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 110

사도와 성도가 서로 그 사정을 아는 것은 같은 생명의 본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면 동상이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도들을 세상의 가치로 낮아지는 것을 전하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힘입어 세상에서 잘 되려고 하는 것이 바로 동상이몽인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생각이 다른 동상이몽은 해프닝이 아니라 죄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성도가 같은 생명의 본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 이는 서로에게 위로가 됩니다. 모든 위로의 시작과 본질은 같은 형편에 속한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가 자신을 이해하는 같은 족속이라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와 다른 예수님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신비한 능력을 가졌으니 그럴 수 있지?”라고 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되지만 우리는 사람이니까 노력할 뿐이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능력이 자기가 바라는 문제 해결로 위로가 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동상이몽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의 사정을 알기 원하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 성도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은 이와 같이 바울사도의 심령과 성도들의 심령이 동일하고, 본성이 동일하고, 가치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옥에 갇힌 사람이 위로가 된다는 것은 성도들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위로를 전하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된 연고를 인하여 세상의 가치 앞에 종이 되어 육신을 소비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사정을 아는 것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바울사도가 옥에 갇혀 곤고한 중에도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하나님을 빌어 육신이 평안하고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자신의 꿈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곤고함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옥에 갇히면서까지 복음을 전한 것과 같이 세상에서 힘들더라도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고 살면 육신의 복락은 물론이고 천국에서도 금면류관을 쓰고 다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형편은 그것이 아닙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한 것을 원인으로 옥에 갇혔다는 것은 세상과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사회와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심판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반대로 낮아지는 것을 의로 여기는 탓에 옥에 갇혔는데 그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을 육신으로 지켜서 세상이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 여기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가당치 않은 것인데도 오늘날 그것을 신앙의 골격으로 삼고, 그 방법에 대한 학문이랍시고 신학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바울사도의 사정과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바울사도를 감옥에 가두는 가치관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옥에 갇힌 것을 가지고 오늘날 자기 신앙의 위로를 삼는다는 것은 도적질인 것입니다. 자기 것 아닌데 자기 것인 양 하니 그것이 도적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의 전하는 바와 같은 의를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 성경을 믿고 아는 기본이자 모든 것입니다. 바울사도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이 하나님의 의가 충만하고 그것을 전한 것이고, 그 전한 것을 순종한 사람들은 또한 같은 의를 가진 사람이기에 서로가 같은 생명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의 형편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축복이 유효한 것입니다. 낮아지는 의를 가진 자의 축복이 유효하고 복이 임하려면 단연히 낮아지는 가치를 가진 생명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에베소서와 또 성경을 대함에 있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사도들과 자신의 정체성이 동일한지부터 솔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자신은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제 아무리 성경을 다 외우고 행동으로 지켜낸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낮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전하는데, 하나님을 힘입어서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더 이긴 자가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사도들과 정체성이 같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정체성이 다르다면 사도들의 사정도 위로도 아무 의미 없고 축복도 전한 말씀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먼저 사도들과 본성과 가치관이 같은 생명이 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인생의 목적이 되는 것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사도들의 서신서의 진정한 수신자요, 그 위로와 말씀과 축복이 의미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에베소서를 마칩니다. 그간 구독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편부터는 유투브를 통해 한 번 공지한 바와 같이 <질그릇의 선택>이라는 제하의 책을 쓰는 과정에서 먼저 일부를 조금씩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일이 없다면 한동안 성경책 한 권을 이어서 강해하는 것을 잠시 쉬게 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다만 그 사이에 이미 기록된 글을 일부 전자책으로 편집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급적 큰 공백없이 계속 글을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늘 감사한 말씀을 드리며 에베소서를 마칩니다. 


에베소서를 비롯한 사도들의 모든 편지는 대부분 서신의 목적과 수신자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에 보낸 이 서신도 에베소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은 바울사도와 같은 생명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사도가 서신의 마지막에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당부고 그것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과 바울사도가 본성과 추구하는 것이 같다는 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같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종이 되고 갇힌 바울사도와 같은 생명을 가지고 같은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에베소서의 수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것을 성경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사도가 에베소교회에 보낸 이 서신을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 예수님께 육신의 평안을 구하면서 그 대가로 옥에 갇힌 바울사도의 서신대로 행함을 드리려고 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사정을 에베소의 성도들 그리고 오늘날 에베소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서신을 기록하고 그것을 두기고라는 사람을 통하여 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기고는 에베소서 외에도 사도행전 등에도 나오는데 트ᅟᅳᆨ히 골로새서 마지막에도 바울사도의 형편과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언급됩니다. 즉 두기고는 바울사도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사도가 자신의 사정을 왜 알리려고 하는지 또 그렇게 알리고자 하는 사정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에베소서의 기록 목적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에베소서의 수신자들의 성격과 연결된 것입니다. 바울사도와 의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 바울사도의 사정을 알 이유도 관심도 없을 것이고 위하여 기도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에베소서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사도의 사정은 옥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옥에 갇힌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복음을 전한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 표면적인 이유를 성도들이 알기 원해서 바울사도가 자신의 사정을 알기 원한다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날은 전도한다고 옥에 갇히는 일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없기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이 알아야 할 사정은 아닌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성도들이 알기 원하는 자신의 사정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를 지는 삶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것은 그 삶을 인하여 마치 옥에 갇힌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삶을 육신의 정욕이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중에는 원치 않은 곳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어떤 사정인지를 성도들이 알기 원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것은 큰 비밀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추구하는 어두운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큰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보물찾기를 위하여 감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놋뱀과 같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므로 그것을 제대로 보기만 하면 자신의 것이 되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기에 보이지 않아서 비밀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사형수가 되어 돌아가셨는데 그 예수님께 세상에서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을 구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비판이나 비난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질적인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그렇게 날 선 공방을 하신 것들이 유대인들의 신앙과 세태에 대한 비난이나 책망이 아닙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의 일부입니다. 온전한 것을 전하면 온전치 못한 것은 다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속한 사정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사정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과 다르면 말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가 바로 바울사도가 성도들이 알기 원하는 사정의 본질인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매인 것임을 알기 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였다는 것을 자유의 구속이라고 터부시하지만 의외로 많은 것에 스스로 매이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성간의 사랑과 결혼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자녀를 원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삶의 좌지우지하는 구속인데 그것에 스스로 매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기도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와 같이 어떤 매임은 그것이 옥에 갇히는 것과 같이 강력한 구속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아니 오히려 스스로 그것에 매이려고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인자는 다음이 아니라 본성입니다.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본성이 아니면 자기 육신이 상할 것을 뻔히 알면서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된 모습을 보여주면 타고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도 자신들을 복음 전하는 것에 보내달라고 간구하고 심지어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고 마음도 먹어 봤는데 마음이 불타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본성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을 그렇게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도, 바울사도도 스스로 매인 자가 된 것도 다 이를 인함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서신도 바로 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도, 곧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사정을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운명도 바울사도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치 않는 것으로 띠 띠우고 끌고 갈 것이니 그리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도 싫지만 인류를 구하려면 해야 하는 것이라서 예수님께서 신념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본성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갔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예수님을 전한 사도들이 알기 원했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사정이 자신들에게 동일하게 임했고, 그 본성이 자신의 삶을 이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사도가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알기 원했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삶의 사정인 것입니다.


전신갑주의 말씀 끝에 바울사도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서 성도들과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 간구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쇠사슬에 매여 옥에 갇혀 있지만 그것 또한 복음을 위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바울사도가 감옥에 있으니 두려워서 걱정되니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육신을 가졌으니 그것이 두렵지 않을 리는 없지만 바울사도가 자기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바울사도나 다른 사도들만의 일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것은 추구하는 바가 같아야 합니다. 스포츠 경기 하나만 두고 봐도 자신이 이기기를 바라는 팀이나 선수를 응원합니다. 그 선수야 당연히 이기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이기고자 하는 것이 같을 때 응원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것을 추구할 때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다른 것을 추구하는데 위하여 기도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서를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전하는 편지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에베소서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가지고 계셨던 그 예정하신 뜻이 자기 본성이 되었기에 그 생명 안에(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사도도 그 생명 안에 있고, 다만 그 생명 안에서 장성한 자로서 이 생명에서 자라나면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먼저 겪고 그것을 권면하는 글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사도와 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같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나 바울사도 또 모든 사도들의 육신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거지처럼 살다가 사형을 당하고, 당시 최고 신분인 로마시민권을 가진 바울사도도 옥에 갇히고 풀리기를 반복하다 죽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과 사도를 위하여 기도한다면 적어도 그들과 삶에 대한 가치관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축복을 받고 이 땅에서는 물론이고 죽어서 천국가면(갈 수 있을지 모름)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무거운 금 면류관 쓰고 다닐 것이라고 믿는 것이 과연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삶과 궤를 같이 하는 삶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같지 않다면 바울사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나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세계와 가치가 다른데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물론 그 뿐 아니라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보이고 전한 삶과 가치가 다른데 그들의 복음을 아무리 믿노라 소리치고 수십 년 신학이랍시고 공부를 해도 별다른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런 것은 자기 생각에 신앙이고 하나님 믿는 것이지 하나님과 아무 상관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버젓이 오늘날 정통신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사도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건구해 주기를 바랐던 그 기도를 오늘 서로 중보기라며 또 축복하노라며 기도하고 서로 위하여 간구하고자 한다면 예수님과 사도들과 의와 생명과 가치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계와 의와 생명이 다른데 하나님의 의와 복과 생명을 서로를 위하여 간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전신갑주는 아주 유명한 성경말씀입니다만 많은 사람들은 각각을 하나의 요소로 구분해서 봅니다. 그러나 이 전신갑주는 옵션처럼 추가로 신앙에 장착하는 것이나 단계적으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 그 자체가 권세와 악한 영들에게 이기고도 남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항상 변함없이 이기는 존재가 되려면 세계가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같은 파이를 다투는 사람들에게 있어 어떤 신을 믿느냐와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추구하는 바가 같기 때문입니다. 추구하는 바가 같고, 그 추구하는 바를 얻기 위하여 힘을 빌리고 싶어 하는 신들도 결국은 같은 속성을 가진 종족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동일하다면 부처가 되었든 산신령이 되었든 하나님이 되었든 결국은 다 같은 종족에 속한 신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전신갑주라는 것의 시작에서 이것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싸움의 목적이 육신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에 병이 들면 병마라고 하는 식의 접근으로 이 말씀을 온전히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것이 전신갑주를 입고서 맞서야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이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이 육신이 바라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과 연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신앙과 잡신과 무엇보다 세상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도 탐하는 파이인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병을 병마로 보는 것과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생각이 오히려 전신갑주를 입고 맞서야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평안이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잡신들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부처나 바알이나 산신령이나 모두 자신을 믿는 이들의 육신의 건강과 사업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베푸는 신이라 믿고 바라듯이 하나님께 같은 것을 기도하고 바라면 하나님은 거룩하지도 않고 유일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신은 널리고 널린 것입니다. 우리가 다투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중 권세를 잡은 자들의 악한 생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형태를 보면 물 컵만 엎어져도 혹시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 것이 없는지 돌아봅니다. 물이 쏟아지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치 않는 것인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호를 보내신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행위적 신앙으로 매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당연히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성취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회칠을 합니다. 세상이 귀하게 여기니 하나님도 귀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온 생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도 모를 순환 속에 갇혀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 어느 순간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한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생각,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얻으려고 하나님께 무슨 행동을 드릴지 알려고 하고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고 맞서야 하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기 바랍니다. 말씀을 가진 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택의 순간에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나, 성경말씀을 유념하므로 육신의 욕망을 잘 절제하게 되고 모범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하고 많이 보므로 필요한 순간 성경의 말씀이 자신을 충분히 통제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어떤 이들은 훈련이라 생각합니다. 반면에 성경은 그 과정을 성육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쌓여서 아는 것이 행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므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봐야 합니다. 예수님과 말씀의 관계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책이 예수님으로 변신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셨는데 그 육신의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육신은 형식이고 그 내용이자 본질이며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이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선택의 순간 어느 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를 고민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근원적인 뜻입니다. 선택의 순간에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아주 작은 잔가지이고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이란 존재에게 뜻하신 하나님의 뜻은 나무의 유전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신 뜻,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을 표현하는 것이 육신이라는 형식 안에 내용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진다는 것은 본성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빼앗기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영성이 약해지고, 성령의 능력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가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종과 아들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종은 자기 행할 일을 하지 않으면 쫓겨나고 밥도 못 먹게 되지만 아들은 어떻게 해도 아들이라는 그 연결고리가 끊어질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을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의 본성이요 목적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목적으로 삼으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잉태하심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하실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 곧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 뜻이 사람 안에 순종되었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본성과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능력이고 본분인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