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을 넘어선 ‘존재의 모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성경의 장과 절은 본래 원본에 존재하던 것이 아니다. 수많은 학자와 인쇄업자들의 노고를 거쳐 장절이 체계화되었고, 대중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성경을 온전히 손에 쥔 것은 1560년 제네바 성경에 이르러서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팩트 자체가 본질은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 배경을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가 ‘디도서 2장’이라는 인위적인 구분에 갇혀 1장의 맥락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다. 디도서는 장의 경계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거대한 맥락으로 이어져 있다. 덧붙여, 성경의 장절이 이처럼 인간의 필요에 의해 후대에 붙여진 역사적 산물임을 이해한다면, 성경의 장절 숫자를 조합해 시대를 점치거나 예언 노름을 하는 행위가 얼마나 근거 없고 허황된 짓인지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디도서 2장의 문을 열면 바울 사도는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라는 특정 대상을 지목한다. 흥미로운 점은 원어의 구조를 살필 때 이 단어들이 1장에서 교회의 지도자로 언급된 ‘장로(감독)’와 같은 어원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디도에게 권면하는 핵심은 교회의 계급이나 조직을 정비하는 직분의 문제가 아니다. 타락한 그레데의 문화적 조류 속에서 성도들이 보고 본받을 수 있는 ‘경건의 모델’이 필요하다는 정서적·영적 요청이다. 방탕과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몸소 살아내어 보여줄 어른들이 절실했으며, 1장의 장로 역시 이처럼 이미 존재로 증명된 성숙한 이들 중에서 세워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각개전투가 아닌 단 하나의 생명 본성
디도서 2장에 열거된 늙은 남녀와 젊은 남녀의 덕목들—절제, 신중, 경건, 순전함 등—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고 인정하는 보편적인 성품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리스트를 대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본질이 있다. 이 허다한 모습들이 사실은 그리스도라는 단 하나의 생명 본성에서 비롯되는 다채로운 열매들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열된 성품들을 보며 마치 훈련소의 ‘각개전투’ 하듯 하나씩 훈련해서 내 것으로 수집해 가려는 경향이 있다. 오늘은 절제를 훈련하고, 내일은 신중함을 연습하는 식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경건은 인간의 수양으로 빚어내는 파편화된 도덕이 아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분의 생명을 이식받은 사람의 삶이 어떤 성품으로 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책이다. 따라서 열거된 각각의 성품은 내가 노력해서 갖추어야 할 과제가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본성의 발현이어야 한다.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라’는 음성의 다른 온도
이처럼 생명의 본성을 다루는 디도서의 권면 중 유독 깊이 대화해 볼 만한 독특한 구절이 있다. 바로 늙은 여자들을 향한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라” (딛 2:3)는 말씀이다. 통상적으로 술에 관한 경고는 남성들을 향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여기서는 특이하게 노년의 여성들을 지목하고 있으며 그 표현의 수위 또한 ‘종이 되지 말라’며 사뭇 다른 온도의 엄중함을 담고 있다.
성경적 맥락에서 술이란, 인간이 삶에서 마주하는 근원적인 두려움과 하나님께 의지해야만 하는 실존적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찾아내는 세상적인 해결책의 대명사다. ‘많은 술에 취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셔야 할 삶의 영역과 영혼의 자리를 세상의 방법과 가치관에 통째로 내어 주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술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은 주권의 문제다. 내 육체와 마음의 통제권을 세상의 작동 원리에 양도하지 말라는 경고이며, 이를 영적인 질병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기를 잃어버리고 다른 영에 사로잡힌 ‘귀신 들린 상태’와 본질적으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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