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교회가 자기 교회는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든 첫번째 이유가 새벽기도회는 샤머니즘의 유산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의 어머니들이 새벽에 정화수 한 그릇을 떠 놓고 새벽에 천지신명께 기도하던 관습이 기독교와 접목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이유를 부가하기도 했고, 새벽에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는 명분으로 샤머니즘의 유전을 언급했다는 건 아주 주목할 주장이다. 그리고 이건 어떤 한 교회만의 독특한 주장이 아니라 많이 알려진 명분이기도 하다. 오늘의 주제는 새벽기도회를 하자 말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가당치 않은 명분에 대한 이야기다.
새벽기도회는 사실 성도들의 삶에 아주 큰 부담을 주는 예배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하루 종일 봉사하는 것과 비교해도 매일 새벽기도회를 참석하는 게 더 대단하고 정성스러운 신앙이다. 그래서 실제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대게 좋은 신앙인으로 인정받는다. 여기에 더해 매일 출근하는 직장인이 그렇게 한다면 정말로 좋은 신앙인으로 인정받는다. 오히려 새벽기도회는 이런 이유, 성도들의 생활에 너무 큰 부담을 주는 예배라서 삼가한다 라고 하면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는 좋은 명분이라 생각한다. 당연히 전통적인 방식대로 하는 게 더 좋은 건 말할 것도 없다.
신앙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성경에 근거가 미약하고 샤머니즘의 유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유지해 오던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는다는 게 교회나 개인의 신앙 순도를 높이고, 좋은 신앙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보일까?
새벽에 기도하는 건 좋은 거라는 단서를 붙이면서도 샤머니즘의 유전적 요소가 있어 새벽예배를 폐한다는 건 사실 자기 모순이다. 형식이 형성되는 과정에 불순물이 있어 형식을 폐한다는 이야기인데, 적어도 이렇게 주장하고, 이런 주장을 실행하려면 모든 형식의 순도가 정결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상세한 분석을 하지 않아도 우리 주변의 교회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다. 교회가 교리로 유지하고 있는 각종 종교적 형식이 순도 높은 신앙 행위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사실은 아니겠지만 학창시절 들은 이야기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수가 담긴 예배 기구에 파리가 빠져 죽었는데, 그걸 두고 예배 집기가 부정해진 것인 지, 아니면 파리가 거룩해진 것인지 논쟁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지금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예배인 새벽기도회의 역사적 고찰을 이유로 샤머니즘을 운운하면서 삼가하는 명분으로 삼는 건 바로 이 이야기와 같은 상황이다.
샤머니즘의 유전이 있다는 이유로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성도들의 기도를 권면하고 있다고 할 때 성도들이 더 많은 기도를 하고 있다고 증명할 수는 있을까? 그리고 샤머니즘의 유전이 있는 예배 형식인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샤머니즘이 되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신앙하고 있다. 이게 참 감동적인 스토리인데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 정도의 방법을 동원하셨다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에 있는 어떤 일이나 방법, 심지어 미신적 요소라고 할지라도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마다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생각해보면 어떤 의를 이루기 위해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게 샤머니즘보다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아마도 이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걸 탈색하고서 보면 아주 패륜적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는 방법 아닐까?
아들을 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샤머니즘으로 여기는 방법이라 할지라도 구원에 유익하다면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샤머니즘적 유산이 남아 있다는 걸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는 이유로 삼고, 그걸 순도 높은 교회의 신앙 수준이라고 떠벌리는 건 한도가 초과된 무식이고, 양심을 말아먹은 자기 모순이며, 뻔뻔함의 극치인 변명이다. 이렇게 말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사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교회는 형식의 본질을 모르면서 이런 저런 형식을 만들고 갖추며 지키고 또 어떤 것들은 비판하면서 터부시하는 뫼비우스의 띠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해적들이 나라에 자수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해적선 안에서 이런 저런 규칙을 만들고 폐하고 집행하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새벽기도회가 형식의 형성 과정에 한국적인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걸 새벽기도회를 하지 않는 명분으로 삼는 건 정말로 무식하고 오만한 생각이다.
새벽기도회 같은 신앙의 부분에 관한 정통성을 따지기 전에 교회의 정통성을 먼저 고찰해야 …
이런 모순들이 벌어지는 데는 교회라는 공동체에 대한 정의와 인정에서부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교회라고 문을 열고나면 그 상태를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면서 신앙적 활동을 논의하기 때문이다. 새벽기도회의 형성 과정보다 먼저 검증해야 하는 건 지금 우리가 아는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가 성경적으로 형성되었는지, 성경대로 행하는 공동체인가를 검정하는 것이다. 교회는 일단 신앙에 대해 바른 정의와 교훈을 낸다는 잠재적 원칙의 검증이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는 교회는 자주 설명한 바와 같이 목회자(목사 혹은 전도사)가 건물을 빌려서 사람을 모아 시작한다. 여기서 교회를 형성하는 중요한 2가지는 신학교를 졸업한 라이선스와 건물 계약서인 셈이다. 이 자체가 나쁘거나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이건 형식이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이름으로 사람이 모이는 것이다. 이게 먼저다. 건축된 집 이전에 설계도가 있고, 설계도 이전에 집 주인의 꿈과 의도가 있다. 목사라는 자격증과 건물 계약서가 새 집이라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사람은 설계도고 예수 이름이 집주인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 집주인의 생각과 같은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거듭난 생명의 이름과 정체성이다. 정리하면 그리스도스로 거듭난 사람의 만남이 교회의 본질이다. 그들이 설령 감옥에서 만난다고 해도 교회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의 유산이 남아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교회의 본질적 모습이 있다면 새벽기도회든 철야기도회든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건 교회 본질에 대한 도전이지 정결한 신앙이 아니다. 본질이 아닌 형식으로 형성되고 지어진 교회라서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이다. 콩 심은 데서 콩이 난 것이다.
본질을 잊은 형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교회가 자기들 일부의 형식을 부인하면서 자기 의로움을 삼는 건 아주 교활한 논리다. 이건 분명히 멸망의 가증한 것이 교회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의 만남부터 교회라는 걸 인정하고 바로 믿는다면, 형식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샤머니즘의 유산을 따랐다며 형식을 꼬투리 잡을 요량이라면 진설병을 먹은 다윗의 일을 성경에서 지워야 할 것이다. 태양신과 관련 있다고 알려진 크리스마스와 성탄절도 교회 달력에서 지워야 할 것이다. 참으로 멍청하고 한심한 노릇이다.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6)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엇을 하느냐? 어떤 형식을 따르는 지로 신앙의 순도가 결정되지 않는다. 거듭난 생명이 된다는 건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관한 것이다. 괜히 네가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하신 게 아님을 상고해야 한다. 내가 온전히 거듭난 생명인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존재라면 새벽기도회를 나가면 예배가 되고, 거듭난 사람이나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만나면 그곳이 술집이라고 해도 교회가 된다. 이런 믿음도 없다면 교회 때려 치워야 한다. 따지고 보면 형성 과정에 허물없는 예배나 교회의 예식이 없을 텐데 그 하나하나를 이유로 할지 말지를 정하는 게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을 넘어 무식이다.
무엇을 할지가 아니라 네가 또 내가 누구냐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이다. 이걸 모르고 어떻게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나? 그런 믿음을 나누는 곳을 교회라 할 수 있겠나?
'주제별 성경 보기 > 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검은 박스, 흰 박스 (0) | 2024.03.10 |
|---|---|
| 코로나로 드러난 교회의 밑천 (1) | 2021.10.29 |
| 모임에 즈음하여... (0) | 2019.01.11 |
| 신앙과 교회의 변질 18 –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0) | 2018.08.12 |
| 신앙과 교회의 변질 17 – 변질된 신앙이 주는 착각 (0) | 2018.08.1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