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7:16-34)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울 사도는 아덴이란 지방에 이르렀다. 이 지방의 사람들은 종교성이 많아서 여러 신을 섬겼는데 그중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단도 있었다. 반면에 이 지방의 사람들은 외국인이 전하는 가장 새로운 것을 듣는 것 외에는 시간을 쓰지 않았다고 할 만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 곳은 아니다. 섬기는 신이 많다는 건 문제의 근원을 보는 시각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 특징이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하니 어리석은 신앙이라 우습게 볼지 모른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오늘날 기독교 안에 이것과 같은 뿌리의 말들이 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다 사해 주시고'라는 기도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있나, 최선을 다하는 거지' 혹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라는 말이다. 교회에 좀 다녔다고 말할 정도면 분명히 들었을 말들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이상한 말들이 경건한 말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방문한 아덴 지방 사람들이 보여준 습성을 지금은 오히려 경건하게 취급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칭하시는지에 늘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게 있는 존재나 오해하는 존재로 믿는 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칭하는 말들은 정확히 우리의 정체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시인하면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말씀이 이를 보증한다. 내가 하나님이 보시는 그대로의 존재였다는 걸 시인한다는 건 하나님의 의와 법에 순종한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영혼을 가리켜 늘 어둡고 사망 가운데 있다고 하신다. 제대로 보는 게 없고 제대로 모른다는 뜻이다. 알아야 하는 하나님의 의와 뜻을 모른다는 걸 말씀하심이다. 그렇게 어두운 사람이니 세상의 신을 다 알 수 없다. 그렇다 보니 '알 수 없는 신'에게도 제사를 드려 혹시 자신이 놓친 무언가를 대비하려 한다. 이를 대변하는 말이 바로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벌은 받기 싫은데 벌 받을만한 죄를 지었는지조차 모른다는 걸 스스로 실토하는 셈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하나님께서 자신을 늘 '빛'이라 하시는 건 빛 아래서는 모든 게 선명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하신 건 모든 게 선명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라는 의미인 게 분명하다. 모르고 지은 죄 같은 개 풀 뜯어 먹는 말로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퉁치려는 건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지 경건한 신앙이 아니다. 아울러 그런 신앙은 아덴 사람들처럼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것이지 빛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숨기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의 법과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거나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며 뜻을 감추고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답을 알려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뜻을 성경 시작 부분에서 먼저 분명하게 말씀하신 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순종뿐이다. 알지 못하는 신,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다는 말, 모르고 지은 죄를 사해 달라는 기도는 모두 내가 하나님의 의 밖에 있다는 실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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