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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한 바울 사도의 마음은 아버지가 자녀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데살로니가 성도들 모두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런 바울 사도의 마음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고, 전도자의 마음이다. 복음은 결국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산다는 건 신앙인 모두의 소망이다. 여기서 한 부류는 제외해야 하는데 그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사서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이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의 삶이 세상에서 평안할지 아니면 사도들처럼 고난의 삶일지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지 그 결과가 신앙의 소망이어서는 곤란하다. 금도끼 은도끼를 바라고 자기 도끼를 연못에 던지면 안 된다.

 

어떤 합당함은 당연히 기준에 부합한다는 말이므로 그 기준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과 법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이걸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의>라고 할 수 있다. 의는 옳음과 그름을 가늠하는 헌법적 기준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의를 기반으로 나라의 옳음과 그름이 결정되는 걸 생각하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 합당함을 결정한다.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려면 먼저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알아야 …

 

그렇다고 하나님의 의가 감춰져 있거나 비밀스럽거나 어려운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세상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람의 역량에 맞추어 예비해 두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에 맞추어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순종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의지까지 사람에게 주셨다. 그리고 합당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성경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의 본으로 아들까지 보내셨다.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의지 앞에 핑계조차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대로 정의하고 조각한다는 데 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믿는다. 이렇게 하나님을 자기 맘대로 조각하고, 리모델링하는 것, 이게 바로 우상을 만들고, 조각하고, 섬기는 일이다. 이건 불상에 절하는 것보다 교묘해서 자기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조차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신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행위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걸 그렇게 강조하심에도 사람은 존재의 하나님을, 행위를 의로 여기는 하나님으로 믿는다.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우상을 조각하여 섬기는 일이다. 이 우상 숭배는 아주 굳어져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사람이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걸 깨우치는 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일 정도다.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건 하나님을 조각하여 만든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려면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부터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우선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는지부터 살펴보면,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두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실지를 생각한다. 행위를 의로 여기는 분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행동>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예배가 바른 예배인지, 불참하는 이유 같은 건 따지지 않고, 출석이란 행동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이건 명백히 행위를 의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행위를 기준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거나 벌을 내리신다고 생각하는 건 하나님은 행위를 의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시는 신이라고 믿는 신앙이다. 이게 하나님에 관한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과 믿음이다.

 

사람들은 행위를 의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시는 신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제사를 거르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보다 더 정성이었다. 지금 드리는 십일조나 헌금은 당시에 드린 번제물이 차지하는 경제적 부담에 비할 수도 없는 정도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셨다. 심지어는 "누가 저 성전 문을 닫아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너희가 나의 단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할 것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정성을 마다하시고, 싫어하셨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책망하셨다는 것만으로 유대인의 신앙을 터부시하면서 지금 자신들은 율법 아닌 복음 생활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건 착각이다. 단언컨대 예수님께 책망받던 유대인들이 지금 이 시대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보다 더 경건하게 살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행위가 아니라 존재라는 걸 눈치채야 한다.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 존재 정체성을 의의 기준으로 보시는 분

 

앞서 잠깐 언급한 대로 이 시대 신앙인들에게 그들이 신앙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라는 걸 깨우치게 하는 건 매우 어렵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려고 엄청나게 노력함에도 자기 자신조차도 합당함을 자신할 수 없는 엄청난 괴리를 느끼는 근원적 이유가 하나님과 다른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인데도 자기는 바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기에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게 노력하면서도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노력할 뿐'이라며 자신조차 자기 삶을 하나님께 합당한 삶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만 있어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일임에도 착각에 매몰되었기에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에게 어렵게 해 놓았을 리 없다는 단순한 상식만 상기할 수 있어도 문제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님에도, 하나님의 의와 다른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 합당한 삶은 어떤 행동들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느냐다. 행동은 존재 정체성 혹은 본성에 부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기가 창조한 사람이 어떤 존재라는 걸 가장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시고 긍휼하신 분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렇게 노력해도 이를 수 없는 기준으로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삶을 정의하셨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뇌까리면서도 이 단순한 믿음 하나가 없어서 그렇게 소망하는 합당한 삶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나의 삶이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건 내가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아서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좁은 문으로 가야 한다. 대중적인 신상의 형태와 교리는 구원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만약, 그 대중적이고 교리에 입각한 신앙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면 또 모르지만, 그 신앙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매일 회개하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다고 공식적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그 속에서는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 수 없다.

 

행위가 하나님께 합당하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의의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나는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무엇을 의로 삼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주일 예배에 가지 않으면 화를 내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든 예배에 가려고 할 것이다. 그러다 늙어서 병원에 입원하면 저절로 죄인이 된다.

 

하나님은 이런 행위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진, 완성된 예배의 제물인지를 물으신다. 내가 성전에 가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떠날 수 없는 존재, 그래서 늘 거하시는 성전인지를 물으신다. 그렇게 하나님이 내 안에 DNA로 거하시면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삶이 된다. 이게 하나님께 합당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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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성령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4. 26. 22:31 Writer : 김홍덕

신앙인들은 대체로 성령을 가볍게 생각한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기보다 상세히 알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성령은 더 높은 수준의 신앙 자격으로 생각한다. 이는 성령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인데, 기적은 일상적이지 않고 더 높은 수준의 영향력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더 큰 능력이 필요한 순간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은 구원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셨으니 그렇고 거듭난 생명은 성령으로 잉태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령은 대충 알아서 되는 분이 아니다. 구원을 정확히 안다면 성령에 관해 명확하고 밝히 알 수밖에 없다.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만 성령을 생각한다는 건 구원에 관해 밝지 않은 것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한정하여 성령을 아는 건 구원에 대해 밝히 알지 못하는 것

 

성령의 핵심적인 직임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일이다. 그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령의 모든 기적보다 더 위대한 기적이다. 성령이 이런 분이라는 걸 알려면 성령의 거듭남을 체휼해야 한다. 몸이 뜨거워지는 성령 체험이나 사람의 능력 이상의 기적을 행하여 도우시는 성령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령을 더 귀하게 여기고,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진정한 기적이다. 바로 구원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셨다. 이런 기적을 보이신 건 동정녀 탄생이라는 기적이 주인공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그 능력을 보이신 이유가 주인공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의 본이신 것과 우리가 물과 성경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걸 종합하면 우리의 거듭남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건 곧 우리의 모습인 셈이다.

 

성령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생명이 되게 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시려면 하나님의 생명이 될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함께 씨 뿌리는 비유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흙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심겨 있어야 한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심령 안에 하나님 말씀이 내재하여 있고, 그 말씀의 뜻을 알기 원하는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신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을 늘 물로 비유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비밀이 이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저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이라고 순종하면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 내재하게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 오셔서 그 말씀을 생명이 되게 잉태케 하신다. 그렇게 잉태된 생명이 바로 거듭난 생명, 곧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하나님 아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한 영으로만 성령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살면서 겪는 문제를 기적적으로 돕는 영이나, 불치병을 고치는 능력으로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런 일들은 성령께서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성령은 언제나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하신다. 기적은 그 일을 위해 필요하실 때만 하신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뜻을 먼저 행하심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성령에 관한 가장 올바르고 핵심적인 인식은 바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보혜사임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거듭난 사람은 이 성령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따라서 성령이 이런 분이라는 사실, 아니 이것이 성령의 유일하고 위대한 능력이라는 걸 안다. 따라서 성령에 대한 이런 바른 인식은 곧 거듭남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성령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질 수 없다. 그들에게 성령은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한 영일 뿐이다. 그건 드라마 X-파일의 스핀 무비 주인공으로 아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구원이 없어서 그렇다.

 

정리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직임을 올바로 안다. 성령의 직임대로 행하신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성령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반추할 필요가 분명하다. 내가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잉태된 거듭난 생명인지,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내 생명은 말씀이 생명과 육신이 된 것인지와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이건 성령에 대한 바른 인식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인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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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2:1-10)

데살로니가 전서 2장 앞부분에는 바울 사도와 동역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지를 간증하듯 전하고 있다. 당연히 이 마음은 데살로니가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마음인 건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이런 바울 사도의 마음은 오늘날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는 마음이다.

 

먼저, 바울 사도는 복음이 전해졌다면 그 과정에는 고난이 있었음을 증언한다. 복음은 그 자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므로, 고난 없이 복음이 전해질 수는 없다. 복음은 하나님 아들임에도 세상의 심판을 받는 낮은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은 수고가 있었다. 그런 수고와 헌신으로 전해진다. 자기 인생과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오늘 나에게 복음이 전해진 복음은 그렇게 고난을 겪은 수고의 은혜다.

 

복음은 고난 없이 전해지지 않는 은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은혜'는 나로선 할 수 없는 혜택이다. 은혜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셨고, 그 뜻이 육신이 되어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향유 옥합처럼 육신이 깨어져 그 속에 있던 육신이 된 말씀이 세상에 향기처럼 드러났으며, 그 향기에 취한 많은 사도들과 믿음의 선친들이 환난 중에 전하고 전하여 오늘 나에게 전해진 은혜다. 오늘 나에게 임하기까지 내가 한 건 없는데 나는 복음을 누리니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와 순종이 더해져서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받는 이의 순종이 없으면 그 또한 전해지지 않는 게 복음이다.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시기까지 하며 복음을 주셨지만, 사람이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또한 열매 맺기 힘들다. 구원받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은 걸 보면, 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져서 열매 맺는 건 아주 놀라운 기적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역시 바울 사도를 통해 이런 기적의 열매가 되었다. 더욱이 바울 사도는 사도로서 권한과 존중을 구할 수 있었지만,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않았기에 그렇지 않았음을 언급한다. 아울러 어떤 탐심도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며, 하나님께서 이 일의 증인이라고 확정한다.

 

바울 사도는 분명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로하고 신앙을 보증하고 칭찬하고 있다. 환난을 이겨내고 지역의 성도들과 사람들에게 본이 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은 사람이나 세상의 영광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전한 복음의 열매다. 고난을 이겨내며 전한 순전한 복음을 데살로니가 성도들 역시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하여 맺은 열매다. 말 그대로 줄탁동시다.

 

복음은 단 1%도 하나님의 것 아닌 게 없다. 그리스도의 도와 진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전하고 받는 사람 역시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다. 이런 모든 섭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그 성품을 표현하시고자 한 뜻이 표현되고 나타난 것이다.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람과 복음이 있다. 따라서 어느 한 절도 사람의 유익이나 사람 혹은 세상의 영광을 위한 게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인해 고난받을 수는 있어도 복음에 기인하여 세상의 영광을 얻을 수는 없다. 복음은 그 자체가 세상에서 낮아지는 본성으로 거듭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복음으로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고, 사람이 세상의 복과 유익을 얻을 이유가 없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바울 사도의 위로에서 우리는 세상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수를 믿는 게 아님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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