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2:28-32) 구원이 쉬울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7. 14. 12:29 Writer : 김홍덕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1)

이 말씀을 접하면 순간적으로 ‘누구든지’가 마치 ‘아무나’라도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고, 그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졌다는 것을 믿으면 쉽게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해볼 것이 있다. 구원이 과연 그렇게 쉬운 것이라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라는 극형을 소화해가면서 희생을 드려야 했을까? 아마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랬기 때문에 구원은 쉬운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게 사람에게 편리할 테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고, 예수님과 형제, 곧 같은 아버지의 본성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야 구원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같은 아버지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상황에서는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은 사도들의 시대에 정말로 순교하는 것에서부터 삶에서 서로 의의 충돌과 갈등과 같이 삶의 작은 부분 모두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사는 삶’,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그리스도 안에서’, ‘빛의 자녀답게’와 같은 말이 무색해진다. 즉 육신으로 살면서 서로의 의가 다를 때, 같은 일을 해 가면서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가 다툴 때 “너의 생각대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거듭난 것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된 이유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의 어떠함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세상의 가치를 좇는 이들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의 아들은 의의 대립에서 너의 뜻대로 하는 종과 같은 결정을 하게 하는 본성, 유전자를 가진 존재임을 보이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은 세상의 가치로 높은 존재라 믿는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 십자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것은 그런 본성이 없다면 어떤 형태로도 얻을 수 없다. 예수 외에는 구원을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이란 예수님이 보이신 정체성,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 예수님이 뵈신 하나님 아들의 모습과 같은 것이 아니면 구원이란 없다는 아주 단호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냥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 죄가 내가 지었는데 벌은 예수님이 받았으니 나는 사함 받았다는 신학으로, 세례 문답과 세례로, 교인증서나 세례증서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이고 의로운 생각인가 돌아봐야 한다.


한 마디로 구원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물론 구원이 어렵다는 것은 저항력을 가진 말일 수 있다. 구원은 말 그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 얻을 수 있는 쉬운 것이고 예수님은 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서 봐야 하는 말씀이다. 그래야 왜 쉬운지, 또 한편으로는 왜 어려운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짐이 가볍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존재가 그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 이상으로 존재에게 쉬운 것은 없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망치는 못을 박거나 부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그것으로 두부를 자르려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당연히 사람이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는 모든 원인은 단 하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짐이 쉽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 쉬운 삶이 자신의 삶이 되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아들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존재가 목적과 하나 되었을 때의 쉽고 평안함을 누리는 것이 이것이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 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이름은 정체성이므로 그 정체성을 불러 상관이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이 또한 동일한 맥락이다. (이것은 다음 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러므로 구원이 쉬운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존재가 목적대로 사는 것은 쉬운 것이고, 또 존재가 자기 목적대로 살겠다고 순종하는데 그 창조주가 그것에 난관이나 시험이나 어려움을 주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구원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그 선택을 하기까지 자기 의를 버리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당장 이 요엘의 말씀만 봐도 그렇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즉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의 과정이 보통 험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험난한 것은 하나님의 고의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겪는 일임을 잊지 말고 있어야 한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그래서 교회가 하자는 대로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메뚜기 재앙과 같은 재앙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


심지어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완성되지 않은 퍼즐 같은 설교와 성경에 대한 이론과 학문에 대한 갈증을 겪고, 또한 예수 믿는다고 삶이 변하지 않는 자신과 사람들의 삶을 목도하고 회의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은 죄가 없다는 온전한 말씀에 반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신앙을 떠나면 죽을 것 같아 그 속에 머무르고 있다.


그것은 죄가 있어도, 온전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도박과 같은 신앙에 매몰된 재앙 속에 있는 것인데 그것부터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재앙이었다는 것이 인정이 되어야 자신이 어둡고 캄캄한 세월을 보냈고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런 날을 맞이해 보지도 못했는데 구원에 이를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구원은 오직 한 길 밖에 없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또 죄와 비겁함을 인정해야 비로소 그 세월이 여호와의 날에 이르게 하는 것이 자기 속에서 확신하게 되고 그리고 이어서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시며, 지난 모든 세월의 의로움인 하늘의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구원의 여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어떤 부름에 답한다는 것을 아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정말로 낙타가 바늘 귀를 들어가는 것과 같이 어렵고, 세상의 확률로도 산출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극히 작은 수에게 허락된 것인데, 창조의 목적을 기준으로 존재가 목적대로 사는 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가장 쉬운 것이라는 이해와 믿음과 본성도 없이 거저 구원은 쉽다고 말하고 그것을 팔아먹고 동조하는 종교라는 허울 안에는 구원이 없다.


무엇보다 구원은 본성이 바뀌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의 신을 불러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부름이기에 구원은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런 존재가 되었으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체가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교회 다니기 전이나 교회에 다니는 후나 추구하는 것은 여전히 세사에서 성공하고, 육신 평안하고, 자녀 잘 되는 것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고, 성경대로 사는 착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으로 그 원하는 것을 바꾸려는 장사속으로 구원을 논하면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십자가를 욕되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실상은 구원이 없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구원을 구하고, 얻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니 다시 사함을 받을 기회조차 스스로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쉬운 것이나, 사람들의 생각은 그것에서 멀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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