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예배의 핵심이다.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전하는 게 설교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보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설교를 통해 깨닫고 삶을 바꿀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제는 설교가 성도들을 바꾸는 게 아니라, 성도들이 설교를 비판하는 게 다반사인 상황이 되었다. 당연히 성도들은 설교를 집중해서 듣지 않는다. 오히려 비판의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더 주목해서 듣는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000명처럼 설교를 기대하고 경청하는 사람은 있다. 그들은 좋은 설교를 갈구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주변에 좋은 설교가 흔하지는 않다. 많은 경우 인터넷 등을 통해 좋은 설교를 듣고 있다. 더 열정적인 사람은 그 설교를 직접 듣고자 행정구역을 넘어 매주 먼 길을 나서기도 한다. 원론적으로 신앙에는 이 정도의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려는 사람에게 설교는 정말로 간절하다. 신학이라는 게 예배를 형식화(형식화는 곧 우상화다) 시켜서 잡다하다고 말하고 싶은 여러 순서들로 혼탁하게 만들었지만, 예배는 말씀 선포와 선포된 은혜를 찬양하고 화답하는 게 본질이다. 좋은 설교가 있다면 사실 예배는 풍성하다. 수 억원의 파이프 오르간이나, 사례비까지 주면서 동원한 오케스트라는 오히려 예배의 본질을 흐린다. 언제나 핵심은 말씀과 화답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설교나 예배에 관한 비판적 관점은 차치하고 좋은 설교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이걸 설명하기에 좋은 우화가 있다. 바로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시합을 한 ‘해’와 ‘바람’의 내기다. ‘해’와 ‘바람’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누가 먼저 벗게 할 것인지 내기를 했다. ‘바람’은 그건 아주 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걸 날려 버리는 게 자기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쾌히 내기에 응했다.
먼저 ‘바람’이 자신 있게 나섰다. 아주 강하게 불면 나그네의 외투를 날려 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그네는 바람이 거세지자 옷깃을 더 단단히 여미고 몸을 움츠렸다. ‘바람’은 당황해서 더 세게 몰아쳤지만 그럴수록 나그네는 더 옷깃을 여미었다. ‘바람’은 실패했다. 다음으로 ‘해’가 나섰다. ‘해’는 나그네를 따뜻하게 했다. 그러자 나그네는 외투를 벗어 손에 들었다. ‘해’가 쉽게 이긴 것이다. 축복과 심판이라는 당근과 채찍으로 성도를 독려하는 바람으로 성도들이 스스로 삶을 변화시키는 감동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축복과 심판이라는 당근과 채찍으로 독려하는 것으로 스스로 행하게 하는 감동을 줄 수는 없다
사람의 행동은 마음(심령)에서 비롯된다. 물론 생물학적인 무조건 반사도 있지만 그걸 가지고 사람을 탓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성경말씀을 행동으로, 삶으로 실천하는 건 마음에서 우러나야 한다. 마음에 하고 싶은 이유가 생기면, 더 나아가 그게 본능이 되면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게 된다. 이게 바로 생명의 본성이다.
생명의 법칙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면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어야 한다. 그게 제대로 된 거듭남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산다는 건 곧 성경대로 사는 게 본성이라는 뜻이다. 이걸 부인하거나, 이상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타협하면 그건 명백히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과 거듭남은 이것이다. 따라서 설교는 사람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하고, 이렇게 거듭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보증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좋은 설교다.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고, 그 본성대로 살아가는 삶을 위로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다
우리는 많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복을 주시는지, 또 어떤 걸 경계해야 하는지를 들어 왔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늘 듣고 있는 셈이다. 다만 우리는 그 설교들이 제시한 대로 시도해봤고, 이제는 거의 경험적으로 항상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그렇게 하기 힘들다는 걸 체득한 상태다. 솔직하게 말하면 ‘해 보니까 안 되더라’고 경험이 외치고 있다. 설교자들도 이걸 모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기도(노력)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 게 이를 증명한다. 기도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건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하겠지만, 우리는 모두 그게 잘 안 되기에 힘들어 하고 있다.
당연히 많은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힘들어도 기도해야 한다고 늘 외친다. 봉사해야 한다고도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필요한 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말씀이지, 안 되는 걸 신념으로 계속 하라는 독촉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스스로 외투를 벗을 수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존재, 어떤 생명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여 줘야 심령이 거듭난다. 거듭난다는 건 행동이 바뀌는 게 아니라 생명이 바뀌는 것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성도에게 필요한 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말씀이지, 안 되는 걸 신념으로 계속하라는 독촉이 아니다
다행히도 세상에는 좋은 설교, 좋은 말씀이 있다.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전하는 말씀들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니 그 말씀은 당연히 존재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게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아직 세상이 망하지 않는 건 그 목적이 세상 어느 한 켠에서 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으로 정말로 거듭나는 사람이 있어 세상이 망하지 않는 것이다. 즉 세상에는 온전한 설교와 말씀이 분명히 존재한다.
좋은 설교는 무엇을 하라는 설교가 아니다. 복락과 심판을 당근과 채찍으로 제시하면서 우리의 행동을 독려하는 건 결코 좋은 설교가 아니다.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통곡했다. 설교를 인해 자신이 어떻게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서 비롯된 고백과 삶이 나오도록 하는 말씀이 진정 좋은 설교다. 이걸 이상으로 치부하면 안 된다. 분명한 답과 원론이 있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거나, 그렇게 해도 성도들이 듣지 않는다는 책임 전가식의 핑계는 신분에 책임을 다하지 않는 죄악이다.
듣는 사람이 스스로 감동하게 하려면 자기 안에 그 감동이 있어야 한다
이런 설교는 감동이다. 설득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이라고 했다. 감성을 자극하는 말로 설교하라는 게 아니다. 좋은 설교를 갈망하는 사람의 심령을 동하게 하는 줄탁동시의 설교여야 한다. 이런 설교는 자기 안에 그런 생명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신학과 좋은 논리로 외투를 벗길 수는 없다. 살면서 적어도 한번쯤은 목사라는 신분을 알기 전에 “너의 말을 들으니 나도 예수 믿고 싶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어야 좋은 설교를 할 수 있다.
사람이 말에 감동하는 출발은 ‘나도 그랬는데!’, ‘나도 그렇다’다. 나와 다른 사람, 나로선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내가 이를 수 없는 경지를 제시하는 말에는 누구도 감동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 듣는 사람의 심령에 동화되지 않는 말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신 걸 생각하면 이건 명확하다. 같은 마음이 아닌데, 가르치고, 책망하고, 이끌려고만 하는 말은 감동이 없다.
우리는 다가오는 주일에 또 기대를 안고 예배에 가서 설교를 경청할 것이다. 우리의 간절함 그대로 우리의 외투를 벗기는 따뜻한 감동이 기다리는 주일을 모두가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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