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가볍게 보면 욕이나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너부터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자칫 불의를 보고도 외면하라는 말씀으로 오용될 수도 있습니다. ‘건전한 비판’이라는 말이 얼마나 도덕적 실효성이 있는 지는 정의하기 어렵지만, 무조건 터부시될 개념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이 말씀은 이런 논쟁을 이끄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사람을 판단하는 자기 기준, 자기의 의로움과 사람이 가진 선과 악에 대한 자의적 판단 기준에 관한 말씀입니다.
비판이라는 것은 독립된 행위가 아닙니다. 비판을 위해서는 반드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기준이 있어야 잘못된 것, 악한 것을 정의할 수 있고, 비판의 정당성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비판의 기준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눈의 들보(기둥)>입니다. 눈은 당연히 비판을 보는 안목입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비판은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이 바로 눈 속에 있는 들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네가 비판하는 대로 너도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나 역시 비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비판은 독립적이지 않다. 반드시 비판하는 판단 기준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남이 나를 판단하는 것만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사실 사람을 가장 비판하고 죄책감을 주는 건 자아의 선악 기준입니다. 자기가 가긴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자기를 늘 심판합니다. 신앙인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회개하는 이유도 행위를 죄의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자기 행위로 인하여 늘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비판하는 기준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내가 남을 판단하는 기준은 도덕적인 관념이나 사회화 교육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남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자기 기준’이라며 독단과 고집의 세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의 의도는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의 의와 뜻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남을 비판하는 기준은 하나님과 다른 의와 뜻, 즉 사람이 스스로 만들고 정한 선악의 기준입니다. 바로 선악과를 말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기준은 바로 ‘선악과’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할 (물리적) 육신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게 목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표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대로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의 본성입니다. 내가 더 옳다고 해도 사람이 가진 선악의 기준에 육신을 내어 주는, 수고하고 심지어 목숨도 내어주는 본성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내가 맞고 상대가 그릇된 상황에서 ‘그래 네 말이 옳다’라는 건 고사하고, 상대가 분명히 옳은 말을 하고 있을 때조차 ‘그래 네가 맞다’라고 인정하기 지극히 어렵습니다. 이게 자존심의 문제 같지만 사실은 내 안에 있는 선악의 기준에 대한 숭배 때문입니다. 나의 자아는 내가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 위에 있는데, 내 기준이 아닌 것을 옳다, 선하다고 하는 건 곧 자아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라는 말 속에서 죽는 ‘나’가 바로 나의 자아, 더 깊이는 내가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후략) (갈 2:20)
우리가 너무 익히 알고 있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은 버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십자가로 가시며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와 뜻, 곧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내가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데,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가진 하나님 아들의 기준(화려하고, 괴족같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기준에 자기 육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눈의 들보를 빼고, 남을 비판하지 않는, 더 본질적으로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을 버린 참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삶을 따라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삶을 따라가려면, 온전히 그렇게 되려면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진 생명이어야 하기에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내 눈의 들보를 빼는 것
야구에 관하여 어떤 기준도 가지지 않은 나의 아내는 어떤 경우에도 야구 선수나 감독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에는 야구에 관한 선악의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야구 선수나 감독에게서 티끌만한 기준도 보이지 않습니다. 들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전문가도 아니면서 오래 야구를 봐왔다는 하나만으로 나는 야구에 관한 비판을 합니다. 야구는 분명 선수나 감독이 더 잘하는데 비판합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가 티끌만한 비판의 대상을 세상 최악의 비판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는 모든 비판은 내가 가진 선과 악에 관한 기준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에 아주 결정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사람은 피조물이므로 스스로 선과 악에 관한 기준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과 악에 관한 개념을 주신 것은 하나님 한분만이 선하다는 것과 자기가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라는 걸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직 사람만이 존재라는 걸 스스로 인식하며, 그 존재의 목적을 탐구합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가 정한 존재의 목적이라는 선함을 구하여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그 선함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비판 받지 않으려는 방어적 목적으로, 또 사회적 원만함을 위해서,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비판이라는 행위를 금하는 것으로 이 말씀을 받으면 안 됩니다. 이건 틀린 게 아니라 부족한 것이며, 방향이 어긋난 것이며, 본질을 깨닫지 못한 어두움입니다. 본질은 내 안에 있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 피조물 주제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과 세상을 맘대로 판단하는 들보를 인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조물로서 본분과 정체성을 벗어나서 스스로 정하고 가진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선과 악에 관한 스스로의 기준, 그것이 바로 선악과며, 우리 눈에 들보입니다. 우리가 빼야 하는 것, 주의하고 금해야 하는 건 남을 비판하는 생각과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는 나의 기준입니다. 이 들보를 빼라는 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게 곧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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