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 108

(베드로전서 5:12-14) 끝 인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6. 23. 13:37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이 흔히 베드로전서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향한 위로라고 말합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것은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아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난은 사뭇 다릅니다. 먼저 사람들은 인생을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대로, 마치 자신이 이 인생을 설계한 것인 양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생은 자신이 설계한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만히 있는 것도 자기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겪는 모든 갈등을 고난이라고 하고, 그래서 <인생은 고(苦)>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앞서 아주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는다는 것은 인생이 자기의 기획으로 시작된 것이 아님을 알고 뜻하시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겠다는 것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 고난입니다. 이것이 고난인 이유는 앞서 너무 많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다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성경은 단 한 가지 맥락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한 가지는 육신을 가진 인생은 그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같이 우리 모든 인생도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인생이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살 때 구원이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무엇보다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순종하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사람들의 의지에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을 로봇이나 아바타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강제할 수 없어서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강제된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사람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선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이 선택할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본을 보이신 예수님께서 자신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표면적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빌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해 왔고,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삶을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자기 안에 있어서 자신들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종과 같이 섬기고 죄인이 되어 육신을 소비하고 드리는 삶을 사는 그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가치관에서 보면 어이없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런 삶에서 벗어나 보라고 조롱을 받는 것입니다. 모두들 성공이라는 크고 넓은 문을 향하여 달려서 피라미드의 꼭대로 가면서 그 다툼에서 이겨내는 것을 성공이며 복이며 은혜로 여기는데, 그 반대로 가는 모습이야 말로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고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의 삶이 영광과 권세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베드로 사도만의 관점이 아닙니다. 모든 사도들의 관점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생명이 큰 문을 행해 달려가는 자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다르기에 영광도 권세도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들이 세상에서의 권세를 얻어서 교회를 영화롭게 하고, 그 권세를 자랑하며 전도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채색한 일들을 잘 추진할 수 있게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 다른 생명의 세계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마지막에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신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권력이라고는 전혀 없고, 오히려 그 세상의 권력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죄인으로 처형된 분인데 이 권력이 세상의 권력일 리가 없는 것입니다.(그럼에도 이 시대의 교회들이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참 어이없는 일) 그러므로 예수님이 권력으로 또 그것이 영원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그것을 권력으로 아는 생명을 가지지 않고서는 그것을 은혜로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아무리 증거를 해도 그 증거가 자기 심령에서 생명이 되지 않았다면 이 또한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그저 자신들이 사업이나 자녀나 건강에 대하여 기도하는 입장에서 그것들이 무난히 흘러가는 것을 보거나 아니면 바람대로 될 때 그것을 은혜로 여기고 감사하는 안목으로는 세상의 기준으로 죄인이 되는 것(십자가)을 은혜로, 권력으로, 또 감사로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생을 고난 자체로 여기는 것에 출발해서 그것을 감하여 주시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안목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고난은 인생은 정말로 감사하고 또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 육신의 삶을 삶에 있어 육신을 좀 더 수고하고, 넘쳐나는 자기가 옳다는 주장들 앞에서 죄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그 애매하고 괜스런 삶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까지 많은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체계적인 준비가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지만 그 내용의 깊음을 지속적으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라 여깁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다들 고달프게 여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글을 통하여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곤고하게 여기는 것은 단지, 축구를 제 아무리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도 축구하는 동안 숨이 차는 것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인생은 정말로 감사하고 또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 육신의 삶을 삶에 있어 육신을 좀 더 수고하고, 넘쳐나는 자기가 옳다는 주장들 앞에서 죄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그 애매하고 괜스런 삶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을 자기 삶으로 여기는 모든 이들이 그 삶에 숨겨진 영광을 발견하기 바라고, 그것이 진정한 권세임을 또한 알기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입맞춤으로 문안하는, 즉 그 삶을 나누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참교회가 이 글들을 통하여 세워지기를 바라며, 저 또한 베드로 사도의 바람과 같이 이 고난을 짊어진 모든 분들에게 평강과 삶의 안식과 삶이 감사한 생활을 기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여러 각도에서 함축된 표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와 같은.(물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종교의 범주로 격하 시킬 수는 없지만.) 그 하나의 표현을 하자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육신을 가진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의 문제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진 인생이기에 이 인생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을 믿겠다는 것은 이 인생의 모든 의미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가진 육신으로 사는 인생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성경이 시작되면서부터 제기된 문제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도 이 육신으로 사는 삶이 하나님이 주신 삶이라고 인식하면서부터 자기 삶이 하나님의 세계로 열리는 것이고, 많은 이들이 각양의 의견을 내어 놓는 선악과도 이 육신을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육신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기에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세계인 사람에게 인생은 감사한 것이기에 만족의 동산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며, 육신으로 에덴동산에서 산 사람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신에 대한 관점은 예수님이 오셔서 아주 명확하게 보이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는데 천사와 같이 신비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과 같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에서부터 그 의미가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심으로써 우리의 육신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인생을 사는 이유와 의미를 보이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가 육신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이 더 평안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이를 위하여 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보존하고 평안해져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소비하면 할수록 복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 육신은 명확하게 <소비재>입니다. 단 한 번 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이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죽어서 천국’이라는 연장선을 그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장선입니다. 즉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산 삶의 모습과 의미 그대로 죽어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곤고한 중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평안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고난이라 여기기에 죽어서도 곤고한 삶이 될 것이고, 이 땅에서의 삶이 육신이 소비되고 연약해질수록 영광스럽고 감사하게 여기며 산 사람은 역시 고난이 없는 천국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소비재라면 그것은 어떤 목적 하에서 소비되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의 구분이 생기는 것입니다.(그래서 굽이 갈라진 짐승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소비되는 것임에 순종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육신이 평안해질수록 하나님께서 혹은 자기가 믿는 신이 복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나, 육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육신을 소비(정확히는 허비)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1서)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육신이 기준이 되어 육신을 허비하는 것을 이야기하심입니다. 육신이 평안을 바라니 내일 육신이 평안해지기 위하여 오늘 수고하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수고하니 이 인생이 곤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일의 평안을 위하여 아니면 내일 벌을 받지 않기 위하여 오늘 육신의 본능을 제어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것이 이 세계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지키는 모든 것이 바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고 율법신앙인 것입니다. 바로 흔히들 이야기하는 구약시대의 신앙인 것입니다. 지키려는 말씀이 신약이냐 구약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이 구약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시고, 내일 일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으로 살아가는 이 삶이 하나님의 의도 아래서 창조된 것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이 삶이 깃든 육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육신을 소비재로 여기자니 인생을 하찮게 보는 것 같지만 그 소비가 전능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소비라면 그 보다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고귀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어느 날 자기 삶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날이 바로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는 날이 되는 것이고,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의, 우리 육신을 소비하는 목적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가진 인생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더 이상 의로울 수 없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인생들이 각자 육신의 정욕을 좇아 자기 옳은 대로 판단하고 행하는 선악과를 먹고서 자기가 조성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주신 자기 삶에 대하여 하나님과 같이 주관하며 사는 자들의 주장에 끌려가서 그들의 주장대로 육신을 드리는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이자 목적이자 의미인 것이며, 소비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 삶은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기에 육신의 수고를 곤고함과 고난으로 여기는 인생들의 관점에서 보면 고난인데, 그 고난을 받을 이유를 살피자면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매 맞는 것 같으니 애매한 고난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애매한 고난을 베드로가 볼 때 그러지 않아도, 아니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은 예수님의 끌려가심과 같아서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었기에 그 생명의 본성에 이끌려서 사는 모습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양을 치는 것을 본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길거리에서 예수 믿으라고 외치다 받는 조롱이나, 지친 몸을 이끌고 안 가면 벌을 받을 것 같아서, 아들 사업이 안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새벽 기도회를 가는 곤고함이나, 주일 지킨답시고 회사 동료들 일할 때 교회에 가므로 당하는 불이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소비하는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수고하는 것에 소비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곤고한 것이기에 고난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도들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육신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진정한 영광이고, 감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인생은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그 자체로서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것인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인 것입니다.


최근 개봉했던 <어밴저스 인피니트 워>라는 영화에는 타노스라는 악당이 나오는데, 그 악당의 주장은 온 우주에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문제가 심각하니 무작위로 우주 인구의 반을 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만 튕겨도 우주의 반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려고 6개의 인피니트 스톤이라는 것을 모으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정말로 어이없는 모순이 있습니다. 우주의 반을 손가락만 튕겨서 죽일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능력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잠깐 서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이없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대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도 이런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며 실수도 않으시는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바로 잡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해프닝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고난에도 동일하게 녹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마지막 부분인 10절에서 고난을 잠깐 받으면(견디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고 견고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고난에 대하여 이 세상 살 동안 고난을 잘 견디면 하나님께서 그 보상으로 천국의 복락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 상식적인 개념이 되어서 누구 하나 그것을 의심해 보지 않지만, 이것은 앞서 이야기 한 역설적인 면과 궤를 같이 합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그 육신에 각종 욕망을 주시고, 또 자기 생각을 다 구현할 수 없는 연약한 육신을 주신 다음에 그 욕망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또 연약한 육신을 어떻게 강하게 단련하고 수련을 하는지를 평가하신 다음에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이 땅에서도 주시고 더 나아가서 죽은 다음에 그 수고의 등급을 기준으로 크게는 고래 등과 같은 기와집을 상급으로 주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힘든 과정을 겪을 때에 하나님께 얼마나 의지하는지를 보시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지에 스스로 자긍심을 느끼시는 하나님으로 여깁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면 도와주신다는 것을 앞서 이야기한 욕망의 억제와 연약함의 극복을 도우시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타로스의 모순과 같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을 다스려야 온전해지고, 연약함을 기도와 수련으로 더 강해지고 온전해지며, 성경도 지식적으로 공부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은 처음 만들 때 불량품이거나 완성되지 않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재공품 상태로 태어나게 해서 살면서 완성품이 되어야 온전해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며, 사람을 만들고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 뭐가 좋았는지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고를 정말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본다면 하나님은 쥐를 잡아 놓고 죽이지 않고 가지고 놀고 있는 고양이와 같은 분일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라는 것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극복하기 힘든 인생살이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는지를 보시고 그 이겨내는 행위와 공로를 기준으로 그 인생의 믿음을 평가하시고 또 죽어서까지 상과 벌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겪는 삶을 잠깐의 고난으로 보고서 이생에서의 고난을 잘 이기면 하나님께서 영원히 영광된 삶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을 넘어 정말로 하나님을 알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인지 놀랄 정도의 어두운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가치관은 결국 <행위로 의로워지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또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런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각종 시험을 주신다거나, 인생으로서 성경대로 삶을 살기에 힘든 조건들, 육신 안에 있는 욕망이나 연약함과 같은 조건들로 인하여 곤고한 삶을 살게 하고 그것을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극복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이겨내고 영광을 얻으려면 행위의 공로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고난을 이겨내서 얻는 것이 육신의 평안이나 세상에서의 성취라면 그것은 고난을 이겨내는 것은 투자일 뿐 믿음은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하여 성경이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나 금욕적인 수련이나 또 손해를 억지로 감수하거나 신념으로 견디는 행위로 이겨내거나 맞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몸을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욕망을 극복하고 자기 이익을 구하는 유혹을 이겨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인생의 정체성을 아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수고하고 섬기는 것을 위하여 주심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 순종은 세상이 추구하는 위로 올라가셔 의로운 것과 반대이며, 몸이 평안할수록 복을 받았다는 가치관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고, 또 고난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아니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일(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회사의 동료들이 일하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느라 받게 되는 불이익이나 비난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과는 다른 삶이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을 자기의 의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그 삶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다른 삶을 사는 이유가 성경을 지키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인함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큰 차이는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 큰 교회(덩치가 큰 것이 아니라 큰 것이 좋고 영광이라 여기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성경을 지키지 않고 게으르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억제하거나, 아니면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선택>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므로 그런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은 늘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늘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 성공률 100%가 아닙니다. 또한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틀린 것이 되기도 하고, 어떤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는 악한 일이 되기도 하는 등 온전하지 않습니다. 이런 구멍이 숭숭 뚫린 신학적 관점이다 보니 ‘사람은 연약해서…’라는 절대적인 면피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동시에 그 조건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수고하게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학문이 되고, 또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선 글들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고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울역 광장에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다 듣게 되는 비난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이 옳다고 여기는 높이 올라가고, 많이 가지게 되는 것과 반대로 낮아지고, 섬기는 자리로 가며, 세상의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주장(하나님을 주장하는 것 역시 같은 것)하나 오히려 자가가 가진 그 옳은 의가 옳지 않은 세상의 의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인 것입니다.


또한 성경이 말씀하시는, 지금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고난은 억지로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본성에 의한 것입니다. 즉 어떤 선택을 앞에 두고서 성경이 말씀한 대로 선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심한 듯 살아도 성경을 지킬 수밖에 없는 생명의 본성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낮아지고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 본성을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인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크게 착각을 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세상에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을 옳다고 여기는 그 의는 예외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의를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것, 제사 지내지 않는 것, 밥 먹을 때 기도하는 것과 같이 기독교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에는 절대로 양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어떻게 보면 좋은 신앙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 닥칠 손해나 위험이나 벌을 감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이나 힘이나 권력 앞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는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끌려가신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신의 의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며 모든 술자리를 피하여 자기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은 십자가를 질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잡으러 온 군사들을 이길 힘이 없어서 잡혀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끌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정체성, 하나님에 대하여 누구보다 더 온전히 알고 있는 그 모든 것까지 버릴 수 있을 때, 그것을 버림으로 육신의 수고와 고난이 있음에도 본성에 이끌려서 그 자리로 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정리해보면 이 고난은 본성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각성한 상태에서 믿음이라 왜곡된 신념으로 선택한 어떤 선택으로 인한 손해나 곤고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을 좇아 살다보니 낮아지고, 하나님의 의조차 버려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내는 삶을 사는 그것이 베드로 사도가 또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인 것입니다.


이 고난은 육신으로 사는 동안 고난을 당하고 죽어서 천국에서 보상 받는 그런 시험이나 테스트가 아닙니다. 이 고난은 그 자체가 감사함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바보 같고 어리석고 괜히 힘들게 사는데 그것을 감사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 낮아지는 것을 영광으로 알 수 있는 생명의 안목이 있기에 그것을 감사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고난은 영광을 얻기 위한 시험이나 테스나 자격 검증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육신을 가진 인생의 삶 그 자체입니다. 그러면 인생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좇아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보면 고난과 같은 것입니다. 육신을 수고하고 십자가에 드리기까지 하니 분명한 고난이기는 하나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이것을 평안과 영광으로 아는 것도 그것을 평안과 영광으로 보는 안목을 가진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썩은 고기가 늑대라는 생명에게는 양식으로 보이지만 양은 피하는 것이 되는 것은 생명이 다르기 때문임과 같습니다.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음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광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을 받고 그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강함이며 영광이며 온전함인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미래가 많은 사람입니다. 많은 시간을 가졌고,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역량은 어떤 주권 아래에 있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집니다. 시간과 힘을 자기 주원 아래에 두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자기 옳을 대로 행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그 시간과 힘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두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자신들이 본 장로와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시간과 힘을 자기 주권 아래에 두면 교만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두면 겸손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자기 존재 정체성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 맡긴다는 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는 것을 잘 보면, 계획과 시작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서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기대하는 결과를 하나님께서 책임을 질 것이라고 협박하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맡긴다는 것은 인생이 그렇듯 시작에서부터 결과까지 다 맡기는 것입니다.


염려라는 것은 원래 기획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존재가 할 일 자체가 아닙니다.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것은 어떤 결과에 대한 기대가 있기에 그 기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과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염려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어떤 일에 자기가 옳을 대로 계획을 세웠거나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염려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하다는 것은 곧 염려가 없는 상태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기획도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 길을 계획해도 그 일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심이 그것입니다. 형식이라는 것은 내용이나 의가 가진 범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순종만하면 되는 존재가 염려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 안에 염려가 있다면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옳다고 여기는 바가 있어 그것이 이루어질지 아닐지 걱정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라고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염려는 하나님의 의에서 비롯된 염려입니다. 그것은 겸손한 자, 곧 내용이신 하나님과 형식인 육신의 삶이 하나가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으로 표현하는 것에 관한 것이지, 자신이 세운 계획을 하나님께서 맡아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 주실 것임을 믿는 것이 맡기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러한 권면을 젊은 이들에게 하고 있는 것은 젊은 이들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시간과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확실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라는 것도 자기가 주권을 가지고 있을 때는 불확실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뜻에 순종하는 것이 본성이 된 사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불확실한 것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무엇이라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데 불확실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인생의 걱정과 근심도 같은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근신이라는 것은 자기 뜻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도 어떤 것에 대비하고 반응하기 위한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덫을 놓듯 우리 인생을 시험하시는 것이나, 마귀가 유혹하는 것에 대한 대비가 아닙니다. 어차피 그런 것을 이기는 것도 하나님의 힘이 있어야지 사람이 깨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행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마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우리의 의와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스스로 옳다고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근신할 이유도 깨어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계획이 우리 안에 있는데 깨어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근신해야 하는 이유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일을 계획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것은 뜻을 세우신 이에게 순종하기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한 육신의 정욕을 생각해보면 사람이 자기 육신의 평안을 바라고 추구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 가운데 있다면 깨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깨지 않는 것이 육신이 더 평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다가올 영광을 위하여 지금 육신을 수고하는 것이라고도 하나, 그것도 목표는 장래의 육신의 평안이 목적이지, 육신을 소비하여 애매히 고난을 받기 위함은 아닌 것입니다.


이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뜻에 순종함이요, 그 순종함은 고난을 받는 것이며, 그 고난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삶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가 지고 갈 우리의 십자가요, 그 십자가는 우리 육신이니,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수고하는 형식과 소비재와 도구로서 창조의 목적을 좋아 예수님과 같이 낮아져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인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이고, 순종이며, 근신하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