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한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이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대개 ‘결론’ 혹은 ‘결과’의 형태다. 요셉의 예를 들어보자. 요셉이 채색 옷을 입고 있다가 형들에 의해 죽을 뻔했고, 겨우 목숨은 구했지만 종으로 팔려가고 거기서 열심히 살았으나 다시 옥에 갇히는 굴곡의 끝에 총리 대신이 되어 오히려 자기를 죽이려 한 형들을 구했다. 이런 그의 삶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라고 스스로도 간증했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족들이 몇 십년 뒤에 만날 흉년을 대비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고, 이를 위해 요셉이 그에 합당한 신앙과 인격을 갖추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의 마디마다 <채색 옷 – 종 – 감옥 – 총리대신>과 같은 눈에 보이는 이정표를 정해 놓으시고 요셉이 그 과정을 거치도록 연단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같은 시각으로 자기 인생을 조명한다.
신앙인들의 이런 사고는 사실 운명론에 가깝다. 즉 요셉은 총리대신이 될 운명으로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삶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모양과 형태가 있다고 믿는다. 사실 이 믿음의 구조는 기독교인만의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운명론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떤 신을 믿는다는 건 그 신이 자기 운명을 정해 놓았다고 믿으며 그 운명을 벗어나는 걸 두려워한다.
정리해 보면 사람들의 믿음과 생각 속 하나님의 뜻은 삶의 모양과 형태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신분이나 성격 같은) 사람으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부모님이 목사나 사모로 서원했다면 그 삶을 살아야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아주 큰 오해다.
하나님은 틀과 결과가 아니라 목적을 정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목적을 정하신 분이지 결과를 정한 분이 아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모든 사람,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게 있는데, 이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법을 의아해하고 잘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사람에게 전적으로 맡기셨다는 것이다. 맡기셨기에 이걸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모든 걸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청지기다.
하나님은 뜻을 이루는 일을 사람에게 맡기셨다
그러므로 목사와 같은 사명이나 직업과 같은 삶의 모양은 하나님이 굳이 정하시지 않는다. 그런 건 사람이 정하면 된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자기 삶을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택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건 우리가 삶을 잘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이런 선택의 권한을 주시지 않았다면 사람은 자기 목숨이 달린 순교 같은 걸 결정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정한 결론이나 모양대로 살아가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뜻을 다양하게 자기 삶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원하신다.
출애굽 과정을 보면 광야에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었다. 반드시 그 아래 있어야 했고, 불기둥, 구름기둥이 갈 때 가고, 설 때 서야 했다. 이건 율법적인 신앙 세계로 우리 인생의 모양이 하나님이 정한 형태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앙이 이 세계다. 그런데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니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없어졌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밟는 모든 땅이 너의 것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광야 곧 율법 신앙의 때와 달리 사람에게 모두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뜻을 위해 스스로 결정(때로 서원)하고 그 길을 가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가 정한 길을 가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을 향해 가는 길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고 약속했는데 사람은 하나님이 정한 삶의 모양이 무엇인지 몰라 두려워하고, 자기가 가는 길이 맞는 방향인지 염려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 안에서 각 사람이 정하고 길을 가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이런 삶은 언뜻 생각하면 내 맘대로 사는 삶처럼 보인다. 삶의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한다는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대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적지 않은 사람이 앞선 설명에 관해 이런 반론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적이 분명하고, 그 목적의 근본 의가 분명하면 그 사람의 어떤 독자적인 결정도 모두 목적대로, 의(義)대로 행하는 것이 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우리가 전쟁을 생각해 보자.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다. 적진에 침투하는 군인이 나라가 정한 전쟁의 목적과 지휘관의 뜻을 잘 이해하고 그걸 달성하기 위해서 전장에서 어떤 독단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그의 모든 행동은 국가와 지휘관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순간의 행동이 본질이 아니라 목적과 의가 본질이다. 그렇게 사병이 싸워 이기면 지휘관이 영광을 얻고, 나라가 이긴다.
하나님께 우리의 길을 맡긴다는 말씀도 사실 같은 맥락이다. 가장 완벽하게 하나님께 맡긴 인생은 어떤 모양, 어떤 삶을 살아도 말 그대로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되는 삶이다. 심지어 다시는 주를 위해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하며 살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삶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거듭나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고, 그리스도의 본성이 내 삶과 생명의 본성이 되는 것 외에 삶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은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나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라는 걸 믿고 마주하는 삶의 순간들 마다 내가 결정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이것이 바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맡은 자의 충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마디마디마다 하나님이 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계획과 의가 전부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거듭난 생명이라면 그냥 사는 것만으로 하나님이 정한 삶을 이룬다. 고양이의 생명과 본성을 가진 고양이의 모든 행동이 고양이라는 걸 드러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인 생명이라면 삶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냥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믿고 나의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본증대로 살면 된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과 순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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