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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같은 구원과 죄 사함과 거듭남은 크고 큰 은혜다. 하지만 그 자체로 은혜인 건 아니다. 내가 확신하고 내 것일 때 은혜고 구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원과 거듭남의 확신과 증거를 구한다. 많은 기독교인이 구원받아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구원의 확신에 의심이 있다. 더욱이 그 마음을 말하고 표현하고 인정하는 건 더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감추기에 해결하기 더 어렵다.

 

구원의 확신은 마치 합격증 같은 느낌이다. 따라서 의심스럽고 불안한 마음은 아직 합격증을 기다리는 상황이므로 사실상 구원을 믿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믿지 못한다면 구원이 없는 것이다. 합격 통지를 받고 출근이나 등교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불안은 없다. 아울러 간절하게 구원의 확신을 느끼고 싶은 마음 역시 합격을 바라며 열심히 공부하는 마음 같아서 확신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구원의 확신이 합격증 같다는 건 제법 적절한 비유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구원의 합격증은 삶과 말이라는 것이다. 사실 합격한 사람은 합격증보다 언제라도 재직, 재학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고, 회사와 학교의 법과 규칙에 따르고, 복지나 혜택을 누린다는 게 본질이다. 이게 성경의 표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어야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건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사실상의 정답은 자기 안에 있는 마음의 확신이다. 재직 중인 직장인은 구내식당에 들어갈 때 머뭇거리지 않고, 재학 중인 학생은 강의실이나 학적과에 들어갈 때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런 걸 의심하지도 않는다. 자기 존재의 확신 때문인데, 한 발 더 나가서 생각하면 그걸 믿으려고 다짐하지도 않는다.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믿음을 북돋우는 신앙과 확연히 다르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에 확신하는 사람, 아니 그런 걸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자기 행동을 보고 정체성을 느낀다. 대학 캠퍼스에 앉아서 자기가 학생이란 걸 느끼고 감상하며, 회사에서 일하면서 자기가 그 회사의 일원임을 느낀다. 구원과 거듭남의 확신도 마찬가지다. 자기 삶과 말과 생각 그리고 가치관을 보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느끼고, 이전과 다른 자기 삶에 놀라고 감사한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 거듭남의 증거를 자기 심령 안이 아닌 밖에 있는 어떤 것에서 찾는 건 항상 불안하다. 나의 자아 밖에 있는 건 나의 것이 아니므로 그것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데 이건 종과 같다. 예를 들어 방언이 구원의 증거라고 치면, 구원받은 방언과 사탄이 주는 방언은 어떻게 구분할 것이며, 또 어떤 기준으로 방언의 종류나 수준을 정할 것인지도 문제, 아니 논쟁거리가 된다. 즉 확신할 수 없는 요소가 늘 있다.

 

수가성에서 만난 물 긷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확신은 자기 안에서 넘쳐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0)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자기 안에 본능처럼 있어야 한다. 구원과 거듭남의 확신은 어쩌면 증거를 찾을 게 아니라,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어야 한다. 이는 구원과 거듭남은 새로운 생명으로 나고,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본성을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다. 개가 아무리 노력해도 '야옹' 소릴 낼 수 없고, 남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잉태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가 가진 모든 지식과 역략과 감증과 증거를 가지고 자기 구원을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야 구원의 확신을 가진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스스로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 안에 생명이 있어야,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이 있어야 구원이 확증된다. 생명 본성이 있으면 그 본성이 이끄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을 보며 또한 구원과 거듭남을 확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이 모든 건 생명의 법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나기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얻는 것이다. 결국 구원의 확신은 성령이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성령으로 잉태된다. 결국 성령이 있어야 구원과 거듭남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성령의 임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령께서 심령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시킨 사람은 성령이 심령에 계실 것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게 아니라면 성령이 계시지 않으므로 구원과 거듭남의 확신을 갈구한다. 결론적으로 성령이 내재하지 않은 사람은 생명이 없고, 생명이 없으므로 객관적 증거를 갈구한다.

 

반대로 성령이 내재한 사람은 새로운 생명 본성이 삶을 이끌기에 자기가 살아가는 모습과 말과 생각과 가치관에서 그리스도를 느낀다. 당연히 생명 본성이 이끄는 구원의 증거들은 부인하려 해도 부인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 그런 사람들은 남자로 난 사람은 남자가 되길 갈구하지 않는 것처럼 구원과 거듭남의 증거를 갈구하지 않는다.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느니라 (고후 1:22)

 

구원과 거듭남의 증거는 결국 자아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 자기 심령에 있다.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자기 삶과 말과 생각과 가치가 이전과 다르다는 걸 보며 자기가 거듭났음을 확신이라기보다 부인할 수 없음을 안다. 심지어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 마음을 먹어도 되지 않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 자리에 이르러야 구원받은 상태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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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거듭남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4. 4. 06:24 Writer : 김홍덕

'거듭남'은 성경의 핵심이다. 사람의 구원을 말씀하시는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밤 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즉 구원은 곧 거듭남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요 3:3)

 

이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가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니고데모의 말을 초등학생 같은 답변이라 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거듭남에 대해 니고데모만큼 진지한지는 알 수 없다. 경험에 의하면 기독교인 대게는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따지지 않는 듯하다. 이게 유일한 구원의 길인만큼 깊은 묵상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 이건 행간을 읽어야 한다. 거듭난다는 건 생명이 바뀐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생명이 무엇인지 상고해야 한다. 지금껏 이야기한 목적론에 따르면, 생명, 살아있다는 건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 목적을 상실한 휴대전화나 노트북을 두고 '죽었다'라고 말하는 게 그렇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과 살았다는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이 기준이다.

 

생명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기준이고, 그 기준에 순종하는 게 거듭남이다.

 

앞서 성선설, 성악설을 이야기할 때 사람이란 존재는 태어날 때 선악의 정체성이 정해지는 게 아니며, 살아가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순종해야 하는 존재라는 걸 설명했다. 그 순종이 생명이 바뀌는 것, 곧 거듭남이다. 사람이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정한 인생의 목적을 좇아 살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대로 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생명이 바뀌는 거듭남은 자기 선악의 기준으로 살다 하나님이 선히 여기는 창조 목적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인데, 이건 생명이 바뀌는 것이므로, 노력이나 신념으로는 되지 않고 다른 본성을 가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 새로운 생명의 본성은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삶을 이끄는 본성이다. 이 본성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 이것이 거듭남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이 생명 이전은 모두 사망 가운데 있는 삶이다. 육신의 호흡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기준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삶은 사망과 죄의 상태고, 하나님의 뜻이 본성이어야 산 생명이다. 하나님의 뜻하신 목적이 없는 시절에는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삶을 살아간다. 이게 바로 선악과를 먹은 상태며, 자기 자리를 떠난 죄의 상태다. 당연히 사망 가운에 사는 것이다.

 

그 사망의 상태는 창세기 시작에 나오는 혼돈의 상태다.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르면서 이리저리 살아가는 혼돈의 세월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서로 의가 달라 다투고, 바벨탑을 지은 사람들처럼 모두가 위로 가려고 하나 서로의 의가 달라 서로를 용납하지 못한다. 이렇게 방황하는 혼란한 삶의 시절은 어두움의 시절이다. 삶에 대한 밝은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삶에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을 빛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심이 여기 있다. 더 나아가 이 빛이 비췸이 천지창조 시작에 말씀하신 빛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만나므로 삶의 어두움이 끝나고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생명은 잉태하여 태어난다. 마늘 먹는 노력으로 될 수 없다. 노력이나 신념으로 생명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그리스도라는 생명 역시 그렇다. 성경대로 살려는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인 생명, 그래서 그 본성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건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뿐이다. 성경에 이것 외에 다른 법을 말씀하신 게 없다.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지 않는다.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은 말씀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참뜻을 알기 위해 심령에 두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말씀이 생명이 되게 하신다. 이 진리의 법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이셨는데, 그게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예수님 탄생의 비밀인데, 이는 우리가 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걸 보이신 기적이다.

 

성령께서 사람이 듣고 순종한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시키시므로 사람이 거듭난다.

 

우리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초자연적 기적으로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인식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겸손한 듯한 신앙인들의 말에서 기독교인들이 사람과 예수님을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든 모습은 우리가 되어야 할 표상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건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예표로서 일어난 기적이다.

 

사람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을 세례 문답에서 말로 하는 예수 믿는다는 고백으로 얻는 구원의 미사여구 정도로 생각하지만 내 영혼의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 거듭남이 깊은 묵상도 없이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건 아주 심오하고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하는 말씀이며, 그 실체를 알아야 하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이미 어떻게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듣고 알고 있다. 십자가에 구원이 있고, 나를 창조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소식은 다 들었다. 필요한 건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삶 중에 그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미 소식을 들었으므로 심판은 받은 것이다. 선택하지 않으면 멸망이고, 듣고 그 뜻을 알고자 기도하고 순종하면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신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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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데살로니가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로 고린도에 보낸 편지와 비교하면 칭찬이 아주 많은 서신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많은 핍박을 이겨냈고, 말로만 믿는 신앙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으로 큰 확신을 가진 신앙이라고 칭찬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믿는 소망이 있었다. 다만 이런 소망으로 인해 일부가 재림에만 의미를 두고 현실의 무가치하게 여기는 잘못된 신앙에 빠진 데 대해 바울 사도가 두 번째 편지에서 권면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내하는 소망을 칭찬했다. 이는 복음이 지향하는 바로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이 삶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이런 성도들의 모습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보증한다.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는 능력이며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큰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는 하나님의 능력

 

일반적으로 능력이라고 하면 초인적인 능력이나 초자연적 현상을 일으키는 거로 생각하지만, 바울 사도는 사랑으로 수고하게 하는 게 능력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인내가 능력이라고 말씀한다. 사랑으로 수고하게 하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조롱하고 핍박하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인내하는 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하나님 능력의 뿌리는 성령이 주시는 확신이다.

 

사랑의 수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의미 있는 관계 위에 있다. 하나님과 온전하고 의미 있는 관계가 성립된 사람이 표현하는 헌신과 삶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아는 사랑이다. 이는 사람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이성과 사랑하고 결혼한다. 관계의 의미 없이 이성을 만나는 건 매춘이고 음란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란도 이것인데, 자기 짝이 아닌 대상과의 관계가 바로 음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는 수고는 하나님과 관계가 온전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헌신적 수고다. 먼저 하나님의 관계가 정립된 사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온전한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이 서로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특히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는 관계다.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는 사람이 행하는 수고는 당연히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행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는 수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행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는 헌신적 수고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순종으로 준행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순종,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자 목적에 순종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이시러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낮고 천한 자리에서 섬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그 낮아짐과 사랑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낮아져서 섬기는 건 당연히 수고를 수반한다. 여기에 절대적으로 빠질 수 없는 게 있는데 이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낮아짐은 신념과 노력이 아닌 낮아짐이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냐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칭찬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보인 사랑의 수고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낮아진 마음으로 섬기는 본성으로 거듭난 생명의 삶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따라서 오늘 데살로니가 전서를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한다면 사랑의 수고가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섬김의 삶을 소망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망의 인내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한다는 건 예수 그리스도를 바란다는 말로 어렵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망에 대한 약간의 오해를 하고 있다. 세상의 삶에서는 사지 않은 복권의 당첨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웃지만, 사람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창조, 존재 목적과 무관한 것들을 마구 소망한다. 당첨을 바라면 복권부터 사야 하듯,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법과 뜻 안에 먼저 들어가야 한다.

 

또한 소망은 자기 정체성에 종속된다. 양에게는 썩은 고기에 대한 소망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생명,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말씀하심은 우리가 되어야 할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존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한다.

 

이 예수는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가 소망하는 예수는 평안과 풍요를 약속한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평안이 아니라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셨을 뿐 아니라 어떻게 봐도 예수님은 풍요의 아이콘은 아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평안과 풍요를 소망하고 간구하는 건 의미가 없다. 간구한다고 해도 예수님은 관심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건 아버지께서 이미 다 아시는 세계라고 일갈하셨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풍요와 평안을 소망하고 기대하는 사람은 당연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풍요를 약속하는 다른 그리스도다. 당연히 그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 보낸 그리스도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필요로 만든 우상이다. 소망은 정체성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세상의 풍요를 먼저 구하는 사람은 세상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한다는 건, 십자가에서 보이신 우리 정체성을 소망한다는 것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이 칭찬한 소망이다. 즉 세상의 풍요와 평안을 구하는 소망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생의 목적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다. 그건 곧 나를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구하는 소망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하늘의 뜻이 땅(사람)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구할 건 하나님의 뜻이지 세상의 풍요와 평안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 소망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확증한다. 이 소망은 세상에 속한 사람과 달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소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스스로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는 예수와 같은 본성을 소망한다는 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소망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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