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유다서' + 20

(유다서 1:24-25) 마지막 인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유다서 Date : 2017. 12. 17. 07:56 Writer : 김홍덕

대부분의 서신서와 같이 유다서도 마지막에 해당 서신서의 수신자들에 대한 축복을 비는 것으로 마칩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유 1:24-25)


이러한 축복의 말씀을 대할 때면 ‘이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마지막에 듣는 축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 축도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떠나서 어쨌든 그 예배 속의 축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니 그 하나님의 축복을 매주 듣는데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참 무감각한 것입니다. 문둥병에 걸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다 사도의 축복을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가 정말 삶에 있어 거침이 없는지, 흠 없는 즐거움이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다 사도가 유다서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자신에게 다 이루어졌는지를 가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신의 마지막에 이렇게 빌었다는 것은 유다 사도가 권면하고 경계한 말씀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이렇게 될 것이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 축복은 일반으로 얻은 믿음을 지키고 싸우는 이들, 그래서 영생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유다서에서 경계하는 사람들, 다른 색을 좇고, 성령이 없는 이들에게 거침이 없고 흠 없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흠이 없는 즐거움은 항상 기뻐하는 것과 일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즐거워하는데 흠이 없다는 것은 즐거워하지 않는 순간이나 요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 존재 자체가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존재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삶의 행위와 마음과 생각이 즐거운 것이라면 모든 순간의 생각과 행동이 즐거워야 하는 것이 될 것인데 그러면 장례식장에서도 웃기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즐거움에 흠이 없다는 것은 삶 자체가 즐거운 존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즐거움이 없는 사람들은 거침없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라는데 행여 자신의 어떤 행동으로 인하여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나 신이 노하여 벌을 주어 원치 않는 불행을 겪을까 노심초사하는 사람에게 삶이 거침없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자기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벌을 받을 만한 행동이 아닐까 조심하면서 사는데 거침없는 삶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렇게 조심하는 것을 깨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정체성이 발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살아 있는 것을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동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여 자신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이 깨어지는 것을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자기 행동을 조심하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것으로 보시지 않는 행위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즉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유다서를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의 말씀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유다서를 읽으면서 자신은 당연하게 영지주의자가 아니라고 여기면서 읽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경계하는 바 사람이 그 행위로 하나님께 의로워지려고 성경을 육신으로 지키는 노력의 공로를 드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영지주의와 뿌리가 같은 자입니다.


행위로 의로워지려 한다는 것,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는 것이 믿음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고 여기는 것, 그렇게 해야 자기 육신의 삶이 평안할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은 그 바라는 것이 육신의 평안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도 있지만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이 필요하다고 여기며 늘 그것을 쌓고 채우려고 하는 것은 온전하지 않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온전하고 자기 믿음대로 된다는 것을 안다면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이 딱 맞는 국이나 찌게에 간장이나 소금을 더 넣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렇듯 뭔가 아직 부족하다고 여겨 오늘도 내일도 육신으로 그것을 매우려고 한다는 것은 이 육신을 가진 삶을 부족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수고를 자꾸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듭난 생명이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도 그리 살 수밖에 없는 것을 기록해 두었건만 사람들은 거듭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 자기 육신으로 그것을 지켜서 의로워지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육신가진 삶을 부정하고 부족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육신을, 또한 육신 가진 삶을 부족하고 부정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율법이나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려 하거나 아니면 아예 믿음은 마음만 있으면 된다며 육신은 방치하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순간 그것이 혼합되기도 합니다. 어차피 육신을 부정하고 부족한 것으로 보는 뿌리는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지주의나 율법주의나 다 같은 뿌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경을 몸으로 지켜서 의롭게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유다서를 보면서 ‘이건 옛날 영지주의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히 건방지고 교만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령이 없는 사람들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유다서를 보면서 옛날 영지주의자들을 경계한 말씀으로 읽는 사람들은 성경이 오늘 자신의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 오늘 자신에게 하는 말씀 아닌 것을 괜히 읽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단지 사람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듭난 생명으로 산다면 이 육신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존재가 그리스도이므로 항상 하나님의 아들이고 항상 그리스도이며 항상 즐거운 사람이고 언제나 성경이 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자신을 영지주의자와 같은 자리에 두고 이 말씀 앞에서 고백적인 마음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아니라면 이 말씀을 성경에 두고 읽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유다서를 마칩니다. 유다서는 설교나 강해를 많이 들을 수 없는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오늘 자신의 이야기로 잘 받지 않기 떄문입니다. 그리고 유다서에는 ‘~~하라, 그러면 복을 주실 것’이나 ‘~~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행동을 해야 행동의 주체인 육신의 삶이 평안해 질 것이라고 설교하는 교회에서는 별로 할 말씀이 없는 책입니다.


하지만 이 유다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육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을 부정하고 연약한 것으로 보고 있지 않는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과 다른 뜻을 가짐으로서 유다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다른 색을 좇는 사람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단지 사람이기만 하면 일반으로 얻을 수 있는 복음이나 믿음으로 이 믿음을 보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면, 기적을 일으킨다면 더 좋은 신앙으로 여기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일반으로 전한 범사의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다서 1:20-23) 영생을 이루는 삶의 본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유다서 Date : 2017. 12. 16. 08:09 Writer : 김홍덕

유다 사도는 서신의 끝에서 <어떤 이들>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분류하여 사람에 따라 긍휼히 여기라고도 하고, 불에서 건져내라고도 하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입어서 더러워진 옷이라도 싫어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을 분류하는 기준에 대하여는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이 서신의 전반에 흐르는 서신의 목적을 기준으로 가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긍휼이 여기고 어떤 사람을 그 입었던 옷도 싫어하는 사람으로 여겨야 할까요? 여기서 특별히 궁금해지는 것은 그 입었던 옷까지도 싫어하라고 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의 문제일 것입니다. 유다 사도는 특별히 그 사람들에 대하여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옷은 단순하게 의복이 아닙니다. 이는 그 사람의 지위, 신분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받으실 때에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고 왕을 상징하는 홍포를 입힌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육체로 더럽혔다는 것은 오염시켰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성경 속에 있는 말씀입니다. 즉 더러움과 죄와 악은 모두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와 악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으로 더럽혔다는 것은 육신을 그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은 모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이 가진 존재의 목적이 있는데 그에 합당하지 않은 삶으로, 그에 합당하지 않게 육신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육체로 더럽혔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육신으로 더럽힌 옷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을 알지 못한 체 이루어 낸 옷으로 표현되는 자기 신분과 같은 정체성은 다 싫어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과 의미도 모른 체 세상에서 성공한 모든 성공은 싫어할 만한 것이라는 것이고, 그런 성공을 바라볼 때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인 것을 알고 두려워하되 그런 성공에 도취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 사도의 권면은 앞서 이야기한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의 긍휼을 기다리는 일>의 실체적인 내용입니다. 영생을 이루는 것이 의심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불에서 구원하고, 육신의 목적을 알지 못함에도 이루어 낸 지위와 성공을 두려워하되 그런 사람들을 볼 때는 또 긍휼하게 여기는 이런 모든 삶의 모습들이 바로 영생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황금률 그대로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이나 세상 속에서 사람들을 볼 때 교만하고 의심 많은 사람들과 같은 이들을 싫어합니다. 심지어 신앙 안에서는 자신이 만든 사람도 아닌데 자신이 심판해서 ‘저런 꼴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삶은 영생이 없고, 성령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성령이 그 마음 안에 있으면 사람의 교만도, 분내는 것도 다 사람의 연약함을 인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의심? 그 의심 없이 신앙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걸린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세상의 성공을 빌면서 한편으로 성경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의심해보지 않는다면 신앙 안에 들어 올 수 없기도 합니다. 의심하는 것은 온전한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육신을 하나님이 주신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 섬김이 의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확신을 얻을 수 있는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불 속에서 사람을 구하려면 불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그것입니다. 육신은 바로 그런 것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삶은 그 속에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의 생명 본성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 없이 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 여정이 바로 영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그것이 푯대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삶이고, 하나님 아들의 삶인 것입니다.


(유다서 1:20-23) 영생에 이르도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유다서 Date : 2017. 12. 15. 07:14 Writer : 김홍덕

신약성경에 있는 사도들의 서신서의 내용은 거의 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대한 권면과 위로, 그리고 복음에서 벗어난 이들을 향한 책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모든 서신서에 나오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이들을 향한 권면은 하나 같습니다. ‘구원을 이루라’, ‘푯대를 향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얼핏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어가라는 권면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이 미완을 완성시키라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 신앙의 안목이 육신으로 신앙적인 공로를 쌓는 사람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을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믿는다고 말하고 그 말한 것을 육신으로 지키고 노력하는 안목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임종을 앞둔 부모님이 예수 믿는다는 말 한 마디 하는 것을 그렇게 의미를 두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평생 하나님 믿지 않다가 죽을 때 ‘믿는다’ 말하고 죽으면 되는 것인가?’라는 말도 안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생명의 세계입니다. 어쩌면 이 생명의 세계 하나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생이 나고 자라고 살다 죽도록 하셨는지도 모른다 싶을 정도로 우리에게 이것이 생명의 법이라는 것을 설명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달리 생명, 생명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살아감이 우리 삶의 목적이고, 영생을 이루는 것이며, 푯대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정체성의 문제, 살아가는 주체의 정체성의 문제라는 것을 알 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도 알게 됩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이전에 없던 존재가 어떤 목적 아래서 존재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생물학적으로 나서 그 생물학적 육신이 삶의 본질이라고 여기면서 살던 육신에 속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육신 가진 인생의 목적을 보고서 ‘저것이 내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 목적이고 의미구나!’라고 깨닫게 될 때 미운 오리새끼로 있던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거듭나는 것과 같이 그 삶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인생의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존재로 회복된 것이 거듭남이고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을 알면 왜 구원이 거듭남이며, 회개는 무엇이며, 영생은 또 무엇인지가 분명해지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마치 여행 가방인양 늘 믿는다는 것을 상기하고 신경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일이나, 구원은 이렇게 해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나, 건강을 회복하려면 무엇을 하라는 것이나, 죄를 지었으면 주기도문을 10번 해라는 것과 같은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본성으로 있는 것을 그렇게 단속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뺏을 수 없는 것입니다. 뺏을 수 없다는 것은 순교적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릴까 신경 쓰거나 다른 노력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 뺏기지 않는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조건처럼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웃기는 일입니다.


유다 사도의 유다서, 영지주의를 경계하는 말씀의 마지막에도 이렇듯 영생을 이루어가는 것을 온전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권면하고 있다는 것은 온전한 믿음,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육신의 의미를 잘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영생을 이루어가는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육신으로 영생을 이루어 간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런 위로의 말씀의 대상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책망의 대상이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인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말씀이 우리가 아는 그 생명의 법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목적이 있어야 생명이라는 것, 그리고 생명은 수고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남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존재하게 주신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담는 그릇, 거하시는 성전으로 자신을 드림으로 생명의 본성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그 육신을 통하여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의미이고 행함의 의미며, 믿음과 구원의 본질인 것입니다.



흔히들 교회의 교리 문답을 인정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런 고백, 아니 정확히는 뇌까림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리문답은 구원의 증거이긴 하지만 구원의 법은 아닙니다.(방향이 있는 문제) 이것을 구분하는 간단한 법이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하나님께 가서 자기 육신의 안위가 곧 복이라는 기준과 척도로 삼고서 자신이 하는 일이 잘 되게 해 달라고, 자식과 건강과 취업을 기도했다면, 그런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 신앙의 결과라고 믿고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행위를 단속하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그것은 자기 하나님의 구원일지는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은 아닙니다.


우선 예수님은 세상에서 성공하신 분이 아닙니다. 반대로 분명하게 세상에서 실패하셨습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라도 말하고는 왕은 커녕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그 육신의 삶이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백성에게 주시는 축복이라고 여기는 신앙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은 항상 예수 믿지 않는데 잘 사는 사람에 대한 해석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의가 자기 안에 거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이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일이 이해가 되는지 그렇지 않는 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실수 없이 온전히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이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인데, 아들이 아버지가 만든 세상을 온전하신 아버지가 다스리는데 잘 못되고 이해되지 않는데 어떻게 아들이라 할 수 있고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교리문답 같은 것은 개나 주고 오늘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보며,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놀라운 하나님의 경영을 보지 못했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겸손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법을 모르면 당연히 구원이 없는 자며, 구원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구원을 이루고 영생은 얻은 것 같은데 또 이루라고 하는 것과 구원의 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유명한 ‘푯대를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와 같은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이 왜 노력해야 하는지, 왜 구원은 단번에 얻은 영원한 것인데 바울 사도조차 잡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는지, 또 유다 사도가 ‘영생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하는지 알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학문적으로 연구합니다. 이게 사람의 학문으로 될 일일까요? 신학으로 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구원은 정체성의 회복이고 사도들이 말하고 있는 ‘푯대를 향하여’, ‘구원을 이루라’와 같은 말씀은 그 회복된 정체성으로 사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자기 정체성과 무관하게 성경에서 시인하라고 한 것, 교리문답이나 ‘예수님 믿습니다.’와 같은 말, 곧 행위로 얻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구원을 받은 삶도 늘 뭔가 행위로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시작이 행위였으니 끝까지 행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행위는 늘 연속성상에 있습니다.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렇고, 그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보지만 자신의 행위는 늘 부족하니 또 행위로 그것마저 메우려 해 보니 늘 부족함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이 부족하니 늘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겸손한 것 같은데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사람’이 잘못된 법 안에 있는 것은 모르면서 부족한 것으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람쥐 쳇바퀴 돌들 늘 노력만 하는 자신의 구원을 보면서 구원이 단 번에 드려진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뭔가를 손에 쥐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관계에서 볼 때도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는 영원히 그 부모의 아이인 것입니다. 그와 같이 거듭나는 것인 구원, 생명의 법인 구원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뜻 안에서 살아 있고 의미가 있는 존재로서 거듭나는 것이 구원이며, 그런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얻은 것(과거 완료)인 반면에 영생은 그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부모 아래서 아이가 나면 나는 순간 그 부모의 뜻과 목적과 유전성 안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 구원이고, 그 아이가 부모로부터 받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영생이라 비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법 안에서 구원과 영생을 보는 온전한 관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명의 법과 존재의 법으로 보지 않는 안목과 세계 안에서 보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었는데 또 이루어간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구원을 행위로 얻은 이들은 구원도 영생도 다 행위의 수고와 공로를 이루는 것에 있다 보니 구분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온전한 구원도 아닙니다. 아니 그냥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알이라면 또 모를까? 그것도 바알이 신이기라도 한다면 말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Jude 1: 20-23) Was not salvation an eternal one at a time?


It is often said that recognizing the catechism of the church is salvation. Such a confession, that is, to be precise, the brain is the salvation. But the catechism is proof of salvation, but it is not a law of salvation. There is a simple law that distinguishes this. First, you can see what you are praying to God. Yesterday and today I go to God and believe that the comfort of his body is the result of good faith, that if he prayed for his children, health, and employment, I am sorry if you are cracking down on the act to accomplish it, but it may be the salvation of your God, but it is not the salvation of the Lord God.


First, Jesus did not succeed in the world. On the contrary, you have clearly failed in the world. If I say, 'I am the king of the Jews,' then the success of the kings on the cross will not be a success. So the faith that believes that the success of the physical life in the world is a blessing God gives to the saved people is not saved. Such a faith does not always believe in Jesus, because it is difficult to interpret people who live well. God does not understand. The spirit and the righteousness of God is the man who dwells in him, and he is saved. How can he be saved if he does not understand the world that God manages?


So it is not the doctrine that we judge whether we are saved or not, but we can distinguish whether or not the work of God's world is understood or not. To be saved means to believe in God, to believe that God is in complete control of the world without error, and that the Spirit of God be the Son of God in Him. How can we say that we can be called sons and saved? So if you do not want to see this amazing God's management if you have not been born yet, then you should humbly wait for God's salvation.


If you do not know this law, you do not have salvation, you do not even know salvation. So it seems that the Bible is salvation and eternal life, and I can not understand what it is to be said and done, until the time of salvation, and not to take the famous 'do not regard it as a catch'. Why salvation is the best thing to do, why salvation is eternal at one glance, whether the apostles do not regard it as being caught, or whether the apostle Judas is "waiting for the mercy of God" is. And I study it academically. Is this the work of a man? Is it theology?


In conclusion, salvation is the restoration of identity, and the words of the apostles, such as 'toward the mark' and 'make salvation', live by the restored identity. This is because it does not make sense to think of it in the Bible, regardless of its own identity, as a catechism or a word like "I believe in Jesus." So it seems that the saved life is always keeping the Bible in action. Since it was an act, it is knowing by act until the end.


So, act is always in continuity. I think that I should be in front of God in my actions. By the way, I try to live with those thoughts, but my actions are always lacking. So people think that they are always trying because there are not enough people. It seems to be modest, but to ignore God. It is stigmatizing that the person who was 'very good at seeing' is not in the wrong law and is insufficient. So, squirrels do not understand that salvation is given at once, while seeing their own salvation, which is always an endeavor.


To be saved is not to hold something in your hand. To be saved and to have eternal life is that our being is restored. In our physical relationship, a child born under one parent is eternally the parent of that parent. It is eternal life that salvation which is born again, salvation of life is salvation, that being born again as living and meaningful existence in God's purpose which can be said to have lived before God.


That is why salvation is obtained (past completion) while eternal life is living by that identity. When a child is born under a parent, I am instantly saved as being born within the will, purpose, and heredity of the parents, and that life can be likened to being eternal life. This is the whole point of view of salvation and eternal life in the law of life.


However, it is difficult to understand what is said and done in the eyes and in the world that are not seen as laws of this life and laws of existence, but they are saved and have eternal life. It is difficult to distinguish those who have obtained salvation as an act, because salvation and eternal life are the fulfillment of the works of effort and merit, as mentioned earlier, but above all, it is not a perfect salvation. No, it is not just saved. It is because the god of being can not be saved by action before God. Would not Baal know? That is, if Baal is a god.


(유다서 1:17-19) 핵심은 성령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유다서 Date : 2017. 12. 7. 06:47 Writer : 김홍덕

성경은 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온 말씀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모든 말씀은 다 같은 맥락이고 같은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유다서 1:19절에서 어떤 이들(이 사람들)을 가르켜 당을 짓고, 육신에 속했고, 성령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표현을 든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이 없는 자>일 것입니다.


성령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전후에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성령은 신앙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한 성품이니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에 대하여 사람들은 아주 오해를 합니다. ‘기적=성령’이라는 프레임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 사도는 당을 짓고 육에 속한 이들이 성령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성령이 있다면 그런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을 지어 사람을 구분하여 따돌리는 것이나 육신을 삶의 본질로 보는 안목이 가진 육신의 복락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가치라는 관점을 가지지고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성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자기 의로 구분하지 않도록 하여 모든 것을 하나로 보게 하며, 삶의 본질적 가치가 육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가 교회에 다니든, 목사든, 설령 남을 위하여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다 성령이 없는 사람일 뿐, 하나님 앞에서 그런 일과 행도 자체는 일말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가치가 있으려면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서 그 의로 인하여 그런 행위를 하게 했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의의 문제라는 것이며, 또한 그렇다는 것은 우리 삶에 작은 부분, 누군가를 배려하여 문을 잡아 주는 것과 같은 것도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 행한다면 하나님의 의는 없이 자기 몸을 남을 위하여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과는 천지차이의 가치를 가졌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 장난 같이 여깁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남을 위하여 전재산을 바치거나 죽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문 잡아 주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어 그 의로 인하여 사는 삶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런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북한이 핵 미사일을 만드는 것은 대단한 기술이지만 그 기술이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대단한 것입니까? 의가 다르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단순히 기적을 일으킬 믿음이 있느냐 아니냐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란 신앙의 어떤 등급이나 수준이나 옵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지,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어떤 문제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해결하는 능력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산을 옮기는 것보다는 사람을 구분하여 당을 지을 이유가 없는 마음을 가진 것이 하나님 앞에 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엘리야가 바위를 쪼개는 바람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서를 이야기하면서 아니 성경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드린 말씀에서 이 육신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과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이야기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성령이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니 성령이 사람 안에 있다면 하나님과 안목이 같을 것이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과 세상을 보는 안목과 가치관이 같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이 없는, 곧 성령이 없기에 하나님과 의견이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죄에서부터 모든 경계의 대상들, 시기와 분쟁에서부터 육신에 속한 것, 그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나 세상의 초등학문에 의지하는 것, 율법주의의 영지주의 그리고 오늘날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나, 성경이 뭐가 부족한지 과학이나 인문학을 더해야 더 좋은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는 것과 같은 다양하고 잡다한 모든 신앙적 문제의 근본 원인은 단 하나, 바로 그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없다는 것은 신앙의 많은 옵션(사실 신앙은 하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조차 문제지만) 중의 하나가 결핍된 것이나 부족한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이 없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다니는데 아직 나는 그 정도의 성령의 능력은 없다(성령=기적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것이겠지만)고 생각하는 것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은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란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인데 성령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떤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돌이켜 생각하면, 성령이 자기 안에 있다면 영지주의나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사람을 갈라 당을 짓지 않을 것이며,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을 본질로 알아 그것을 가치롭게 하는 것을 인생의 본질로 아는 육에 속한 가치관으로 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만 있다면 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만 제대로 믿으면 굳이 몸으로 성경을 지켜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며, 잉태되었다는 것은 생명이라는 이야기니 그 생명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으면 당연히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은 행위가 아니라 의가 그 안에 있는 문제이며, 또한 그 의가 있으면 그 본성에 맞는 행위를 하게 되니 이를 기준으로 보면 행함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 곧 죽은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의 핵심은 결국 그 마음 안에 성령이 계시는가 아닌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Jude 1: 17-19) The core is the Holy Spirit


The Bible is a word from a Heavenly Father. This is the same context and the same story. In Jude 1:19, I pointed out some people (these people) to be a party, to be in the flesh, and to have no Holy Spirit. This is not to talk about different kinds of people, but to all of them. The most representative expression would be the one without the Spirit.


About the Holy Spirit, Jesus gives a very detailed account before and after John 16. In addition, the Holy Spirit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elements of faith. It is a character of God and it is a very natural story. Nevertheless, people are very misunderstood about the Holy Spirit. I can not escape the frame of 'Miracle = Holy Spirit'.


But the apostles of Judah say that they build the party, and that the flesh is not the Holy Spirit. It is paradoxical that if you have the Spirit, you do not do it. It is not the same thing as the blindness of the physical body that has the eyes to see the separation of people by separating people and seeing the flesh as the essence of life, the blessing of God, the view of value and trying to succeed in the world. If you look at it, you can see that the Holy Spirit makes man see everything as one, not to divide the world made by God into his own, and to know that the essential value of life is not in the flesh.


The Bible tells the same story as mentioned above, so a man who does not know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belongs to the flesh is a person who does not have the Holy Spirit even though he goes to church, pastor, Such things in front of God and the act itself are not worthy of a word. To be worthy is worthy only when God has righteousness in the heart of those who do it, and because of that righteousness. It is not an act but a matter of righteousness in it, and it is also a small part of our lives, such as taking care of someone and taking the door, if the righteousness of God is done by nature, It is the meaning of having the value of heaven and soul for giving to others.


People do not like this story. I think I'm a joke. We do not admit that those who do not believe in God but dedicate and die for others are worse than those who walk with God's righteousness. But here is the difference in faith in God. It is what comes to believe in God. Anyone who believes in God knows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in him and that he lives by his righteousness. Though it is a great technology for North Korea to make a nuclear missile, is it technology that is great for our country or other countries? It is just that righteousness is different.


Therefore, the question of whether God has righteousness in man or not is not the same as whether or not there is a faith to cause miracles. The Holy Spirit is not any degree, level or option of faith. The presence of the Holy Spirit means that every act of the person has become meaningful to God, not at any moment, in any situation, or in any ability to solve a problem by calling the name of God. It is more meaningful to God to have a heart that has no reason to distinguish people and to build a party, rather than to move mountains with the name of God. Otherwise, Elijah would have to be able to meet God, who appeared as a wind blowing rocks.


As I talked about Jude and I told many stories about the Bible, I have spoken so much about the view of this body that God and man are different. Here is the difference between a person with the Holy Spirit and a person who does not. The Holy Spirit is the Spirit of God. If the Holy Spirit is in man, it will be the same with God, and then it will be the same in the eyes and the values ​​that see God and the world. Then, of course, you will have the same idea as God about this body. It is a different opinion from God because man does not have the spirit of God, the Holy Spirit.


From the sins of the Bible to the objects of all bounds, from time and conflict to the flesh, to serving the pagan gods, to relying on the world's elementary sciences, to the gnosticism of the law and to the capitalism of today Is the glory of God, and the fact that the Bible lacks what is needed, and that science and the humanities have better values, and that there is only one root cause of all the diverse and miscellaneous religious problems, .


The absence of the Holy Spirit is not a problem of lack of one of the many options of faith (in fact faith is one, but even thinking it is a problem). The absence of the Holy Spirit means that we do not believe in God. So I go to church, and yet I do not have that much power of the Holy Spirit (it is based on the idea that the Holy Spirit is miraculous), but thinking that glory is God's success in the world, Life. The life of Christ is born of the Holy Spirit and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What can we do without the Holy Spirit, and what kind of existence God desires? I can not do that.


This, again, if we think of it, if the Spirit is in himself, he will not fall into gnosticism or lawfulness; he will not divide men and build a party; I will not live with the values ​​of the natural. If only the Holy Spirit exists, all this is done. In other words, if you believe only Jesus Christ, you do not have to try to keep the Bible in your body.


That is why we need only Jesus. The nature of Jesus Christ i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and conception is life, and if the nature of life is in itself, it will live according to the nature of life. Therefore, faith is not an act but a matter in which righteousness is, and if there is a righteousness, it will act according to its nature. On the basis of this, there is no life, even death. The key to all of this is that in the end it is the question of whether the Holy Spirit is in the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