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라는 우상 (feat. 달란트 비유)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6. 3. 9. 13:17 Writer : 김홍덕

최근 욕설을 내뱉은 목사로 인해 교계가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이보다 더 본질적인 논란은 과거 정치적 집회에서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외친 어느 목사의 발언이었다. 욕설 목사는 사임 후 폭로가 이어지며 몰락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을 협박하듯 외친 목사는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둘 다 엉망이긴 하지만 상대적 관점으로 보면 상식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앞뒤가 바뀐 상황이다.

 

하나님 까불면 죽어라는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인식이 극단적으로 증폭된 결과물이다. 비단 이 극단적인 표현을 비난하는 신앙인들 내부에도, 사실은 그와 결을 같이 하는 마음이 존재한다. 많은 신앙인이 인지하지 못할 뿐, 자기 기준대로 하나님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왜곡된 신앙관은 대개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들에 의해 형성된 경우가 많다. 이 비극적인 상태를 성경 속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태복음 25:24)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문제는 단순히 이익을 남기지 못한 게으름에 있지 않다. 그는 주인에게당신은 ~한 사람인 줄 내가 알았으므로라고 말한다. , 주인의 정체성을 자기 마음대로 정의해 버린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하므로,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있는 현실을 꼬집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대로 정의하고 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는 역설적으로성경을 어렵게 느낀다는 점에 있다. 성경은 본래 어렵거나 먼 것이 아니다. 시편과 신명기, 디모데후서 등 여러 말씀을 통해 성경은 우매한 자를 깨닫게 하고 아이들도 알 수 있으며, 심지어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는 쉬운 말씀이라고 선포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성경을 어렵게 여기고신학이라는 거창한 학문까지 만들어 연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쉽다고 하신 말씀을 인간의 관념으로 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신 30:11),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취어 우매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일을 수 있게 하라”(합 2:2),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그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예전에 보관해 둔 제품 박스를 찾을 때 그것이 흰색이라고 확신한 적이 있었다. 온 집안을 며칠간 뒤졌지만 찾지 못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박스는 검은색이었다. 늘 두던 곳에 있었음에도흰색이라는 선입견에 갇히니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실제 정체성과 상관없이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을 정의한 채 성경을 본다. 그러니 성경도, 하나님의 뜻도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냉정히 말해 신학은 이러한 그릇된 방향성이 낳은 산물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가인을 축복하시거나, 이방인과 결혼한 요셉, 혹은 이방 국가를 이용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수많은?’라는 의문을 품는다. 이런 장면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공의의 하나님혹은신실한 자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틀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그 틀과 다른 모습이 나타날 때 느끼는 당혹감을 두고 우리는 성경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의 논리대로 악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고 믿지만, 실제 성경 속 하나님은 인간의 기대와 다르게 행하실 때가 많다. 신학은 이런 대목을난해 구절로 분류하지만, 사실 이는 난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충돌일 뿐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어야 한다는 확증 편향이 성경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선한 결과만을 도출하셔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인간 중심적인 믿음으로 성경을 투사하면, 곳곳에서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이해의 영역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믿음은 인간에게 큰 곤고함을 안겨준다. 이는 마치 왼나사를 오른나사 너트에 억지로 끼우려는 것과 같다. 자기 생각으로 정의한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끌 것이라 믿고 살아가면 필연적으로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되며, 그 반복은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상에서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정의한 당연한 결과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은 브라운관 TV 8K 고화질 TV 광고를 보고품질을 평가하려는 시도와 비슷하다. 낮은 해상도의 브라운관으로는 고화질의 진면목을 결코 알 수 없다. 하나님을 형상으로 조각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순히 물리적 우상만을 뜻하지 않는다. 철학적으로, 사상적으로, 혹은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조각하는 행위 역시 우상을 조각하고 숭배하는 죄악이다. 인간이 만든 관념의 우상을 섬기고 있으니 인생이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신이 아니다. 그렇다고 변덕스러운 분도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자기 정체성과 본성에 따라 행하신다. 그분이 선하고 공의로운 이유는 인간과 약속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본성 자체가 선과 공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지, 인간의 생각에 맞추어 연기하시는 분이 아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우리는 그분의 정체성을 온전히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친히 당신의 성품을 말씀하시고 행사를 알리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종이 아닌 친구로 부르시며 모든 것을 알게 하겠다고 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그분을 이해하고, 행하시는 대로 순종하면 된다.

 

공의의 하나님이 다스리는데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한탄하는 것은, 사실 자기가 하나님을 정의한 교만이다. 실수 없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입만 열면 세상이 엉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를 넘어선 자기모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신앙은 세상을 문제투성이로 보고 개혁해야 한다는 인간적인 진보 성향과 궤를 같이할 수 없다.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인간이 다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다. 다행히 예수께서 오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생명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것처럼, 우리 역시 거듭남을 통해 그분의 본성을 공유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좌우의 틀에 가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물질로 복을 주실 수도 있고, 고난을 통해 깨우치실 수도 있으며, 심지어 세상의 것을 도구로 쓰실 수도 있다. “주가 쓰시겠다하시면 그뿐이다.

 

하나님께 돈 달라, 밥 달라며 기도하면서 하나님은 그런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은 존재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참칭한 것이자 바알을 하나님으로 회칠하여 믿는 여호와라는 우상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은 물질은 본질로 보시지 않는다면 오직 신앙의 경건만 주장하는 것 역시 하나님을 조각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의 생각이나 신앙 안에 갇히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묵상하고, 또 삶의 주변을 체휼하면서 일어나는 일들 앞에 하나님은 이런 분인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게 아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이라면 그가 하시는 일을 가만히 서서 보고, 나는 하나님이 주신 삶과 선택의 권한으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위한 선택과 삶을 이어가며, 이루어지는 일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라 그림자도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될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