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씀은 애통하는 자의 복입니다. 사실애통하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결코 복된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외모나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관한 말씀이 아님을 안다면, 이 애통함 역시 세상이 말하는 단순한 슬픔이나 신세 한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애통함은 앞서 우리가 정의한인간의 존재 목적과 필연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애통의 헬라어 원어는펜데오(πενθέω)’입니다. 이렇게 원어의 언급하는 이유는 헬라어를 알아야 성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을 그저 자기가 알고 있는 의미로 고민 없이 해석하면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타성에서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다행히 요즈음은 세상이 좋아져서 제미나이(Gemini) 같은 AI를 활용하면 성경 원어의 사전적 의미 정도는 누구나 손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필자가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는 따로 있습니다. 복이라고 하면 무조건재물이나건강으로 확정하는 아쉬움, 그래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서 세상의 복을 얻는 매뉴얼로 인식하지는 말자는 취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애통함이 있는 자가 도리어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펜데오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야곱이 그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다고 믿었을 때,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비통함 속에서 터뜨린 극한의 통곡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로 통해 볼 때, 성경이 말하는 애통은 내 삶의 가장 절대적인 본질이 통째로 날아간절대적 상실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신비롭게도 이러한 실존적 상실을 결코 망각하지 못합니다. 그 애통함을 유발한 본질적인 결핍을 평생토록 그리워하고 소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복에서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정작 그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절대 결핍을 인지하는 것이 복이었다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복은 그 존재의 목적을 상실해 버린 나의 어두움을 인한 애통함이 우리에게 복임을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내 안의 근원적인 목적 상실을 아파하며 창조주 앞에서 애통해 하는 자가 그것을 다시 얻으려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며, 그렇기에 이 애통함이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애통함이 있는 사람은 마침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위로 역시, 우리가 위로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생각하는등을 토닥여 주며 슬픔을 달래는 감상적인 위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파라칼레오(πακαλέω)’는 우리가 잘 아는보혜사 성령(파라클레토스)’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본래 곁으로 부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애통함과 연결하면,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가난을 애통해 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곁으로 불러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사람을 구원의 자리로 불러내셨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 편에 나란히 세운다는 이 위로는 곧 우리의 거듭남입니다. 존재의 목적이 결핍되었음을 애통하는 사람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뜻(창조 목적)을 아는 자리로 부른다는 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하던 절대적 상실을 애통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정한 존재 목적이 생명의 본성이 되어 삶이 되도록 하시는 게 애통하자가 받는 위로의 복입니다.

 

결국 하나님 편에 나란히 세운다는 이 위로는 곧 우리의 거듭남입니다. 존재의 목적이 결핍되었음을 애통하는 사람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뜻(창조 목적)을 아는 자리로 부른다는 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하던 절대적 상실을 애통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정한 존재 목적이 생명의 본성이 되어 삶이 되도록 하시는 위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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