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세바의 일 이후에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모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의 예언대로 전개된다. 죽을 거라는 예언대로 밧세바가 낳은 첫번째 아들은 죽었다. 그렇지만 아직 집안에 칼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과 첩들이 백주 대낮에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예언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 일은 다윗의 아들(셋째) 압살롬의 반란으로 이루어진다.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게 압살롬에게 은혜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사용되었지만 긍정적인 용도가 아니었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 압살롬처럼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자기에게는 아주 나쁜 모습으로 사용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압살롬도 그런 사람의 하나다.

 

오늘의 주인공인 압살롬은 여동생 다말을 이복형제이자 다윗의 장남인 암논이 강간하자 이복 형 암몬을 죽이고 도망갔다. 아버지 다윗은 자식들의 일을 슬퍼하면서도 압살롬을 그리워했고, 이를 안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계략을 꾸며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다윗은 2년 동안 그를 보지 않았고, 어떻게든 아버지를 보고자 한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질러 요압을 만나 아버지 다윗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여 만나게 된다. 압살롬으로서는 암논을 죽인 후 5년만의 상봉이었다.

 

그때부터 압살롬은 왕이 되기 위해 계략을 꾸민다. 가장 핵심적인 계략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는데, 그가 취한 방법과 행동이 그가 왜 자기에겐 불행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성문 앞에 서서 왕의 재판을 받으러 가는 백성들을 꼬셔서 자기가 너의 말은 맞다. 그러나 왕은 너의 문제를 해결할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방법이 없다)’며 자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퍼트린다.

 

그리고는 결국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을 일으킨 그는 심지어 궁을 떠나며 남겨 둔 아버지 첩 10명을 범하는 악행까지 저지른다. 그것도 백주 대낮에 옥상에 천막을 치고서. 그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정복자의 위용을 나타내려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다윗을 징계하시는 나쁜 수단, 자기로서는 불행한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도구로 사용되었는지, 그걸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그런 도구가 되면 안 될 테니까?

 

압살롬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누구도 그의 용모에서 흠을 찾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특히 머리결이 풍성하고 아름답고 풍성해서 년말에 그가 머리털을 깎아서 나온 무게가 200세겔, 지금으로 치면 약 2.2~2.3kg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은 기준으로 삼지 않는 외모에 특화된 사람이었다. 그는 형식에 비유되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반란을 일으키기 전 백성들이 겪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처럼 인식되기를 원했다.

 

여기서 압살롬의 자랑이었던 머리털에 대한 다윗의 견해를 볼 필요가 있다. 다윗은 자기 대적들로 인한 근심이 머리털보다 많다고 말했고, 또 자기의 죄가 머리털보다 많다고 했다. ( 40:12, 69:4) 다윗에게 머리털은 근심이자 죄였다. 그러나 압살롬에게는 자기의 자랑이고 아름다움이었다. 머리털과 관련한 계명도 있는데 바로 나실인에 관한 규례다.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은 머리를 밀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은 자기 스스로 근심을 해결하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래저래 머리털은 세상의 근심을 비유한다.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왕에게 재판을 받으러 가는 백성을 꾀어 너의 말이 옳다. 그러나 왕은 너의 문제를 해결할 사람(방법)을 세우지 않았다”(삼하 15:3)며 백성의 마음을 훔쳤다. 성경에서는 압살롬의 이런 행위를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한 것으로 정의한다. (삼하 15:6) 이런 계략을 통해 그는 자기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지만 아버지 다윗은 그렇지 않다는 걸 사람들에게 세뇌시켰다. 자기 여동생이 강간을 당하고, 강간한 형 암논을 죽이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아버지 다윗에 대한 원망이 배경인지도 모른다.

 

압살롬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자랑했다. 머리털로 대변되는 세상의 문제를 다윗은 해결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머리털과 외모를 가진 자기는 해결한다는 걸 표현했다. 그게 자기 정체성이자 가치관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압살롬의 모습과 겹치는 사람이 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저 사람은 우리 현실의 문제(로마로 부터 독립과 질병과 가난과 같은 민생의 문제)를 해결할 메시아가 아니라며 종의 값에 예수님을 팔아 버린 가룟 유다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백성을 마음을 훔치며 준비한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자 신세가 된 다윗의 모습은 정확하게 오버랩(Overlap)된다.

 

왕은 백성의 문제에 대책이 없다며 백성들 마음을 훔친 압살롬은 예수는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팔아버린 가룟 유다와 같다.

 

사람들 대부분은 육신이 겪는 어려움을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해결하는 존재가 메시아라 여긴다. 사람이 히어로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도 이런 소망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그렇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다 자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난다. 그런 신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게 단지 신앙을 버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는 건 일종의 반역이다. 흔한 말로 하나님께 개기는 것 자체가 바로 반역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다.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예사로 들으면 안 된다. 목사나 교회가 흔히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 걸 하나님의 뜻으로 주장하며 심지어 사회주의적인 생각을 신앙으로 미화하기도 하는데 그건 하나님을 위한 게 아니라 반란이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사람인 자기가 나서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문제 해결을 자랑하던 압살롬은 반란 전쟁 중에 나귀를 타고 가다 자기의 자랑이던 머리털이 상수리 나무에 걸려 매달려 오도가도 못하는 꼴이 되고 그 모습을 보고 받은 요압이 죽이지 말라는 다윗의 사전 명령에도 불구하고 창으로 찌르므로 죽게 된다. 가룟 유다 역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의로움이라는 자기 의로움 때문에 예수님을 팔고 자결한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도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의지하다가 하나님을 떠나고 사망의 길로 들어선다.

 

히브리서 기자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고 했다. 눈에 보이는 게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습인 육신의 필요인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필요하다는 건 하나님께서 충분히 아신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은 육신의 문제 해결이 마치 하나님의 본분인양 여긴다. 그런데 바로 그 가치관이 자기를 죽인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와 사망의 길로 이끈다. 압살롬과 가룟 유다는 그걸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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