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12)

죽을 거라는 나단 선지자의 예언? 책망대로 다윗과 밧세바가 낳은 첫 아들은 태어나자 마자 심히 앓았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벌하시는 일환으로 첫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하셨고,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는 다윗이 하나님께 그 아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식음을 전폐하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일반적인 상황이다. 혹시나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실 지도 모른다는 기대나 무엇이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는데 다윗은 안된다고 말리는 모양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지를 보여주는 상황이다. 다윗은 제사보다 나은 순종, 순종의 본질을 보여준다. 밧세바와의 간음이 우리에게 큰 경계심을 주었다면,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다윗의 모습은 우리에게 진정한 순종의 의미를 알게 한다.

 

밧세바가 낳은 첫 아들의 죽음을 대하는 다윗의 모습은 진정한 순종의 모델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신앙의 절대적인 이슈다. 심지어 선악과를 단순하게 불순종의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선악과는 먹은 행위의 불순종이 아니라 존재의 불순종이다) 순종이 이렇게 이슈가 되는 건 당연히 순종해야 하는 걸 알지만 실제로는 그게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정하고 원하시는 게 어렵게 여겨진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상황이고, 창조주가 하나님이시므로 문제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럼 사람에 순종은 왜 어려울까? 그리고 다윗의 모습은 어떤 측면에서 순종일까? 이번에는 그걸 이야기할 것이다.

 

순종은 결과에 순응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사람에게 순종이 어려운 건 사람이 희망하는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의 믿음은 자기가 소망하는 결과를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걸 믿는 믿음이다. 사람이 원하는 바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전부가 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복 신앙이 된다. 사람이 원하는 게 결국은 육신의 평안과 복락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는 이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알갈했다. (요일 2:16)

 

표면적으로 볼 때 결과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고 대개의 교인들도 그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누구나 알고 있고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결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분명한 명제 앞에 사람은 몇 가지 다른 모습들을 보인다. 이를 굳이 나누어 본다면 3가 정도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1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어차피 해봐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결과가 하나님 손에 있으니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이 집합에 속해 있다. 그런데 다른 한 부류가 있다. 결과는 하나님 손에 있으니 나는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태도다. 밧세바가 낳은 첫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다윗이 바로 그렇다.

 

무엇이든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에 매몰되어 결과를 정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려는 사람과 1달란트 받은 사람 그리고 다윗은 모두 하나님께서 결과를 정하시는 주권을 가졌다는 걸 믿고 있다는 건 같다. 그런데 순종의 관점에서 보면 이 셋은 전혀 차이를 보인다.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순종에 관한 인식의 차이다. 그리고 이 인식의 차이는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 목적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는 지에 따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게 달라지는 것이다.

 

내 존재의 목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과 순종에 관한 인식이 달라진다.

 

먼저 결과를 하나님이 정하시니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결과를 바꾸려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무엇이든 구하면 주신다라는 약속에 주목하고 이걸 순종하는 걸 순종이라 믿는다. 하지만 여기에 어폐가 있다. 그건 무엇이든<무엇>을 사람이 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구하라고 하니까 사람이 그 무엇까지 정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무엇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뜻하신 목적안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걸 벗어나 사람이 하나님께 구할 것을 정하는 건 월권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하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지 사람의 뜻이 하늘을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리고 사람이 구하는 그 무엇은 하나님이 이미 아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정한 무엇을 구하면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주신다는 말씀대로 될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순종이 아니다. 여기에는 순종도 없고, 믿음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어두운 상태다. 엄밀히 말해 태초에 빛이 있기 이전 상태에 가깝다.

 

1달란트 받은 사람으로 비유되는 신앙은 생각보다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런 신앙은 의외로 넓은 신앙 수준의 스펙트럼을 가진다. 사람들은 1달란트 받은 사람을 신앙의 초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욥도 이 범주에 속했다가 벗어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신앙의 장성함과 무관할 정도로 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범위는 넓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 범주에 속할 수 있다.

 

이 신앙은 욥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에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자기가 깨달은 하나님의 정체성 안에 하나님을 가두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상처럼 고정되기 때문에 무궁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모두 믿고 순종하기 어려워진다. 만약에 다윗이 하나님은 말씀하신 건 변개하지 않는 분이라는 믿음에 갇혀 있었다면 당연히 아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1달란트 받은 사람으로 비유되는 신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다윗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몰랐을 리 없다. 나단 선지자가 말했듯이 이것저것 다 받은 다윗은 굳이 무엇이든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에 의지해서 간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찬양의 고백 속에서 다윗이 무엇을 자의적으로 해석해가면서까지 주신다는 약속에 의지하여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들이 죽을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그 아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 단순히 허례허식이 아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간구하는 모습에서 그의 진정성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마음을 바꿀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물론 육신의 생각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들이 죽자 즉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그를 움직이는 신앙은 아들이 살기를 바란 게 기도의 주제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어차피 결과는 정해진 것이라며 1달란트 받은 사람의 마음으로 아들이 죽기를 기다린 것도 아니다. 그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결과에 너무나 깔끔하게, 마치 그게 당연한 듯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순종의 참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신하들이 걱정할 정도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던 다윗은 수근거리는 신하들을 통해 아들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되자 즉시 외관을 단장하고 음식을 차리게 한 다음에 바로 일상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신하들은 놀랐다. 그러나 이는 냉정하고 쿨한 모습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다윗이 그럴 수 있었던 건 자기로선 할 바를 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본성 안에서는 아들이 살기를 간절히 구했고, 하나님이 정한 결과를 손에 쥐었을 때는 또 그것에 순종했다. 자기 할 바를 다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에 충실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없다. 미련과 후회는 순종을 어렵게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한 목적과 그 목적을 주신 본분에 충실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목적의 본분에 충실한 게 순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윗이 충실했던 게 단지 육신의 본성이라고 보면 곤란하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목적을 바로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혈통이 가진 본성이다. 다윗의 모습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이 그리스도의 혈통이 가진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다윗의 행위를 보면서 그걸 본받을 게 아니라 그런 삶과 행동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혈통이 가진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구해야 한다. 본성은 거듭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결국 거듭난 삶을 구해야 순종에 이를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그것이 순종의 근원이고 알파와 오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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