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27-32)
이 본문은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세부적으로 보면 내용은 세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 신체의 일부가 나를 실족하게 하면 떼어 버리라는 말씀, 그리고 이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세 가지라고 해서 주제가 세 가지인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간음'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묶이는 잘못된 일들의 집합입니다.
우리는 '간음'이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육체적인 간음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간음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의 간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간음은 자기 짝이 아닌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관계를 떠나 다른 대상을 믿거나 의지하는 모든 것이 간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형성되면, 육신의 남녀 관계 역시 자기 배우자, 곧 자기 짝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위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떠나 다른 것을 추구하고, 믿고, 의지한다면 그것이 바로 간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인생의 목적은, 육신의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유일한 짝인 것처럼 사람에게도 유일하게 정해진 삶의 목적과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것을 떠나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간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간음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 자체를 이미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이 말씀이 육신의 성적인 욕망만을 가리킨다면, 세상의 모든 남자는 이 법을 피할 수 없으므로 모두 죄인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을 그렇게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창조 섭리 자체에 모순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성욕을 주시고, 그 욕망에서 비롯되는 생각 자체를 죄로 규정하신다면, 어느 모로 보나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은 물론 완전하신 하나님이라고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떠나려는 시도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음욕을 품는다는 것만으로 죄를 범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구분됩니다. 원어를 보면 '음욕을 품는다'는 말씀은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πρὸς τὸ ἐπιθυμῆσαι)'라는 전치사구에 가까운 여러 단어로 이루어진 표현입니다. 그 의미를 옮기면 '탐하려는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바라본다', 또는 '탐하려는 의도로 조준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음욕을 품는다'는 말씀은 단순한 성적 욕망만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의도로 무엇인가를 탐하는 것 자체를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같은 사건은 이미 창조 때에 있었습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바라보던 마음이 바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음욕을 품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실제로 '에피뒤메사이(ἐπιθυμῆσαι)'라는 단어도 같은 계열의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음욕은 젊은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탐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아바타나 로봇처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밖에 알지 못하는 몽유병 환자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존재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기에, 사람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길 것인지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자유의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선택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돈과 명예, 그리고 평안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려는 마음의 시도,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세상에서 복을 준다고 하는 이방 신들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이 말씀하는 근원적인 간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자'라는 존재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성별로서의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여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된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형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을 주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여자'는 형식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여자는 외모와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 역시 이러한 복선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형식이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여자입니다.
따라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형식, 곧 세상에 나타난 것들을 보고 탐심을 품어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것을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세상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곧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와 뜻이라는 사람의 유일한 자기 짝을 버리고 다른 것과 관계를 맺으려는 간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다 쉽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로 설명해 줍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 2:15-16)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오른쪽 눈이 실족케 하면 그 눈을 떼어 버리라고 하셨는데, 그 실족한 일부로 인해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낫다는 이유입니다. 이건 일점일획도 다 이룬다는 기준을 적용하기에 너무 강압적일 뿐 아니라 실제 그렇게 하기도 힘듭니다.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음욕을 품는다면 뇌를 드러내야 할지, 아니면 심장을 드러내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습니다. 결국 이 말씀 역시 육신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심청전을 읽고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 효자, 효녀라고 할 게 아니라면 이 말씀은 분명 육신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도 앞서 언급한 간음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이 아닌 것을 추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꼭 집어서 ‘오른쪽’을 지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재밌는 게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는다고 하실 때도 오른손으로 붙잡으신다(사 41:10)고 하시고, 또 오른손으로 하늘을 폈다(사 48:13)고도 말씀하십니다. 한 번도 왼손을 이야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오른쪽은 우리 말로 바른쪽 혹은 의롭고 옳은 쪽을 말합니다.
따라서 나의 오른쪽 눈이 실족케 한다는 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과 안목입니다. 오른쪽 눈 하나로 우리가 지옥에 간다는 건 완전한 논리가 아닙니다. 지옥에 갈만한 짓을 할 때 때마침 왼쪽 눈은 감고 있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육신의 눈이 아니라 안목입니다. 더욱이 오른쪽 눈이라면 그건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바라보는 안목과 그 안목의 기초가 되는 가치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앞서 말씀하신 음욕을 품는 것과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내 것이 아닌데 내가 가지는 게 옳다고 여기는 안목이 바로 나의 오른쪽 눈이 나를 지옥에 끌고 가는 죄악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육체의 오른쪽 눈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가치관과 안목 아닌 것을 옳다고 바라보고 탐하는 모든 것을 지금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의 연장선에서 이혼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혼증서는 모세의 율법으로, 이 율법에서는 음행한 것을 감추고 결혼한 후에 발각이 된 경우 즉 처녀 결혼이 아닌 게 발각되면 이혼증서를 써 주고 이혼하라는 계명인데, 예수님 당시에는 사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혼증서만 써 주면 이혼을 했던 사회적 문제가 있어서 표면적으로는 이를 지적하신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뜻이지 사회 비리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간음이 아니면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말씀의 속 뜻을 새겨보는 게 더 맞는 접근입니다.
앞서 우리는 간음이 무엇인지, 또 여자는 성경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이야기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 외의 것에 가치를 추구하고 탐하는 게 간음이라는 것과 여자는 곧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형식이라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내는 어떤 존재일까? 이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생을 주실 때 함께 주신 육신의 본성과 능력과 개성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나’라는 한 개인에게 주신 짝, 곧 육신과 그 역량과 본성이 바로 나의 아내입니다. 다시 한번 이건 육신의 남녀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의를 기준으로 한 말씀이라는 걸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인생의 구성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나를 위해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중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다 수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앞서 실족하면 떼어버리라는 것의 반대 영역으로 간음하지 않는다면 온전히 감사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4)
우리는 우리 인생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나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다 버리려고 하고, 하나님께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생을 주실 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좋다고 판단하여 주신 나의 육신과 삶의 환경과 구성들은 모두 나의 아내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게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또 편하지 않다고, 또 수고스럽고 부끄럽다고 버리려고 하고 떼어 버리려고 이혼증서를 남발합니다. 하나님께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여기 포함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은 다 주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함부로 버리거나 하나님의 영광이나 나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내가 임으로 이혼증서를 발행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간음이라는 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삶의 형식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나 탐욕을 가지는 게 바로 이혼한 여자에게 임의로 장가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간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또 나를 사람으로 창조하신 목적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을 내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조건과 환경으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 순종하는 것이 순결한 삶입니다. 간음을 육신의 문제로 한정하여 보면 이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께서 산에서 설교하신 뜻을 알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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