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 96

구원의 주님이시자,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앞서서 구원이 어렵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앞서서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깨닫고 그것에 순종하며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삶의 본성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이 쉽고 가벼운 것은 어떤 존재든지 자신의 존재 목적 안에서 목적대로 사는 것이 가장 쉽고 편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먼저는 다시 한 번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의 모순이자 허구성을 짚어 보면, 세례 문답에 답하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신앙 등 여러 가지로 구원과 무관함을 말할 수 있겠으나 가장 확실한 증거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을 죄 없다 하지 못하는 그것이다.(물론 그것은 증거로 나타난 것이고, 본질은 그들의 생명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기도할 때 마다 회개로 시작한다. 죄가 있다는 것을 늘 자인하고 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자신이 받지도 못한 구원을 아주 쉬운 것이라고 여긴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쉽다고 말씀하신 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존재 목적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이 존재하게 된 목적대로 쓰이고 살아갈 때 가장 쉽게 사는 것이다. 자동차 브레이크는 자동차를 세우느라 엄청난 열이 날 뿐 아니라, 자신이 닳아 없어지지만 그것이 브레이크의 존재 이유고 살아가는 삶이기에 브레이크에게 그것보다 쉬운 것은 세상에 없다. 만약 브레이크가 자동차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게 하려 한다면 그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고 시도한다면 완전한 하나의 공학과 공장과 산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인생들에게 보이시려 하신 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은 십자가가 우리 존재의 목적이란 말씀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쉬운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짐이 가볍단 말씀은 사람이란 존재가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존재하는 목적대로 사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 구원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 만드신 목적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자신이 생각할 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좇아 사는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존재하는 것은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이기에 사람에게 가장 쉬운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을 온전히 알면 예수님께서 쉽다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녀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간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에게 좋은 결과는 쉬운 일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쉽고 가벼운 일이다. 문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쉬운 일이고 가벼운 짐인데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구원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거듭남도 말로 되는 것으로 안다. 성경에서 거듭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 말만 인정하면 거듭나고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듭남”이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자. 다른 생명으로 났다는 뜻이다. 생명이 달라졌다면 삶이 달라지고 무엇보다 본성이 달라져야 한다. 본성이 달라지면 가치관과 안목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전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거듭남이다.


그런데 구원 받기 전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바랐는데 구원을 받았다는 다음에도 동일한 것을 구하는데 그것을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기 전에는 자기 힘을 믿고, 또 세상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한다. 필요하면 불법적인 것을 도모하기도 한다. 그러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다음에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육신의 평안과 안녕과 같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의 주관자로 믿는다. 구원을 받았으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한다고 한다.


이런 상황, 이런 변화를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느냐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이런 신앙과 믿음은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것이 아니다. 구원 받기 전, 교회에 다니기 전, 하나님을 믿기 전이나 구원 받은 다음이나 원하는 목표는 같으니 거듭난 것도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다. 썩은 고기를 좋아하고 먹는 늑대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변화 다음에도 썩은 고기를 좋아한다면 그것을 두고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과 거듭남은 이렇게 엉터리다.


공부하면 좋은 미래를 보장 받는 것은 쉬운 것이나 공부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을 진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사람이다. 예수님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과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육신의 삶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다. 존재로서 존재 목적대로 사는 것이므로 쉽고 가볍다. 문제는 공부하는 것이 힘들 듯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 힘들다.


육신의 정욕, 곧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늘 소망하는 사람이 육신의 정욕이 아니라 육신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형식이자 도구며 하나님의 성품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자신이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사하신다는 것이 약속이다. 


그러므로 돌이킴은 행위에 대한 반성과 돌이킴이 아니다. 행위에서 돌이키고 회개하고서 또 다시 행위로 범한 죄를 회개하는 반복이 사함 받고 구원 받았다면서 죄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더욱이 행위는 본질도 아니다. 행위는 속에 있는 의와 생각과 가치와 철학의 표현이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인 삶의 목적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구원 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되겠지만, 스스로 알지 못하는 인생의 존재 목적, 삶의 의미를 하나님께 찾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알려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것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다.


구원은 엄청 어렵지만 구원 받은 삶은 너무 쉽다. 현재의 삶을 늘 곤고하다, 인생은 힘들다, 괴로운 인생길이라 말하며 사는 인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존재가 존재 목적 아닌 것을 좇아 사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힘들다. 반대로 존재가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은 다른 존재가 보기에 힘들 것 같아도 편안하다. 브레이크가 항상 열나고 마찰을 받아도 차를 세우는 것에 사용되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는 것과 같다. 바로 이것을 믿고 알고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구원은 방향을 바꾸는 것이고 목표를 바꾸는 것이다. 높은 곳을 앙망하다 뒤로 돌아서는 것과 같다. 돌아서는 것은 하등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높은 곳을 사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돌아 설 수 없다. 그럴 수 없다면 구원은 한 없이 어렵다. 그러나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모든 것을 주신다. 사람이 육신의 가치를 앙망하면 구원은 하염없이 어렵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낮은 곳을 앙망하면 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