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224

(창세기를 마칩니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1. 24. 07:00 Writer : 김홍덕

창세기는 세상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를 이 우주만물의 시작, 그 물리적인 시작에 대한 말씀으로만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 창세기는 그것을 말씀하시고자 우리에게 주신 책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역시나 자신의 피조물인 사람들에게 공치사나 하시자고 이 책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세계, 한 사람에게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천지창조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말씀하신 책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서 ‘이 세상의 물리적 시작을 고찰하고, 이 신비한 우주를 창조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에 그친다면 참 아까운 일입니다. 1억을 주고서 커피 한잔 사 먹은 꼴보다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시작이 물리적 세상의 시작이라고 말하기에는 당장 창세기 1:2절만 해도 혼돈스럽습니다. 아직 빛도 창조되지 않았는데 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비단 그것이 아니라도, 물리적으로 어떤 시점을 시작으로 본다고 할 때 그 시작 전에 시간이 없었던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창세기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천지만물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세상입니다. 이 두 번째 세상은 우리 사람들 사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컴퓨터의 세계, 인터넷 세상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어떤 안목과 관점, 그리고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조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세계 역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보는 안목과 특히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창세기의 핵심은 바로 그 세계인 것입니다.


물리적인 세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또 아담의 죄가 어떻게 나에게 유전되었는지? 와 같은 문제들은 성경의 형식만 보는 관점입니다. 책과 말 그리고 언어와 글자는 그 표현된 형식이나 문자가 본질이 아닙니다. 핵심은 그렇게 표현한 의도인 것입니다.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죽자는 이야기가 아니듯이 성경 창세기도 물리적인 세상의 시작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육신으로 나서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살거나 자기가 가공한 하나님을 믿다가 온전한 하나님을 만나서 공동체에 대하여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안목이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하나님의 의와 경륜이 표현된 책이 바로 창세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객관적 사실로 믿는 것이나, 물리적 세상의 이야기나 또 혹은 아주 어리석게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한 것이라고 읽고 공부하고 이해했다면, 더 나아가서 그렇게 창세기를 껍질로만 보는 안목으로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복 받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이 또 야곱이 어떻게 부유하게 되고 인생의 위험을 이겨 내었는지와 같은 것으로 본다면 심청전을 읽고서 효도하려면 바다에 빠져야 한다고 이해한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는 야곱의 식솔들이 애굽에 정착하게 되므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들이 종살이를 하게 되므로 그 고통이 심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나타나서 출애굽하는 과정을 말씀하십니다. 이 과정은 창세기와는 또 다른 관점입니다. 창세기는 한 개인과 족장의 시대였다면 출애굽기는 민족과 나라의 시대이고, 창세기에는 율법이 없었지만 출애굽기에는 율법도 주어지고 심지어 출애굽 과정에서 걸어가는 대형조차 규정된 책입니다.


그렇게 이어진 출애굽기는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이 체계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야 아브라함에게 또 야곱에게 약속하신대로 큰 민족이 되어 나라를 이루게 되는 과정을 보이십니다. 이러한 장대한 여정을 우리에게 성경으로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가 한 개인에게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시작으로부터 그런 사람들과 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수용해가는 안목을 가지므로 공동체로서 살아가는 안목과 심령과 순종하는 마음을 주시는 여정을 말씀하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서 나라가 되기를 하나님이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나라라고 하니 어떤 정치적인 색채를 띤 조직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의가 다스리는 곳입니다.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어떤 의가 있고 그 의에 자신의 삶을 맡긴 사람들이 모일 때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하나님의 세계, 곧 창세기의 모든 말씀이 자신의 삶이 된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을 그렇게 이끄신 하나님의 의를 서로 나누므로 하나님의 의가 영광을 받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어떤 지역을 차지하고 설립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영토를 가지고 국가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니듯 교회도 반드시 어떤 건물과 형식으로 모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에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두는 사람, 그들이 인생으로서 취할 수 있는 방법들 중에 삶의 조건과 형편에 맞게 모이고 하나님의 의를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구하는 곳이 바로 교회고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세기를 끝내면서 이제는 많은 경우 하나님의 나라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창세기, 곧 자기 신앙과 삶에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어느 듯 그런 분들을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블로그도 개인의 시대에서 적지 않은 글에서 교회와 나라와 공동체의 글을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이제, 이번 글을 끝으로 창세기에 대한 포스팅을 마칩니다. 창세기에 대한 첫 번째 글이 2013년 5월이었으니 3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올린 글이 오늘로 224번째입니다. 천지창조와 선악과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 서울에서 천지창조에 대한 말씀을 가지고 모임을 했었는데 3일째 정도까지 했었습니다.


창세기 다음으로는 구약성경의 한 권을 선택해서 계속 포스팅을 할 예정입니다. 책이 정해질 때까지는 <십계명>에 대한 포스팅을 완료할 계획입니다. 그간 저의 글을 꾸준히 구독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특히 저의 글을 통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새롭게 보는 안목이 열리신 분들이 계셔서 큰 영광으로 여깁니다. 감사합니다.

창세기 후반부에 아주 감동적인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야곱이 바로 왕 앞에서 한 고백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이는 요셉의 가족들이 애굽 왕 바로 앞에서 문안할 때에 바로 왕이 야곱의 나이를 물은 것에 대한 야곱의 고백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나름 신앙의 여정을 보낸 사람들이 읽으면 뭔가 애잔한 마음이 들게 하는 고백입니다.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의 삶은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출생부터 쌍둥이 형 에서와 다툼을 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장자의 권한을 빼앗고자 아버지를 속이기까지 했지만 기껏 얻은 것은 이삭의 재산이 아니라 하늘의 이슬과 포도주 즉 하나님의 의를 얻을 뿐인데 형에게 쫓겨서 돌베개 베고 자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서 아내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수고했으나 라반이 속이고 레아를 주어 또 7년을 일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부유케 되자 라반의 아들들과 다투고, 그리고 다시 본토 아비 집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여정을 떠나고, 그 마지막에 천사와 싸워 환도 뼈가 부르지는 일도 모자라 자신의 아들들이 그 형제를 팔아버리고 아비인 자신에게 죽었다고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세월을 보낸 야곱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의 여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곧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심령을 가진 사람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야곱이 보내는 그 험난한 세월 역시 우리의 세월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의 여정이 다른 곳이 아닌 애굽에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좇아서 산 세월, 하나님께서 후손으로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살아온 삶의 여정과 세월을 자신의 후손들이 어떤 나라를 이룰 수 있도록 비옥한 땅을 얻어서 정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인생 말년에 기근에 힘들어 하다가 결국은 애굽으로 이주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굽으로 들어가게 된 야곱 곧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착하여 살다가 그 수가 너무 많아지므로 오히려 세상과 같은 애굽의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하여 종으로 삼고 그 종된 세월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께 신원하므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하여 내시는 출애굽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어차피 애굽에서 건져 내실 것이고, 또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면 애굽이 아닌 야곱에게 기근을 이길 기적을 주셔서 처음부터 가나안으로 안착하시게 하시면 될 텐데, 그랬다면 아들 요셉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기도 한데 왜 이런 힘든 여정을 거치게 하셨을까요? 비슷한 여정으로 출애굽을 할 때 광야를 40년이나 거치도록 하셨을까요?


창세기, 그리고 아브라함에서 야곱까지의 여정은 왜 성경에 있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것은 남의 나라 신화나 역사 정도의 가치 밖에 없을 수 있고, 창조론도 진화론과의 논쟁에서 압도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는 이 성경을 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냥 단순히 남의 나라 이야기 속에 나오는 기적을 일으키는 신의 능력을 믿어 나도 그 능력의 도움을 받으려고? 아니면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내용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이 정말로 일어난 실제적 사건이라고 그 객관성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면 사람은 어느 한 구석 의심을 하게 됩니다. 단순합니다. 자기도 그렇게 해 보면 됩니다. 물 위를 걸어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나도 예수님과 같아진다고 하셨으니 해 보면 됩니다.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의 병은 고사하고 자신의 두통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공동체의 신앙으로



야곱의 여정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여정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 관한 것이고,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일원 곧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다스리는 것에 동의하게 되기 위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이 하나님의 경륜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서 야곱에 이르기까지 그 여정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여정, 한 개인으로서의 여정을 마치고 민족과 나라로서의 여정으로 전환하는 시점이 바로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시점입니다. 생각해보면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천지창조의 시작 전에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도 인생의 목적도 알 수 없는 자리에게서 시작해서 아브라함과 야곱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 개인의 신앙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으로 전환되려 합니다. 창세기가 한 개인의 자아 안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말씀이라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이어지는 말씀들은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민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개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이제 자기 외에 다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을 만나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다른 사람과 함께 신앙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함께 누리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시대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되는 안목을 가지게 되는 여정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는 사람이 단체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공동체에 대한 안목이 열리는 것, 하나님은 믿는 신앙이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을 서로 수용해가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 다름을 서로 섬기면서 가는 것이라는 것이 열린 안목으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야곱이 한 개인으로서 또 족장으로서 하나님의 경륜의 여정을 마치는 곳은 세상의 가치관이 의가 되어 다스리는 나라 애굽이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보게 되는 세계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혼자서 굴속에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길 것 같지만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서로 의지하게 살도록, 그리고 또 이 땅위에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 곧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경영하시는 뜻을 가지신 분인데, 단지 자기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사람과 세상과 접촉을 끊고 고고한 듯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이나 신부나 수녀 그리고 또 외딴 곳에 거할 곳을 짓고서 그야말로 서로 용납할 수 있는 사람들만 모여서 서로가 마음에 죄를 일으킬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규율을 정해서 그것을 지키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신앙은 대우를 받을 것이 아니라 회개가 필요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등을 지려하는 것 역시 같은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세상 사람과 함께 있으면 죄를 지으니 가급적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이 온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휘둘리는 정도로 빈약하고 허약한 것입니까? 그렇게 휘둘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하는 것이지 세상과 어울려 살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세상이란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이라는 것, 그리고 오히려 세상에 가서 종살이하듯 그들을 섬겨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여정이 애굽에서 마친 것은 민족으로서의 새 세계의 시작을 위한 경륜



야곱으로 인하여 애굽에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 민족은 그곳에서 처음에는 대접 받는 삶을 살지만 그 수가 많아지고 출산하는 능력이 애굽사람보다 월등하여 그 수가 많아지자 애굽의 두려움을 사게 되어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종으로 삼고 노역을 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노역이 가중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므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과 같이 애굽에서 올려지는, 즉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시게 됩니다.


이는 천지창조의 때에 셋째 날에 세상의 모든 물이 한 곳으로 모이므로 땅이 드러나듯,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드러나게 되는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어서 시작되는 또 다른 여정, 애굽에서 시작되는 여정은, 또 하나의 창세기와 천지창조와 같습니다. 


성경 창세기의 천지창조가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사람이 나오는 여정이라면 출애굽은 민족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시작되는 세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개인의 신앙 여정의 상징인 야곱의 여정이 애굽에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그 이후는 민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1. 19. 07:00 Writer : 김홍덕

아들 요셉이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야곱은 그것이 족하다고 하고 죽기 전에 가서 아들 요셉을 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요셉을 보러 떠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셉이 애굽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이 다스리는 제국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다시는 사람이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애굽은 내려가는 곳



이러한 상황을 잘 표현한 말이 어쩌면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말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올라간다. 내려간다.’는 말은 위도에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 가고자 하는 장소와 출발하는 장소의 규모를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나라로 보면 서울로 가는 것을 ‘상경’한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애굽은 그 당시 주변에가 가장 큰 제국인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애굽으로 내려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람인 야곱이 거하는 곳이 세상의 가치관이 다스리는 애굽보다는 훨씬 크고 높은 지역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가는 것을 내려가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셨다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니 하나님의 의가 있는 곳이 높고 큰 성읍이고 도시고, 세상의 가치관이 다르시는 곳은 그 성읍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낮고 작은 도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문제로 넘어 가보겠습니다. 애굽이란 하나님이 보실 때 낮은 곳이고,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인데 왜 그곳으로 자기의 사람 야곱이 내려가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교회나 신앙을 떠나서 세상의 가치관이 대접받는 곳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터부시하고 있고 심지어 다른 성도가 그렇게 가면 걱정이나 심지어 정죄까지 하는데 그것을 두려워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인지를 보겠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의 조상 아브라함과 또 아비인 이삭도 다 애굽으로 내려 간 적이 있습니다. 내려간 이유도 다 같습니다. 기근 곧 흉년이 들어서 갔습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육신의 먹거리가 고갈되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먹거리를 육신의 먹거리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에게 흉년이 들고 먹거리가 줄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줄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하나님의 사람을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내려가는 것과 애굽으로 올라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가는 사람이 애굽보다 높은 하나님의 의안에 있다는 것이고, 행여 애굽으로 올라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애굽으로 가는 사람이 가진 의보다 애굽의 의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의 의를 자기 왕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애굽으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내려간다는 것은 애굽의 의를 왕으로 삼는 것, 세상의 가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려가기를 두려워말라고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창 46:2-4)고 하신 것은 애굽에서도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야곱은 세상에 살아도 하나님의 의가 삶의 목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일을 두고 애굽에서 올리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창 46:4)



신앙은 세상이란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 같은 것



많은 신앙인들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늘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 어떤 사업을 도모한다고 하면 다들 두려워하고 터부시합니다. 주일이 아니라도 세상의 가치관에 빠진 것을 심히 두려워하고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는 (그 교회가 평소에 주일날 돈 쓰면 안 된다고 하는 곳도 아닌데) 젊은 새댁들이 주일 예배를 다 마치고서 백화점에서 쇼핑한 것을 두고 세상 것을 좋아 한다며 뜨끔할 정도로 문제를 삼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기독교 신앙 안에 상당히 넓게 퍼져 있습니다. 세상과 함께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엄청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가급적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사업체,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물건을 사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커지면 모여서 살려고 하고, 그런 생각은 많은 경우 사회에 대하여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고, 믿지 않는 사람을 아주 무시하고, 심해지면 모여 살면서 사회와 격리된 삶을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과 접촉하고 세상과 연관이 있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유명한 복서인 알리는 전성기에 팔로 자기 몸통을 가리지도 않고 싸웠습니다. 상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경계하고 터부시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내려가서 종과 같이 섬김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생명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없으니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블로그를 지속적으로 봐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렇게 세상을 등지려고 하는 신앙은 옳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결국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과 같습니다. 세상과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되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이란 항상 세상으로 내려가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가치관 아래서 종과 같이 섬김으로 세상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이며, 자신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살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는 하나님 아들의 영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고 또 다시 하나님 아들의 영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또 야곱도 그리고 요셉도 다 애굽으로 내려가거나 팔려갔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애굽에 내려가서 아름다운 아내로 인하여 죽게 될까봐 누이라고 속이는 일을 부자가 동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단순히 시대적 상황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사람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교회의 시대를 맞이하고 또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정체성을 회복하는지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기근이라는 것은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먹어야 사는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먹을 것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이 자기 본성에 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살고자 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심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어찌 보면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먹을 것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존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이란 아버지가 가진 의가 형식을 가진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 아들인데 형식이 없고 의만 있는 하나님의 영적 세계 안에는 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당연히 그곳이 어디든 형식이 있는 세계이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큰 본성이시기도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위대한 영적 존재인 신으로 계신다는 그것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세상을 또 사람을 만드셔서 그 존재의 영광을 표현하려 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 사람이, 이렇게 글을 쓰고 보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런 존재가 실존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렇게 인식할 수 있는 형식을 가진 세계를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게 하시겠다는 목적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형식이 없는 영적 세계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시고 늘 하신 말씀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늘 나타나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당연히 세상이 있어야 하고, 애굽이라고 터부시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삶을 세상에서 살아내는 것이 아들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세상을 등지고 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듯 살아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저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신앙 생활하는 것, 세상과 등지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 아니고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셨지 애굽의 의를 네 주인으로 삼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서 제자 삼으라는 것입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니 선생과 같이 가르치고 모르면 책망하라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종이 되어 섬기는 법입니다. 그 섬김을 본 사람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게 하라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깨닫고 스스로 자기가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가르침을 받은 온전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 형들에게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예비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하셨고, 반드시 애굽에서 올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는 십자가의 도를 깨달으면 세상을 터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내려가서 종과 같이 섬김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게 하는 것을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세상 속에서 세상과 분리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려가서, 그 세상을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살아내기에 충분한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니 그 함께 하심으로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보고 그 생명이 자기가 온전히 주인 삼아야 할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에 아무런 지장도 없고 두려워할 일도 경계할 일도 터부시할 일도 아님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온전히 누리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을 인하여 야곱의 모든 가족들은 애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 이주 과정에서 요셉이 한 말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5-8)



요셉의 일은 오늘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온 것은 형들의 시기 때문이었지만 요셉은 이르기를 그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들을 가뭄에서 지키시려 함이며,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내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고백은 이 블로그에서 야곱과 요셉에 대한 글을 써 오는데 기본적인 골격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조상입니다. 이 야곱과 요셉의 일은 오래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나 신화가 아니라 오늘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신앙 여정이라는 것을 계속 이야기 해 온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비단 이 야곱과 요셉의 일뿐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이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는다면 굳이 성경을 묵상하고 신앙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공부해서 밥 벌어 먹는 것이 목적이라면 또 다릅니다만, 성경을 읽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나는 왜 사는지와 같은 의문을 알아가고자 성경을 대하고 있다면 성경은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팔아 버린 것은 세상의 가치관



그러면 이 요셉의 이야기를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은 그 형들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 하다가 미움을 당했습니다. 그 꿈은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와 형들이 자신에게 경배하고 절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에 대하여 형들은 막내(12중 11번째 아들)에 가사에 별 도움도 안 되는 어린 동생이 자기들의 경배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우습게보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형들이 그렇게 보는 것은 아주 합당한 관점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세상의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그렇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요셉은 아비와 형들에게 절을 받을 만한 일을 할 여지도 능력도 없는 그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어린 동생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을 정리한다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보잘 것 없는 동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예수님과 아주 비슷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서 성경은 건축자의 버린 돌(마 21:42)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건축물을 짓는 건축자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버릴 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은커녕 죽어야 할 존재로 보였던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요셉도 같았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보는 관점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잘 것 없이 여겨 십자가에 못 박았더니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시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로 살아 있는 생명이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을 보고 그것이 육신으로 한 세상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깨달아진 모든 사람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자리에서 구원을 얻게 하심과 같이 요셉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곧 이 땅위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위해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요셉과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인생의 연약함이 곧 구원임을 보이시는 말씀



예수님과 또 요셉이 이러한 과정을 보인 것은 우리 모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늘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보잘 것 없는 것을 버리려 합니다. 육신의 연약함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끔씩 망상처럼 육신의 일반적인 한계와 정체성을 넘어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그렇습니다. 때로는 슈퍼맨 같은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고, 때로는 흥부와 같이 갑자기 큰 부자가 되면 좋겠고, 또 때로는 투명인간과 같이 되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시간을 넘나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이 그런 상상을 해 보는 것은 그렇지 못한 육신의 한계가 한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날고 무슨 일이든지 큰 힘들이지 않고 쉽게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해서 슈퍼맨이 부럽고, 마음에는 늘 갖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넘치는데 그렇지 못한 경제 사정이 아쉬우면 부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 또 맘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늘 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정작 구원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때 너무 연약해서 버리고 싶은 인생의 한계 그것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연약함, 야곱의 아들들, 그리고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볼 때 너무나 보잘 것 없어서 도저히 경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여야 하는 동생 요셉과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와 같이 연약함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육신의 능력을 초월해가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 여깁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거나, 육신이라면 누구나 먹고 자야 하지만 그것을 참고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을 좋은 신앙으로 여깁니다. 그것을 좋은 신앙으로 여기는 것은 참 고상한 것 같지만 실상은 요셉을 팔아버린 마음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마음이며, 아담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 마음입니다.



육신의 연약함,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인생을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온전하다는 것을 믿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라는 것을 믿어야지, 인생이 가진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 인생의 연약함이 너무 좋은 것이고,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아주 아주 온전한 것이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그 형들이 자신을 버렸던 그 마음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아비 야곱과 자손들을 구원하실 계획이었다고 고백함과 같이 우리 모든 인생들도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의 연약함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육신의 연약함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기에 너무 합당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시기에 인생들이 볼 때 연약한 육신의 정체성이 너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신의 모든 한계를 십자가에서 보이시니 하나님께서 온전한 아들로 또 살아 있는 존재로 보셔서 죽음 가운데 두시지 않고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육신의 연약함은 요셉의 형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버리고 죽일 것이 아니라, 이 연약함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고 존재의 목적과 이유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이 연약한 육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가진 한계를 벗어버리고 싶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 성품과 영광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예비하신 것임을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진정 온전한 믿음인 것입니다.


요셉과 아스닷(이방인 아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1. 15. 07:00 Writer : 김홍덕

이번 글에서는 요셉의 아내 아스닷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요셉의 아내 아스닷은 창세기 41장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을 낳았다는 기사 외에는 성경에 달리 언급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하는 것은 그녀가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아내를 취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보통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이 요셉은 그 이방인 아내에게서 난 아들이 이스라엘 지파가 되고 에브라임은 후에 북왕국의 왕족이 됩니다.




에서는 안 되고, 요셉은 괜찮다?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의 형 이삭의 장자 에서(창 26:34)도 이방인 아내를 취했습니다. 이삭과 아내 리브가는 그 아들 에서가 이방인 아내 취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동생인데 그 일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 곧 이스라엘은 나중에 자기에게 손자가 되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기 양자로 삼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왜 에서는 이방인 아내를 취한 일로 좋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되고,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요셉은 이방인 아내, 그것도 애굽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사이에서 난 아들들이 이스라엘 왕국의 지파로 편입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을까요? 특히나 애굽 제사장이라면 태양신이나 바알을 섬기는 신앙을 이끄는 제사장이고 그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단순히 이방인 여자 이상의 의미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요셉은 아내를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바로의 꿈을 해석하므로 총리대신이 되면서 바로 왕이 그 나라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닷을 아내로 주므로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강제로 결혼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요셉이 결혼을 하겠다는 뜻을 비친 것도 아닌 상태에서 바로 왕이 일방적으로 혼인하게 한 것입니다.


반면에 에서는 자기가 가서 자기가 좋은 대로 이방인 아내를 취하므로 그 부모 이삭과 리브가가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 이삭의 염려는 곧 하나님의 염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자신의 의를 가지고 이방인의 아내와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래도 좋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남자 안에 있는 의를 여자를 통해 표현하는 것



결혼이라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란 주제로 쓴 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남자는 내용인 의를 의미하고 여자는 그 의를 표현하는 형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여 아들을 얻으면 그 성을 남편의 성을 따릅니다. 생각해보면 아이는 여자가 임신하고 그 몸에서 자라다가 여자가 낳는데도 그 성을 남자의 성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남편 집안의 아이가 됩니다. 즉 남편의 혈통으로 대표되는 의, 그 내용이 여자인 아내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 가진 삶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가 신랑이 되시고 교회가 또 성도가 신부로 말씀하시는 것 역시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혈통, 즉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본성과 성품이 각 사람의 육신 가진 삶으로 표현되고,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는 곳이기에 그리스도는 신랑이 되고 교회와 성도는 신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서도 요셉도 그 본성 안에 있는 정체성이 그 아내를 통하여 아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방인 아내를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에서가 가진 신앙 정체성이 세상의 형식을 통해서 자신이 가진 의를 표현해야겠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날 교회가 세상의 법칙인 경쟁의 방식에서 성공한 사람을 목사로 청빙하고 또 장로로 선출하는 것을 의롭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좀 다릅니다. 요셉이 이방인 아내를 얻은 것은 자기의 의가 아닙니다. 바로가 주선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상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좀 추측해 본다면 바로가 자기 통치를 위임하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사람을 아내로 주지는 않았을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상황이 요셉은 약간의 시차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옥에서 막 풀려난 신분인데 바로 왕이 주선하는 것을 거절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자, 아내가 형식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요셉은 자기의 의사가 아니라 바로 왕, 곧 세상이 요구하는 요구에 의하여 아내를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인데 굳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의 애굽을 구해야 하듯, 죄에 빠진 육신을 가진 인생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그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자기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과 예수님께서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연약한 육신을 입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오늘 우리와 어떤 상관일까요?




우리의 육신은 아내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



그것은 우리가 육신이라는 아내와 같은 이 형식을 가진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의 사용법, 목적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육신이 편하고, 보통 사람들이 육신으로 하기 힘든 일들을 많이 일들을 할수록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누구나 굶으면 힘든데 금식 기도를 하면 좋은 신앙이라 하고, 잠을 자지 않는 철야기도를 많이 할수록,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면 좋은 신앙이라 하고, 또 누구나 어려워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또 그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좋은 신앙, 세상에서 영광을 얻은 결과를 가지고 대우를 받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란 그 어떤 분야에서라도 더 가진 것이 있게 된다면 그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렇지 못한 자를 위하여 그 육신을 수고하여 섬기기 위한 것 그것뿐입니다. 신앙이 더 좋다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보고서 스스로를 돌이킬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육신을 사용하는 것이고, 세상의 어떤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그 역시 이기지 못한 이들이 보고서 스스로 깨닫고 얻을 수 있도록 살아내는 것을 위하여 육신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표상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체시자 아들이시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아내와 같은 육신을 입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을 가진 삶에서 이 육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즉 인생의 존재 이유와 목적과 그 의미를 보이신 것이 그것입니다.


요셉이 이방인인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은 애굽에 닥칠 기근에 대비하는 자로서 세움을 받는 것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이방인, 그것도 애굽의 신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는 혼인을 하게 된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 그 존재의 이류를 찾지 못하는 기근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 가치관을 형식으로 취하여 그 기근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 삶에서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다니는 사람을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회사생활과 교회의 일정이 겹치면 고민을 합니다. 그런 갈등에서 많은 경우 교회를 선택하면 좋은 신앙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 이외의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 회사 야유회로 등산을 간다고 하면 신앙을 떠나 산이 싫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회사가 아니라 교회를 선택하면 교회에서 칭찬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이 요셉의 이야기, 자기가 원한 것이 아닌데 이방인 아내를 맞이하는 것, 즉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이방의 것을 덧입게 되는 모습은 회사와 교회가 겹칠 때 회사를 선택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이시면 되었는데 굳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앞의 예로 돌아가 본다면, 회사에 같이 다니는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을 알 것입니다. 그가 교회에 가고 싶어 하고 또 좋은 신앙(평소에 그리 살아야겠지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지간하면 알 것입니다. 그런 그가 회사에 급한 일이 있고, 다른 직원이 힘들어하거나 어려워하는 일을 하러 교회를 뒤로 하고 나왔다면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어떤 사람은 ‘저 사람도 별 수 없구나! 먹고 살려니 신앙을 버리네.’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신앙이 있을 텐데 우리 일을 도우러 왔구나! 저런 신앙이라면 나도 가질만하네.’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육신은 이렇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후자의 사람들, 그 사람들 마음에 ‘나도 저렇게…’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이 원치 않게 이방여인을 아내로 삼아 자기 의를 표현해 낸 것이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진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회사일과 교회일이 겹칠 때 회사에 일하러 간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백부장은 그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치 교회 다니는 사람이 회사 직원들을 도우러 왔을 때 그것을 보고 ‘나도 저런 신앙이라면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든 사람처럼. 구원의 대상은 그런 사람들이고, 또 그런 사람 하나를 찾기 위해서 양 99마리를 버려두고 찾으러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이 세상의 형식을 덧입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이라는 것은 놀라운 비밀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 유지우 2018.07.04 17:55

    요셉이 왜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인가요? 궁금해요!

    수정/삭제 답글
    • Favicon of https://www.elphis.or.kr BlogIcon 김홍덕 2018.07.16 09:20 신고

      답변이 늦었습니다.(죄송) 요셉이 왜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냐고 물으셨는데,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인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우리 삶의 목적과 의미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경이기에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건이나 주제들 속의 주인공적인 부분은 결국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특히 요셉은 이사야 선지가 말한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우리는 그를 버렸지만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함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에 예수님을 상징한다고들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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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크리스 2020.01.17 00:59

    성경의 모든 인물, 사건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관련된 하나님의 창조 역사라고 생각됩니다.
    위에 본문에서 요셉이 수동적으로 결혼하게 되었고 당시 자신의 좋지 않은 사회적 신분때문에 권세자의 영향력을 받으려고 타협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요셉 같은 믿음의 사람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방인 우상숭배자를 접수할 수 있습니까?
    보디발 아내의 유혹까지 믿음으로 물리친 요셉입니다.
    요셉의 결혼이 성공적인 것인지 궁금합니다.

    수정/삭제 답글
    • Favicon of https://www.elphis.or.kr BlogIcon 김홍덕 2020.01.18 12:41 신고

      반갑습니다... 답변이 늦었습니다.
      요셉의 수동적 결혼은 성경에서 말하는 여자, 아내, 신부가 삶의 형식을 비유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에 주어진 우리 육신의 형식과 삶이 수동적으로 부여된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은 자신의 의를 담을 형식으로 보디발의 아내가 짝이 아니므로 물리친 것인 반면, 아내는 자신의 짝이요 의를 표현하고 아들을 낳는 삶의 모양인데, 이는 우리가 우리 육신의 삶의 형태, 그 부모와 사회를 선택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육신의 삶이 뜻이 있음을 인정하고 순종하므로 의에 이르듯, 요셉의 결혼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는 것을 문제 삼기도 하지만, 요셉의 아들들이 12지파가 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방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불순종하는 사람이지 육신으로 인종이나 민족이 다른 문제가 아님을 생각하면 그것 또한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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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BlogIcon 제티 2020.07.26 12:20

    우선 요셉이 예수님을 상징한다 라는 말에서 상징한다는 것은 추장적인 계념을 물체에 빗대는 것이기 때문에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다음으로 아스닷은 요셉의 감옥살이의 이유인 보디발의 아내에 대한 추행사건을 없던일로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보디발과 아스닷의 아버지라 나오는 보디베라는 동일인물이라는 추측이 상당히 많죠.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본인의 딸을 결혼시킴으로서 아내를 추행했던게 아니라는 일종의 면죄부였던 것이겠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스낫에 대해 추가 정보를 드리자면 아스낫은 그 출신이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이방인 여성은 아닙니다. Midrash and Targum Pseudo에 따르면 그녀는 야곱의 딸인 디나와 그녀를 강간한 셰쳄 혹은 세겜의 딸로 나옵니다. 즉 보디베라에게 입양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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