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6장)
여기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이유는 모든 사람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의 의미까지 살펴봤다. 이에 더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유에는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들은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은혜다.
앞서 어두움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사탄은 십자가를 지신 낮고 천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생각과 사람이라는 걸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을 인식하는 게 밝음이고,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이 말씀들은 죄 사함의 다른 표현이다.
사람은 행위로 죄를 판단하고, 하나님은 존재가 목적 안에 있느냐로 죄를 판단하신다.
사람이 생각하는 죄는 성경이 말하는 죄와 다르다. 물과 불처럼 이질적이라기보다 무엇을 죄의 본질로 보는지의 차이다. 사람은 행위를 기준으로 죄를 가늠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행위는 존재 본성의 표현이라는 걸 주목하시기에 행위 이전에 존재가 무엇이냐를 죄의 기준으로 삼는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행위를 본질로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행위는 본질인 내용의 표현이라고 보신다. 그리고 그 내용은 다름 아닌 정체성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물으시는 질문은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와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은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의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죄라고 여기시는 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벗어난 상태, 하나님이 정한 목적 아닌 걸 삶의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어원이 '자리를 벗어나다'라는 의미의 '하말티어라'라는 게 이를 증명한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을 벗어난 상태를 죄라고 여기시며, 그 죄의 상태에서는 어떤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냥 죄인일 뿐이라는 분명한 뜻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창조한 목적을 벗어난 상태 자체를 죄로 여기신다.
이 같은 목적론적 관점에서 죄의 정의는 사실 사람에게도 있다. 매장에서 목적을 가지고 구매한 물품이 목적을 벗어나면 자리를 벗어난 죄로 여긴다. 음식이 상했다는 건 신선해야 하는 자리 곧 정체성을 벗어난 것이고, 방송 신호를 보여주지 못하는 TV는 드라마를 보려는 목적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자리를 벗어난 죄의 존재다. 그런 상태에선 어떤 신기한 기능을 보여줘도 그냥 고장난 TV일 뿐이다. 그냥 죄인이란 이야기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는 거듭남, 곧 구원은 죄는 행위로 범한 죄가 아니라 목적을 떠난 존재로 있는 것일 때 유효하다. 거듭난다는 건 존재가 바뀌는, 다른 생명이 된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행위로 계명을 어기는 걸 죄의 본질로 보신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물으셨을 것이고, 사람을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의 행동을 내가 주목하겠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추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그러나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관점과 다르게 행위로 죄를 가늠하고 판단한다. 회개의 기도가 자기가 행위로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 '지은 죄'라는 말은 행위로 죄를 범했다는 뜻이다. 성경은 구원받았다는 건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심에도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죄를 회개하는 건 행함으로 지은 죄를 자기 죄로 여기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회개하는 건 행위가 죄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이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대한 대안으로 기독교인들이 선택한 건 끊임없는 성찰과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각성과 성경을 지키는 최선의 노력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만 가지를 지켰다고 해도 단 하나를 범한다면 모든 게 수포가 된다고 일갈하신다.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바라는 사람의 노력은 무쓸모임이 드러났음에도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일관하고 있는 건 아주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므로 노력할 뿐'이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우리는 죄에 대한 바른 견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아야 하므로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죄를 알고 내가 그런 죄인이었다는 걸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죄는 회개하지 않고, 사람이 가진 죄의 관점으로 자신을 송사하는 죄만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죄를 사함 받아야 하는 것
여기서 논하기도 유치한 반론이 있는데 그건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만 회복하면 도둑질을 해도 되느냐?'라는 것이다. 이 반문은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을 도둑질도 하는 존재로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사람도 죄를 범한다고 확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과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자기 행위를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다. 이런 반문이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 정도 논리도 없이 질문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 어리석음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두움이다. 어리석음과 인식의 어두움은 같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기 원하셔서 바울을 사도로 세우셨다. 자기 존재 목적을 떠나 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목적 안으로 회복시키겠다는 뜻이다. 이걸 모르면 어둠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떠나 자기가 삶의 뜻을 정해서 사는 삶은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힌 삶이다.
우리는 빠져 있는 죄는 행위로 범한 죄가 아니다. 하나님 앞, 사람의 죄는 하나님 창조한 목적을 떠나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는 상태 자체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상태다) 이 자리를 떠나 원래 정체성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회개다. 회개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걸 인식하고 자신을 조명하면 많은 게 달라진다.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가 왜 사는지를 모르고 있고, 나도 그 중에 하나라는 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다. 인정하고 믿어야 하는 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믿음의 기초 중의 기초 그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라면 나를 창조한 이유인 목적을 가졌을 게 분명하다. 이 평범한 논리만 믿어도 되는데 사람은 이 하나를 믿지 못한다.
이렇게 인생의 목적을 모른 채 살아가는 오늘의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시는 은혜를 베풀고 또 바울과 같은 사도들을 세워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나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을 알려 주셨다. 그것도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그렇게 알려 주신 인생의 목적은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인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사는 이 하나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게 바로 이걸 믿는 것이다.
하나님 정한 목적 아닌 나의 의지로 사는 사람이었다는 걸 고백하는 것이 죄 사함을 받는 고백이다.
이 믿음이 우리 죄를 사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이라는 빛이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한 나의 모든 삶이 죄인으로서의 삶이라는 게 드러낸다. 그렇게 드러난 나를 인정하는 게 죄를 시인하는 것이 죄 사함을 받는 고백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죄 사함의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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