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딛 2:15-3:2) 사회적 경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디도서 Date : 2026. 5. 26. 10:51 Writer : 김홍덕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기독교는 사회적 부조리에 저항하고, 세상을 바로 잡는 주체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가끔 언급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진보적 성향이나 사회주의적 가치관을 형성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신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단언컨데 그건 온전하지 않은 신앙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께서는 실수도 하지 않으시는 경영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걸 믿는 신앙이다. 그런데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아야 한다고 외치는 건 하나님 당신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야!”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다음으로 성경에는 그 어디를 눈 씻고 찾아봐도 오늘날 세속 사회가 부르짖는 '평등'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얼마 전 한 목사님과의 대화에서 "성경에 평등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질문을 던진 목사님조차 내 단호함에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사실 성경의 계시 목적을 정확히 알고 말씀의 행간을 흐르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이해하고 있다면, 굳이 자구 하나하나를 찾아보지 않아도 성경은 결코 인간적 평등을 말하거나 권면할 수 없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기계적 평등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라, 각 사람의 그릇과 사명에 따라 완벽하게 대하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계급의 철폐나 물질의 균등 배분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적 가치관은 결코 성경의 가치관이 아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을 신앙의 대적으로 간주하고 투쟁하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복종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 디도서 3 1절 외에도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부터 왔다고 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 순종하라고도 말씀하신다.

 

신앙인들이 세상의 권력자와 제도를 영적 대적인 세상의 권세로 확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하나님이 주인이신 세계라는 걸 먼저 생각해야 한다. 즉 우리가 인지하는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나 최소한 용인이라도 없다면 존재하거나 유지될 수 없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권세와 능력을 인정한다면 세상의 권세와 권세자에 대한 시각도 바뀌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이 선한 경건의 삶으로 나타난 이들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모순적인 구조와 현실마저도 하나님의 완벽한 경영 아래 놓인 세계로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온전히 이끌고 계심을 확신해야만, 비로소 세상 왕들을 향한 훼방과 다툼을 그치고 모든 사람을 향해 관용과 범사의 온유함으로 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구원을 얻은 사람이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과 사사건건 다투고,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비방하며 파괴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완전한 자기모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본성이자 생명이 되어 거듭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성도가 이러한 세상의 부조리를 무책임하게 방관하고 외면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가이사의 세계는 가이사의 법으로 들여다보아도 불합리하고 불법이 만연한 곳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법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따로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성도가 세상 한복판에서 흠 없는 경건한 삶을 살아내어, 그것을 보는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게 만들고, 그들 역시 경건한 삶으로 전염시켜 아래서부터 세상을 바꾸어 내는 성육신의 법칙이다.

 

가이사의 세계에 존재하는 불법은 투표라는 선거나 합법적인 공권력을 활용하는 가이사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 시민의 권리로 참여하면 그만이다. 괜히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하나님의 이름으로'라는 거창한 종교적 명분을 덧씌워 혁명가처럼 도전할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향해 경건을 가르치고 교훈을 주는 방법은 언제나 모범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어두움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어둠아 물러가라외치고 투쟁할 게 아니라 자신이 작은 불빛이 되는 게 가장 바른 방법이다. 예수님께서도 몸소 자기를 십자가에 드려 달리시므로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과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들이 되어야 함을 보이셨다.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경건을 교훈하는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그건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경건은 교회라는 특수한 울타리를 넘어 삶 전반에 공히 적용되는 생명의 법칙이다. 교회 안에서는 더없이 경건하고 거룩한데, 가정이나 특히 자기가 속한 사회로 나아가면 경건의 지탱력을 상실한다면 그건 결코 진짜 경건이 아니다.

 

물통에 아무리 많은 물을 부어도 작은 구멍 하나가 뚫려 있다면 물은 딱 그 구멍의 높이까지만 차오를 뿐이다. 이처럼 내 삶의 영역 중 단 한 곳, 특히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 제도를 수용하고 사람들을 대하는 영역에서 경건의 구멍이 나 있다면 나의 경건함의 총량은 딱 거기까지인 셈이다.

 

더 엄중한 문제는 이러한 영적 불일치의 상태가 사실은 거듭남 자체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을 시사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거듭난 단 하나의 본성이 장소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인격과 행동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원양어선을 탄다고 해서 갑자기 짖어대는 개로 변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듯이, 진짜 거듭난 생명을 가진 성도라면 그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본성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모순 가득한 사회에서나 언제 어디서든 한결같이 흘러나와야 한다.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고 본질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짜 생명의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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