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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상) 09. 돌아오는 언약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무엘상 Date : 2025. 8. 2. 10:15 Writer : 김홍덕

(삼상 5, 6)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궤가 효력이 없었다고 언약궤의 권위가 떨어진 건 아니다. 하나님 언약의 표상인 언약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지, 하나님 없이 전쟁하면서 능력만 기대하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에게 능력이 나타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빼앗아 간 블레셋에는 재앙이 일어난다.

 

블레셋은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은 언약궤를 자기들의 신인 다곤 신을 섬기는 신전 안에 두었다. 그런데 다음날 다곤 신상이 언약궤에 절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놀란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신상을 세워 두었으나 다음날은 아예 머리와 팔다리가 끊어진 상태로 언약궤 앞에 엎드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재앙도 아니었다. 언약궤를 둔 '아스돗'이라는 지방에 독종이 창궐했고, 이어 언약궤를 가드로, 에그론으로 옮겼는데, 언약궤가 거하는 지방마다 독종으로 사람들이 큰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언약궤를 돌려보낼 때 속죄 제물로 금으로 만든 쥐를 만들어 언약궤와 함께 보낸 것으로 보아 쥐가 나타나 농작물을 해치는 재앙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상 6:5)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언약궤의 힘을 빌려 전쟁에 이기려고 했을 때는 아무 효험이 없었는데 이방 신전에 두었더니 이방 신상이 절하는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고, 블레셋에는 재앙이 임했다. 그런 능력이 전쟁 때 나타났으면 더 나았을 텐데 이제야 나타나니 이스라엘은 야속할 수 있다. 그러나 블레셋에 일어난 재앙이나 이스라엘을 돕지 않은 것 같은 야속함이나 같은 사건이다. 언약궤는 합당한 사람과 함께할 때는 은혜지만,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겐 재앙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합당한 사람에겐 은혜지만,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겐 재앙이다.

 

하나님 없이 전쟁하는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언약에 합당하지 않은,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으로 믿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을 상징하는 언약궤나 말씀 그리고 기적은 언제는 재앙이다. 그리고 심판이다.

 

재앙이 임한 블레셋은 언약궤를 감당할 수 없어 돌려보내기로 한다. 먼저 언약궤를 함부로 가져온 걸 죄로 인식하고 이를 속죄하기 위해 금으로 독종과 쥐 모양으로 만든 속죄 제물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암소에게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게 했다. 그리고 사람이 끌지 않는 수레가 어디로 가는지를 보기로 했다. 젖 먹이는 암소가 새끼가 아니라 이스라엘 진영으로 간다면 그간의 재앙이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라 믿기도 했는데, 정말로 젖 먹이는 암소들은 언약궤를 가지고 벧세메스라는 유대 땅으로 가버렸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다.

 

언약궤는 언약이 함께하는 사무엘이 있어 돌아왔다.

 

이렇게 언약궤는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하는 사람 사무엘의 시대가 열린다. 언약을 믿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언약의 상징인 언약궤가 돌아온 것이다. 사무엘이 있어 돌아왔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하나님의 언약이 나타날 곳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내용이 있는 곳으로 형식이 돌아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보다 언약궤를 성스럽게 생각했고, 그래서 전쟁에서 언약궤의 능력을 기대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에게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하는 사람 사무엘의 시대가 예비되자 스스로 돌아오는 능력을 보였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과 능력은 그에 합당한 사람이 함께할 때만 이루어지고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너는 존재 목적과 정체성을 지키고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존재의 신 여호와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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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4:12-22)

엘리 일가의 악행은 하나님을 알기 전 우리 모습이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자기 것으로 훔치고,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보다 내가 우선인 삶을 살고,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짝인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이 아닌 세상 가치와 상관하는 음란한 삶을 사는 우리 모습이다.

 

그런 삶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다. 언약궤를 빼앗긴 사건은 이를 말씀한다. 있다면 그건 심판에 관한 경고뿐이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없이 임한 전쟁에서는 하나님 뜻의 상징인 언약궤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없다면 성경을 지키는 행위도, 교회에 빠지지 않는 열심도, 전 재산이라도 드릴 것 같은 헌신도 다 소용없다. 핵심은 사무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3)

 

하나님의 심판은 말씀대로 이뤄졌고, 그 결과 악행을 일삼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었고, 아들의 악행을 방관한 엘리도 죽었다. 그런 엘리의 일가에 새 생명이 태어났지만, 엄마인 비느하스의 아내는 자기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영광이 없다'라고 지었다. 성경에서 아들은 엄마를 영화롭게 하는 존재인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으니, 이제는 영광이 없다고 고백한 것이다. 어쩌면 이 엘리의 며느리가 집안에서 가장 믿음이 좋았던 거 같다.

 

사건 자체로 보면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일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내가 인생의 주인으로 살던 시절이 이렇게 완전하게 멸망하지 않는다면 나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 사무엘 시대가 열리려면 패역한 엘리 일가의 멸망은 필수적이다. 이게 보기에 두려운 일이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우리에겐 축복이다. 내가 주인된 삶이 죽고 시작된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새 생명의 삶은 축복이다.

 

이런 전개는 이 사건에만 특화된 게 아니다. 우리 신앙, 우리 삶은 반드시 이런 전개를 거쳐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종말도 같은 맥락이다. 엘리 집안의 멸망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은 우리의 회개다. 회개는 하나님의 의와 법을 떠나 살던 삶의 멸망이다.

 

이 삶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을 수 없다. 언약의 축복이 적용되지 않는다. 법괴라고 하는 언약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 아무런 효력이 없었던 이유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갈등은 이방인들의 다툼일 뿐

 

하나님 없는 상태는 이방 민족인 블레셋과 다를 게 없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도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알고, 육신의 복락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임하는 블레셋과의 전쟁 같은 삶의 갈등은 세상을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싸움이 아니라 그냥 이방인들끼리 다툼에 불과하다. 그런 전쟁에 하나님의 언약은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 누구든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언약이 실현된다.

 

엘리와 두 아들의 멸망은 우리의 회개

 

엘리 일가는 비록 불행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행악과 태만은 회개해야 할 우리의 모습이다. 다시 한번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육신의 복락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과 은혜와 말씀을 이용하며,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이 아닌 세상 가치를 배필로 삼아 살던 세월을 돌이켜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 그래야 본젹적인 사무엘의 시대가 열린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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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4:1-11)

사무엘이 장성하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시기 시작할 즈음에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우려고 전쟁을 일으켰다. 처음 전투에서 4,0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참패하자, "하나님께서 어떤 이유로 패하게 하셨는가?"라며 탄식하다 묘수를 짜냈는데, 그건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생각대로 언약궤를 가져다가 그 힘으로 전쟁에 임하였다. 일시적인 효과는 있었다. 블레셋이 이를 두려워했었는데, 그게 끝이었다. 그들은 다시 전투를 벌였고, 이번에는 더 크게 패해 삼만 명이나 전사했고, 이 전투에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겼다.

 

사무엘 상 4장을 시작하는 말씀은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 되니라". 그런데 사무엘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전쟁을 명령했다거나 지원했다거나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말도 없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터로 나갔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에게 나타났는데 사무엘 없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사무엘은 미스바 대 성회 이후 전쟁에 처음으로 참전한다.)

 

성경 속 전쟁은 오늘 우리에겐 영적 전쟁의 모델이다. 사무엘 상을 시작하면서, 우리 구원의 역사를 왕들의 이야기로 말씀하신 건 우리는 하나 같이 자기 세계의 왕들이기 때문이란 걸 설명했다. 전쟁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 왕인 세계를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 사람들은 영적 전쟁을 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광명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러나 사람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인이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야 함은 당연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신다고 하신다. 이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위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내용을 채워야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 거하시면 우리가 왕이 된다.

 

이 전쟁이 패한 이유는 우선 하나님이 명한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사람의 생각대로 하나님이 역사할 거라고 믿은 것인데,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전쟁이 아닌데 하나님의 언약궤를 승리의 부적으로 삼았다. 즉 내용은 없는데, 하나님의 의와 뜻은 없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라는 형식을 사람이 자기 계획대로 사용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데 언약궤라는 형식에만 의존하는 건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다.

 

먼저 하나님께서 명한 전쟁이 아니라는 건 성경의 기록으로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어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정황상 엘리 제사장은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므로 엘리가 명한 전쟁일 수는 있다. 방탕한 두 아들이 참전했다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 엘리와 사무엘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은 엘리와 함께 하시지 않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와 무관한 전쟁인 셈이다.

 

더 핵심적인 이유는 언약궤와 관련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첫 전투에서 대패하자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장에 가져오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사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새겨 주신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가 담긴 금 항아리가 들어 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있으면 하나님도 함께하실 거라 믿었다. 신권으로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 믿기도 하는 오늘날 신앙인들에겐 '이게 무슨 문제인가?'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내용 없는 형식에 의지하는 것으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은 것과 같은 상황이다.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없는데 하나님의 의를 상징하는 형식이나 물건이 의미가 있을 리 없다. 세상 모든 만물이 그렇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뜻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 하나님의 뜻과 의가 없는 실존은 존재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전쟁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다 놓는다고 전세가 역전되지 않는다.

 

나의 세계에서 왕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도 여러 갈등과 다툼을 직면하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한다. 때론 그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확신하기도 하지만 다른 결과를 손에 쥐기도 한다. 결국 그 차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지가 핵심이다. 언약궤라는 형식에만 의지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다툼에 그리스도인이니까 잘될 거라는 자기 확신으로 임하여 실패하면 하나님을 부인하기까지 한다. 언약궤마저 빼앗기는 것이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영적 다툼과 갈등을 이기는 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을 믿는 형식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행함이 하나가 되어야 영적 전쟁을 이길 수 있다. 그리고 믿음과 행함, 형식이 하나가 되는 가장 온전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내 삶의 본성이 되는 것, 이것이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삶이고, 이렇게 하나님의 의가 함께할 때 세상을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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