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하나님께 뜻을 묻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헤브론으로 올라가 유다 지파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다. 그리고 한편으론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옹위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으로 내전 상태가 된다. 이 내전에 관해 이전 포스팅에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갈등과는 다르다는 걸 설명한 바 있다.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 다스릴 나라가 없었다. 이는 우리가 거듭난 후에 옛사람을 이겨내는 과정이었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 마주한 내전은 거듭난 영혼이 자기 삶을 하나씩 주관해 가기 시작한 상황이다.
실제로 사무엘 하의 시작부에 나오는 사울의 집안과 다윗의 싸움은 다윗의 군대가 우세하고 승리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의 동생 아사헬이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고 사울을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옹립한 아브넬에게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다윗의 군대가 사울 집안의 군사 360명을 죽이는 등 전쟁은 일방적으로 전개되고, 결국 사사로운 일로 아브넬과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을 아들 이스보셋의 사이가 갈라지게 되고 아브넬이 다윗에게 나라를 갖다 바치게 된다.
이러한 전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의 승리라는 성경의 당연한 전개임에 분명하다. 우리가 좀 더 세밀하게 봐야 하는 건 다윗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다. 이게 누구나 아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건 요즘 말로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는 통념으로 정의될 뿐 그 상세한 실체를 알고 자신이 얼마나 그에 합당한지를 묵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실제 기독교인들이 가진 믿음이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의 정의는 플라톤이 말한 ‘독사 (Doxa,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대중이 관습적으로 옳다고 믿는 신념, 편견, 혹은 사회적 통념)의 영역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서로 통일되고 그렇게 동의한 사람들 각 자가 그 기준에 자신을 비추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다들 그러니까’와 결을 같이 하는 막연한 생각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다윗의 성공적 모습을 볼 때 어떻게 해야 나도 저런 사람이 되는가에 대해 도전은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플라톤이 말한 독사의 영역에 두고 깊이 파고 드는 수고를 꺼린다. 그리고 합의한 게 교회에 출석 잘하고, 헌금 내고, 성경에 있는 말씀 중에 자기가 기억하고 도전할만한 말씀들을 실천하려고 애쓰면 사는 것 정도다. 자기가 설정한 영역 이상의 관심이나 노력을 요구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라고 회피하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다윗의 삶을 묵상하면서 다윗처럼 행동하려는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으로 진행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다윗처럼 되는 도전의 방법으로 ‘행위 모방’을 선택한다. 다윗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지를 분석하고 그걸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흔히 듣는 설교 대부분이 이 맥락을 따른다. 하지만 우리가, 특히 기독교나 종교인들이 간과하는 게 있는데 바로 행동이라는 건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동은 본성이나 생각 혹은 의에 종속된 표현이지 그것이 행동하는 사람의 정체성이거나 의로움의 본질이 아니다. 이 명료한 논리를 간과하기 때문에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행동으로 지키려고 한다.
행동은 생각과 의로움의 표현일 뿐 본질이 아니다.
앞으로 이어갈 다윗의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다윗의 모습과 또 실망하시고 벌을 내리시는 모습을 같이 보게 될 것이다. 그런 다윗의 행위를 분석하여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어떤 행동을 하면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지를 따지는 건 성경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혈통인 다윗의 변화무쌍한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도 일어나는 삶의 모습이란 걸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는 축복도,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모습도 있다는 걸 깨달어야 한다. 이는 어떻게 하든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으려고 애쓰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두려운 일일 것이다.
이 두려운 접근이 가능 하려면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 그건 바로 내가 거듭났다는,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다. 다윗의 삶을 거듭난 사람의 삶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윗이 겪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의 혈통,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윗의 삶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구원을 얻었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처럼 “그런 짓 하면 지옥 간다”라는 말로 알 수 있는 불안정한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는 다윗의 삶을 바로 조명할 수 없다.
다윗의 변화 무쌍한 삶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의 여정을 투사한다.
이제 다윗은 막 왕이 되었고, 7년 6개월의 통치 후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7년 6개월이라면 적지 않은 세월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아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에 입학할 정도의 긴 시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 자기 삶을 주관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지를 설명한다. 그 긴 시간동안 겪는 다양한 일들을 ‘이러다 지옥 가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 없이 견딜 수 있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거듭나야 가질 수 있는 그 믿음은 결국 생명이 가진 본성일 때만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거듭난다고 말씀하신다.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도한답시고 산에 있는 나무를 다 뽑는다고 해도 이 믿음은 얻을 수 없다.
사울의 집안이 세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백전백승하는 다윗의 모습은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결과다. 사람이 노력으로 자기 자아와 본성과 습관을 이길 수는 없다. 모세의 기적을 따라한 애굽의 술사처럼 어디까지는 가능하다고 해도 어느 지경과 수준에 이르면 실패한다. 설사 일만 가지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해도 단 한 가지에서 실패하면 어떤 것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성경을 말씀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많은 노력을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셈이다.
그렇지만 많은 실패에도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었다. 이는 그가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성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골리앗과 맞설 때도,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여러 기회에도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본성을 드러냈다. 이는 그가 많은 실수와 죄를 범할 때도 변함없었다. “죄를 범하는 데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었다고?”라고 반문할 것이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거듭남을 바로 알고 있는 상태는 아니어서 하는 말이다.
다윗의 이야기는 어떤 행동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지를 전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의 여정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이 자기 삶이라는 자기 나라, 자기 세계를 하나님의 의로 다스려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의 모형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볼 때 그저 범죄로 보이는 다윗의 일들은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본성으로 그 삶을 더 온전히 주관해 가는 과정에서 겪는 실수와 또 하나님이 벌하는 죄를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거듭나는 과정에서의 죄와는 좀 다르다. 간단히 설명하면 <존재의 죄>와 <행위의 죄>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 말씀의 ‘목욕한 자’와 ‘손과 발을 씻으면 되는 자’가 이 차이다.
다윗을 신앙의 모델로 묵상하는 건 아주 좋은 방법이고 또 당연한 신앙의 태도다. 그러나 다윗의 행동을 연구하고 따라하는 건 의미가 없다. 내가 다윗과 같은 본성이 아닌데 그걸 따라하는 건 ‘노릇’이자 ‘거짓’이다. 사울의 집안과의 싸움에서 이기면서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가는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다윗을 이끄는 다윗의 본성, 곧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생명의 본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성경의 행간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보이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처럼 내 삶이라는 내가 왕이 세계를 하나님의 의로 다스리는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앙망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대로 사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다. 간혹 “그게 가능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반문한다. “그럴 게 아니면 왜 예수 믿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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