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 38

새롭게 시작하는 신앙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22. 15:52 Writer : 김홍덕

이 글의 목적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주관자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가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인생을 주관하신다고 할 때, ‘과연 인생의 무엇을 주관하시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신앙이 흐트러진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살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주관하시는 주권의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주관하시는 주권의 가장 본질은 창조에 있다.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생각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왜 만드셨는가?”하는 그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여기에 본질이 있는 것이다. 즉 만든 이유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관하시는 것이다. 목적이 있어 만드셨다면 그 목적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동을 위하여 사람이 자동차를 만들었기 때문에 자동차에 연료를 채워주는 것이지, 자동차에 연료를 채우기 위하여 자동차를 만든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그것이 사람 안에 있느냐? 아니냐? 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새 생명이 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창세기가 시작되는 것이고, 그 생명이 장성하여 삶을 주관하므로 나타나는 그 사람의 모든 행동과 살아가는 모양과 생각과 말이 어떠한지를 기록한 것이 성경인 것이다. 즉 내용인 하나님의 의가 형식인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 외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향성은 없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순간까지 신앙이라는 것은 어렵고, 성경이 이해하기 어려우며, 사는 것이 힘들다고 여겼다면 그것은 방향이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성경을 읽고서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갈 것이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아무 문제가 없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신앙적 가치관과 안목은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치관은 늘 ‘이렇게 해도 괜찮은가?’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고, 성경은 생명의 말씀인데, 생명이 ‘숨 쉬어도 되는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숨 안 쉬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서 숨을 참아보려 해도 스스로 숨을 참아서 죽을 수도 없는 것이 생명이다. 그것이 그런 것은 생명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 생명이 몸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과 같이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말씀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적어도 스스로 그것을 그치게 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죽일 수는 있어도 주님을 부인하게는 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고서 정말로 말씀대로 살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말로 믿음을 체험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생명이 되면 성경의 모든 것이 내 삶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가장 크다. 죽은 사람 살려 본들 다 죽었지 않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의가 내 생명이 되어 그것 삶으로 나타나면, 이 육신의 장막을 벗어도 그 속에 있던 의는 영원하다. 왜냐하면 그 의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이고 하나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의가 육신을 입고 살 동안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니 당연히 그것은 하나님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작에 대하여 의심할 필요는 없다. 모든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다. 사람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마치 땅에 씨가 심기는 것과 같다. 땅에 씨를 심은 농부가 그 씨가 열매 맺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돌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명이 되기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그 말씀이 생명이 되기까지 뿌린 이도 기르는 이도 다 최선을 다한다. 뿌린 이나 기르는 이가 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것이다. 농부가 씨 뿌린 이유가 그 씨가 열매를 맺는 것뿐임과 같은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자꾸 하려 한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마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면 살아 있는 생명이 그 생명을 끊임없이 표현하듯 쉬지 않고 하나님을 나타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당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해야겠다고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외식하는 신앙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 예레미야와 같이 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불붙는 것 같이 견딜 수 없다면 당신 안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보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것이다. 최면 걸듯이 속이지 않는다면.


인생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이고 도구다. 그러니까 육신의 삶과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뜻이 본질이고 내용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에 관하여 기도하고, 살아가면서 화를 당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세상에서 성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결과에 대한 부러움을 사기 원했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살아온 것이다. 그러한 것은 어떤 모양이라도 될 수 있다. 내용이 표현되는 것은 너무 다양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동을 위한 자동차의 모양과 크기가 다 다른 것이 그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의가 인생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말씀에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은 그 행동 자체를 원하심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는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착각하거나 외면하면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진정한 신앙을 원한다면, 그런데 오늘까지 성경을 지켜 행함으로 내 영혼의 정체성을 죽음에서 천국으로 바꾸려 했다면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내 영혼이 먼저 은총을 입고 하나님 아들의 생명으로 거듭나면 성경의 모든 말씀도, 삶의 모든 필요도, 그리고 삶의 목적과 의미도 다 이루어질 것이다. 아니 그것을 금할 방법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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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신앙의 내용, 그리고 형식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21. 10:46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은 아주 핵심적인 말씀이다.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것에 관한 것일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의 많은 본성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법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법과 성품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에 많이 베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만난 것 같다.’고 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빌립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7)

이 말씀은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정말로 더 이상 말하기 입 아플 정도로 명확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니 예수님을 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본 것임이 당연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이 있으신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몸이 하나님이라는 것인가?’ 하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보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서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깨닫게 되는 과정에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즉 성부께서 가지신 의가 육신이 되어 나타나니 그분이 아들이시고 그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를 본 것 같이 아버지의 존재와 성품과 뜻을 알게 되는 감동을 주시는 분이 성령이신 것이다.(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라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이 가진 정말로 놀라운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은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살고, 그 삶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핵심 중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각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것도 우리 사람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런 모든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을 볼 때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았듯이 다른 사람이 자기 삶을 볼 때 하나님을 알고 깨닫고 만날 수 있게 되는 그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목적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그야말로 내용이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되어 예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할 것이라고 하셨다. 즉 우리의 삶으로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나타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이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그 영광스러움이 소름 돋을 정도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 것이지 세상에서 상 받고 성공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영광이 오염된 것은 정말로 통탄할 일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로 감동스러운 일이고 몸 둘 바를 알 수 없는 그런 일이다.(이런 말씀을 생각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할 때면 가슴 벅찬 감동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가 또 내가 지어졌고, 이를 위하여 부르셨고, 또한 불러서 이렇게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정말로 이 인생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은혜이기 때문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그러므로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식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이신 하나님이 실존하심을 증거하는 증거가 사람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하는 존재가 또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으로서의 삶을 눈에 보이는 형식을 본질로 알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인생을 사용하지 않고, 내용 없는 인생의 겉모양에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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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신앙의 내용, 그리고 형식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20. 11:22 Writer : 김홍덕

너무 간단한 인생의 정의



<내용과 형식>이라는 관점으로 성경을, 신앙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생소한 관점일 수 있다. 처음 시작할 때 밝힌바와 같이 이는 성경의 법칙을 종교적인 색채가 없는 일반적인 용어와 관점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정확한 관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로 합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이동이라는 내용과 바퀴 달린 몸체라는 형식이 하나가 되어 존재한다. 칼은 그 날카로운 모양인 형식이 자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자르는 것이 본질이고 칼의 내용이다. 내용이란 다른 말로,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목적이다.


사람들의 삶은 정신없다. 그리고 늘 불안하다. 사람들이 불안한 것은 내일 자신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지만 아주 명백한 가정 하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정확하게 뭘 모르는지 조차 모른다. 살아가기 힘든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지만, 그렇게 두렵고 대비를 해서 죽지 않는 것도 아닌데도 그렇게 불안해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불안해할까? 정말로 그냥 안 좋은 일이 일날까봐? 아니면 아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 그 자체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에, 그러니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미친 듯이 대비하면서도 떨쳐지지 않는 불안감의 원인은 사실 다른데 있다. 사람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의 모든 불안의 원인은 <왜 사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왜 사는지를 안다면, 내일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지도 분명하고, 더 나아가서 왜 사는지 목적을 주신 분이 누군지 알면 그 목적대로 사는 것에 필요한 것도 다 준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을 믿는 망치는 주인의 공구함에 들려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아니 뭘 할지도 알뿐 아니라, 가면 못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자신이 망치라는 것을 아는 이상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이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것은 내일 먹을 양식이 아니라, 내일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도 같은 의미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왜 만드셨는지 그 의도와 그 의가 다스리는 나라를 알게 되면 그 의를 표현하기 위한 형식들은 다 주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이라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에 합당한 제물이 예비 된 것이다. 이런 모든 말씀들은 결국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면 그 존재 목적을 이루면서 살기 위한 육신의 모든 것은 다 예비 되어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즉 내용이 무엇인지 알면 형식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있으니 그 형상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이라는 내용을 표현할 형식인 사람을 예비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것으로 볼 때 사람이 내일을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존재의 목적을 알면 삶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려주러 오신 분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예수 믿으면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질, 곧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형식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람의 내용만 알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 하나뿐인데, 왜 그렇게 성경을 어렵게 보고, 신앙생활 힘들다며 쟁쟁거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얼토당토않게 신앙을 학문으로 만들어서 신학이라고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공부한다고 알 일이 아니다. 이 세상의 사람 어느 누가 태어나서 호흡법을 배워서 숨쉬기 시작했는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그렇게 익히는 법은 없다. 그냥 생명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그것이 사람의 내용이라는 것, 그 내용은 곧 인생의 목적이고 의미라는 것, 그리고 육신의 삶은 그 목적을 표현해내는 형식이요 도구라는 것, 이 얼마나 간단한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줄이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게 다다. 성경을 왜 연구하고 앉았는가? 이것이면 족하다. 단 하나 이것이 자기 안에 없고, 성경이 이것 하나라는 것을 믿지 못해서 다들 부산을 떨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하나님 당신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표현하시겠다는 것이 인생의 모든 내용이고 본질이고 의미다. 이것을 믿는다면, 이 육신의 삶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지 너무 분명한 것이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천부께 다 아시느니라” 그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자기 삶에 대하여 그렇게 걱정하고, 뭔가를 해야 하나님께서 반응하실 것이라고 난리를 떨고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본질이 자기 육신의 삶, 곧 눈에 보이는 것, 그 형식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그것뿐이다.


그래서 육신이 하나님 앞에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하여 선과 악을 규정하고 육신이 선한 것을 행하기 위하여 심지어 남을 죽이기도 하고 난리도 아닌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용이고 내 존재의 목적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이 육신의 삶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임을 안다면, 이 육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누가 준비하겠는가? 당연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이 자기 삶을 대비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곳간을 새로 지은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딴 게 아니다. 바로 이것이지.


인생과 신앙은 간단한 것이다. 스스로가 이 인생을 시작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이 아님을 알 것이고, 그러면 누가 시작했는가를 알면 그 시작하신 분이 나의 존재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삶의 주인이고 내용이고 목적이고 의미이신 것이다. 그러면 육신의 모든 것은 그 뜻에 맞게 예비 되고 사용되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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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4)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19. 13:55 Writer : 김홍덕

교회



이 글의 기본 주제는 <내용과 형식>이다. 이것은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성경의 기본 구조를 보편적인 용어로 설명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성경의 기본 골격이고 법칙이기도 하다. 영이신 하나님과 그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창조의 섭리가 그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사람의 내용, 곧 본질은 하나님의 의다. 그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있어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이다. 성경은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형상은 이미지다. 즉 사람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누군가 자신을 볼 때, 혹은 그 삶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 사람에게서 이루어졌으므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산 사람이다. 그것을 성경은 구원, 거듭남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생명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즉 세상의 모든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깨달아진 사람은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사람이고 그렇지 않다면 물리적 세상을 아무리 잘 알아도 하나님의 세상이 그 사람에게 열리지 않은 것이다. 즉 흑암과 혼돈 가운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 자기 안에서 열리지 않으면 인생을 왜 사는지 모르기 때문에 흑암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의 그림자다. 즉 이 세상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고 그렇게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 열린 사람, 즉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태초가 있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하나님의 세계이다. 그런 사람에게만 이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나 신념으로 의심을 물리치고 믿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듯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내용 – 육신을 가진 삶은 그 형식>이라는 구조와 같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삶을 살던 사람들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서 들어가는 곳이라면,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곳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예표인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를 삶으로 표현한 사람들이 모이는(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교회도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라는 내용이 교회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 이전에 이 세상이라는 것이 전부 하나님의 의가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라는 내용이 이 땅에서 형식으로 표현된 곳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장 먼저는 교회가 설립되는 과정부터 설명하고 있다. 즉 교회가 건물을 세우고, 세상의 법칙대로 시험 쳐서 설교 면허를 얻은 목사가 있고 난 다음에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인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삶이라는 형식이 된 사람이 모임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렇게 모인 교회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라는 내용을 표현한 형식, 즉 하나님 나라의 예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는 너무 많은 성경의 말씀들이 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도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다. 분명히 모인 다음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사람이란, 그냥 육신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목적임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그런 면에서 보면 성경에 사람이라고 나온다고 육신인 사람이 그것에 해당된다고 믿는 것은 난센스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 곧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 상식적인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모이면 대한민국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교회는 그냥 사람이 모여서 예배드리면 모인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터미널과 같은 곳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생명을 가진 이들,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모인 곳이라는 것이다.


많은 교회가 문제를 일으키고, 사람들이 교회에서 안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을 알지 못하고 방향을 거꾸로 해서 일단 모으면 교회가 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안식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일단 건물과 목사라는 설교 면허가 있으면 교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형식이 있으면 내용이 찰 것이라는 거꾸로 된 방향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형식이 본질로 아는 가치관의 산물일 뿐 온전한 하나님의 법이 아니다.


교회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사람이 모일 때 이미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성령의 감동이 있어서 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는 것은 세상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든지(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전도다.), 육신이 교회에 와서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삶을 보고서 감동하든지 간에 먼저는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기 위한 순종의 세계가 시작되어 모이는 곳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예표이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로 통치되듯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법인 공동체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이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당연히 몸이 머리에 순종하듯 그리스도의 의에 자기 삶이 순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아주 자연스럽고 안식할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심판이 없듯이 교회에는 심판이 없다.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곳이듯, 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육신의 다양한 성향대로 마음껏 자신의 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함에 있어 심판도 거리낌도 없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형식이고 예표며,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교회에 가는데 의무감이 있고, 또 가면 사람들의 눈치 보이고, 또 신앙 없다고 심판 받고 한다면 그곳은 온전한 교회가 아니다. 또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고, 교회를 아름답게 지어 놓으면 사람이 온다고 하는 것 역시 온전한 교회가 아니다. 하물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싸우는 교회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교회를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우고 운영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에 사람의 외모와 행동을 기준으로 심판하고, 편을 갈라 싸우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중심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든 행동이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이라는 것 자체도 모르기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한 삶의 내용으로 있어 그것을 삶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할뿐더러 그런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교회가 사람을 심판하고 다투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며 쫓아다니는 것이다. 그러한 곳은 교회 노릇을 하는 곳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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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19. 11:51 Writer : 김홍덕

천국,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천국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누가 갈 것이며,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가장 먼저 정리가 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천국이 사람 마음대로 되는 나라든,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나라든 과연 있는가? 하는 문제일 수 있다. 이슬람에서는 천국에 가면 72명의 신부가 평생 모신다고 하니 자살 폭탄테러도 하는데, 그렇게 죽었는데 막상 가보니 ‘아무 것도 없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여담으로 대부분의 남자에게는 한 명의 부인도 힘든데 72명의 처녀가 좋은 것인가 싶기도 한데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있느냐 아니냐가 아닌 어디에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천국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속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집합의 어느 쪽이 큰 것인가?


사람의 마음이나 눈은 생각보다 크다. 사람의 눈으로 온 우주를 담을 수 있고, 마음으로 온 세상을 담을 수도 있다. 반대로 멀쩡한 눈으로 뻔히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하기도 하고, 온 우주를 담을 수도 있는 마음으로 단 한사람의 한 순간을 담아내지도 못하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과 눈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천국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앞에서 우리는 천국이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내용이 되어 그 하나님의 의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표현한 사람들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서 가는 곳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나라이고, 그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삶으로 표현되는 의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의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에 있을 때와 천국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하나님께서 항상 변하지 않고 가지고 계신 의가 사람 안에서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가 되어 삶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나 ‘저기’와 같은 지리적, 물리적인 장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안에 있다고 하신 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 사람은 이미 천국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들이 아버지의 집 안에 있지 않고, 학교나 군에 가 있어도 아들인 것과 같고, 대한민국 국민이 다른 나라에 가 있어도 대한민국의 헌법 아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도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 의가 그 사람이 세상을 살 동안 모든 삶의 이유와 목적과 의미인 사람은 이 땅에 살 동안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이 땅에서부터, 아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았던 사람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 들어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하게 있는 나라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없는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정말로 천국이 있을까?’라며 살면서 수시로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천국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인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 안에 천국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의심스럽지만 신념을 가지고 믿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그냥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억지 같지만 실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 안에 있어서 자기 삶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의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의인데, 마음 안에 그 하나님의 의가 있는데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있겠는가?’, ‘천국이 어디에 있냐?’ 같은 의심이나, 특히나 ‘이렇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겠나?’와 같은 의심과 걱정이 반이고 억지로 믿어보려는 의지가 반인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없다. 이 또한 당연한 것이다. 마음에 없기에 자기 삶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에 대하여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통성기도로 ‘주여!’ ‘주여!’외쳐도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2차 방정식 공식을 모르는데 풀게 해 주실 줄 믿는다며 소리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 실존과 나라의 법과 의가 너무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는 곳이다. 반대로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없기에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서 영혼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나라에 맞게 바꾸어 보겠다는 사람에게는 너무 의심스러운 곳이다. 즉 그들에게는 없는 곳이다. 그렇다는 것은 천국은 어떤 이에게는 있는 곳이고, 어떤 이에게는 없는 그런 곳이다. 사람에 무관하게 있거나 없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들어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있는 곳이고, 들어갈 수 없는 사람에게는 있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없는 곳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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