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6장)
엘리 제사장의 때에 블레셋과의 전쟁에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실로의 하나님 성막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장으로 가져갔다가 패하면서 블레셋에게 빼앗긴 이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까지 두 사람의 집에 머문다. 한 명은 하나님과 충돌한 웃사의 아비 아비나답이고 또 한 사람은 웃사와 충돌 후 임시로 거한 오벧에돔이다.
언약궤는 엘리의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아 자기들의 신 다곤의 신당에 두었는데 자기 신 다곤의 머리와 손이 잘려서 언약궤에 절하고, 지역 사람들은 독한 종기가 나서 사망과 괴로움을 당하는 일을 겪자 멍에를 매지 않았고 젖 먹이는 새끼가 있는 암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임의로 두었더니 레위인의 땅 벧세메스에 이르렀고, (이때 사람들이 언약궤 안을 들여다보다가 죽는 일도 생긴다) 이후에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렀다. (삼상 6장-7장 초) 아비나답은 아들 엘리아살을 구분하여 언약궤를 지키게 했다. 하지만 성경에는 축복을 받았다는 등의 기록은 없다. 기록이 없다고 복을 받지 않은 걸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아비나답의 다른 아들 웃사는 언약궤를 만지다 즉사한다. 반면에 오벧에돔은 웃사의 사건 이후에 언약궤를 자기 집에 머물게 했다. 이건 다윗의 결정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오벧에돔은 온 집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아비나답은 사울 시대의 사람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언약궤에 무관심했다. 사울은 제사장 엘리의 때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 실로의 성막에 있던 언약궤를 전장으로 가져왔다. 언약궤를 전쟁을 이기게 하는 신성한 힘으로만 생각했다. 하나님 언약의 본질보다는 신성하다는 외모만 취하려 했다. 이를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귀산 내쫓겠다고 십자가를 들이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울의 시대,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던 언약궤는 하나님의 언약이 바알레유다, 즉 바알의 가치관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오벧에돔에 머문 언약궤는 상황이 달랐다.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는 바알의 가치관으로 지킬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하고, 바알의 성읍에서 시온으로 가져오는 과정 속에서 오벧에돔의 집에 머물렀다. 하나님의 언약이 바알의 가치관이 아니라 시온의 가치관 안으로 회복되는 과정에서 머무른 것이다. 아비나답과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언약을 대하는 두 가치관의 차이인 것이다.
아비나답과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떤 가치관으로 보는 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보여준다.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언약궤는 바알의 가치관, 즉 세상에서 높아지고 승리하는 가치관으로 대하는 신앙을,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언약궤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시온의 가치관 아래에 있는 신앙을 대변한다. 시온의 가치관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맞게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의지하는 가치관이다. 이는 다윗이 시온으로 언약궤를 모셔오는 가치관이며, 우리가 가져야 할 가치관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오벧에돔의 집에 언약궤가 머무는 동안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안에 복을 내리셨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이 복을 자기들이 세상에서 원하는 복으로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사람의 일반적인 복과 다르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그 복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바로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이다. 천국을 얻고 땅(사람)을 얻는 복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언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주시는 복은 천국을 얻고 사람을 기업으로 받는 복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힘입어 세상에서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며 육신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사실상 이걸 믿는 믿음이다. 억까라고 생각한다면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된다. 하늘의 뜻이 땅인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는지, 자기가 바라는 게 하늘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지를 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아비나답의 집에 두고 있는지, 오벧에돔의 집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을 얻는 복은 그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한가지 극적인 반전이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언약을 바알의 가치관 아래 두었구나!’라고 고백하는 순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자기 가치관이 그릇됨을 알려면 하나님의 언약에 관해 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언약을 바로 보이셨다. 십자가는 바알의 가치관과 달리 낮아지는 게 귀한 가치관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바로 믿는다는 건 십자가의 가치관, 곧 낮아지는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 > 사무엘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무엘 하) 10. 하나님과 충돌한 웃사 (0) | 2025.12.27 |
|---|---|
| (사무엘 하) 09. 바알의 성읍에 있던 법궤가 돌아오다. (0) | 2025.12.20 |
| (사무엘 하) 08.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다스리는 나라 같은 삶 (0) | 2025.12.18 |
| (사무엘 하) 07. 그리스도의 본성에 굴복하는 불순종 (0) | 2025.12.17 |
| (사무엘 하) 06. 하나님이 사랑하는 다윗의 삶을 바로 보자. (0) | 2025.12.0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