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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교회에 돌을 던지는 사람들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4. 7. 22. 20:01 Writer : 김홍덕

기독교와 그 주변에는 교회를 기존 교회라고 칭하면서 교회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큰 범주에서 보면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렇다 보니 간간이 교회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 비판에 동참한다는 사실 만으로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가 비판받을 만한 상태가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문제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너무 광범위하게 횡행 되다 보니 마구잡이식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라는 기복주의적 기독교가 추구하는 신앙을 쫓다가 실패한 목사들의 비판은 비판인지 질투인지 구분하기 어렵고, 어설프게 기독교를 학습한 상태에서 상식마저 통하지 않을 논리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까지 경계선 없이 비판이 넘쳐나고 있다. 이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다 보니 유년 주일 학교와 율법적인 신앙이지만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오히려 중요하게 여겨진다. 평생을 그런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만, 그런 신앙의 여정 없이 그저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그런 자신의 모습이 정의롭다고 참칭해서도 안 된다.

 

이런 현상은 왜 하나님께서 구원의 여정을 설명하는 출애굽 여정에서 40여 년간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연단하셨는지 이유를 알 수 있게 만든다. 율법적인 신앙생활, 그러니까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는 노력으로 관철된 삶의 과정은 진정한 복음을 깨닫는데 필수 불가결하다는 걸 날이 갈수록 깨닫게 된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는 과정으로 비유해 본다면, 병아리가 안에서 부화해서 스스로 껍질을 깰때까지는 껍질이 온전해야 한다.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걸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는 율법적인 신앙생활이 달걀의 껍질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껍질을 깨야 병아리가 나온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밖에서 껍질을 깬다면 병아리가 되기 전에 죽고 말기 때문이다.

 

자기 최선을 다해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서 스스로 "이래서는 구원이 없겠구나!" 깨달아야지, 율법적인 신앙에는 구원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가 체휼한 것도 없이 그저 율법적 신앙이라는 껍질을 깨버린다면 이도 저도 아닌 신앙이 될 게 분명하다. 그저 기독교를 비판하면 자신도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내가 만난 막무가내로 껍질을 깨려는 대표적인 이론 중에는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성결한 건 아니었다는 이론이 있다. 그래서 "그럼 언제부터 성결해졌는가?"라고 반문했더니 이해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또 어떤 이들은 "아담의 육신은 원래부터 영원히 죽지 않게 창조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럴 값이면 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나? 아담과 하와만 있으면 되지?"라고 반문했더니 그 또한 이해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 외에도 성경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일반 상식으로 봐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예수님의 육신을 바라보는 모든 잘못된 생각은 영지주의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을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든다. 그러면서 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예수님과 자신이 다르다면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는 양자라 다르다고?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라는 근원적 개념도 모르는 소리다.

 

아담의 육신에 관한 오해 역시 육신에 관한 그릇된 견해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정녕 죽으리라"하신 말씀에 기인한 해석인데, 성경을 제대로 봤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바로 죽임을 당한 게 아니다. 선악과를 먹은 일로 육신의 정체성이 변경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나신 예수님을 보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라고 했다. 아담을 불사의 몸이라고 보는 것이나 예수님이 처음부터 성결한 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 동전의 앞뒷면처럼 표현이 다를 뿐 다 같은 영지주의다.

 

오랜 시간 성경을 묵상하고, 또 성경에 대해 나름 자기 생각을 가진 사람과 또 알기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게 있다. '사람들이 이 육신을 보는 관점을 넘어서기 힘들구나!'라는 것이다. 이 육신을 보는 바른 관점이 생기려면 육신으로 의로워지려고 최대한 노력해 봐야 한다.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보라는 게 아니다. 자기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한다. 그러면 껍질 안에서 밖으로 껍질을 깰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기독교에 돌을 던지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선무당이란 걸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넘기 힘든 신앙의 장벽은 육신을 보는 관점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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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사마리아인에게 안수하니 성령을 받았다고 했다. 이런 전개는 우리에게 세례와 성령강림이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당연히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게 한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건 구원의 문제이므로 생각 이상으로 신앙의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다.

 

핵심은 '성령'이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까지 갈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과정에서 보듯이 성령강림은 너무너무 중요하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예수님)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까지 말한 베드로가 성령이 오시니 오히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전하는 변화를 보면 성령강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고 성령이 오시는 게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면 신학이라는 학문의 존재 정당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성령을 받았다면 성경은 공부하지 않아도 자기의 삶, 자기의 이야기가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원론적으로 성경은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니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그들의 이야기가 바로 성경이다.

 

세례는 성령강림의 전단계이자 필수적인 단계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물에 들어가거나 안수를 받는 행위 자체를 한정하는 게 아니다. 세례가 가진 본질, "나는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라는 고백이다. 이 고백을 진심으로 한다면 그는 굳이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진정한 세례를 받은 것이다.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세례는 물(율법과 말씀) 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의 퍼포먼스지 본질은 아니다. 이걸 부인하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이다. 세례라는 행위가 있어야 온전한 구원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자기 신앙을 증명한다.

 

세례는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고백

 

그러므로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고백인 세례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절대적 조건이다. 성령으로 잉태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는 사람이다. 행위를 실천하기 위해 의지나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본성이 되어 그 본성대로 사는, 아니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자기 의지가 있다면 굳이 성령이 필요 없고, 질그릇과 같은 우리 한 개체 안에 삶을 이끄는 복수의 가치관이 있을 수 없다. 행위로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 성령은 임하시지 않는다. 설사 그가 기도하여 암을 치유한다고 해도 그건 그를 위한 성령의 강림은 아니다. 이건 분명하다.

 

우리의 신앙은 세례로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고 세례와 성령강림이 멀리 있느냐? 그것도 아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고백한 사람은 쉽게 성령을 받는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의로워질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생각은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이 된다. 사마리아인들도 마술사 시몬이 부러워할 정도로 빌립 집사의 말씀을 사모했다고 했다.

 

우리는 성경 많은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으면 만나겠다고 하신 약속을 볼 수 있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고백한 사람, 행동으로는 성경을 모두 지켜낼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한 사람, 그래서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말씀을 다 알게 된다고 하셨는데 자신은 모르기에 아직 성령이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으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 만남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어떤 기적도 일으키실 것이라 확신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건 이런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강림이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강림은 필수적이다. 자신이 성령을 받았는지는 앞서 자주 언급했듯이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는지, 자신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닌지 돌아보면 된다. 이걸 솔직하게 인정하는 게 양심이다. 양심에 화인 맞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건, 이런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로는 구원을, 성령을 받을 수 없기에 하신 말씀이다. 나에게 성령이 필요한지 정말로 깊이 생각해 볼 때다.

 

성령이 강림한다는 것, 성령을 받는다는 건 곧 그리스로라는 생명이 잉태되고 거듭나는 것이다. 그건 곧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고, 말씀이 육신이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존재가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삶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아들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렇게 꿰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 진정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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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 집사가 전한 복음을 듣고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8:12) 이런 소식은 예루살렘에 전해졌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가서 세례받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니 성령이 임하였다. 이런 능력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사마리아 성에 사는 마술사 시몬이다. 시몬도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니 성령이 임하는 걸 보고, 놀랍게도 돈을 주고 그 능력을 사려고 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크게 책망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과 함께 망할 것이라 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사해 주실지도 모르나, 시몬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였다고 책망했다. 이에 시몬은 베드로의 책망이 자신에게 임하지 말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걸 회개로 볼 것인지, 또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회개를 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마술사 시몬이 돈으로 성령의 능력을 사려했다고 해서 거저 돈에만 집중해 이 사건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돈으로 사는 사례와 같은 범주에 넣는다. 물론 그렇게 분류하고 교훈을 삼는 건 잘못된 건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돈이든 무엇이든 대가를 치르고 성령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선물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와 능력은 모두 선물인데 이를 얻기 위해 돈이든 노력이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을 악독한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일갈했다.

 

하나님의 선물을 대가를 치르고 얻으려 하는 건 악독한 마음

 

사람들은 늘 하나님께 은혜를 갚으려 한다. 헌금으로 또는 봉사나 선교로.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건 모두 선물이다. 선물은 내 공로 없이 얻는 것이다. 구원도 은혜도 능력도 사람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게 선물이 되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건 나의 공로나 노력으로 얻을 수도 없고, 대가를 치를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걸 알 때 비로소 선물이 선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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