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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4 – 죄 사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2. 3. 16:43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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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이유는 모든 사람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의 의미까지 살펴봤다. 이에 더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유에는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들은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은혜다.

 

앞서 어두움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사탄은 십자가를 지신 낮고 천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생각과 사람이라는 걸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을 인식하는 게 밝음이고,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이 말씀들은 죄 사함의 다른 표현이다.

 

사람은 행위로 죄를 판단하고, 하나님은 존재가 목적 안에 있느냐로 죄를 판단하신다.

 

사람이 생각하는 죄는 성경이 말하는 죄와 다르다. 물과 불처럼 이질적이라기보다 무엇을 죄의 본질로 보는지의 차이다. 사람은 행위를 기준으로 죄를 가늠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행위는 존재 본성의 표현이라는 걸 주목하시기에 행위 이전에 존재가 무엇이냐를 죄의 기준으로 삼는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행위를 본질로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행위는 본질인 내용의 표현이라고 보신다. 그리고 그 내용은 다름 아닌 정체성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물으시는 질문은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은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의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죄라고 여기시는 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벗어난 상태, 하나님이 정한 목적 아닌 걸 삶의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의 어원이 '자리를 벗어나다'라는 의미의 '하말티어라'라는 게 이를 증명한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을 벗어난 상태를 죄라고 여기시며, 그 죄의 상태에서는 어떤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냥 죄인일 뿐이라는 분명한 뜻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창조한 목적을 벗어난 상태 자체를 죄로 여기신다.

 

이 같은 목적론적 관점에서 죄의 정의는 사실 사람에게도 있다. 매장에서 목적을 가지고 구매한 물품이 목적을 벗어나면 자리를 벗어난 죄로 여긴다. 음식이 상했다는 건 신선해야 하는 자리 곧 정체성을 벗어난 것이고, 방송 신호를 보여주지 못하는 TV는 드라마를 보려는 목적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자리를 벗어난 죄의 존재다. 그런 상태에선 어떤 신기한 기능을 보여줘도 그냥 고장난 TV일 뿐이다. 그냥 죄인이란 이야기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는 거듭남, 곧 구원은 죄는 행위로 범한 죄가 아니라 목적을 떠난 존재로 있는 것일 때 유효하다. 거듭난다는 건 존재가 바뀌는, 다른 생명이 된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행위로 계명을 어기는 걸 죄의 본질로 보신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물으셨을 것이고, 사람을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의 행동을 내가 주목하겠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추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그러나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관점과 다르게 행위로 죄를 가늠하고 판단한다. 회개의 기도가 자기가 행위로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 '지은 죄'라는 말은 행위로 죄를 범했다는 뜻이다. 성경은 구원받았다는 건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심에도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죄를 회개하는 건 행함으로 지은 죄를 자기 죄로 여기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회개하는 건 행위가 죄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이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대한 대안으로 기독교인들이 선택한 건 끊임없는 성찰과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각성과 성경을 지키는 최선의 노력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만 가지를 지켰다고 해도 단 하나를 범한다면 모든 게 수포가 된다고 일갈하신다.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바라는 사람의 노력은 무쓸모임이 드러났음에도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일관하고 있는 건 아주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므로 노력할 뿐'이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우리는 죄에 대한 바른 견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아야 하므로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죄를 알고 내가 그런 죄인이었다는 걸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죄는 회개하지 않고, 사람이 가진 죄의 관점으로 자신을 송사하는 죄만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죄를 사함 받아야 하는 것

 

여기서 논하기도 유치한 반론이 있는데 그건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만 회복하면 도둑질을 해도 되느냐?'라는 것이다. 이 반문은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을 도둑질도 하는 존재로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사람도 죄를 범한다고 확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과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자기 행위를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다. 이런 반문이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 정도 논리도 없이 질문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 어리석음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두움이다. 어리석음과 인식의 어두움은 같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기 원하셔서 바울을 사도로 세우셨다. 자기 존재 목적을 떠나 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목적 안으로 회복시키겠다는 뜻이다. 이걸 모르면 어둠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떠나 자기가 삶의 뜻을 정해서 사는 삶은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힌 삶이다.

 

우리는 빠져 있는 죄는 행위로 범한 죄가 아니다. 하나님 앞, 사람의 죄는 하나님 창조한 목적을 떠나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는 상태 자체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상태다) 이 자리를 떠나 원래 정체성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회개다. 회개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걸 인식하고 자신을 조명하면 많은 게 달라진다.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가 왜 사는지를 모르고 있고, 나도 그 중에 하나라는 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다. 인정하고 믿어야 하는 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믿음의 기초 중의 기초 그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라면 나를 창조한 이유인 목적을 가졌을 게 분명하다. 이 평범한 논리만 믿어도 되는데 사람은 이 하나를 믿지 못한다.

 

이렇게 인생의 목적을 모른 채 살아가는 오늘의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시는 은혜를 베풀고 또 바울과 같은 사도들을 세워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나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을 알려 주셨다. 그것도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그렇게 알려 주신 인생의 목적은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인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사는 이 하나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게 바로 이걸 믿는 것이다.

 

하나님 정한 목적 아닌 나의 의지로 사는 사람이었다는 걸 고백하는 것이 죄 사함을 받는 고백이다.

 

이 믿음이 우리 죄를 사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이라는 빛이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한 나의 모든 삶이 죄인으로서의 삶이라는 게 드러낸다. 그렇게 드러난 나를 인정하는 게 죄를 시인하는 것이 죄 사함을 받는 고백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죄 사함의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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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존재 목적의 회복이다. 그렇다면 구원 이전의 상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구원도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구원 이전의 상태, 구원이 필요한 상태는 육신이 기준이다. 죄에서 구원받는 것인데, 그 죄가 행위로 지은 죄다. 육신의 행위로 지은 죄에서 받는 구원의 이전 상태는 행위로 죄를 지은 상태와 그로 인한 곤궁한 삶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구원은 행위로 지은 죄와 그 죄로 인한 원치 않는 삶의 상태에서의 탈출이다.

 

하지만 이런 구원의 개념은 어두움이다. 이처럼 구원의 개념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는 앞서 설명한 대로 어두움이다. 그리고 사람이 이 어두움에 잡힌 상태를 사탄에게 사로잡힌 상태라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즉 어두움의 상태나 사탄에게 속박된 상태나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잡힌 상태나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매몰된 상태는 모두 같은 상태다. 하나님의 관점이 인생의 존재 목적이라는 걸 모르는 모든 상태와 사람은 다 여기 속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뜻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자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 둘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같은 상태 전환이다. 여기서는 사탄의 권세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탄 혹은 마귀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데 이를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다.

 

사탄에 대한 오해 혹은 무지

사람은 사탄, 마귀를 삶을 괴롭히는 존재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삶에 괴로움을 주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이는 영화를 봐도 알 수 있고, 기독교인의 기도나 일상 대화에서 출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사탄과 마귀(이하 사탄으로만 정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물론 그들의 능력 혹은 영향력은 분명 삶을 파괴하는 것이지만, 그들의 본질적 목적과 정체성은 육신의 삶을 괴롭히는 게 아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사탄을 직접 언급하신 곳이 몇 있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은 금식 이후 시험을 받으신 때와 변화산에 오르시기 전 베드로와의 대화 속에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책망하신 일이다. 그리고 이와 연결된 사건으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한 결심을 사탄을 인함이라 말씀하고 있다.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였다.(눅 22:3-4)

 

예수님의 시험 받으신 일과 베드로를 책망하신 일 그리고 부가적으로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간 일은 하나의 이슈로 연결되어 있다. 대게의 경우 연관성을 간과하지만, 이 세 가지 사건은 단 하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핵심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탄의 핵심 전략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라는 조건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율법을 사람이 다 지켜내도록 하고, 육신이 상하지 않다록 하며, 세상의 권세를 추구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게 사탄의 시험 주제다. 이 시험 주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한 행인들의 조롱에 집약되어 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거기서 내려오라"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그리스도라면 초인적인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세상의 권세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건 조금 뒤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사탄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초인적 인물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게 하는 생각 그 자체

 

다음으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책망하신 사건을 보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완전 정답을 답한 후 크게 칭찬받은 바로 직후에 예수님께서는 난데없이 "내가 십자가를 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라고 만류했는데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하셨다.

 

십자가를 지는, 낮고 천한 존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사탄 그 자체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의 일을 보자. 성경의 순서로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하게 된 사건은 향유 옥합 사건이다. 귀한 향유를 깨어 예수님 발에 부은 여자를 향해 사람들이 "가난한 자를 위해 팔아야 하거늘"이라고 비난했을 때 예수님께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가룟 유다는 '이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아니구나!'라고 확정했고, 그 확신에 따라 그리스도가 아닌 예수는 종과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딱 종의 몸값을 받고 팔아 버렸다.

 

이렇듯 어떻게 보면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 세 가지 사건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주제가 관통하고 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사탄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데, 그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 육신을 가진 평범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생각, 가치관, 믿음이다. 결국 사탄은 십자가를 지는 예수,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과 그렇게 생각하도록 주입하는 사람과 생각 자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바로 사탄이다.

 

사탄이 하나님과 대적하는 존재라는 건 누구나 인정한다. 무엇보다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믿지 못하게 하는 존재라는 건 재론의 여지조차 없다.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자연 대해는 사탄이나 귀신의 짓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믿지 못하게 하는 모든 건 다 사탄이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하나님과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고 혼돈을 주는 모든 이론과 사상과 믿음과 철학과 그것을 가진 사람이 바로 사탄이다.

 

결국 어두움에 빠진 상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상실한 채 자기가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인 사람일 뿐 아니라 그 사탄의 생각으로 서로 소통하고 강요하고 동의하며 살기에 사탄 그 자체다. 즉 어두움에 거한 상태, 십자가에 달리신 낮아지는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 자체가 바로 사탄이다.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자신과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게 하기에 모두 사탄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결국 자기 생각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추구하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인 그리스도로 살아가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망치로 두부를 자를 수 없고, 양초를 받침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존재는 자기 존재 목적대로 사는 것 이상의 행복과 평안과 만족과 성공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 역시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살아 가는 것, 그것이 가장 온전하고 평안하고 행복하며 성공한 삶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온전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사람들은 낮고 천한 모습을 거부했고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다. 그렇게 서로 낮은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며 살면 그렇게 바라는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데 이를 배척한 채 살고 있다. 이 상태가 사탄의 권세 아래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바울 사도를 세우신 뜻도 이런 삶에서 사람의 존재 목적대로 살도록 회복하시기 위함이다. 이 하나님의 뜻이 바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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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2 – 어두움에서 빛으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29. 21:36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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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의 회심은 사도행전에 세 번 기록되어 있다. 9장은 간증이라기보다 상황을 기록한 것이고, 22장은 예루살렘에서 송사를 받아 간증했다가 폭동 수준의 유대인들 저항에 천부장이 나서서 바울 사도를 보호했고, 마지막으로 로마로 가기 전 유다 분봉왕 아그립바와 총독 앞에서 자기 회심의 과정을 간증한다.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은 각 복음서에 반복되는 부분이 있으나 각각은 다른 관점에서 예수님을 조명한 반면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관점에서, 마가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성격이 강하고, 누가복음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란 관점이고, 요한복음은 메시아,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에 관한 관점이다) 바울 사도 회심은 한 성경에서 세 번이나 같은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여러 번 자기 간증을 한 것은, 자신의 변화 과정은 자기만의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반문할 정도의 바울임에도 선택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 구원과 광명과 사탄에게서의 해방과 죄 사함과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의 기업을 얻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결국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26:16-18)

 

우리는 흔히 사도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도 바울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신 것>이라고 간증한다. 유대인에게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라고 하면 사실상 모든 인류를 의미하는 것이 되므로, 사도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은 단지 이방인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계획임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은 이방인만을 위한 부르심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부르심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동일하다. 당연히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핵심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때문이다. 아담에서 아브라함, 다윗과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과 오늘 우리에게까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삶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한결같으시다.

 

그렇다면 어쩌면 다 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어두움에서 빛으로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와 모든 사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이유는 먼저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어두움은 조명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런 말씀은 쉽게 이해하면서 율법이 행위를 말씀하시는 게 아닌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두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어두움에 관한 시작은 의외로 창세기 시작부다. '흑암이 혼돈한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때 이미 땅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하시니라(창 1:2)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물리적 세계의 창조로만 보는 사람은 주목하지도 않고, 또 설명할 수도 없는 말씀인데, 이 말씀의 의도는 사람이 어두움에 거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빛을 만난다는 전개로 이어지는 말씀이다. 땅은 굳이 성경이 아니어도 하늘에 대비하여 일반적으로 사람으로 인식한다. 성경은 더 분명하게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는 말씀으로 땅이 사람이란 걸 확증한다. 그런 땅이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은 흑암에 놓였다는 건 사람이 어둡고 바른 인식과 인지가 없는 상태라는 걸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을 두고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요한복음도 태초로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이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말씀은 천지창조를 물리적 세계의 창조만으로 한정한 관점으로는 해석하면 오류에 빠진다. 빛이 있으라 하기 전 땅이 혼돈했다는 말씀을 이해하기 힘들 듯 성선설, 성악설이라는 의미 없는 논쟁이나 예정론, 자유의지 같은 논쟁을 멈추지 못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태초와 창조는 단지 물리적인 세상의 창조를 한정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위대함을 설명하기 위한 말씀 역시 아니다. 사람에게 있어 스스로 알 수 없는 자기 존재 정체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도록 인도하시고 알게 하시는 게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다.

 

사람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원이라는 일련의 사항들을 이해하기 위해 핸드폰이라는 걸로 비유해 보자. 먼저 사람이 통신과 인터넷 등 정보를 활용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겠다는 의도로 핸드폰을 만든다. 핸드폰 생산 이전에 사용 목적이 먼저 있다. 사람 역시 존재하기 전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한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의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인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먼저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브라함은 물론 창세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의 존재보다 창조하신 목적대로의 사람인 그리스도가 먼저다.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창조에는 목적이 있다. 심심풀이로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어떻게 하나 보다가 상이나 벌을 주시는 재미로 사시려고 만드신 게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아바타나 로봇처럼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그건 엎드려 절받기일 뿐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진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창조된 사람 스스로 하나님께서 자기 존재의 목적을 탐구하여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뜻에 자의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렇다는 걸 알면 성경이 모두 해석된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사람의 창조 목적을 알 수 있도록 세상의 이치와 율법과 말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육신이 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찾아야 할 우리 존재 정체성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걸 보고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그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은 사람이 자의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 나타나

 

예수님 역시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자를 고치듯 바리새인들의 정신을 사로잡아 순종하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다. 그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려고 놋뱀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다. 사람이 그걸 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 계획대로 밑에서 보고 있던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도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이 법을 설명한다.

 

또한 성경에 그렇게 무수히 하나님을 부르면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도 이 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연장 하나를 선택할 때도 원하는 대로 잘 작동하는 걸 사용하듯 사람이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드신 목적을 알고 살겠다는 마음으로 그 뜻을 구하면 어디서라도 만나시겠다는 약속하셨다. 이건 너무 당연한 이치기 때문에 의심하는 게 오히려 바보다.

 

이 순종을 굳이 표현하면 '자유 의지'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유일하게 자기 인생에 대한 선택권을 주시고, 선택한 대로 살 수 있도록 하신 건 바로 이 이유 하나 때문이다. 인생을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선택할 수 있게 하셔서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하나님 뜻을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기를 바라시기에 사람에게 인생에 대핸 선택권을 주신 것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역량을 가지고 인생이 마치 자기 것인 양 생각하며 산다. 이렇게 사는 삶이 바로 어두움이다. 자기 존재의 목적도 모르면서 맘대로 사는 건 어디에 사용하는 건지 모르는 전동공구를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전동 공구를 용도와 무관하게 사용하면 사고가 나듯이, 사람이 서로 인생을 자기 맘대로 사용하니 갈등과 다툼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걸 화평하게 하신다는 건 모든 사람이 존재 목적대로 회복되면 전동공구를 용도대로 안전하게 사용하는 것과 같아지니 사람 사이에 갈등이 없어진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알지만, 그렇게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인생의 목적도 모르는 어두움에 갇혀 있다.

 

이렇듯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는 인식과 인생을 선택하고 선택한 대로 살 수 있는 역량을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체가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두움이다. 목적을 모르는 어두움, 용도를 모르는 어두움인데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하나님의 뜻 이 하나를 몰라서 그렇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인생은 모두 어두움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람을 인도하기 위함이라고 하신 말씀은 결국 이 어두움, 자기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어두움에서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그 빛은 영광을 얻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아는 상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시는 성품은 세상의 가치로 높아지고 위대해지는 게 아니아 낮은 마음으로 서로 섬기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이런 수고를 하신다는 자체가 낮은 자세로 섬기는 그 자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빛>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인식하는 삶을 알게 되는 것

 

하지만 핸드폰이 목적대로 생산되었다고 해서 바로 그 목적대로 활용되지는 않는다. 핸드폰을 사용할 목적을 가진 사람이 유심을 넣고 설정해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핸드폰은 존재 목적이 달성된다. 이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이 부여한 생물학적 본성에 따라 태어났다고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 목적을 기준으로 보면 사람이 생물학적, 의학적으로 살아 있어도 생명이 없는 상태다. 이 상태가 바로 천지창조 이전 상태, 흑암이 혼돈하는 땅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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