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여러 가지 일로 두려움을 느끼고 환난을 겪는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그 두려움과 환난을 이기기 해 달라고 간구한다. 이렇게 두려움과 환난 앞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대체로 다른 기도에 비해 간절하다. 어쨌든 우리는 어떻게든 두려움을 이기고 환난을 극복하려 하고, 또 그래야 한다. 그 속에서 산다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환난 날에 부르면 도우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있다. 변치 않고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우리는 이 말씀에 의지하고 안심할 수 있고, 또 많은 신앙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의 두려움과 환난은 생각보다 잘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서 그 두려움과 환난의 가치와 의미를 모를 때가 많다. 대게는 그 끝에는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어느 날 참 쉽게 떨치기 힘든 이 두려움과 환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의 곤고한 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두가지 관점에서. 하나는 ‘하나님도 이걸 화난으로 여기시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도들과 순교자들 결국 죽거나 엄청난 고난을 겪었는데, 그게 두려움과 환난을 이긴 것인가? 그들은 또 두려움과 환난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평소에 잘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 답은 명확하다. 다만 그걸 내가 얼마나 믿는지는 다른 문제기 하다. 우리는 두려움과 환난을 재앙과 형벌처럼 이해하기 일쑤다.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고, 장래에 소망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가 두려움이나 환난으로 생각하는 일을 하나님은 평안과 소망을 위한 일로 여기신다. 이런 현격한 차이는 기준에서 비롯된 게 분명하다. 같은 일을 다르게 본다는 건 기준이 다른 이유다. 나는 벗어나야 할, 경우에 따라서는 회개해야 할 일로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창조하신 목적 안에서 거쳐야 할 일로 보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존재이므로 하나님과 같은 기준으로 벗어나고 싶은 두려움과 환난을 봐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순종>하는 존재라는 진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실 나를 각성하게 하는 건 사도들의 태도다.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과 겪는 환난은 대게 육신의 고통이 본질이다. 고통의 정도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내가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쟁점은 누구나 같은 개념을 겪는 고통과 환난과 그걸 두려워하는 두려움은 인류 공통의 것인데 사도들은 그걸 어떻게 순종했느냐는 것이다. 순교와 같은 엄청난 고난은 어떤 의미고, 어떻게 그렇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게 궁금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환난 앞에서 비교를 하게 된다. ‘평안을 누리는 사람, 더욱이 신앙이 없거나 세상의 관점에서도 악한 사람들은 평안을 누리는데,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나는 왜 이런 고난을 겪는 것인가?’라는 비교를 하게 되고, 이런 비교는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든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그런 마음이 없었을까? 마침 이에 관한 유명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 하리니 …(중략)…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4-(중략)-8)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사도들은 <”너는 돈 있냐? 나는 예수 있다”> 라는 우리의 보편적인 정신 승리이자 자기 위안을 삼는 방법이나 가치관으로 환난을 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겐 정말로 환난이 우리가 보는 환난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평안과 소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분명한 현실은 나에게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얼마나 더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는지를 일깨운다.
그러나 이 일깨움보다 더 중요한 건 환난과 두려움을 이기는 능력이다. 두려움과 환난을 사람의 가치와 생각과 기준으로 정의한 다음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게 아니라, 두려움과 환난이 임하고 그 앞에 섰을 때 그걸 보는 가치관과 기준 그리고 두려움과 환난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때 우리는 사도들처럼 환난에 순종하고 이겨낼 수 있다.
그런데, 사도들처럼 두려움과 환난을 조명한다는 건 하나님의 안목과 기준을 가졌다는 것이고 그건 하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확실한 증거다. 말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뜻이 그대로 이루어졌을 때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명한 기준에 사람인 나의 생각으로 두려움과 환난을 정의하며 해결해 달라고 떨며 기도하는 모습은 냉정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거듭남에 이르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말하는 ‘믿음이 없어 혹은 약해서 겪는 환난’이란 게 실재의 일인 셈이다. 환난을 통하여 더 큰 믿음을 얻게 하실 것이라는 환난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믿음은 지금은 그 믿음이 없다는 의미라는 상식을 인지하고 있다면 이건 부인할 수 없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두려움과 환난을 이기는 능력이 아니라, 두려움과 환난이라고 사람의 기준으로 정의한 일을 보는 하나님의 관점이다. 하나님과 같은 안목과 가치로 우리가 마주한 일을 보면 하나님의 생각대로 된다는 믿음을 가질 것이고, 하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안목을 가진다면 그 자체로 두려움과 환난을 이길 것이다.
하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다는 건 거창한 것 같아도, 생명이 같아야 아버지와 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 곧 의와 뜻이 내 육신이 되는 것이므로 그건 그저 구원과 거듭남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겨자씨 만한 믿음, 그 하나가 없어서 두려워하고 환난에서 구해 달라고 부르짖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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