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는”에서 시작해서 “나의 이 말을 듣고 준행하는 자는”으로 끝나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여러 문단 혹은 주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 말씀의 DNA는 사실 하나,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는 말씀을 전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니 모든 말씀이 우리의 구원에 관한 말씀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 속 예수님이 지향하는 사람의 모습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과 삶입니다. 이건 거듭난 다른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지 행동 규범이나 신앙적 도덕책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산상수훈과 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행위규범처럼 보입니다. ‘~하라’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행위규범으로 먼저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간을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우리의 경험과 하나님의 정체성을 연결해서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누구나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늘 실패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면 누구보다 우리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을 텐데, 그런 창조주가, 더욱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 정말로 중요한 이유는 이런 근거를 알아야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시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지 않는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 수도 아신다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할 수 없는 율법을 주셔서 우리를 굴복시키는 게 목적일까요? “사람은 예수님처럼 될 수 없지, 다만 우리는 노력할 뿐이야”라는 고백을 듣고 싶어하시는 것일까요? 이런 게 아니라면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성경대로 사는 게 쉬워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규정하거나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이 인정이 바로 우리 죄를 자백하는 시작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평생을 들었을 텐네 혹시 여기서 말하는 생명에 주목해 봤을까요? 생명이라면 고유한 본성이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명 역시 유일한 본성이 있습니다. 그 유일한 본성을 육신으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유일성을 두고 ‘독생자’라고 하며, 이 말씀을 육신으로 보이셨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생명의 이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거듭났을 때 가지게 되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이 생명으로 나면 그리스도(a Christ)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육신으로 보여주신 사건이 십자가의 구속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하여 벌을 대신 받은 것도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신념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이기에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이 된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자 사람에게 원하시는 단 한 가지, 낮은 마음으로 사람을 섬기는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행위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인 말씀이 육신, 곧 삶이 되면 어떤 모습인지를 말씀하신 게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그 표현이 “~~을 하라”라고 해도 이것은 그 행위가 본질이 아닙니다. 행위는 생명의 본성이 표현된 모습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성경을 행위규범으로 읽고 믿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외모로 판단하고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생각을 믿음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은 성경 밖에 두어도 훌륭한 도덕적 규범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핵심이 빠진 행위 자체로도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그걸 바라고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뜻은 이런 행실로 살아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라는 겁니다. 바로 우리가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이전에는 산상수훈을 행동으로 지키려고 노력하던 본성을 가진 생명에서, 그냥 살 뿐인데 매 순간 산상수훈의 말씀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산상수훈을 주신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항상 이 관점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무엇을 하라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라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걸 늘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도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 모습을 보고서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도 사람에게 이끌려 자기 육신을 내어 주시는구나?’라는 걸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내가 원래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처럼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인데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았구나!’라고 깨닫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본질입니다.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성경 밖에 있어도 훌륭한 산상수훈, 그래서 실제로 세상에서 많이 교훈으로 삼는 이 말씀의 본질은 이런 행동을 준행하라는 게 아니라, 이렇게 행동하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라는 말씀이라는 걸 깨닫는 것입니다. 이게 말장난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생명으로 거듭난 삶을 살아보면 이게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사도와 믿음의 선진들은 그 놀라운 삶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다는 건 그들이 삶으로 체휼한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능력을 믿는 것,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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