이미 세상에 수많은 농산물에서 비롯된 경제활동에 참여하면 먹고 사는 것은 해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세상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기도할 대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그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도덕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범적으로 살기 위하여 육신이 살아가며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기도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정말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모든 것인가? 아니면 그것에 더해서 그런 식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늘이기 위하여 전도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적 성공을 보여줌으로 육신의 삶의 평안을 갈망하는 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셨다고 전도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정말 그게 신앙의 전부고 기도할 제목이라고 여기는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부터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했지만, 이 지구상에서 전쟁이 없었던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기도는 도무지 안 들으시는 하나님이신가? 이게 이쯤 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도하라고 하시는지 새롭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과연 재화와 용역, 혹은 물리적인 세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존재하시는 분이신가?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일일이 다 들어 주셨다 치자. 근데 죽고 나면 아무 소용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을 매번 기도하고 얻고 한들 지속적인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우스개 소리로 선교사가 아프리카 선교 활동 중에 식인종을 만나게 되어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소서” 기도했더니, 식인종은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했다고 한다. 과연 주기도문이 그렇게 쓰이는 것인가 말이다. 안 그렇겠지 싶겠지만, ‘사업 잘되게 해 주십시오’, ‘좋은 배우자 만나게 해 주십시오’, ‘시험 합격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모든 것이 다 그것인 것이다. 그리고 큰교회들이 수능 당일에 시험 시간표에 맞추어 기도하기도 하는데, 그게 얼마나 넌센스인가?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도 그날은 그렇게 기도한다. 그리고 그건 같은 짓이다. 교회에서 기도한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규정하는 것이므로,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정체성을 농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구하라고 하신 것은 육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에 필요한 보이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구하라 하심은 예수님 자신을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찾으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찾으라는 것이며, 두드리라는 것은 양의 문(요 10장)되시는 예수님을 두드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치신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모든 내용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와 목적에 합일된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지, 육신의 어떠함에 대한 간구가 아니다. 육신의 어떠함은 주시는 대로 받고 순종하고 감사히 받고 살아가는 문제이지, 그것을 해결해가는 것이 인생의 숙제가 아니다. 다해도 결국 죽으니 못한 꼴이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주기도문의 내용은 구구절절이 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발견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것을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며, 시험이라 함은 우리가 율법을 행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여기는 것과 육신의 연약함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는 것과, 보이는 것이 실상이라고 여기게 되는 시험을 이기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렇게 연약하고 맘대로 못하는 육신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신 그 마음을 좇아 이 육신으로 사는 삶을 감사히 받고, 이 연약함으로 인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심이며, 우리가 연약하고 세상의 도덕과 윤리 기준으로 볼 때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여기는 악에서 구원하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한 모든 간구는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을 신앙하고 믿는 것이 무엇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거나, 하나님께 무엇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신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 즉 사람은 연약하고, 육신으로 세상의 모든 법과 윤리를 지킬 수도 없고, 죽지 않을 수도 없으며, 돌로 떡을 만들듯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고백으로 비롯되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성품이신 사랑이 나타내는 것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의 행동도 다 그의 생각 안에 있는 것이니, 그것이 얼마나 기쁘게 할 수 있으며,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 세상에서 얻은 먼지만도 작은 재물을 드림이 얼마나 기쁘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만들어진 것에 자꾸 무엇을 더하고, 더 행하려 하고, 더 가지려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죄인이라는 고백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에 더해서 뭘 행하고 드리고 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그런 것을 구하는 기도는 다 중언부언에 속하는 것이며,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에 관한 기도요 외식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칭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을 행함이나 드림이 아니라, 아들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아들은 생명으로 낳아지는 세계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물학적으로 아들을 낳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생명이라는 말씀이시다. 또한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본성과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모든 인간들의 자녀가 그렇지 않은가? 그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요 의가 육신이 되는 것이 바로 아들이요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것,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와 행함에 관하여 그 성품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그런 모든 것이 다 벗겨진 상태가 바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이시다. 가시관은 우리의 생각이, 벗기심은 우리의 신분이, 못 박히심은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지, 더 화려해지는 교회나,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에 성공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함과 소유에 대한 의를 버리기를 간구하고, 오직 연약한 모습 이대로를 하나님께 감사히 받아 그것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 되어야지, 밥 달라, 돈 달라, 여자 달라 기도하는 것이 기도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간구는 우리의 삶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 실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기를 간구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끝)

주기도문 후반부는 누가복음에는 없지만 마태복음 6장 13절에는 ( ) 안에 “대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이라는 말씀이 있고, 주석에는 ‘고대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성경에는 지금 우리는 한 권으로 보지만 원래는 두 권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21장이라던가 마가복음 16장 14절 이후와 같은 성경들이 있다.

 

이렇듯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이 적은 성경에 이후에 사도들이 추가한 내용들이 있게 된 것은 전부 교회 시대가 시작되고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더 확실하게 깨우쳐지면서 이것을 이전에 기록된 내용들을 보강하거나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성경은 대단히 함축적인 표현들이 많다. 요한복음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 기록한다면 책을 세상에 두기도 힘들다’했다. 예를 들어 마태를 부르실 때 “나를 좇으라(마 9:9)” 기록된 것이, 단순히 마태에게 그 말 한마디 했다고 따라갔다고 보면 곤란하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가 성경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해보니 그 모든 말씀과 그 때의 부르심이 “나를 따르라”하신 것이구나 깨달아져서 기록한 고백적인 기록인 것이다.

 

그것처럼 주기도문에 나오는 “대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라고 하신 것도 마태가 교회 시대에 성경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니, 앞에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들을 자기의 의로 삼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 보였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구나 하는 것이 또한 깨달아졌으며, 그것을 보니 그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고, 그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보여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때 가르치신 것이 생각났거나, 깨달아져서 기록에 함께 넣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기도는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가 이루어진 나라, 즉 교회 시대에 보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영광과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기도인 것이다.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곧 모든 뜻을 가지신 아버지가, 내 안에서 소유와 공로를 좇는 내 마음에 있는 다른 신들과는 거룩하게 구분되어 임하여 주시고, 그 뜻이 하늘이 바뀌면 땅이 바뀌듯 흙으로 지으신 내 인생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아버지의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뜻 곧 그 창조목적을 감당하게 하셔서 우리의 죄(채무)를 없게 하시며,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아들 삼으시기 위하여 인생을 만드신 목적과 다르게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여기지 않게 하시고, 또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게 하시며, 세상의 본질과 형식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험에서 이기며, 연약한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다는 악한 생각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나라, 그 나라가 곧 교회이며 그 나라의 영광과 권세가 생명관계로 만난 하나님, 곧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나라를 ‘죽어서 가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라이 임하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율법과 복음은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눅 16:16)”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됨을 말씀 하셨다.

 

“율법과 복음은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눅 16:16)”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여기게 된 것은 <죽어서 가는 천당>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이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던 간에 천국에서의 삶은 다르다는 보편적인 동의를 이끌어낸 큰교회들의 가르침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큰교회들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은 큰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라 여길만한 것이 그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인데, 먼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망상이 소유와 행위에 제약과 부족함이 없는 곳이라 여기기 때문에 육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현세의 큰교회 안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큰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교리 외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야구선수가 프로선수로서 그라운드에서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 전에 야구선수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라운드에서 야구를 할 만한 이유가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법이 그러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는 것이다. 즉,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지 못한 사람은 죽어서도 하나님 나라를 갈수가 없다는 것이다. 뭔지를 알아야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땅에서 꿈꾸었듯이 소유와 행위에 제약이 없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 여겨 죽어서도 그런 나라를 찾아 간다면 필시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면서 살아본 사람이라야 죽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신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의로 세운 나라에 합당한, 그 나라의 의가 내 의가 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셔서 나로 하여금 그 나라를 이 땅에 살면서 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그 나라는, 율법을 먹을 것으로 삼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렸을 때 죽지 않으며, 보이는 것이라고 본질이라고 여기거나,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여기는 나라가 아니므로,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게 된 사람들이 모인 나라,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곳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인생들이 모인 곳, 즉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 나라의 권세와 영광은 잘 짜여진 조직과 예산에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아버지께 권세가 있는 것이지, 화려한 건물이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모여있는가?’ 하는 것이나, ‘한 해 예산이 얼마냐?’ 라던가, ‘교인수가 얼마냐?’ 라던가, ‘신비한 일이 얼마나 일어나느냐?’에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곧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 그것에 영광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의 큰교회들은 주님 가르치신 기도의 극한의 반대편에 서 있다. 그 교회의 권세는 돈 많은 사람들이 모인 당회와 그들이 짜 놓은 예산과 조직 안에 있고, 영광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파이프 오르간이나,  수십억짜리 건물을 지어놓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그 영광 아래에 스스로 머리 조아리고 들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시험하던 그 마귀의 시험에 굴복한 것인지는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죽어서 가는 나라로 가르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모인 곳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칭할 수 없는 양심을 하나님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물이 좋아 질수록, 성가대 소리가 더 음악적 완성도가 높을수록, 교인수가 더 많을수록 영광스럽다고 여기는 신앙 안에는 아버지가 영광을 받고 권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짜여진 조직이 권세를 가지고, 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권세를 가지고, 교인수가 더 많은 교회가 권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되는데 너는 안 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적어도 너에게 복음이 될 수 없다. better better 하는 것이 복음이라면 그렇지 못한 모든 것은 다 죄인이 된다. 그렇게 죄인 되는 그 기준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예수님이 되기에 나도 되는 복음> 바로 그것이다. ‘그 초라한 꼴로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냐?’며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의 관점 같이, ‘교인도 얼마 안 되는데 무슨 교회냐?’ 라고 하는 관점, ‘노래를 그 따위로 하면서 무슨 성가대냐?’ 하는 그 관점 아래서는 많은 사람이 죄인 될 수 밖에 없기에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큰교회들은 사회적으로 더 나아짐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며,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해도 그것을 책망하건만 전혀 돌이킬 생각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주기도문을 교회 안에서 아무리 해 봤자, 그건 진정한 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아니 그저 주술과 주문에 가까운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이 땅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의를 자기의 의로 삼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늘 우리가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정말로 드리는 존재가 되려 한다면,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소유와 공로에 또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생명 관계, 그리고 교회 조직체가 아니라 생명으로 이루어진 생명 공동체가 되게 하는 존재성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되도록 먼저는 내 안에 주님의 기도가 온전히 이루어짐으로 그런 사람들이 모였을 때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계속)…

(주기도문)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1. 31. 23:59 Writer : 김홍덕

악(惡)은 무엇일까?

 

마태복음 9장에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예수님께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시자,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 9:4)”라고 하셨다. 또한 마태복음 12장(22절 이후)에서는 예수님께서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시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기적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한 것이라 폄하할 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마 12:34)”이라고 말씀 하신다.

 



 

우리는 위의 두 예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악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있는데, 이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참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또한 사람이 귀신의 힘을 빌려서 병을 고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대신해서는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사람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직임을 감당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과 같이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실재로 많은 기적을 행하실 뿐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도 하고 물위로 걸으시기도 하셨지만 예수님은 한번도 제자들이나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리스도의 조건이라고 하신 적은 없다. 그러시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은 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이것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기적을 행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게 예수님의 일이고,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대신하여야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우린 오늘 다 예수 믿는 것 때리 쳐야 할 것이다. 누가 회사 일이나 가사 일처럼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일로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좇아 살게 되므로, 십자가 밑에 섰던 백부장이 예수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하며 예수님을 믿었듯이, 우리 중에 한 사람, 평범하고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고, 특별히 신학을 하지도 않았으며, 세상적으로 전혀 성공하지도 않은 사람, 즉 인간이라는 그 본연의 모습 그 외에는 예수님처럼 흠모할만한 것이 전혀 없는(사 53:2) 사람이 한 사람을 볼 때, ‘너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고백하게 할 수 있는 그 한 사람이 되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대신하는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벌거벗겨지신 모습으로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주는 모든 의복, 즉 신분과 학력과 재력과 권력을 다 내려 놓은 모습이 바로 벌거벗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큰교회는 그 반대로 가고 있다. 목사를 청빙함에 있어 신앙고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약력을 보며, 사람이 변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겉모습이 자꾸 화려해져야 교회가 제 일을 한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오늘날의 큰교회와 큰교회에 시무하는 목사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싶은 지경이 되려면, 교회의 그 모든 화려함도 다 빼고, 건물도 조직도 재정도 다 빼고 난 모습으로 있어도 교회가 되고, 목사도 신학박사라는 약력에서부터 자기의 모든 업적을 다 버리고 런닝 차림으로 다녀도 그를 볼 때 말씀을 듣고 싶고, 그를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의 직분을 대신하는 사람이요,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자로 인정 받을 수 있어야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모든 생각이 바로 악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의 사고방식 안에는 초라한 모습의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으며,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느냐?라며 생각하는 그 생각을 예수님께서는 <악>이라고 하셨다. 만약 화려한 옷을 입은 대제사장이 그랬다면 그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찮은 목수의 아들이 거름뱅이 같은 모습으로 다니다가 사람의 죄를 사한다고 하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꼬라지를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니 더 화가 난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바로 악한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때나 지금이나 그런 생각은 동일하다. 사람 안에서 사람이, 그것도 세상적 가치관 안에서 전혀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대신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하여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죄하는 생각은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악>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빠지지 말아야 할 그 악함, 즉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에게 안식과 죄 사함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은 육신을 가진 인생이 원래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하나님의 아들로 예비되었고, 그렇게 평범한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아 가면서 까지 말씀하셨는데, 평범한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하니, 그것이야 말로 선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부인하는 악한 생각이요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라 하심은, ‘인생이 세상적으로 위대해져야 그리스도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는 생각과, 연약하고 볼 품 없는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여기는 모든 생각에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세상에 <악>은 오직 그것 하나 밖에 없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신 것처럼 말이다.

 

(계속)…

(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Ⅳ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1. 31. 13:20 Writer : 김홍덕

3rd Temptation



예수님이 받으신 마지막 시험은 마귀가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하였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하심으로 물리치게 되고, 이어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을 들었다(마 4:10)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 세 번째 시험은 누구에게 절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 시험은 무엇을 진정한 본질이라 여기느냐? 하는 질문이자 유혹이다. 절하고 경배한다는 것은 그것이 본질이며 근원이고 신앙의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기를 창조한 대상 혹은 그것이 자기 삶의 근원이라 여기는 것을 경배하고 그것을 신으로 삼고 기도하고 경배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마귀가 하는 시험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임을 인정하면 네가 본질로 여기는 이 모든 것은 네 것이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다. 그것은 절하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경배의 목적이고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의 근원은 보이는 물질세계라는 것을 인정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며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본질은 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니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라고 하시면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시험의 내용이자 목적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본질에 대하여 헷갈리고 유혹을 받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본질이고 그것이 영광이라 여기기에 그것에 쉽게 절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본질은 하나님이시지 세상 만물이 아니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주 하나님이 이 세상의 본질이 되신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이것에 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히 11:3)”라고 말씀 하셨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다 봤다고 할 수 없다 혹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이야기이다. 또한 골로새서에서 바울사도는 “만물이 다 그(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라고 하셨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책에 적힌 글씨가 본질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이 본질이다. 심청전에는 효도라는 말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본질은 효(孝)인 것이다. 이렇듯 보이는 것과 본질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신앙하고 경배한다. 그러하기에 모든 사람들은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좇아간다. 그것은 결국 그러한 것들을 경배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경배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답변을 하셨다. 이것은 또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먼저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서 고백되어져야 하고, 다음은 온 세상 사람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게 복음 전파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실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세상은 본질을 표현한 형식이고 표현 양식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동차도 본체라는 형식이 있고, 이동과 운송이라는 내용이 있듯, 컴퓨터도 하드웨어가 있고, 소프트웨어가 있고, 더 나아가서는 계산이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 그렇듯 모든 것은 다 형식과 내용이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 중에 이것에 대하여 예외인 것은 없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형식과 내용 즉 본질이 있다. 그래서 천국이 있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경험하지 못하는 본질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형식의 본질, 즉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천국인 하나님의 나라뿐이기에 이 모든 세상이 형식이라면 하나님의 의가 본질인 나라는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듯 세상의 모든 만물이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된 것은 하나님과 세상, 세부적으로는 하나님과 사람이 그러한 관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 법 아래에서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용이시며, 의를 가지셨으며, 목적이시다. 그리고 사람은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더 정확히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렇게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며, 사람은 그 중에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인 것이다. 자동차가 이동이라는 목적을 표현하는 것이듯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보이는 것에 충실히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눈이 어둡다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맹인을 고치신 것이다. 맹인을 고치신 것은 육신의 눈을 고치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러신 것이 아니다. 육신으로 맹인인 사람이 세상을 보지 못하듯, 영적인 맹인은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심으로 무엇이 본질인지 똑바로 보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끊임없는 시험이다. 사람이 눈만 뜨면 보이는 세상에 늘 속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시험을 받으셨고, 우리의 이김을 위하여 이기셨고, 또한 기도를 가르치실 때 시험에 들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긴다. 큰 교회들은 더 하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의미까지 부여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잘 꾸며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 되고 훌륭한 사람이 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신 것과는 반대로 마귀에게 유혹당하고 패배한 것 인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연약한 인생들은 예수 잘 믿을 방법이 없다. 오죽하면 세상 사람들조차 그런 생각을 비판하며 개독교라 하겠는가?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하신 것이 바로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큰 교회를 그렇게 비난하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라 믿기 때문이며, 그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정치적 왕이 되어서 오늘날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교회에 나올 것이라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도무지 어디 계신건가? 그래서 큰 교회들이 예수님은 없는 십자가만 부적처럼 앞에 달아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세상에서 성공한 왕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올바르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