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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왕을 원하는 이스라엘은 당시 왕과 같은 지위에 있던 사무엘을 무시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생각해 보면 굳이 왕이라 부르지 않아도 사무엘이나 모세나 삼손 같은 사람들은 사실상 왕보다 더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사사시대에 사사가 전쟁을 위해 모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모여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보다 더한 충성은 없다.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라는 부름에 응한다는 건 부르는 자가 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은 ''이라는 지위에 연연하지도 않고 거부감도 딱히 없다. 열방의 왕이라는 게 문제다. 어떤 가치의 정점에 있는 왕이냐가 문제다. 게다가 사람은 자기가 왕을 선택할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사람이 자연발생적 존재라면 자기가 섬길 왕을 정한다는 게 말이 될 뿐 아니라 어떤 왕을 섬기든 다른 존재가 상관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 창조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존재도 사람에게 왕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니라 열방과 같은 왕을 원하고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가 왕이 될 수 없어…

 

열방 곧 이방의 왕은 세상 가치의 정점에 있다. 세상이 추구하는 모든 귀한 것이 모인 지위이고,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존재다. 그런 존재에 충성한다는 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걸 진정한 가치로 삼아야 하는 사람이란 피조물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건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이걸 성경은 ""라고 한다. 그리고 죄라는 말의 어원은 '자리를 벗어났다'라는 의미의 '하말티어'.

 

, 열방의 왕은 우리에게 모든 걸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너희 아들들은 전쟁에 끌려가게 될 것이며, 너희 딸들은 왕을 위해 노동하게 될 것이며, 너희 소산 중 귀한 것들은 왕이 가져갈 것"이라 경고하셨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괜찮다고 했다. 그걸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귀한 걸 얻을 수만 있다면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고, 세상 귀한 걸 위해선 자기를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도, 또 세상 귀한 걸 위해 희생하겠다는 자아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욥 1:21)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경고하신 대로 살고 있다. 세상의 가치, 세상이 귀하다고 생각하는 걸 위해서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길 뿐 아니라 오히려 그걸 고귀하게 생각한다. 정말로 사람들은 세상의 귀한 걸 얻을 수 있다면 자기 모든 걸 버리고 투자한다. 열방의 왕께 진심으로 충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고귀한 일이라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후일에 상을 주시겠지만, 성경은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

 

우리에겐 왕이 있다. 그보다 더한 창조주 하나님이다. 그는 우리를 다스리신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소산을 가져가는 분이 아니다. 그리고 압제하는 통치를 하시지도 않는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앞에 사람이 자기 자리를 떠나고, 죄를 범할 수 있는 자유도가 있다는 것에서 이미 하나님의 통치 이념을 알 수 있다. 이건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어떤 상황도 조치 가능한 능력자기 때문이다. 완전히 통제하고 주관하는 영역을 압제하는 주관자는 없다. 이미 어떤 세계를 주관할 정도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소비적이고 멍청한 짓을 하지 않는다.

 

온전히 주관하고 통치할 수 있는 왕은 절대로 압제하지 않아…

 

이런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와 권한을 자기 걸로 안다. 그래서 심지어 이 절대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죄를 범하기도 한다. 그렇다는 건 사람은 하기에 따라서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할 수도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히, 전적으로 순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 그런 사람에겐 하나님은 온전한 왕이요, 사랑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걸 버린다.

 

우리의 왕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 창조하셨으니까. 더욱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온전히 하나님이 삶을 주관할 수 있도록 창조되어 있다. 단 하나 사람이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 뿐이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순종하고, 그 계획과 의도와 목적인 말씀이 육신이 되면, 그렇게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의 본성이 되게 거듭나면 그냥 그 본성대로 사는 것이다.

 

이것보다 온전한 통치와 육신이 된 말씀보다 강한 왕은 없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습을 보여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사는 삶을 보이셨다. 그게 십자가다. 절대자의 뜻을 버리고 자기 맘대로 살 수 있는 자유와 권한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면, 존재에게 가장 귀한 것, 존재하는 목적대로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내가 알아서 법대로 사는 통치 안에 살게 하신다. 이게 우리 하나님, 우리 여호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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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8:1-9)

사무엘 상 7장은 어떻게 보면 사무엘이 죽는 25장까지의 전체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무엘이 사는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사무엘이 늙었다는 걸 알리며 시작하는 8장은 사무엘 시대 후반부의 일들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잘 섬겼는데 사무엘이 늙자, 그간의 평화 시대가 종식될까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왕을 구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민수기 11장에도 있다. 광야에서 만나만 먹던 이스라엘은 고기가 먹고 싶다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이때 원망하는 내용은 애굽에서는 고기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는 것이었다. 애굽이 더 좋다는 건 하나님의 구원 없이 세상의 종으로 살던 때가 더 나았다는 말인데, <열방과 같이>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의 희망 역시 그것이다.

 

고기를 먹겠다고 애굽을 그리워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한 달간 메추라기를 보냈고, 백성들의 이에 아직 메추라기 고기가 껴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그리고 지금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너희를 압제할 것이라는 분명한 경고에도 이스라엘은 왕을 원했고, 결국 역사적으로 보면 결국 왕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게 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왕을 필요로 했다면, 그들의 신앙이 조금 어리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듭나면 본성 자체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된다는 걸 몰라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마음은 기특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왕을 구한 게 아니다. 열방과 같은 왕을 구했다. 이방인들의 평안을 구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왕이란 존재의 권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왕은 막강한 권력으로 사람을 강제할 수 있는 존재다. 왕명은 목숨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삶을 주관할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 우리를 주관하는 힘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내 세계의 왕이라 할 수 있다.

 

왕은 결국 통제력이다. 그게 권력이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명이 되어 나를 주관하게 된다. 왕을 구한다는 건 이게 되지 않는다는 걸 실토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으로 신부나 수녀가 결혼하지 않는 게 이 맥락이다. 자기 육신을 제어하는 제도, 이게 왕이다, 그래야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런 생각이 바로 하나님 앞에 열방과 같은 왕을 구하는 신앙이다.

 

그러나 왕도 고양이를 '멍멍' 짖게 할 수는 없다. 어떤 권력도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사람을 개나 고양이로 만들 수는 없다. 생명의 본성이 사람과 생명을 주관하는 가장 강력한 주권이다. 우리 구원을 거듭남이라고 하는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 가진 본성은 그 어떤 왕의 권력보다 강하게 나를 주관한다.

 

그리스도의 본성보다 더 강하게 나를 주관하는 왕은 없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가장 강력한 통제력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이 나의 생명, 내 육신의 삶의 본성이 되는 것보다 강한 힘은 없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생명으로 거하시므로, 그 생명의 본성이 나를 주관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게 되는 게 하나님이 나를 주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수 있는데, 생명이라면 생명의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면 어렵지 않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거듭난 생명이 나타내는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은 열방의 왕처럼 나를 통제할 필요가 없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나를 이끄신다. 그건 본성으로 이끄는 것이므로 세상의 어떤 왕보다 강한 권세다. 하나님께서 나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시는 게 그것이다.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삼상 8:5)

 

성경은 성을 빼앗는 것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더 강한 자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바라며,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나를 주관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실패한다. 나를 다스리는 왕에게 힘이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내 생명과 삶의 본성이 된다면? 그땐 다르다. 본성보다 강한 주권자는 없다. 그래서 거듭난다고 한다.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게 된다.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본성이 필요하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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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상) 10. 미스바 대성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무엘상 Date : 2025. 8. 3. 10:33 Writer : 김홍덕

언약궤가 돌아오고, 사무엘 시대가 열린다. 이스라엘이 그간 섬기던 우상 바알과 아스다롯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온다. 사무엘이 온 백성을 미스바에 모이게 했고,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금식하고 회개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건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회개하기 위해 미스바에 모인다는 말을 들은 블레셋은 그때를 기회로 여기고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웠지만 자기들끼리 전쟁에 임한 이전과 달랐다. 사무엘을 찾아 쉬지 말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것을 구했고,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대로 회개의 제사인 번제를 드렸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우레(우뢰)를 내려 이스라엘을 이기게 하셨고, 이스라엘은 이전의 모든 영토를 회복하게 된다.

 

하나님께 의지한 전쟁은 승리한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전과 달리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무엘을 의지했다. 언약궤를 빼앗기는 전쟁을 할 때는 이미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함께한다는 게 전해졌음에도 그냥 가서 전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또한 이번에는 언약궤를 의지한 게 아니라 회개의 번제를 드렸다. 하나님께 회개하므로 자기들 스스로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의지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쟁에 앞서 자기들이 하나님께 범죄 했다고 고백하고 금식했으며, 사무엘이 자기들을 다스리는 걸 동의하고 순종했다. 블레셋을 이기는 것보다 먼저 자기들이 하나님께 죄를 돌이켰고, 중요하게 여겼으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에게 순종했다. 그리고 그들은 평화를 얻었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삼상 7:6)

 

성경 역사서에 나오는 모든 나라의 전쟁은 오늘 나에게 내가 왕인 나의 세계가 마주한 영적 전쟁이며, 이방은 세상이라 세상의 가치가 나를 도모할 때 내가 어떻게 그들을 이길 것인지를 투사한다. 따라서 미스바에서 회개의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임한 이스라엘의 모습은 오늘 내가 세상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의 모범 답안이다.

 

우리는 세상의 여러 시험과 고난을 마주할 때 시험과 고난 그리고 패했을 때 당할 어려움에 주목한다. 그래서 우선 그것을 대항하고,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의지했듯이 목사나 영성이 좋다는 사람을 찾아서 답을 의지한다. 그러나 그렇게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이스라엘이 보여줬다. 그렇게 했더니 오히려 언약궤를 빼앗겼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목사나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을 드려 세상을 이겨보려 했다가 패하고서 교회를 떠나는 모습이 이것일 것이다.

 

세상의 어려움과 고난은 나를 하나님께 드릴 때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세상과 맞설 때 먼저 나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의 삶이 되며, 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면 전쟁의 결과는 정해진다. 세상은 스스로 자기 꾀에 빠져 망하게 된다. 영적 전쟁은 그렇게 이겨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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