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성경 보기/육신을 보는 성경의 관점'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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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을 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 전문을 일부 수정하여 pdf파일로 올립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인쇄/제본하셔서 보시면 되겠습니다.


단 추후 출간되는 책의 일부로 편집된 관계로 

편집용지 사이즈가 일반적인 A4가 아니라, B5인점 유의 하십시오.


(양면 인쇄를 하시면 보시기 좋습니다.)




육신을 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B5).pdf




하나님께서 육신을 부끄러워하는 아담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을 입히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떤 동물의 가죽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죽음 사람을 대신하는 제사의 원조로 볼 수 있고, 그 제사의 궁극은 예수님이시며, 그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표현하므로 일반적으로 양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감추기 위하여 다른 것을 희생하였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어떤 육신이 소비되었다는 의미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는 어떤 육신이 소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라는 것이 그렇고,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렇다. 그러니까 구속과 십자가를 지는 것에는 육신의 소비가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이 어떤 목적으로 주어졌는지를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사람을 만드신 목적도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람의 육신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이다. 사용이 된다면 당연히 소비가 되는 것이다.


대속이 있다는 것은 대속물의 육신이 소비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예수님의 구속도 당연히 이러한 법에서 봐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말씀대로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이 가진 육신의 존재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가 그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이라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보는 관점도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보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는 것은 그 목적에 너무 적합하다고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먹은 선악과는 육신을 다르게 보게 했다. 소비되도록 지으신 육신, 그래서 연약한 육신은 하나님께 부정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끄럽게 여겼다. 사람 안에 욕심이나, 정욕이 가득함이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은 육신을 그렇게 지으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 육신 가진 인생을 창조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그렇게 만드신 이를 비난하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아담이 자신이 만들지 않은 육신을 부끄러워했다는 것 역시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우리가 육신에 대하여 가지는 관점을 회복하는 기준은 십자가가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도 결국 육신의 모습이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육신이 옥합과 같이 깨어지니 옥합에서 향기가 나듯 물과 피가 나온 것이다. 물과 피, 즉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도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로서 자신을 순종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육신의 가장 본질적 모습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시니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구속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요 17장),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마 17:5) 예수님께서 보이신 육신의 사용법을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것이라고 보셨다는 것이다. 즉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는 그 모습 속의 육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기대하시고 목적하신 육신의 모습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보시는 관점대로 구현된 온전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가장 온전한 형상으로 보신다. 찔리고 상할 때 그 안에 있는 것이 나오는 옥합과 같이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겠다는 의미다. 우리가 깨어질 때, 다시 말해서 육신이 소비될 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것은 육신이 하나님의 본성이 내재된 상태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을 종과 같이 섬기고, 세상의 가치 앞에 죄인이 되어도 자신을 소비해 가는 그것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에 내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에 대하여 가지신 생각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뜻이 본성이 되고, 그 본성이 육신을 DNA와 같이 이끄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육신을 보는 관점은 그것과 일치해야 한다. 육신 아니라 어떤 것도 존재의 목적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목적과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그 상태로는 온전한 삶이 될 수 없다. 자기 정체성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봐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질 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나의 육신은 너무나 적합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 달라진, 거듭난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이 자신이 믿고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너무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산다면 인생은 말 그대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감사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상태가 된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지키지 않으려 해도 지키고 사는 사람이 된 것이다.


육신을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의미이고, 인생 자체가 감사한 삶이 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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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의 회복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육신을 보는 성경의 관점 Date : 2019. 12. 25. 04: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만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타락했느냐?’의 문제가 있다. 그런 타락이 없다면 굳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는 것과 같은 구원의 역사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 이렇게 곤란한 문제가 발생했는지 늘 궁금하다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을 예견하신 것인지, 아니면 부추기셨는지, 선악과는 미끼였는지, 이런 문제들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아담이 왜 타락하고, 그로 인하여 아들을 보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알려면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실 때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자 하신 최종적인 목적물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스릴 존재”인 사람인 하나님 창조의 최종적인 목표 곧 하나님의 생각이 육신과 하나가 된 존재는 바로 그리스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나타내시겠다고 하신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냥 단순하게 의학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자 하신 사람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눈으로 보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된 사람을 창조하시고자 하신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스도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아직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첫 번째 아담의 모습으로 창조된 것은 맞지만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달성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나누어서 설명한다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들 중에서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 있어 하나님의 본성이 자신의 본성이 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아들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본성이고, 삶의 목적인 사람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들이다.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아들이 있다면 아버지가 있는 것이고, 아들이 살아가면 그 모습 속에서 아버지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인 것이다.


첫번째 아담 - 육신만 사람 - 구속의 대상이자 창조의 대상

두번째 아담 -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된 사람 - 창조의 목적 - 그리스도


따라서 사람은 육신이 사람인 존재가 있고,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창조목적이 본성이 된 사람이 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첫 번째 아담, 두 번째 아담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여기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당연히 첫 번째 아담의 모습이다. 즉 구속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육신으로는 사람으로 났지만 아직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지 않은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은 아담의 범죄에 따른 후속 조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창조의 과정이며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 자신이 선악과를 먹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속이 모든 인생들을 위한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른다. 하나님의 구속이 모든 인생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모든 인생이 죄인이라는 의미다. 모든 인생이 자기만의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각 개인이 그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생을 위한 구속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섭리이며 세상을 경영하시는 계획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 없다면 말만 모든 사람을 위한 구속이라고 뇌까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모든 구속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선악과를 먹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아담이 먹은 것이 유전된 것으로 치부하는 한 이 구속은 자신에게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이 왜 그렇게 자기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작인데 이 시작이 없으면 교회에 1,000년을 다니고 예수를 10,000년 믿어도 소용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은 사람 자신이 선악과를 먹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삶에 만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육신의 삶에 만족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란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만족은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동일한 관점을 가지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 가진 삶을 자기의 선악 기준으로 보지 않는 것이 만족의 동산에 거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기 전 아담처럼.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회복 아니 창조목적 안으로 온전해지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죄는 우리가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생들이 무엇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삼을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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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지영 2019.12.25 16:01

    음성파일을 녹취를 해주셨네요. 이런 사랑의 수고에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집니다. 정말.. 듣는것과 읽는것으로 함께하니 더 깊은 이해가 됩니다.
    정녕 새롭게 인식되는 하나님과 선악과와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경이롭고 꿀송이처럼 답니다.
    이처럼 행복한 성탄절은 생애 처음입니다. ^^

    수정/삭제 답글
    • Favicon of https://www.elphis.or.kr BlogIcon 김홍덕 2019.12.25 17:53 신고

      이렇게 많은 화답을 해 주시니 저도 놀라운 성탄절이 되었네요... 음성파일은 유투브에 좀 있기는 합니다. 아직 많이 보시진 않는데, 선히 여기시니 감사합니다

      수정/삭제

앞서서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을 보는 것에 대한 하나님과 다른 관점들의 여러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해보면 선악과를 먹은 상태에서 육신을 바라보면 육신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가 선악에 대하여 판단하기 때문이다. 선악에 대한 판단이 이렇듯 사람의 육신을 부정하게 보게 된 것은 선악과를 먹은 동기에 있다. 아담과 하와를 꼬신 뱀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했고, 그 말을 듣고서 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해 보였다. 즉 선악과를 먹으면 과연 하나님과 같이 될 것과 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즉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니 육신으로서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아진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듯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겠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게 사람이 잘못된 안목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비교해보니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과 비교할 때 정말로 비교조차 안된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물론 그 인식은 하나가 된다는 것에 대한 그릇된 관점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어쨌든 어두움에 빠진 사람들로서는 자신들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 앞에 육신이 너무 부끄럽고 부족하다는 것에 대하여 원인을 생각치 않고 어둡고 하나님에게서 떠난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돛단배 안에서 자기가 돛에 부채질을 하여 배를 움직이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그런 어리석음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한 것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것으로 온전히 가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예수님은 물론이고 많은 사도들이 율법의 한계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율법, 즉 사람이 스스로 생각한 법과 그 법에서 파생된 생각인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그 관점에서 시작한 그 어떤 것도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사람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족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육신을 정하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을 포함한 신약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만족과 안식과 평안이 없는 것이다. 다 이루었다면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상식이다. 그런데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 앞에 죄를 범치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사람의 문제이고 문제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문제 해결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한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삶이 만족이 되고 평안하기를 위하여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를 끊임없이 단련하거나 금욕적인 생활을 하려고 한다. 신부나 수녀가 되고 속세를 떠난다며 중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노력들을 오히려 비겁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것마저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라 여긴다. 그런 노력이 바벨탑을 쌓는 것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그 피나는 노력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면 그것이 율법주의와 영지주의가 된다. 하나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안 될 것 같으니 포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그 각각으로 만족할 수 없었는지 육신 가진 인생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면서 노력은 끊임없이 한다. 율법주의와 영지주의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그 둘을 혼합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다르게 육신을 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온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신앙의 실체이다.


그러나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신앙의 절대적인 문제는 어쩌면 다른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육신을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육신을 가진 인생들이 자기 육신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심각하고 근원적인 문제를 오히려 신앙의 경건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인생들은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끊임없이 성경을 공부하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그래야 경건한 것이라고 최면에 빠져 있는 것이다.


육신을 부정하게 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신 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만약에 개를 구원하실 것이었다면 개로 오셨을 것이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대상, 구원의 대상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그 존재와 같은 형식인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를 보이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고 있으니 그것은 육신으로 오신 이의 뜻과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의 육신의 삶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육신 가진 자기 삶을 부정하게 봄을 인하여 이를 만회하려고 말씀을 지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완성하는 것이다. 육신의 삶이 말씀 그 자체가 되면 그것보다 더 온전하게 말씀을 지키는 삶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말씀 자체인데 말씀을 지키려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숨만 쉬어도, 말만 해도 다 말씀을 이룬 것이다. 심지어 화장실에 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면 육신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약속하신 이 놀라운 것을 보이시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정작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고서 오히려 어둡게 되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의 의미를 모른 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부끄러움을 가리듯 성경을 지켜서 의로워지려 하고, 흙을 짓이기고 불에 구워 벽돌을 만들 듯 자신을 단련하고 금욕적인 노력을 쌓아 하늘에 오르려는 바벨탑을 쌓고, 이것저것 해도 안 되니 육신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포기하고 단지 할 수 있는 노력이나 하자는 식으로 주저 앉아 있는 것이 인생의 모습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흑암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도 보이셨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음을 아시고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즉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육신을 부정하게 봄으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구속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사람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창조하실 때 세우신 뜻대로 사람이 회복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마저도 사람이 먹은 선악과로 인한 벌을 아들에게 내리심으로 사람들을 구속했다고 생각한다. ‘죄는 사람이, 벌은 예수님이’ 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을 소비하여 육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말씀하시려 오신 분이다. 


그래서 육신으로 오셨고, 육신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육신 안에 물과 피 곧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옥합이 깨어져 향기가 나듯 드러내신 것이다. 육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본질이라는 것이다. 육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육신이 평안하고, 복락을 누리며, 육신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을 완벽하게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십자가에 육신이 달리심으로 완전히 보이신 것이다. 사람이 육신으로 하나님과 같이 될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육신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육신이 하나님에 미치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고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오히려 육신은 그렇게 신이나 천사에 비해 턱없이 연약하기에 오히려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쉽게 드러나는 온전한 존재라는 것임을 보이셨다. 사람의 연약함, 육신의 능력이 하나님께 미치지 못하여 선악과를 먹은 눈으로 보면 부끄러운 그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기에 가장 온전한 상태라고 생각하셨음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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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 안에서 보면 율법주의는 전통적인 이단 혹은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는 신앙이라면 영지주의는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 새롭게 자리한 이단을 말한다. 이 영지주의는 신약성경 후반부를 기록한 사도들, 요한과 유다 그리고 야고보와 같은 사도들이 많이 언급하였다. 이는 다소간 사도들의 사역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사도는 상대적으로 영지주의보다는 이방인의 신앙과 철학 곧 세상의 가치가 복음과 간음하는 것에 대하여 많이 경계하였다면, 이스라엘 내의 교회들,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비중이 높았던 사도들은 영지주의에 대하여 많이 경계하였다.


이는 영지주의라는 것이 쉽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에 있어 육신과 영혼을 따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육신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영지주의의 기반인 것이다. 그래서 이에서 파생되거나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잠깐 기절하신 것이라고 하거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파생되었고, 이는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 갔던 것이다.


영지주의에 대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영지주의는 어느 시대에만 반짝한 시대적 신앙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자신들은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고 단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라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거룩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본질적인 영지주의다. 다시 말해서 영지주의는 역사 속 한 시대의 신앙이 아니라 오늘도 현존하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사도들의 때 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칭 정통이라는 신앙에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지주의는 잠깐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른 견해를 가진 관점이다. 즉 육신을 보는 두 번째 관점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해 온 두 번째 관점은 육신을 부끄럽게 보고, 감추어야 하며, 육신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두려운 것이라고 판단하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가 육신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육신이 정하고 온전하면 굳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소망을 좇을 때 육신을 배제할 이유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신앙


따라서 영지주의도 육신을 부정하게 본다는 것에서는 율법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즉 율법주의나 영지주의나 모두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두 번째 관점에서 비롯된 신앙이고 사상인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육신을 부정하게 보기에 그것을 만회하려고 성경을 지키려는 것이나, 육신은 어떻게 해도 항상 부정하니 이것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육신을 가진 사람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둘 다 같은 뿌리에 있고, 둘 다 선악과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둘은 같지만 약간의 색깔 차이를 보이는 것은 영지주의는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상이라는 것을 보이셨는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을 수 있을지를 비교하고,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니 할 수 없음을 인하여 예수님과 자신의 육신을 다른 것으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이는 엄연히 육신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그것도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실존이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형상인데 그것을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부정하게, 또 부끄럽고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는 존재로 단정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영지주의는 없어진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어이없게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앙 근간이 되어 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말하면서 예수님과 같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과 같은데 어떻게 예수님과 다른가?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우리가 예수님보다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까지 하셨는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예수님과 같이 온전하여 질 수 없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은 온전하여 질 수 없다는 것이다. 화를 내고 성욕이 일고 욕심에 매인 자신을 보니 부끄러워서 도저히 예수님과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참 겸손한 것 같은데, 사람의 육신을 그렇게 본다면 그런 육신을 만드신 하나님은 실패자요 온전하신 하나님이 아니요, 실수하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는 것까지 생각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완전한 영지주의


사람들이 이렇듯 자신도 모르고 부인하고 있지만 영지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 그 이유는 육신을 자신들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먹은 선악과로 인하여 자신이 화를 내고 욕심과 정욕에 가득 찬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스스로 심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악 간에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선악과의 본성이다. 선악과를 먹었으니 그 본성이 내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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