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옹립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브넬 자신이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걸 명백히 알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아브넬이 사울의 첩 리스바를 취한 것이다. 이에 촌수로 따진다면 자기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의 첩을 범했다는 사실에 분개한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따졌지만 오히려 아브넬은 자기가 왕인 이스보셋 너를 다윗의 손에서 구했는데 은혜를 모른다는 식으로 적반하장식으로 화를 내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분개한 아브넬은 다윗에게 나라를 갖다 바치게 된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전쟁으로 나라를 정복하면 그 나라의 왕비와 왕의 첩들을 취하여 정복의 권세를 과시하였다는 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아브넬이 사울의 첩을 취했다는 건 이와 같은 맥락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스보셋이 왕으로 있지만 실질적으로 자기가 왕이라는 걸 과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이스보셋이 문제 삼자 다윗에게 가서 나라를 바친다고 말하는 것 역시 자기가 북 이스라엘의 주인이라는 과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아브넬의 끝은 좋지 못했다. 이전에 다윗의 군대와 싸울 때 크게 패배했지만 자기 막내 동생 아사헬을 죽인 일로 아브넬을 죽이겠다고 다짐한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게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이스보셋 마저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므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오늘 이 과정에 있었던 몇몇 일에서 사건 자체가 주는 교훈을 조명해 보자.

 

성경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신토불이라는 말처럼 상황은 존재에 맞게 전개된다. 생명이 자기 본성대로 행하므로 주변의 상황이 종속되는 것과 같다. 대표적인 일로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시 시작한 시점을 성경은 세례 요한이 잡히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시는 일이다. 사울이 죽었다는 걸 선언하고서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기록한 사무엘 하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울의 잔당이 스스로 궤멸하는 것을 끝으로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조명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봐야 한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4-15)

 

우리가 오랫동안 이야기해 왔듯이 사울은 불순종의 자손이자 대표다. 하나님께 자기가 볼 때 좋은 것으로 드리려는 마음은 어떻게 보면 기특해 보일 지 모르지만 그건 사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실체와 같은 모습이다. 내가 옳다는 것으로 살아가고,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거울이다. 내가 옳다고, 내가 좋다고 판단하려면 자기 안에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게 선악과를 먹은 상태다.

 

사울의 잔당들이 서로 자멸하는 과정은 모두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판단에 따른 것들이다. 아브넬이 사울의 첩을 취한 것도, 이스보셋을 죽인 레갑과 바아나도 자기 생각에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지고 다윗에게 가면 상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이스보셋을 죽였다. (삼하 4:5-8) 물론 그들은 사울과 요나단을 죽였다고 거짓말을 한 아말렉 사람처럼 다윗이 죽여 버린다.

 

사람들은 사람들 간의 싸움에 여러 이유를 찾지만 사실 사람들의 갈등은 단 하나의 이유에서 비롯된다. 바로 내가 옳다라는 것이다. 그 주어가 나라가 되면 전쟁이 된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싸움과 갈등과 죄는 피조물인 사람이, 존재의 목적을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 것이 옳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하므로 비롯된다. 그래서 선악과가 원죄다. 사람이 스스로 무언가를 선과 악으로 나누어 판단하는 기준을 가진 이상 언제나 죄인이다.

 

사람과 세상의 모든 갈등의 원인은 “내가 옳다”라는 것이다.

 

결국 사울의 후손과 잔당들은 평생 다윗이 보살핀 므비보셋을 제외하고 모두 죽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이스라엘은 통일되고,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이 일을 우리의 영적 관점으로 조명할 수 있는데, 우리 안에 있는 내가 옳다라는 주장이 모두 소멸되어야 나의 삶을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주관하는 진정한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주목할 게 있다. 이 사건들이 사울은 옛사람이고 다윗은 새사람이며, 사울이 죽었다는 건 이제 새사람이 내 삶을 주관한다는 관점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 보면 거듭난 사람 안에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하는 마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인가? 라는 걸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의문은 구조적 관점에서 보면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다른 점이 있다. 사울이 왕인 시절, 우리 인생이 옛사람의 주관 아래 있을 때와 아주 다른 게 있다.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은 사울의 첩을 취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옹립해서 왕으로 세웠지만 자기가 나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옳다는 생각이 다윗을 향한다. 다윗에게 나라를 바친다. 여기서도 나라가 자기 것인 양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스보셋을 죽인 레갑 형제도 이스보셋의 머리를 다윗에게 가져갔다. 불순종의 아이콘인 사울의 잔당이자 주모자들이 자기가 옳다는 생각의 공로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다윗에게 바친 것이다. 거듭난 삶을 사는 사람에게 잔당처럼 남은 내가 옳은 대로 행한 것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본성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브넬과 레갑 형제는 모두 다윗에게 와서 죽임을 당한다. 아브넬은 이전에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의 동생을 죽였었는데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었던 요압이 나라를 헌납하러 온 아브넬을 죽여 버렸고, 레갑과 바아나는 사울을 죽였다고 거짓말한 아말렉 사람과 같은 이유로 다윗이 죽여버렸다. 사울의 잔당들이 자기 생각에는 옳다고 한 일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다윗에게 심판을 받은 것이다.

 

거듭난 사람 속에 있는 불순종은 그리스도의 본성 앞에 심판 받아 사라진다.

 

우리가 옛사람의 주관 아래 있을 때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그리스도의 본성에게 심판 받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옛사람이 나의 인생이라는 세상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내 인생의 주인인데 그걸 내 인생이 심판하거나 제어할 리가 없다. 하지만 다윗이 왕이 된 지금, 그러니까 내가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본성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된 다음에는 다르다. 내 안에 내가 옳다는 생각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세상이다. 그런 생각들은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 앞에 모두 심판을 받는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본성이 내 삶을 점점 주관해 간다. 다윗도 그렇게 과정을 거쳐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우리는 거듭났다고 믿으면서도 내 안에 있는 옛사람의 본성들로 인해 죄책감을 가진다. 하지만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런 생각들이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한다. 이게 믿음의 승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을 이긴 이김이다. 이런 경험들이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라게 한다. 이런 매커니즘이 가능한 건 새사람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이기에 자라고, 자라는 만큼 본성이 강해진다. 당연히 세월도 필요하다. 우리가 80살까지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곰이 여자가 되는 것 같은 드라마틱한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육신의 삶이 가진 모든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라면서 하나씩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 앞에 굴복하며 내 삶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을 이루도록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자리를 떠난 것이고, 회개는 가던 길을 돌아 가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물으신 하나님의 질문,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 앞에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가 되는 것, 그게 거듭남이고, 내 삶이라는 한 세계를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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