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5)

사울의 아들과 군대 장관 등 따르는 남은 자들이 모두 죽게 되자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다윗을 왕으로 옹립한다. 그리고 나라가 강성해진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여 굳건한 성벽을 쌓고, 두번의 블레셋 침략을 물리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다윗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나라와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내가 바뀌면 내 삶이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오매불망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앙망한다. 아쉽게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보다 그 삶이 가져오는 축복이 목적인 사람이 더 많지만 어쨌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 이런 사람들의 소망이 이루어진 시대가 바로 다윗이 통일 왕국의 왕이 되고, 수도를 굳건하게 하고, 이방 외세 블레셋을 물리치는 것으로 설명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소망하는 모습이다. 각사람의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주관하는 삶의 모습이다.

 

개략적인 성경의 기록으로 추정하면 다윗이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후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거의 22년 정도라고 한다. 그가 70세에 죽었다는 걸 감안하면 인생의 긴 시간을 사울과 다투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이, 거듭난 심령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지경에 이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건 비단 다윗만 그런 것도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거의 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과정을 겪었다. 연단의 과정은 아니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도 육신으로 30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다.

 

우리가 그렇게 소망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건 어떻게 보면 내 짐은 가볍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상충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을 길게 연단하시려 하셨다고 하기 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고 겸손한 관점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하신 걸 보면 우리가 자기가 옳다는 대로 육신의 세월을 많이 살면 살수록 하나님께 멀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에 가깝다. 오죽하면 ‘40이 넘으면 죽는 게 변하는 것보다 빠르다라고 할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에 이끌려 살기에 그 생명이 자람에 따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랑스러워지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면 다윗이 나라를 굳건하게 하고 외세를 쉽게 물리친 지경에 이른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장성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장성하다는 것은 전쟁에 나가는 나이 기준과 같아서 전쟁에 나간다는 건 자신 외에 다른 사람과 나라를 지키는 역량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아주 쉽게 말하면 복음을 자기 삶을 주관하는 것 이상으로 차고 넘쳐서 남에게 전하는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이 장성함의 실체는 통일 이스라엘을 굳건하게 세워가는 다윗을 통해 깊이 알 수 있다. 우선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다. 먼저 수도를 정했다는 건 나라를 대표하는 중심점을 정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수도의 이름은 예루살렘이자 시온이라고 했다. 시온은 정확하게 어떤 지명이고 하기 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을 일컫는 대명사다.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있지만 사실 the Mother는 실체가 없듯이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곧 시온이다. 그리고 그 시온성 예루살렘의 이름은 평화의 성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평안이 있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의가 굳건히 다스리는 나라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수도고, 그렇게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평안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주관하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 심령에는 하나님이 거하셔서 우리 삶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건 곧 평안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 주신다고 하심을 기억하면 된다.

 

 

그리고 이건 우리가 경험적으로 또 신앙적 상식으로 체휼하는 부분이다. 마음이 하나님을 인하여 평안하면 그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있어 평안하다. 세상이 망하지도,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에 들게 하는 이방인의 철학과 세상의 가치가 여전하긴 해도 그들이 침략을 한다면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친 것처럼 언제나 이길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세상을 이기게 된다.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을 굳건하게 세우는 모습은 이렇게 사람이 자기 인생이라는 나라와 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모습으로 잘 설명되어 있다. 이게 우리가 꿈꾸는 삶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에 이르는 방법은 없다. 존재가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삶이 되는가?’에 관심을 가지겠지만, 성경은 어떻게가 아니라 누가’, ‘어떤 존재, 어떤 사람이 그런 삶을 사는 지를 보신다. 방법으로는 다윗이 보여주는 굳건한 이스라엘과 같은 삶을 얻을 수 없다. 방법이란 굳이 설명한다면 그건 거듭남밖에 없다. 생명이 바뀌지 않으면 자기 삶을 주관할 수 없다. 의지와 신념과 노력으로 말씀대로 살려 해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걸로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생명의 삶이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그 삶을 누릴 수는 없다.

 

앞서서 다윗과 사울을 비교할 때 수 없이 다윗은 방법이 아니라 존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걸 설명했다. 성경 어디에도 다윗의 어떤 공로가 그리스도의 혈통과 관련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혈통이라는 말은 존재와 생명의 본성이 그렇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건 다윗이 그리스도와 영적 유전자가 같은 생명 본성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떤 방법으로 다윗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에 이를 수는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으로 나서 그 생명이 자기의 영혼을 다스리기에 충분하고 영적인 권능이 넘쳐 장성한 군인처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끼치는 사람이 되기까지 자라는 게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삶이다. 그러므로 거듭났는데 나는 왜 이럴까?’ 낙심할 이유도 없고,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함에 이르려는 것도 불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거듭남이라면 잠잠히 서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기다리고 보면 된다. 그게 진정한 순종이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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