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 21

(치유) 문둥병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5. 2. 4. 15:48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쉽게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지켜야 된다고 말을 한다. 또 그렇게 가르친다. 하지만 어떠한 것도 행동으로 육신의 것으로 지켜낼 수 있는 성경은 한 줄, 한 마디도 없다. 나는 그것을 확신한다. 만약 누군가가 아직도 성경을 지켜 행하여야 하고 잘 지키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이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성경에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십일조를 한번 보자.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를 한다. 그 이유는 알고 보면 부자가 되고 싶어서인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논외로 한다 해도, 십일조의 원천인 수입에 대하여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먼저 세금을 제한 금액으로 십일조를 하느냐? 아니면 세금 전의 소득으로 십일조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을 정했다 치자. 그렇다고 해도 어느 날 얻어 마신 커피 한잔, 그것은 수익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도 있고, 누구나 알지만 공론화 하지 않는 탈세된 소득은 또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교회에는 많은 개인 소득자, 특히 의사와 같은 고액 소득자가 있는데 그들이 원칙대로 세금을 낸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게 현실이니까? 


이런 모든 문제들 속에서 정확한 금액의 온전한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누군가가 이러한 논제로 끌려 들어온다면 이미 십일조에 대하여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십일조의 규례 앞에 사장 정직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그것은 “나는 온전한 십일조를 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금액으로 정확한 십일조를 내는 것이 십일조를 내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십일조를 낸다고는 하나 대접받은 커피라는 수익과 세금 문제와 십일조를 내기까지 시간이 주는 이자와 같은 복잡한 문제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결격 사유가 있다면, 그는 몸의 일부가 문둥병이 든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십일조는 내지만 일부에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는 십일조를 온전하게 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면 온전하다 여기신다는 것이 바로 레위기에 나오는 문둥병의 규례가 주는 교훈인 것이다.


이렇듯 성경에는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는 선지자와 또 예수님 그리고 교회 시대의 사도들의 행적이 기록된 것은 물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이 병들었을 때 고치는 능력이 있으시고, 또한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병을 고치시는 의미도 있지만, 진정한 의미는 육신의 병에 대한 치유가 주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틀어진 상황을 육신의 질병을 통하여 설명하시고, 그것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문둥병이라는 것은 의학이 발달된 현 시대에는 흔한 병이 아니지만, 오늘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통하여 문둥병이라는 것을 대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대하여 몸의 일부가 감각이 없어 문둥병에 들린 것과 같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치유하시기 원하시는 마음과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가는 것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치유를 내 것으로 받아들여서 나의 영적인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치유되었을 때, 진정한 치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고치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삶의 어떤 부분은 정하고 어떤 것은 부정하다고 여기는 생각을 고치시는 것이다. 우선 사람이 그 삶의 일부를 잘라서 어떤 것은 잘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원래는 분리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삶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행동양식과 세상적인 환경과 가치에 따라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을 나누어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가치관이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규례에 있고, 그 중에서 어느 것은 잘하고 어느 것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문둥병이 몸의 일부에 있으면 부정하듯, 자신의 삶의 어떤 부분은 선하고 어떤 부분은 부정하다고 생각이 드는 모든 인생은 문둥병에 든 것이나, 온 몸에 문둥병이 발하듯 자신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온전히 정하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 문둥병의 규례인 것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와 신분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정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 상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즉, 자신의 행위 규범과, 종교적인 규례와, 공로와 사회적인 신분과 같은 것은 다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온 몸에 문둥병이 발하여 제사장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것과 같아서, 그렇게 자신의 모든 형식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온전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 문둥병에 대한 규례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문둥병 환자를 고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의 행위나 공로나 신분과 같이 육신에 속한 것은 설사 일부를 잘 지켜 행한다 해도 몸의 일부가 문둥병이 들어서 부정한 사람인데, 온 몸에 문둥병이 발한 것과 같은 자리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자신의 생각으로도 자신의 행위로도 또한 자신의 신분으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부정한 자리가 바로 죄인들이 매달리는 십자가의 자리이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이심은, 마치 온 몸에 문둥병이 발한 사람이 정한 사람이듯,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나의 행위와 신분이나 생각과 같은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것임을 보게 하여 고백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정한 존재라 여김을 받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심이 바로 문둥병을 고치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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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문둥병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5. 2. 4. 15:47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체 ‘지금은 복음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달력, 즉 객관적인 시간의 흐름상 지금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다음의 시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맹인을 고치신 예수>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을 힘들게 여기고 있다고 여긴다면 아직 하나님의 빛이 비취지 않아서 하나님의 세계를 인지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고,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오지 않은 사람이므로 그 사람은 아무리 신약 성경을 읽고 있어도 그 사람의 시대는 아직 예수님이 오시기 전일뿐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달리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해서 세상에서 위대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므로, 빛이 아직 비취지 않은, 즉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 기록된 성경 말씀도 행함으로 지켜내려 하는 모습으로 자신이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흐름상 예수님이 오신 다음인 A.D.의 시대를 산다고 율법과 무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이든 신약이든 행함으로 지켜내려고 하는 사람은 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고, 모든 성경이 다 율법인 시대를 사는 사람이며, 모든 성경을 율법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이다. 즉 복음이 왔으되 복음으로 알지 못하는 문둥병에 걸린 것이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요 1:5)


그러나 설사 성경의 한 부분이라도 그나마 율법으로라도 깨달았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이것을 행함으로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정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문둥병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인지하고 지키려 하는데, 그것이 지킬 수 없는 것이라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율법에 대한 문둥병인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을 하였느니라.”(마 5:27,28)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율법을 강화하시거나 변경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이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다. 사람에 따라 어쩌다 성에 대하여 아주 무감각한 사람이 있기도 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하여 의학적으로도 분명한 병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사람이 성욕이 있는 것이 정상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신 저 말씀을 어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래야 예수 믿는 사람이고 가르친다면 그건 사람을 향한 가르침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


죄를 깨닫는 것은 ‘아! 그것이 죄구나!’라고 알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육체를 가진 사람이니 내가 죄인이구나!’ 라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문둥병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레위기에 나오는 문둥병에 관한 규례에 대하여 하신 말씀에서 확증을 할 수 있다. 사실 이 문둥병이라는 것은 ‘문둥병이 어떠한 병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과, 그것이 치유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 문둥병에 관한 규례를 잘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성경 레위기 13장에는 문둥병에 대한 규례가 나오는데,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13장 13절이라 할 수 있겠다. 

문둥병이 과연 그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 것이니……(레 13:13)

하신 부분이다. 


성경에서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을 부정하다고 했는데, 그런데 문둥병이 온 몸에 번졌으면 오히려 정 하다고 하신 것이다. 아니 조금만 문둥병이 있어도 부정한데, 온 몸에 문둥병이 퍼졌으면 완전히 부정한 것이 되어야지 왜 오히려 정 하다고 하신 것인가? 여기에 바로 문둥병이 치유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문둥병자를 치유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직임이 문둥병과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임을 보이신 것이다.


이는 사람의 일부가 부정하면 사람이 부정하나, 사람의 온 몸이 부정하면 정하게 된다고 하시는 말씀인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은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할 수 없는 상태이면 부정하고, 온전히 다 못하는 사람이 되면 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인데, 사람이 만 가지 율법 중에서 9,999개를 잘 지키나 단 한 가지를 지키지 못한다면 부정한 사람이나, 만 가지 율법을 다 못 지키면 정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즉 몸의 일부가 부정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이유이기 때문에 그러한 법을 주신 것이다. 사람들이 어떠한 행위로 하나님께 이르려고 하니 그러면 “이러한 것을 다 지키면 인정 하겠다”고 주신 것이 바로 율법인 것이다. 율법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돌 판에 새겨주신 그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이라도 그것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한다면 멀쩡한 복음의 말씀이라도 그 사람에게는 율법이 된다는 것이고, 그렇게 자기가 정한 율법 역시 일점일획이라도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몸 일부가 문둥병이 든 사람과 같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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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문둥병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5. 2. 4. 15:45 Writer : 김홍덕

의외로 신약 성경에는 문둥병에 대한 치유 기록이 많지 않다. 마태복음 8장, 마가복음 1장,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된 온 몸에 문둥병이 든 사람을 치유하신 기록과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명의 문둥병자를 치유하신 기록 정도이다. 이 문둥병은 나병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에 많은 봉사활동의 대명사처럼 여기던 소록도에 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기도 했었다.


이 문둥병은 몸의 감각이 없어지는 병이다. 그래서 몸이 썩어서 떨어져 나가도 그 고통을 알지 못하는 병을 문둥병이라고 한다. 근데 성경에서 의외로 이 병을 많이 다루고 있는 성경은 레위기이다. 레위기 13장과 14장에서 집중적으로 문둥병에 대한 규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성경에서 이 문둥병을 상세히 다루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문둥병자와 같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문둥병은 자기 몸의 감각이 없어지는 병이라고 한다. 사람들도 하나님의 섭리와 말씀에 대하여 문둥병자와 같이 감각이 없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기 위하여 이 병에 대한 규례를 많이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응을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신앙의 요소이다. 그냥 쉽게 교회에 다니고 말씀 듣고, 또 때로는 금식이다 철야기도다 또 성가대나 각종 봉사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니다.


반응한다는 것, 감각으로 느낀다는 것은 먼저 말씀하시는 이가 있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다 헛것이다. 8,9년 전에 국내 한 중견 기업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나보다 나이가 3살이나 많은데 직급은 나보다 낮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매일 밤 10시까지 일을 했는데, 별로 회사에서 그렇게 인정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부서가 통합되면서 내가 그 사람의 상관이 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밤 10시가 넘게 일을 했다는데, 나에게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사내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일한 것을 보고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한번 보자고 하니까 그마저도 안 된다고 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이 왜 진급을 못하는지 알게 되었다. 회사의 모든 일은 적어도 사장에게는 보고가 되어야 하고, 그보다 앞서서 사장과 경영진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것이 관리자인데 그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만 열심이었다. 그것은 회사의 경영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문둥병인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 그러하다. 오죽하면 교회 안에 있는 유머로, 어떤 사람이 한참을 기도하고 일어서는 뒤에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야! 나도 말 좀 하자!” 하신다는 이야기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도다.(말 1:10)


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 7:32)


라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다. 이러한 말씀을 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았거나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멀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히 열심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싫어하셨다. 그와 같이 요즈음 말로 <고객 만족>이 되지 않는 모든 <열심>은 다 문둥병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는 무감각하고 반대로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라 여기는 것에 열심이었던 것이다.


중풍 병이라는 것이 머리의 생각이 몸에 전달되지 않는 것이고, 귀신 들린 것은 몸은 멀쩡한데 머리의 생각이 빼앗겨 버리는 것이라 했다. 즉 중풍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삶에 반영이 되지 않는 것이고, 귀신 들린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그 삶을 주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둥병은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즉 온 세상을 통해 표현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문둥병인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통하여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순전하게 함축된 곳이 십자가이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것에 반응하지 않고 자기가 생각할 때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문둥병인 것이다.


그것을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기도한다는 것이 다 문둥병자의 모습일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온 세상을 통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표현하셨는데,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그것을 알려 달라고 한다는 것은 이미 표현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느끼지 못하는 문둥병자인 것이다. 무리한 접근인 것 같지만, 삶을 살아가는 방법과 형편, 즉 형식이요 행위와 소유의 어떠함에 대하여 그 뜻을 묻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밝혀 놓으셨는데, 시간차에 따른 육신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불확실성을 해결하는 것에 하나님의 뜻을 논한다는 것은, 어떤 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논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궁금해 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이라는 것이 어떤 행동 양식과 방법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 하신 것이다.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즉 육신이 사는 형편과 방법에 관한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고, 방법에 관한 것을 해결하시는 분도 아니실 뿐 아니라, 그러한 것은 이미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미 다 주신 것이요, 또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러한 것을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알고서 살아가면 정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목표에 대하여 감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문둥병인 것이다. 이 문둥병이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율법에 관하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지킴으로 의인이 되려고 한다. 즉 율법을 주신 목적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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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귀신 들린 자의 회복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5. 2. 4. 15:40 Writer : 김홍덕

기적이 되었든 능력이 되었든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에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성품을 표현하면서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필요할 때 신비한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가장 신비한 능력이고 기적 중의 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목적은 잊은 채로 행하는 모든 기사는 다 귀신 들린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어떤 세계든지 가장 온전한 것이 나타나면 그 이전의 것은 다 물리는 것이다. 태양이 쨍쨍한데 형광들을 켜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와 같이 세상에 있는 모슨 신비한 능력과 기적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것 그것이다. 약 장사가 속임수기는 하지만 이상한 무술 같은 것을 왜 보이냐 하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약을 사는 마음이 생기도록 하기 위하여 그런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약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 이상한 차력과 같은 것은 다 치우는 것이다. 그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처럼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든 기적도 결국은 십자가를 볼 때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돌이키는 가장 온전한 기적을 보이시기 위하여 하신 기적들인 것이다. 치유도 물 위로 걸으심도 다 그것 때문이다. 즉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하는 그것을 위하심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위하는 기적이 아니면 다 귀신 들린 자의 능력과 같은 것이고, 또 기적이 일어나는 목적이 분명한데 그것에 집착하는 것 역시 귀신 들린 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비한 기적이나 귀신 들린 자나 보여줄 법한 능력을 보여주는 모든 것은 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그러한 능력을 행하는 것이 더 신앙이 있는 것이라고 우긴다면 그것은 태양 아래에서 형광등이 더 밝은 것이라고 외치는 <소리>이니 그것이야 말로 귀신 들리고 정신 나간 것이니 고쳐야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각종 신비한 은사에 대하여 말하다 마지막 절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이라고 말한 다음에 우리가 잘 아는 사랑장인 13장을 전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라고…… 여기서도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소리가 된다고 했다. 즉, 어떤 기적도 온전한 것 앞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다 소리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에 대하여 말을 하면 누구나 아는 것 같지만 진정으로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1서에서 독생자로 하여금 우리를 살리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1 4:8,9)


흔히 사람들은 밥 퍼주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를 살리신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이라도 사람을 그리스도로 살게 하는 것에 수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 역시 목적을 잃은 공로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것이다. 즉 사람을 구해야 될 잘못된 자리에서 구해진 자리인 올바른 자리로 예수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올바른 자리를 보여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사람들은 자기가 가야 할,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이고, 그 올바른 자리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사랑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물 위로도 걸으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다가 십자가에서는 아무 것도 안 하시고 그냥 처형을 당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만 했느냐 했을 때, 사람들은 물 위를 걸을 수 없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으니, 그것을 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구원의 자리에 간다고 하면 갈 사람이 없어서 그 모든 기사가 다 사람에게는 소리가 될 뿐, 복음이 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즉 목적이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없는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이든 밥 퍼주는 것이든 다 이 목적 아래에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어야 그것이 온전한 기적인 것이지, 그것이 있어야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기적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닌 것이다. 즉 머리를 빼앗긴 채 능력만 행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귀신 들린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목적으로 인하여 가신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이며, 그 십자가의 자리는 세상의 법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실패자가 되고, 종교적인 계율을 지키지 못해서 죄인이 되는 자리가 그 자리이다. 그리고 알고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자리이고, 사실은 누구나 다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이다. 그리고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자리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런 이유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이유로 실패자가 되는 것이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고백할 때,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목적이고 머리인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실패한 인생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이 진정한 기적이고 머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목적, 즉 사람이 변하고 사람의 신분이 변하는 기적을 일으키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의 자리, 곧 세상의 위대함 앞에서와 종교적인 업적과 공로 앞에서 죄인이 된 사람은 자기와 동일하게 연약하고 죄인인 인생들을 볼 때,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과 세상의 종교 앞에서 실패자가 되는 육신을 가지고 오심을 보고 내 모습을 깨닫고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인생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또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어 그 사람 역시 신분이 바뀌고 그 마음이 바뀌는 그것이 진정한 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목적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머리를 회복하는 것이며, 그것이 목적을 모르고 기사와 능력만 행하는 귀신 들린 자리에서 벗어나 치유 받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능력을 보임으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고 여기고, 또 그것이 신앙의 목적이라 여기는 귀신들린 상태에서 벗어나서 치유함을 받아 예수님께서 보이신 대로 십자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이신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심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직임이기에 ……


그렇게 보면 우리는 다 한 때 신비한 기적을 꿈꾸고 남이 할 수 없는 것을 행함으로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마음들은 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십자가에 내려놓고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로마의 법과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계율 앞에서 죄인이 되셨던 것 같은 모습이 오늘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함으로 예수님과 내가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내 모습이 바로 저것이구나!’ 하는 것은 예수님과 상관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이시고자 하신 것을 내가 볼 때 상관이 있는 것이다. 영화 바람의 소리에서 고문당해 병원에서 노래를 부를 때, 그것을 알아듣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불렀고, 어떤 간호사가 알아들었다. 그것은 그 두 사람이 상관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치 그것과 같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모습이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세상적인 성공에 아무리 도전해도 언제나 또 위에 사람이 있어 늘 실패하는 인생이고, 또 종교적인 규율을 아무리 잘 지키려고 해도, 어느 사람에게 얻어 마신 커피 값까지 다 십일조를 할 수 없고, 주일에 돈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일어날 때 이미 전기를 쓰고 있어 도무지 다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기에 그것을 알고 인정할 때, 귀신 들린 자와는 다르게 예수님과 나는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치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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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귀신 들린 자의 회복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5. 2. 4. 15:38 Writer : 김홍덕

성경에는 의외로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한 말씀이 많다. 마태복음에만 해도 그냥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다고 언급한 구절 외에도 8장에서 돼지 떼로 들어간 귀신 들린 사람의 일과,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9장), 또 귀신들려 눈  멀고 귀머거리 된 자(12장), 가나안 여자의 딸(15장), 또 변화산 밑에 데려온 아이(17장) 등, 많은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귀신에 대한 논쟁을 하기도 하셨다.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새불의 힘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하는 일에 이르기 까지 많은 귀신 이야기가 나온다.


중풍병자는 머리에 생각이 있지만 그것을 몸이 받들지 못하는 상태라면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것은 몸은 멀쩡한데 머리에 생각이 귀신에게 점령당한 즉 그 생각을 빼앗긴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풍병자는 머리의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움직임이 부자연스럽지만, 귀신 들린 자는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자도 쇠사슬로도 제어 할 수 없다고 했고, 변화산 아래에 데려온 아이도 자기가 통제가 안될 정도로 움직임이 많아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진다고 하셨다. 이처럼 귀신이 들리면 그 머리의 생각이 빼앗겨서 자기 몸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는 것이다.


머리가 빼앗겼다는 것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제라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목적 안에 두게 하는 능력인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원자력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놀라운 힘을 어떤 목적 안으로 가지고 오는 시설인데, 만약 그것이 통제를 벗어났다면 그것은 전기를 발전시켜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목적을 벗어나서 오히려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거나, 아니면 전기를 생산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상태를 통제를 벗어난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 지진이 났을 때, 원자력 발전소가 크게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때 그 원자력 발전소들은 귀신들린 자와 같이, 엄청난 원자력 활동은 했지만, 원자력 발전소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목적에서 이탈해서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 버렸던 것이다. 그 당시 발전소들의 설비가 원자력이라는 기능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통제를 벗어나 버렸던 것이다. 목적이 상실된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도 그것과 마찬가지이다. 몸의 기능은 오히려 극대화 되었는데, 머리가 빼앗겨서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뛰어들게 되는 상태가 바로 귀신 들린 상태인 것이다.


거라사(마 8장에서는 가다라)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막 5장)은 무덤 사이에 살고, 쇠사슬로 묶어도 그것을 끊어 버릴 정도였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상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 같이 보통 사람들로서는 하기 힘든 일들인데, 그 사람에게는 일상과 같은 일들이었다. 사람이 쇠사슬에 묶이면 움직이지 못해야 정상인데 이 사람은 그것을 끊어 버린다는 것이다. 중풍병자는 머리의 생각이 몸으로 전달되지 않아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이는 반대로 머리의 생각이 정상이 아닌데 몸은 괴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비적인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비한 능력을 사모해서 가진다고 해도 그것이 가진 목적, 즉 머리를 빼앗긴 상태로 신비한 능력을 행한다면 그것은 귀신 들린 자들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할 수 없는 것을 행하려고 하는 것이 그렇다.  마태복음 8장 28절에 보면 귀신들린 자들이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 하더라”라고 했다. 즉 귀신 들린 자의 상태와 같은 방법(길)으로는 사람들이 다니기 힘들다는 말씀이다.


이는 신앙 세계에서 남이 하지 못하는 기적적인 능력을 행하는 것이 더 예수님을 닮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마치 그들에게도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렇게 기적을 행하여야만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닐만한 길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 기적은 고사하고 자신의 몸 하나도 건지지 못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방법이 아니라,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자리에서 구원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길이신 것이다.


신비한 일을 일으키려 하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막 5:7)이라고 알아 봤다. 당시에 아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지 않을 때 인데 이미 귀신 들린 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아야 하는 귀신 들린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해도, 귀신 들린 자가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 5:7)라고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과 귀신 들린 자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를 보이려 오신 분이기에,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는 길을 제시하는 사람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행함으로 신앙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과도, 예수님과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괴롭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누가 이 글을 읽으면서 그 마음이 괴롭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신비한 능력이 있을수록 더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만민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과는 무관한 사람이라서 괴로운 것이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은 소리를 지르고 자기의 몸을 돌로 상하게 한다고 했다. 사람의 말이라고 해도 메시지가 없으면 그것은 소리일 뿐이다. 귀신 들린 자가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메시지가 없는 소리라는 것이다. 메시지는 말하는 사람에게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들을 때 의미가 있어야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는 아니지만 2009년에 개봉된 중국영화 <바람의 소리>라는 영화가 있는데, 반일 단체의 두목을 잡기 위해서 두목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일본 군인들이 초대형식으로 성에 가두어 두고 일본군 입장에서 스파이를 색출하려고 한 영화다.


그 영화에서 성에 초대받은 사람 중에 두 사람이 실재 반일 단체 소속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어떤 중국 노래를 불렀을 때, 노래 어떤 부분의 높낮이로서 의미가 전달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노래 소리로 들리지만 이미 약속이 되어있는 반일 단체의 사람들은 그 안에서 메시지를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두 명 중 한 명은 고문 받다 죽고, 한 명은 병원에 후송되어 가서 자기들만의 노래를 불러 메시지를 전달하여 참사를 막게 된다. 그게 메시지고, 그렇게 메시지가 있는 것은 말씀이고 말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 소리다.


즉 하나님께서 신비한 능력을 일으키시는 목적과 사람의 존재 목적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반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능력이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귀신 들린 사람의 소리와 같이 입에서 나오지만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들을 때는 그냥 소리인 것이다. 왜 그것이 소리이냐 하면 보통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이면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냥 연약한 인생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메시지가 없다. 기도해서 병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신앙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바로 메시지가 없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음 즉 복된 소식이고 복된 말씀이 되는 것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기적을 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복음이 된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된다고 하는 모든 말은 그냥 소리일 뿐이다. 그리고 귀신 들린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누가 들어도 복음이라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교회다. 그러면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목사 아닌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교회 안에서 돈 있을수록 인정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곳도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또 예배시간에 노래를 잘하는 사람만 특송을 할 수 있다? 그럼 그곳도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냥 소리에 불과한 일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신앙이라고 말하는 모든 소리는 다 보통 사람은 하지 못하는 사슬을 끊어버리는 힘이 있는 귀신들린 자의 소리와 같은 것이다.


그런 귀신 들린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고치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것이 고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창조된 목적을 벗어나서 위대해지고 강해지는 것을 죄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귀신 들린 것과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같은 것이다. 뭐랄까 목적도 모르는 채 신비한 능력을 사모하는 것이 원인이라면, 그 결과는 귀신들린 자의 모습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비한 능력은 없어져야 하는가? 그게 아니다. 정말 진정한 능력과 기적이 뭔지 아는가? 그것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또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 앞에 기적을 보이시는 이유인 것이다. 신비한 능력 자체가 목적인 신앙은 다 귀신 들린 자와 같은 것이다.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 역시 다 귀신 들린 자와 같이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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