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 38

요엘서를 마치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8. 12. 10:41 Writer : 김홍덕

<요엘의 주제와 내용 요약>


요엘서는 3장 밖에 없는 작은 성경이지만 우리가 아주 익히 아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시면…”에 관한 말씀과 그에 이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구원을 얻어야 하는 것은 메뚜기 떼로 인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혹은 드리지 않는 자리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흐름의 시작은 “메뚜기 재앙”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리는 자연 재앙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이방으로 여기시는 가치관에 관한 것이다. 제사를 없게 만든 것은 메뚜기 재앙인데 그에 대한 보응은 이방에게 하시는 요엘서의 구조와 말씀이 그것을 설명한다. 결국 온전한 제사를 폐하는 이방인의 가치가 메뚜기 재앙인 동시에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이며 무엇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런 요엘서의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 온전한 구원을 얻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구원 받아야 할 자리라고 말씀하시는 메뚜기 재앙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우리의 어떤 삶과 가치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제사를 폐하였는지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치 않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제사라는 행위가 주는 선입견을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는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의 의가 나의 삶을 주관하는 것에 육신으로 사는 삶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나를 드린다는 측면에서는 제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처럼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생은 하나님의 의를 담고 그것을 육신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라는 존재 목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 온전한 제사다.


그렇다면 요엘이 메뚜기 재앙으로 인하여 제사가 폐하여 졌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사람이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메뚜기 떼와 같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제사가 아님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수의 많음에 기초하여 온전하지 않은 제사를 온전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구원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진 Conventional Wisdom이 서로가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으니 그것을 온전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실상은 온전한 제사가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자리라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 요엘서의 말씀이다. 사람들이 가진 Conventional Wisdom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에 기인하여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제사(예배)드리는 것이다.


오늘날 이단은 물론이고 자칭 정통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실체는 사실상 우상이다. 먼저는 믿음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표상으로 보내신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저주받은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렇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고, 그 구원의 실체도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이나 그것을 담보하는 (세상적 가치로)선한 행위를 행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사람을 만든 목적 안으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의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또한 메뚜기 재앙으로 요엘서가 비유한 하나님의 제사를 폐한 신앙은 하나님께 자신들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베푸시는 마음이 들도록 성경을 지키는 행위의 공로, 착한 말과 선한 행실을 드리는 것을 신앙이다. 특히 이것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대중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메뚜기 떼라고 한 것이다.


이런 신앙들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이 아니라 행위를 의로 여기는 하나님으로 조각한 것이고, 영광과 은혜와 복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의도 아니고 뜻도 아니며, 성경 말씀도 그것이 아니다. 당연히 그런 신앙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방이 바로 그런 신앙, 그런 가치를 가진 사람들과 그 신앙이다. 따라서 그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는다. 이것은 다들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말로만 안다. 행위는 곧 형식이고 나타난 것인데, 그것을 의로 여기지 않는다면 육신의 성공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라 하지 않을 것이며, 좋은 교회 건축물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하나님의 복과 은혜라 말하고, 좋은 건축물인 교회를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신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이 모순이고 거짓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니 메뚜기 재앙이다. 그 속 자기 신앙을 두고 의지한다는 것이 바로 재앙이고 어둡고 캄캄한 것이다. 자신이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려면 그것이 재앙이고 어둡고 캄캄한 거시며 하나님의 제사를 폐한 것이라는 온전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과 여호와의 신이 임하는 시작이고 구원의 문이다. 


감히 말하거니와 이 고백은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절망적인 고백일 것이다. 그 고백을 하기 전까지 자기 인생이 모두 죄와 사망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피를 토하는 것 같은 회개가 없었는데, 단지 교회에 가서 세례 문답했다고 얻을 수 있는 구원이 아니다. 구원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라면 하나님이 아들이 십자가를 질 이유조차 없다.


요엘서는 작은 성경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신앙 전반을 경고하고 있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은 하면서 자신이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신앙이지만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구원이라 말하니 그런 줄 아는 신앙,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했고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니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 신앙 역시 다들 그렇다고 하니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그 대중성이 메뚜기 재앙이고,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방이고, 구원을 받아야 할 자리다.


성경이 이렇게 오래 전부터 간절하고 명료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어제처럼 교회가 그렇다고 하니 자기 안에 확신이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더 잘 받을까 고민하고, 또 반대로 어떤 행위를 하면 안 되는가를 염려하는 것을 경건한 신앙이라 말하는 것에 계속 있을 것인가? 요엘서는 말한다. 그것이 재앙이고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방인의 모습이라고. 무엇보다 그 신앙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죄와 사망의 자리라고.


(요엘 3:18-21) 하나님이 주시는 복, 구원(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8. 11. 10:48 Writer : 김홍덕

구원의 증거


신앙인들에게 구원은 일상이고 기본이자 절대적 요소이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지에 대해서 사실상 잘 알지 못하고, 구원 받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어쩌다 생각하면, 아니면 교회에 갔거나 문득 신앙적 환경에 처하거나 생각을 할 때 별다른 생각없이 그냥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거듭남과 새생명이다.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전화기만 새 것으로 바꾸어도 설레고 그 변화를 체감하며 사람들에게 자랑할 뿐 아니라 주변인도 전화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관심을 보인다. 전화기와 같은 소비재가 그런데 영혼의 운명이자 영원한 시간에 속한 문제인 구원을 받아 새생명이 되었는데 실감할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명이 바뀐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늘 비유하는 대로 늑대가 양으로 거듭났다고 해 보자. 새로 난 생명이 양이라는 것은 모양은 물론이고 살아가는 법, 곧 본성과 행동, 그 모든 것이 양이라는 의미다. 이제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는다. 아니 고기를 먹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고기는 삶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 것이 양이다. 이런 변화를 바로 구원, 거듭남, 새생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믿어 구원 받아 거듭난 새생명이 되었다면 늑대가 양이 되는 것 이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 없다”는 찬송가 가사와 같은 삶이어야 비로소 구원을 논할 수 있다. 그런 변화 없이 단지 세례 문답으로,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문장을 인정하는 것으로 구원은 어림도 없다. 그리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구원 받을 기회조차 없다. 스스로 구원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다면 얻지 못한 구원을 찾을 리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자. 종교와 종파를 떠나서 그들이 신앙을 가지기 전이나 가진 다음이나 추구하는 것 동일하고, 가치 동일하고, 복에 대한 기준, 영광과 성공에 대한 기준 어느 하나 달라진 것 없이 동일하다. 교회나 신앙을 가지기 전에도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랬다. 단지 자기 노력으로 하다가 하나님의 힘을 또는 신의 힘을 의지하여 성공하려 한다고 늑대가 양이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양의 탈을 쓴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외식’이 바로 이것이다.


신앙을 가지기 전에서 세상에서 성공하려 했다. 그러다 교회에 다니고 나서 같은 성공을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으로 치환하고, 성공을 바탕으로 주를 섬기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은 가치가 바뀐 것이 아니라 수단이 바뀐 것이다.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을 수단 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그런 생각에 종속되어 수단이 되실 리는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 하나님이 우상인 이유다. 우상을 섬기니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다.


요엘서는 사람들의 이런 생각이 대중적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한다. 메뚜기 떼로 인하여 제사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앞서 설명한 사람들의 가치관과 신앙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님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육신의 정욕인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얻으려고 하나님께 자기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일부를 드리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장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요엘은 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밀이 없어서 제사가 없다고 했다. 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밀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포도와 포도주는 말할 것도 없고, 기름은 그리스도의 직임을, 빵은 예수님의 육신, 곧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서 받는 구원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회복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포도주와 기름이 없는 것이 재앙이고, 하나님께서 그 재앙에서 회복시키신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은 포도주와 기름과 밀이 회복시키신다는 것이고, 그 회복이 구원이라는 명백한 선언이다.


요엘서가, 그리고 성경의 모두가 말씀하고 있는 구원은 분명한 증거가 있다. 포도주와 기름, 곧 그리스도가 넘쳐나야 한다는 분명한 증거, 기준이 있다. 이것을 감추고 성경의 구원을 논하고 전하면 다 거짓이고 거짓 선지자다. 구원 전했고, 구원 받았다고 보증하고 증거하려면 복음을 받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넘쳐 나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의는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이 아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라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 것이다. 육신의 평안이 하나님의 의로움이고 구원의 증거라면 예수님은 왜 고통을 당하셨고, 인생은 왜 늙고 힘 없이 병들어 죽게 만드셨겠는가?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이 구원 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아니라는 뜻이다. 


때로 구원 받은 사람이 세상에서 형통함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신 세상을 하나님의 의와 법으로 살기 때문에 종속되는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모두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으로 일관된 결과에 수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라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떻게 볼 것이며, 그 예수를 전하다 순교한 사도들은 또 어떻게 볼 것인지 해답이 없어진다.


다시 구원의 증거로 돌아와서 이야기 해보면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대화를 빼 놓을 수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이 대화 속에서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안다면 자기 속에서 예수님이 전해주신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이 영생하도록 솟아날 것이라는 것이다. 즉 구원을 받았다면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하나님 말씀이 영원히 샘솟듯 넘쳐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심령을 채운다는 것이고, 그것이 온전하다면 자기 속 심령에서 하나님의 의가 넘쳐날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니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넘쳐나는 것이 곧 구원의 증거라는 뜻이다.


이것을 요엘서에서 인용한 제사로 이야기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한다는 것이니 자기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에 자신을 내어 놓는다는 제물이 된다는 것이고, 그렇게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듯, 그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넘쳐 나와 자기 삶을 이끄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사의 회복이고, 단 포도주가 산에서 떨어지고 작은 산이 젖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 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솔짜기에 대리라(욜 3:18)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면,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인 죄인이 되어 지신 십자가로 인한 새생명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었다면 수가성 여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쳐날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증거다. 그것이 없다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선언이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의로 본 성경이 아니라, 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서, 세상의 가치와 바울이 말한 세상의 초등학문에 의지하여 바라본 성경에 대한 말들을 설교라고 하는 것은 구원 받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구원 받은 사람의 삶, 그리고 그들이 모인 교회는 요엘의 말씀과 같이 포도주와 같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늘 자기 안에서 솟아나와 넘쳐나고, 유다의 모든 시내, 곧 신앙 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들이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을 흘릴 것이고,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몸과 또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생수가 넘쳐나는 삶이다. 그게 아니라면 단언코 구원 받은 삶이 아니다. 성경이 그렇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요엘 3:18-21) 하나님이 주시는 복, 구원(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8. 9. 15:12 Writer : 김홍덕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가?


요엘은 메뚜기 떼의 재앙이라는 특이한 모티브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에 반하는 것에 대한 심판과 회복 그리고 축복에 관한 하나님의 생각을 전하시는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라는 말씀과 “성령이 오시면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요 …”라는 유명한 말씀도 있다. 그리고 끝으로 회복된 사람에게는 포도주와 샘이 넘쳐날 것이라는 축복의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 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욜 3:18)


결국 성경의 전체적인 주제인 구원이 요엘서의 주제다. 아주 짧지만 구원의 조건과 과정, 그리고 구원 받은 모습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아무리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도 이 요엘서에 나오는 말씀이 자기 안에 없다면, 그 경험과 증거가 자기 안에 없다면 구원은 없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먼저 벗어나야 하는 자리, 곧 죽을 자리라고 칭하는 어떤 자리에서 도움을 받아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을 논함에 있어 가장 먼저 정의되어야 하는 것은 어디서 구원을 받았는지가 정의되어야 한다. 즉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려면 구원 받기 전의 자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라는 것이 고백되어야 한다.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그 자리를 이방의 압제, 세상에 구속되어 종과 같은 삶을 사는 삶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그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애굽에서의 종살이, 이방 민족의 침략으로 인한 괴로운 삶으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한 의미를 그런 사건으로 알게 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요엘은 그 자리를 메뚜기 떼가 덮친 자리, 메뚜기 떼로 인하여 제사가 끊어진 자리가 바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리, 곧 사망의 자리라고 말씀하면서 구원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서는 요엘서에서 말씀하시는 메뚜기 떼의 재앙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 Conventional Wisdom(대중들이 상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오늘날 신앙에 있어서 Conventional Wisdom은 하나님을 믿어서 육신으로 살아갈 동안 육신이 평안을 얻고, 살면서 추구한 일이 성공을 거두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여기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말로는 세상의 귀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교회를 화려하게 건축하고서 그 화려함을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받으신다고 말하고, 어려운 시험을 합격하는 것을 또한 하나님께 영광이라 하며, 세상의 일을 도모함에 있어 하나님께 기도하고서 해야 하나님께서 돌보신다고 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오늘날 신앙적 Conventional Wisdom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신앙적 Conventional Wisdom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절대적인 이방 가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형식과 외식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는 세상에서 가져왔다. 교회를 비싼 자재로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나, 세상의 높은 자리, 평안한 자리에 올라 교회를 다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 안에 있는 가치 기준은 전적으로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기준에서 온 것이다. 성경은 사람들의 이런 믿음을 간음한 것이라고 늘 말씀하신다. 요엘서에서는 이런 신앙적 Conventional Wisdom을 메뚜기 떼라고 말씀하신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은, 또 하나님은 그런 신앙에 대하여 지극히 회의적이다. 요엘서에서 재앙은 메뚜기 떼로 인하여 발생했고, 그로 인하여 제사에 소요되는 밀과 포도주와 기름이 메말랐는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대상은 메뚜기가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나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대중적인 신앙을 하나님께서는 이방으로 여기시고 진멸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한 개인의 신앙에서 본다면 대중적인 신앙이 자신에게 재앙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할 때 여호와의 날이 임하고, 여호와의 날이 임하여야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순서를 요엘서는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몸담고 있고 의지하고 있는 대중적인 신앙,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 얻고자 하는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의미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거룩한 예배에 걸맞는 것은 좋은 자재로 지은 교회당과 비싼 음향 시스템 그리고 실력과 업적(공로)이 뛰어난 설교자와 찬양단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최소한 세리와 창녀들과 먹고 마시는 천한 동네 나사렛은 아니었다.


그런 유대인들의 가치관은 예수님을 절대로 하나님 아들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 가치관과 오늘날 사람들이 가진 신앙적 Conventional Wisdom은 동일한 것이다. 즉 화려한 성전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여기고, 육신이 평안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복과 영광으로 여기는 그 가치관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가치관이고 의(義)며 선이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메뚜기 재앙을 이방으로 간주하고 심판하신 이유가 있다. 이것을 알아야 요엘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구원, 그러나 어디서,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지도 못하고 뇌까리고 있는 구원 받아야 하는 이유와 자리와 모습이다. 


(요엘 3:18-21) 하나님이 주시는 복, 구원(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8. 7. 11:12 Writer : 김홍덕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성경은 구원에 관한 말씀이다. 그 구원은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설명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을 사람에게 주셨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라는 말씀이다. 이를 위하여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오셔서 극악한 형벌을 받으시면서까지 보이셨다. 그게 성경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능력이고 은혜다. 그리고 그 능력과 은혜는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증거가 분명하게 있다는 것은 그 증거가 없다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 증거를 수 없이 많이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그 증거가 자신에게 없는데, 단지 성경이 구원을 말씀하고 있고, 그 구원과 구원의 주권자인 하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고 착각이다. 많이 설명했지만 그것은 큰 죄일 뿐 아니라 회복하기도 힘들다. 구원을 받은 증거도 없이 스스로 혹은 대중성에 의탁하여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구원을 받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엘서의 말씀 안에서도 구원 받은 증거는 많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라는 2장 32절의 말씀도 증거를 받은 자의 외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32절 앞, 31절에서만 봐도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한 후에 여호와의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을 본 사람이라는 말이다. 자기가 옳다는 밝음, 밝을 때나 캄캄한 밤과 같은 세월을 비치는 자기 만의 빛이 어두워지는 세월을 보지 않았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씀이다.


구원의 증거에 대한 말씀은 이 짧은 요엘서에서만 봐도 하나 둘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물리적인 세상, 그리고 울이 자아 밖의 객관적 현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나의 구원, 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해가 어두워지듯 자기 밝음이 어두워지는 경험과 세월을 겪어야 구원이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해가 어두워지기 전에 여호와의 신이 임하는 경험이 있어야 하고, 그에 앞서서 자신의 마당, 곧 자기 삶의 터전에 포도주와 기름이 넘쳐야 한다.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그 직임이 넘쳐야 한다는 것이니 온전한 제사, 곧 자기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 자기 안에서 이방인의 가치와 생각과 의로움이 여호와의 적이 궤멸 당하듯이 쫓겨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서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여 그것을 의로 여긴 자기 신앙이 재앙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마음을 찢고 여호와 곧 존재의 신앙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들이 하나씩 자기 안에 일어나서 고백할 수 있는 체휼함이 있는 사람이어야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여호와의 신이 자기 심령에 있어야 여호와 하나님을 불러 구원에 이른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호칭으로 부른다는 의미나, 구원의 주권을 가진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나, 구원을 얻기 위하여 불러야 하는 이름이기에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깨닫고 믿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존재의 신으로 믿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고,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며 구원이고 영생이라고 믿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은 눈에 보이는 외식이며 그것을 믿는 사람은 나타난 것을 본질로 인식하고 믿는 사람이기에 그 신앙이 외식이고 행위를 의롭게 여긴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얻기 위하여 교회에 열심히 가고(Do), 헌금하는(Have) 행위로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런 신앙은 예수님께서 ‘장사하는 것’, ‘회칠한 무덤과 같은 믿음’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하여 믿는 신이 설사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메뚜기 떼와 같은 존재들이다. 재앙 그 자체다. 물론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육신의 일을 구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하나님, 곧 우상을 섬기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요엘서는 작은 성경이지만 그 속에 있는 구원의 조건은 아주 엄격하다. 이것은 구원이 어렵다는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 것은 아니다. 자녀들에게 우리는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가고 잘 산다”라고 이 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면 그 이후에 제시된 것은 분명히 쉽다.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 가는 것, 쉽다. 좋은 직장과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 역시 쉽다. 그러나 문제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어렵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죄를 자백한 사람에게 구원은 아주 쉽다는 말씀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듣고자 하시는 자백은 ‘오늘 누구에게 화를 내었다’는 자백이 아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듣고자 하신다면 성전에서 남의 물건을 뒤엎고 화를 내신 예수님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이 듣고자 하시는 자백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과 같이 육신의 일을 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라는 자백과 시인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백한다는 것은 바로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던 나의 모든 날이 재앙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 고백만 있다면 그때부터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주 쉽다. 사람은 구원 받은 존재로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존재가 그 존재 목적대로 사는 것이 가장 쉬운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로 인하여 두려운 느낌을 지우기 힘들지만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구원을 받은 사람 안에 이방의 가치관이 있다는 것은 용납하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사사기와 역사서에서 보듯이 이방인의 가치관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곤고하게 하므로 이것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구원과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심판은 구원 받은 자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전의 가치관이 유익한 것으로 생각조차 되지 않는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않는, 아니 진노하시는 이방인과 같은 가치관과 안목은 완전히 처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차든지 덥든지 해야 하듯, 그 생명이 온전히 하나님의 의로 사는 생명이든지 아니면 세상의 가치로 사는 생명이든지로 구분될 뿐이다. 그게 생명의 법이다. 반만 생명인 것은 없다.


따라서 구원과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심판을 받아 소멸된다는 것은 이제 완전히 죄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이방인이, 이방의 가치가, 세상의 가치로 좋은 것을 좋다고 여기는 가치관과 안목이 심판을 받아 진멸되었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을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행여 누군가가 “넌 죄가 없느냐?” 물으면 답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털어서 나는 먼지’와 다르다는 것을 알지도 또 행여 어디서 좀 듣거나 읽었다고 해도 자신의 것으로 확신하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삶에 대한 개념에서 심화된다. 인생이라는 것을 고난으로 여기는 것에서 시작해서, 사는 동안 자기 행위로 인하여 행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판하고 벌을 주시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인생을 살다가 천국은 그런 것이 없는 곳이라 기대하고 죽음을 평안으로 위안 삼기도 하는 삶의 개념이 심화의 증거다. 삶을 곤고한 것으로 여기고 천국에 가는 것을 구원으로 여긴다는 것은 삶은 곧 벌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고통은 심판 받고 벌을 받음으로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이 보시고 심판하실까 전전긍긍하면서 어떻게든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신앙생활을 채찍질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 공로, 성경을 지켜 행하는 공로를 하나님께 주고(드리고) 자신은 심판을 받지 않고 육신이 평안하고 세상이 좋다고 하는 성공과 바꾸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생각은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좋다고 생각하신다고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설계한 우상을 섬기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세상의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 가장 밑바닥이고 저주의 자리인 십자가에 보냈을까? 하는 간단한 물음만 생각해봐도 절대로 접근하지 못할 생각이 오늘날 거룩한 신앙이 되어 있다.


종합적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가진 신앙은 인생을 곤고한 것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심판을 받고 있는, 심판이 끝나지 않은 신앙이고,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을 심판을 받을까 걱정하고 있다는 것에서 봐도 심판이 종결되지 않은 삶이다. 심판이 끝나지 않았다면 당연히 구원도 없다. 이 요엘서에서도 심판은 구원 다음의 이야기로 전개되어 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정말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면 구원 받은 삶에는 이방인의 가치관이 없으니 당연히 심판도 없어야 한다. 하나님께 행여 어떤 일로 심판을 받을까? 그래서 벌을 받을까? 염려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 구원의 삶이다. 그래야 비로소 심판이 끝난 삶이고 심판 이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심판과 축복은 공존하지 않는다. 


심판이 끝나고 구원을 받은 사람의 삶 안에는 이방인이 통행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면 행위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가치관을 심판하시지 아들의 삶의 요소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다. 아들은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 심판의 반대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삶이 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구원 받은 아들의 삶에는 이방인이 다니지 않는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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