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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재림이 어떤 이들에게는 도적같이 임하는 재앙 같은 일이지만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낮에 속한 낮의 아들이므로 예수님의 재림이 고대하던 일의 성취가 된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빛이신 예수님이 오시는 건 제자리의 회복이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도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낮에 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을 소망하는 투구를 쓴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면 피차 덕을 세우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귀히 여기며 화목하는 사람이 낮에 속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전 5:8)

 

흉배와 투구라면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서서 진리의 띠를 띠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이라는 에베소서 6장의 말씀이다. 두 말씀 모두에 흉배와 투구가 나온다. 흉배는 정체성이다. 대제사장의 의복에 속하기도 하고, 군인을 방어하는 갑옷이자 병사의 보직을 표시한다. 따라서 믿음과 사랑의 흉배, 또 의의 흉배라는 건 믿음과 사랑과 의가 낮에 속한 사람의 정체성이자, 우리를 지키는 갑옷과 같다는 걸 말씀하심이다.

 

믿음과 사랑은 군인의 소속을 표시한 흉배처럼 낮에 속한 성도들의 정체성이다. 사람이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믿음 자체는 물론이고 그 사람의 정체성이 정해진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에 순종하는 것임을 믿는 사람은 존재의 신 여호와를 믿는 것이고, 내가 성경을 지키는 공로를 쌓으면 육신의 복락을 주신다고 믿는다면 그의 하나님은 바알이고,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다. 흉배가 달라진다.

 

사랑은 의미 있는 관계다. 상대를 위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랑의 표현은 대상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서로가 의미를 부여한 배우자 간에 헌신과 희생은 아름다운 사랑이지만, 자기 짝이 아닌 이성과의 관계는 그 자체로 불륜이고 음란이다.

 

특히 사랑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선후를 분명히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먼저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인데, 창조하셨다는 건 창조하시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목적이 피조물인 사람에겐 존재의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낮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존재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된 사람이다. 그 관계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으로 맺어진다. 하나님은 내용이 되고 사람은 그걸 표현하는 육신인 관계다. 이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고 곧 사랑이다. 이걸 믿는 게 바로 믿음이다.

 

또한 구원을 소망하는 투구를 쓰라고 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한다. 머리는 삶을 주관한다. 그러니까 머리는 곧 의(). 앞서 이야기한 대로 사람은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다. 따라서 사람의 의는 자기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 그 자체다. 이게 사람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본질적 모습인 그리스도가 주관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의()는 곧 구원이다. 존재로서 사람은 존재의 목적을 소망해야 한다. 특히나 사람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고 자아를 형성한 유일한 존재다. 그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희망이자 소망은 자기가 존재하는 목적을 아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 목적을 소진하는 게 존재로서 완전함인 반면 목적을 상실하거나 알지 못하면 바로 버려진다. 심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며 살아가는지를 소망해야 한다. 존재로서 존재의 목적을 회복하는 게 바로 구원이기 때문이다. 이 구원, 존재 목적을 회복하는 게 구원이고, 그 목적이 삶을 주관해야 한다. 즉 그 목적이 머리가 되어야 한다. 귀신 들린 자는 그 목적을 상실하여 하나님의 의가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사람의 상징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소망하는 게 구원의 투구다.

 

결론적으로 저의 재림이 도적이 임하는 것 같지 않은 낮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고,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낮에 속한 낮의 아들이다. 이런 사람이 되면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반갑고 기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재림은 절대 심판이 아니라 환희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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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예수님이 오시는 때를 '도적같이' 온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때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적절한가 싶은데, 데살로니가 전서를 보면 이게 아주 적절한 표현이란 걸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의 사건이지만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상태인지에 따라 다른 사건이 된다.

 

도둑은 어두울 때 다니고 누구도 원치 않는 존재다. 그런 도둑같이 예수님의 재림이 사람은 주님이 임하시는 걸 원하지 않는 사람이고, 또 주님이 오실 때 상태가 어두운 사람이다. 해가 없는 어두움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이 없는 어두움을 말한다.

 

예수님이 도적같이 임하는 사람은 재림을 원치 않고 그리스도에 관해 어두운 사람이다.

 

주님의 재림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 정한 하나님의 일인데, 그 일이 도둑이 드는 것처럼 원하지 않는 일이고, 오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어둡다는 건 심판이 임한 것이다. 돌이킬 기회도 없다. 아니 기회를 다 소진한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라면 재림은 앙망하고 원하던 일이므로 그때가 언제여도 상관이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재림은 도적같이 임해서는 안 된다. 물론 하나님만이 아시는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겠지만, 그때가 언제여도 도둑의 방문 같은 느낌이 아니라 군에 간 아들의 기대하지 않았던 휴가 같아야 한다. 어차피 재림의 때는 하나님만 아시는 일이라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면 중요한 일이 아니다. 핵심은 그때가 언제여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 재림에 관한 핵심은 그때가 언제인지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사느냐다.

 

재림이 언제여도 상관없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한 교과서적인 답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다. 바울 사도는 이를 낮의 아들이며 어둠에 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들이 되었으니 예수님에 관해 어둡지 않고, 빛이 있으라 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거듭났으니 또한 빛 가운데 있다.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거듭난 사람에겐 낮에 오시는 게 된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위로한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 역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낮의 아들이요, 어두움과 술 취함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도적같이 오지 않는다. 언제 오셔도 반갑고 기쁜 만남이 된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에 이어 성도의 삶의 모습을 권면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기쁜 사람으로 살 것을 권면한다. 이런 삶은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이라면, 생명이 바뀐 사람이고, 생명이라면 본성이 있어 그 본성대로 산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라는 본성대로 산다. 그렇게 바뀐 존재로 살아간다면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상관없다. 더 본질적으로 보면 그런 사람은 이미 예수님이 다신 오신 사람이다. 결국 낮에 속한, 거듭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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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믿음을 주시지 않는다.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5. 7. 7. 12:01 Writer : 김홍덕

심심치 않게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를 바라는 순전한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는 신이 아니라 약속하시는 신이다. 믿음은 순전히 사람의 몫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약속하시고, 사람은 그걸 믿느냐 아니냐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기드온에게 믿음을 주면 간단한 일인데, 하나님은 믿는 건 기드온의 몫으로 두시고 약간의 기적을 행하시고 기드온이 믿기를 기다리셨다. 이건 비단 기드온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일이 그렇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시진 않았다. 본을 보이시며 따라오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는 신이 아니라 약속하시는 신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경은 약속이다. 오래된 약속인 구약성경(The Old Testament)과 새로운 약속이라는 뜻의 신약성경(The New Testament)으로 이루어져 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도 믿음을 주신 게 아니라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지시할 <>"도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에 나오는 <>은 모두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면, 즉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며 그 길을 가고 행하는 게 사람의 일이고 믿음이다. 믿음은 사람의 몫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가 될 때 이루어진다. 그게 약속의 본질이고 모든 것이다. '지시할 땅으로 가면'은 하나님이 정한 자리로 가면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면' 자유를 누릴 것이라는 게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이 정한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사람의 자리를 정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정하셨다. 그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그게 사람의 자리고, 하나님이 지시할 땅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지시할 땅, 곧 우리가 되어야 하는 모습이고, 삶이고, 존재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른다. 자유가 있으며, 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이 번성하는 곳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그 약속,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인생의 복이라는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게 본분이다. 전지전능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귀하고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우리는 그걸 믿고 순종하는 존재다.

 

사람은 스스로의 순종과 믿음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렇듯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사람이 그걸 믿는 관계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정하신 후 사람을 창조하시고, 성경과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고서 사람이 그걸 믿기를 기다리시는 관계다. 믿음의 주권,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는 사람이 정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셨다. 그렇게 자발적인 순종이 아니면 그건 그냥 아바타나 로봇일 뿐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충성스럽게 여기신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재밌게도 믿음과 충성은 헬라어로 어원이 같다. 약속하신 이를 믿는 게 믿음이고, 약속하신 이에게 그 믿음은 곧 충성이다. ('피스티스' (πίστις, pistis) - 믿음, 신뢰, 확신 vs. '피스토스' (πιστός, pistos) - 충성된, 신실한, 믿을 만한)

 

하나님은 약속을 주고
사람은 그걸 믿고
그 믿음을 충성으로 여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더 잘 믿고 싶어 해야 한다. 그렇지만 믿음은 전적으로 사람의 몫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순종하며 가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믿음을 가지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주셨다. 심지어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들리게까지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걸 하신 것이다. 남은 건 사람이 그걸 믿느냐, 아니냐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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