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인생의 목적

Category : 말씀과 삶/십자가의 삶 Date : 2026. 8. 3. 16:33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신앙을 잘 연결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을 떠나 모든 사람에게 인생의 목적을 아는 것은 삶의 가장 기본적 탐구와 욕구에 해당한다. 인생의 목적이란 곧 사람의 존재 목적인데, 사람인 내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고자 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인생으로 살게 하신 뜻을 아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신앙인들이 그렇게 알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인생의 목적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자기가 존재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이게 여타 모든 피조물 및 동물과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다. 논란의 중심인 AI 역시 자아를 스스로 정립할 수 있느냐를 가지고 사람과 구분할 수 있고, 그 기준으로 보면 AI는 결코 사람이 될 수 없다. (사람이 AI를 사람 취급할 수는 있어 보인다) 가끔 AI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답을 한다는 걸 근거로 AI도 자아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시험 문제에 답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사람은 유일하게 자기가 존재한다는 걸 인지한다

 

이렇듯 사람에게 있는 자기가 존재하는 목적, 삶의 목적과 이유(명분)를 알고자 하는 것은 고유하고 매우 중요한 특성이다. 많은 사람이 이걸 고민한다. 그러나 대개는 삶에 바빠 이걸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나 어려움 그리고 좌절 같은 삶의 변곡점에서 간혹 사는 게 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정도다. 그러나 조금만 진지한 대화를 하는 관계에서 이 질문은 서로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드는 토론의 주제가 되고,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삶의 본질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이 인생의 목적이 왜 우리의 신앙과 관련이 있는 지를 생각해 보자. 일단 다른 종교들과 비교부터 시작해 보자.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다. 그 중에 인생의 존재 목적, 창조의 과정과 그 이유를 알려 주는 종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뿐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신앙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당연히 경전들 역시 그 맥락 위에 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왜 창조하셨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도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서.

 

성경만이 유일하게 사람의 존재, 창조 목적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그 중에서 특히 사람의 경우 창조하신 이유도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말씀이 그것인데, 이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표현하겠다는 말씀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알 수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있는 유일한 인생의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인 내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을 믿고 순종하는 데 신앙의 기반을 두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시작이기에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신앙과 믿음은 바로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릴 것인지는 다음 문제다. 일단 야구단에 입단을 해야 그 다음에 홈런을 치든, 승리투수가 되든지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창조 목적에 순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인생의 목적을 아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신앙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만약 여기서 출발하지 않고 그냥 죄사함과 복락을 목적으로 시작한 신앙이라면 이 지점으로 돌아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게 아니면 모두 천로역정에 나오는 월담한 순례자와 같다. 이건 절대로 월반이나 Skip할 수 없는 신앙의 출발이다. 여기서 출발하지 않으면 다 부정출발이다. 명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많은 사림이 하나님의 믿는 신앙은 회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다. 맞다. 분명 회개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의 회복이 바로 진정한 회개다.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 내 삶의 목적이 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반대로 내가 인생의 목적도 모르며 살거나, 하나님께서 의도한 것과 다른 목적을 추구하며 산다면 그게 바로 원죄다. 그 잘못된 방향에서 비롯되는 모든 열심과 결과는 모두 죄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거의 모든 신앙인은 신앙 생활 기간의 대부분을 행위의 잘못을 죄로 알면서 회개하는 세월 속에서 산다. 그리고 그걸 신앙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잘못된 행동을 괜찮다생각하는 건 당연이 옳지 않지만, 우리의 행동은 마음의 생각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행위나 외모를 보시지 않는 존재의 신이라는 걸 반드시 신앙에 투사해야 한다. 이 관점을 배제한 상태로 단지 행위의 잘못을 죄와 회개로 규정하는 건 완전히 잘못된 신앙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

 

시작부에 언급했듯이 사람은 세상 피조물 중 유일하게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고 존재의 목적을 탐구하는 존재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 결핍을 인지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핍을 스스로 채울 수 있도록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스스로 선택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이유는 하나다. 사람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낮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육신을 드려 섬기고 사랑하는 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순종하기를 바라심이다.

 

천지와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 능력과 성품을 표현하신 피조물이다. 영이신 하나님은 물리적 실체가 없으므로 그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리적 실체가 있어야 한다. 온 우주와 태풍과 화산과 같은 위대함과 강함도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인 반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십자가를 스스로 질 수밖에 없는 겸손과 사랑과 섬김 역시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안에 이 겸손과 사랑과 섬김을 표현할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하나님의 낮은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피조물이다

 

우리가 보기에 사람의 육신과 인생은 너무 연약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연약한 육신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라고 하셨다. 이건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기에 오히려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기에 너무 온전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시는 섬김으로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셨다. 사람이 그 십자가를 보고, 육신을 내어주는 섬김이 존재의 목적, 인생의 목적, 창조의 목적이란 것을 깨닫기를 바라시면서.

 

남은 것은 사람이 예수님이 보이신 십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자기 육신을 내어 줄 수밖에 없는 생명 본성이 나의 본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을 선택하고,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사실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유, 선택, 자유 의지라고 생각하는 권리와 역량을 주셨다. 사람들은 이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라는 관점으로만 보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 권한을 주신 것은 오직 스스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순종하기를 바라시며 주셨다.

 

자유 의지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사람 스스로 순종하기 위해 주신 것

 

따라서 만약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을 하나님의 의도와 달리 자기 것으로 알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자 인생의 목적을 선택하지 않고, 마치 자기 능력과 존엄인 양 생각하며, 자기 인생을 위한 선택들을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심판이란 부여된 권한과 의무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지, 사람이 해야 할 권한과 책임과 의무가 없는데 일방적으로 심판한다면 그건 공의나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맡기셨기에 그 책임을 물으실 당연한 명분이 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알기 쉽게 말해서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목사를 할까요? 의사를 할까요?’ 같은 게 아니다. 그런 건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외모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건 모든 행동과 삶을 자아내는 본성과 그 본성을 가진 생명이다. “무엇을 할까요?”가 아니라 어떤 존재, 어떤 생명이 될까요?”가 우리가 물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이 그렇게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다 말씀하셨다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그 뜻을 밝히 말씀하셨다. 우리의 선택, 우리의 순종만 남은 것이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생명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다. 이 뜻이 있으면 인생의 모든 것을 이끈다. 이걸 믿는 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다. 이렇게 이끄는 삶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이끄는 것이므로 먹든 마시든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거듭난 생명이고, 말씀이 육신이 된 상태다.

 

끝으로 이 생명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이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을 때 얻게 되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이다. 유전자를 접붙여서 주시는 방식이 아니다. 놋뱀처럼 들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저 모습, 저 생명이 바로 내 인생의 목적이자 본질이구나라고 깨달을 때 얻게 되는 생명이다. 이게 십자가의 법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이 생명의 정체성은 세상에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은 어떻게든 높이 오르려 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고 전하는 것까지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잘 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란 존재 내면에 뿌리 깊이 높아지려는 세상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신 생명의 본성은 이와 완전히 반대다. 낮아지고 자기 육신(의 수고)을 내어 주는 본성이다. 이건 세상에선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다. 건축가가 버리는 돌과 같고, 천하고 핍박하는 본성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본성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본성이자 생명이라는 걸 몸소 보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얼마든지 하늘의 군대를 불러 군병들을 물리칠 수 있었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능력이 있었으니 십자가에서 내려 오는 것 역시 일도 아닌 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기적이나 능력을 굳이 이용하지 않더라도, 빌라도 앞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찬송 받으실 분(하나님)의 아들이냐?”라는 질문에 답하지만 않았어도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그 모든 기회를 다 버리고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의 이 모습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의무감이나 신념이 아니다.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억지로 참고 신념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다. 또한 죄는 우리가, 벌은 예수님이라는 식의 법도 아니다. 그러니까 차비 대신 내어 주듯이 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내려오지 못하심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가진 본성 때문이지, 신념과 책임감 때문이 아니다. 이건 하나님을 믿는 신앙, 구원의 섭리에서 너무너무 중요한 법이다.

 

십자가의 구원은 죄는 우리가, 벌은 예수님이 받으시는 법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없어서, 그래서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을 몸소 보이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바를 보이셨다. 육신이 찔리시니(깨어지니) 몸 안에 있던 물과 피, 곧 생명과 말씀이 드러났다. 우리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향기처럼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비로소 우리가 인생의 목적을 바로 알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핵심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분인데, 반면에 죄가 없으신 그분이 아니면 또 안 되는 일이 바로 십자가였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보여주려면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 직접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사람, 그런 존재가 없었다.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 아들이 올 수밖에 없었고, 그의 육신이 깨어지지 않으면 그 속에 있는 육신이 되는 말씀이 드러나지 않는다. 향유 옥합이 바로 예수님의 육신이었다.

 

또한 예수님은 충분히 십자가를 피할 수도 있었고,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 올 수도 있었다. 방금 설명한 것처럼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셨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신념을 가지고 대신 벌을 받으신 게 아니다. 제발 예수님의 구원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고 내려오지 못하게 한 건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그렇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에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이게 너무 중요하다.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신이 된 하나님 말씀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셔서 표현하고자 하신 마음이다. 즉 육신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우리를 향하신 유일한 뜻이다.

 

지지 않아도 되는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본성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고,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생명,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같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부르는 생명을 얻었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이건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한 부분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예수님처럼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만, 내 안에 생명이 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끄는 대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육신(의 수고)을 내어주는, 아니 내어 주는 게 본능인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어떤가? 우리의 구원이 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에 순종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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