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4:1-13) 거듭남의 증거, 안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1. 20. 10:10 Writer : 김홍덕


안식이라는 것은 몸이 쉬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회복하는 수고를 그치는 것이고,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은 그 회복된 정체성이 가진 본능이 이끄는 대로 육신이 수고하며 살아가는 그 삶이 안식의 상태라는 것을 계속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이 천지창조라는 행동의 종결로 비쳐지는 것으로 인하여 안식은 행위로 대변되는 일의 종식이라고 생각하지만 근원적으로 행동이라는 것은 의와 생각의 표현이기 때문에 행위가 종식된다는 것은 의도한 바가 종식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안목의 차이다. 행동을 본질로 볼 것인지, 아니면 행위를 이끄는 의와 생각과 목적을 본질로 볼 것인지에 대하여 구분하여 보는 안목의 차이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지인의 말을 듣고 그 말 자체보다 어떤 의도인지를 인하여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나, ‘말 뜻은 알겠는데 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하냐?’라는 말과 같은 것에서는 분명히 말과 행동 이면에 있는 의도를 늘 파악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성경을 볼 때는 갑자기 하나님의 의도는 외면하고 성경의 문자에 집중하는 성향을 보인다. 이것은 알고 보면 성경을 대할 때만 이상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앞서 언급한 우리가 일상에서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서도 상대를 모르면 의도를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을 육신의 수고를 그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아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안식을 지키는 것이다.’며 다투고 종파가 갈라질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식적 사고도 못할 정도로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안식은 육신의 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언급했던 것과 같이 이런 생각은 비단 안식교라는 신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칭 정통이라는 신앙 안에도 역사적인 전통을 가진 믿음인 것은 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는 어두움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다. 그들 안에 하나님의 영이 없기 때문이다. 즉 거듭난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구원도 영생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들은 교회라는 곳에 가서 세례도 받고, 또 그 교회가 인도하는 대로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고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먹고 사는 것에 바쁜 시간에 교회에 와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구원의 자격증이나 신분으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 신분증이 바로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증명서인 아이러니에 매몰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신분이라는 내용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행위로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의 차별도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의도를 생각치 않고 말씀을 문자대로 보는 것이고, 육신의 행위를 의로 삼고 있으니 안식도 육신이 쉬느냐 아니냐로 가늠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상식적이고 마음에 양심이 조금만 있으면 알 수 있는 것인데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육신이 세상에서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매여서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상식적인 생각으로도 알 수 있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보이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떠나려 하니 ‘그러면 이 육신의 삶에 해가 미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을 벗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분명하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음에도 하나님의 의가 아닌 눈에 보이는 문자와 사람의 육신과 행위를 본질로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그것 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영생이 없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로 볼 때 안식을 육신이 쉬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영생도 구원도 거듭남도 없는 사람이다. 영생을 육신이 쉬는 것으로 믿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온세상으로 말씀하시는 음성을 액면 그대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알지 못하니 그 의를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문자로, 계명은 육신으로 지키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보면서 현실에서 이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나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인데,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의를 알 수 없는 존재는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없고, 그 의가 자기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벌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 분명하다.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아들이 아닌 존재는 아들로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거듭난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생도 없다. 영생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 속에 하나가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의를 알지도 못하면서 영생에 속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신념으로 믿으려고 해도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 믿는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이해가 되면,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는 거듭남 속에서 그 새로운 생명이 주는 안목으로 이 모든 것이 밝아지면 안식이라는 것은 육신이 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생명에 이끌리어 육신이 십자가를 지는 궁극의 수고를 보이신 그 모습이 안식 안에 있는 삶이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안식은 그렇게 육신의 수고를 이끌어내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는 그 상태가 안식임이 자기 안에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면 안식이라는 것이 분명히 우리가 거듭난 존재가 되는 것이며,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의와 뜻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 부인하려 해도 부인되지 않는 본성이 될 것이다. 그 자리에 가야 비로소 안식을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