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 10

율법과 복음에 대한 글을 마치며…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30. 08:59 Writer : 김홍덕

율법은 엄연히 법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그 세계에 속한 사람은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키지 않거나 못하거나 범하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행함으로, 지켜야겠다는 의지나 신념으로 지킬 수 없습니다. 지킬 수 있다는 믿음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생명의 법입니다. 사람의 유전자를 가진 생명체는 사람의 유전자가 가진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은 직립보행하게 하고, 말하게 하며, 생각하게 하고, 사회를 이루어 살도록 하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끼리의 유전자가 가진 법은 거대한 덩치와 긴 코와 그 큰 덩치와 힘을 가졌음에도 풀을 먹게 하며 그 큰 힘으로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법입니다.


율법도 그런 법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의 법으로 인생 안에 있으면 십계명도 지키게 되고,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가치관이 구분되지 않은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굽이 갈라지지 않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목적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도록 창조나 일을 하시지 않기에 안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안식이 이루어진 존재, 어떤 날도 안식일과 같이 안식하는 안식일의 주인이 됩니다. 


또 그 사람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콜라가 담긴 콜라병은 콜라가 됩니다. 사람들이 콜라가 담긴 병을 보고, 콜라를 달라고 하고 그것을 들은 사람은 병을 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즉 그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십일조를 합니다.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것만 드리고 나머지는 내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증표로 그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가진 법이 삶으로 표현되고 삶을 주관하므로 나타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 어느 한 순간, 어떤 한 조문이라도 지키지 못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고기가 물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물고기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모두 지켜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법리와 같이 생명으로 있어 그것이 표현된다면 율법은 어떻게 어길 수도 없고, 지키지 못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율법과 또 성경을 읽고서 그것을 지키려 하는데 안 된다면 그것은 자기 안에 그 율법의 법리와 생명의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를 깨닫는 것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이 자신을 주관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의로서 하나님의 법을 반대 방향에서 지켜서 의로워지려 했기에 아무리 해도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죄를 깨닫고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 해 보니 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은 자신이 지난 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했는지, 그 자신의 방법이 틀린 것이고, 그것이 틀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것이 아닌 자기가 자기 삶을 주관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이 으 육신으로 수고하고 노력하여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가려는 애굽의 법으로 하나님의 법을 대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잘못된 안목 안에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됩니다. 그것을 시인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하나님께 이르려했던,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던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표현되는 법,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법에 자신이 속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온전히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그 목적이 사람 안에 있으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기 정체성의 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것이 회개고 죄를 사함 받는 것이고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당연히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심겨서 성령으로 잉태되고 싹이 나서 거듭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법이 그 육신으로 표현되게 됩니다. 


그 상태가 바로 육신이 말씀이 된 상태고 그 말씀이 육신으로 표현되면 모든 율법이 완성되게 되고 안식일의 주인이 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 바로 그 상태, 그 존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시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리스도의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존재,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법으로 삶이 표현되는 상태가 되면 예수님의 오심이 그 사람에게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심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말씀에 대한 요약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표현되시는 뜻과 방향과는 반대로 하나님을 믿어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하나님께서 내용이 되시고 내 삶은 그것을 표현하는 양식이 되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려했고, 영이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니 이 육신은 너무 보잘 것 없고 연약하고 부끄러워 이것을 감추려고 육신의 행위로 이를 가리고 하나님께 이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생의 정체성, 육신을 가진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이 삶의 의미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시면서, 그 보이신 삶이 율법의 완성이고, 하나님의 뜻과 우리 삶의 존재 목적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믿는다면 성경을 육신으로 지켜 의에 이르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반대 방향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한 마음이 우리의 자리가 아님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를 좇아 이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산제사로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순종이고 믿음입니다. 사람을 통하여 그 성품과 영광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것이 말입니다.


8. 십자가의 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27. 00:10 Writer : 김홍덕

여기서 십자가의 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아주 크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오해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율법으로 심판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실질적인 예수님의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왜 그것이 죽을죄가 되었을까? 이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 율법이란 행위로 지켜야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대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나 의 그리고 본질 같은 것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인생이 부정하다 여겼기에 이 부정한 인생을 구원할 것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을 가리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켜 행하여야 한다고 믿고 무엇보다 주장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심령에 율법을 주신 목적이 생명이 되어(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율법의 존재 목적의 본체로서 그 생명의 본성대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 예수님의 삶은 그들의 안목으로 볼 때 도무지 율법을 지키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들은 미칠 것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인생을 부정하다 여긴 그들의 안목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인간이라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려야만 했던 안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담의 그 안목이 결국은 어린양을 죽게 했듯 유대인들의 안목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게 되어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이 부끄러운 것이라 여기는 사람의 죄를 어린양이 피 흘리고 대속하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덮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아담(사람)이 선악과를 먹고서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끄럽게 여긴 것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죽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인생의 정체성이 모퉁이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안목으로 볼 때 부끄러운 인생의 모습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음 중에 두실 수 없는 온전한 생명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육신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며,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도무지 흠모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의에 이를 만한 것을 육신으로 나타내지 못하기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기고 십자가에 발가벗겨 매달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같은 육신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는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만한 것도 없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십자가에 아담이 부끄럽게 여긴 모습으로 매달아 ‘이런 꼴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는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쓸모없고 부끄러운 인생의 모습, 집 밖에 나가면 감추고 숨겨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우리의 연약함 그것이 숨길 것이 아니라 드러나서 세상의 가치로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십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신앙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지 않고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를 반대로 보고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욕보이는 것임에도 오히려 그것이 좋은 신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모습,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로 하신 모습이라는 것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육신으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하나님 아들의 모습인데 지금 아담이 부끄러워한 모습으로 달리신 예수님은 그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기에 그것을 드러내시므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 목적 안에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도 포함된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예수님의 운명을 율법이라는 각도에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를 사람들이 거꾸로 믿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철저히 죄인이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힘입어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작정하고 떼를 쓰고 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반대로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인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온전한 사람, 보시기에 심히 만족하신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려 하심이지 그 십자가를 힘입어 세상에서 성공을 담보하여 주시려 함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어두움, 이렇게 율법도 십자가도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하는 것의 근본 원인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을 자기 안에 있는 선악의 기준으로 부끄럽고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안목만 바꾸면 되는데 오히려 사람의 육신의 행동을 바꾸려 한 것이 율법을 잘못 대한 모습인 것입니다. 안목은 생명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율법은 행동을 바꾸는 조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표현되는 법이니 결국 사람이 자기 안목만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이신 인생의 정체성을 아담이 부끄럽게 여긴 안목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안목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인생은 부끄러운 것이고, 그렇기에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르려고 한 자신의 안목이 하나님을 거역한 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이 죄를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고, 그 시인이 있으면 온전한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 심겨져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그러면 율법은 그냥 지켜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는 생명의 법칙이 바로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이것이 십자가며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7. 다 이루었다.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25. 23:54 Writer : 김홍덕

법(法)에는 법리(法理)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도로교통법에서 교통법규를 위반하면 범칙금을 낸다는 조항의 목적, 곧 법리는 범칙금 부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교통법규를 잘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세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하고 처벌한다고 하는 것은 재산 압류가 목적이 아니라, 세금을 잘 내게 하여 그 세금으로 나라 살림을 윤택케 하겠다는 것이 세법의 법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법이라는 것은 그 법이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법의 법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 명시된 조항들, 이것을 행하고 지키라는 그 조항들은 그 조항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그렇게 행동하라고 하는 근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신 계명을 지키려면 자기 안에 도적질할 이유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삶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이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 보다 존재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 감사하고, 또한 만족과 안식을 누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도 그것을 지킬 수밖에 없는 마음과 가치관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근원된 법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 ‘어떻게 하라’와 ‘지키라’는 말씀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타난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법리인 것입니다.


이는 도로교통법에서 범칙금의 부관에 대하여 규정한 것이 범칙금이 목적이 아니라 교통안전이듯, 십계명과 같은 하나님의 율법이 보기에는 무엇 무엇을 하라는 말씀 같으나 그 본질, 그 법리는 성경이 전하는 모든 말씀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니, 성경에서 이렇게 하라, 저것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지켜내는 존재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지게 되면 모든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위 준법정신이라는 법을 지키려는 마음만 있으면 도로교통법이든 세법이든 다 지키게 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또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지닌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그런 행동을 하려고 애쓰는 것은 마치 범칙금을 부과하기 위하여 숨어서 단속하는 경찰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 곧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그 본성이 행동과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가공품과 제조물은 생명이 표현한 모양과 형태를 따라 만들기만 합니다. 그것은 그런 모양과 형태를 이룬 생명의 본성이 없습니다. 법으로 치면 법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도 법리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본성 없이 몸으로 지켜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외식이라 책망하시고 바울 사도와 사도들이 경계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법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면 율법은 다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예수님의 생명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면 율법을 다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말씀,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의 삶의 모양과 행동은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행동양식을 가진 삶을 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삶의 모든 것, 행동양식과 삶의 모양과 의식은 율법을 지키는 삶, 아주 정확하게 말해서 지킬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기지도 못하게 지키는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 그리스도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알면 율법의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존재가 되느냐를 알게 되면 율법의 행위, 절기와 규례는 다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은 다름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셔서 십자가의 도를 보이시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땅에 씨가 심기듯 사람들 안에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도가 심기고 그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가 되어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이 이 육신으로 나타나서 어떤 행동과 삶의 모양과 양식과 규례와 절기를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성에 따라. 바로 그 본성에 따른 행동양식이 성경이고 율법이고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을 말씀이 육신이 된 삶, 곧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경의 법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말씀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 십자가 바로 아래에서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한 사람(백부장)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즉 이 십자가에서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어 나타난 존재라는 것이 인정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백부장이 눈으로 본 예수님의 모습이 그의 심령 안에 심겨졌고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생명의 안목이 열렸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제사장의 복식(옷)과 절기와 규례를 거쳐야만 만날 수 있던 하나님의 지성소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말씀)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것을 보고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아니 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빛이 비췬 것입니다.)하고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바로 율법의 모든 것을 육신으로 나타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로 알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것으로 깨달아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산다면 그것이 모든 율법을 일점일획도 빠트리지 않고 다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 이 율법과 복음을 시작할 때에 목차는 <7. 다 이루었다>까지 였는데 예상대로 추가가 되어 다음 회에 <8. 십자가의 도>를 이어가겠습니다. 율법이 어떻게 십자가와 연결되는지 같이 묵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6. 나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노라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18. 14:58 Writer : 김홍덕

우리는 앞에서 <심청전>의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심청전의 주제는 <효(孝)>입니다. 효를 이야기하기 위해 심청이는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심청전을 오늘날의 인권적인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인신매매입니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이나 심청전이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것을 문제시 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심청전을 학교에서 배우고 읽은 사람들에게 심청이는 효도를 한 딸이지 인신매매의 희생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심청전을 읽고서 ‘효도를 하려면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효도의 내용이 심청이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라도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심청전을 읽으면 그 전하고자 하는 의미인 <효>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심청전의 본질은 아버지가 눈을 뜨려면 딸이 바다에 빠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효도하라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심청전을 읽고 효도하기 위해서 문자 그대로 바다에 빠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십계명과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들은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율법과 계명은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청전이 효도를 이야기한 것처럼.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도 그렇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기록된 문자와 문장대로 육신이 행할 때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자기 안에서 자기 삶으로 표현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경을 지키는 것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 자기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것이 심청전이 자기 것이 되는 것과 같이.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대하면서 문자 그대로 행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의로운지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도승이나 신부나 수녀와 같이 사는 것이 주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몸을 제어하고 또 삶을 오로지 종교적인 의식 안에만 두는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과 삶이 자기 삶에서 많아질수록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또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디까지가 종교와 신앙의 세계이고 어디까지가 육신의 삶일까요? 그게 구분이 가능할까요? 그렇다고 그것이 구분되지 않으니 그렇게 사는 것은 의로운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오심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사장으로 오셨다고 했다면 분명히 신부나 수녀나 목사나 수도승과 같은 사람이 좋은 신앙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삶은 어떤 경계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육신의 삶과 신앙의 삶을 분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 그것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이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의 어떤 부분이라도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킴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 또 그것이 말씀을 따라 혹은 지키는 것이라고 산다고 여기는 것은 어두운 신앙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주제가 효도가 아니라 바다에 빠지는 것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율법과 성경의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 사도는 로마서 3장에서 새로운 법, 곧 믿음의 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율법 즉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는 분명하고 또 아주 쉬운 법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니.


여기서 우리는 어쩌면 다 아는 뻔한 답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생각과 같이 뻔한 답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문자 그대로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새 법이 되시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인함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서 문자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의 방향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목숨과 같이 지키는 유대인들이 볼 때 어이없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물론이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상을 엎어 버리고, 성전을 헐면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는 등 율법을 작정하고 어기려한 사람과 같은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한술 더 떠서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마 5:17)


그럼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키시지도 않으셨는데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고 또 율법의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마 5:18) 말씀하신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율법이 의도한바 목적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율법의 완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이라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 율법을 완성시키고 다 지킨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니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하고, 또 육신이 연약해서 잘 지키지 못하니 오늘도 내일도 어제처럼 계속 노력해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의 신앙이 온전한 신앙입니까? 그런 신앙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다 이루신 분이고, 그분을 믿고 그분이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곧 나의 정체성이고 나의 모습과 삶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율법이 다 완성된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 율법을 또 성경을 지키고 따르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면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완성되었는데 노력할리는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이시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괜히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 같은 정체성을 가진 생명이 되기를 바라셔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기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율법의 완성일까요?


우리는 앞에서 심청전 이야기를 했습니다. 심청전을 읽고 부모님을 위해 바다에 빠진 사람과 심청전을 알지 못해도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심청전을 완성한 사람이겠습니까? 그건 아주 명확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볼 때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외면하고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의 목적이 바로 예수님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성경은 행동강령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그와는 색다르게 행동은 무관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삶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위하여 만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의 답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길을 찾는다는 것이 인생에서 잘 살고 부자로 또 건강하게 사는 조건에 대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인생 그 자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또 그것이 해를 당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고, 경건하려 애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이 우리 행동에 반응하시고 그 결과 복을 주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모든 성경을 행위로 지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아닙니다. 누가 차에 기름을 넣어주기 위해서 차를 사겠습니까? 하나님도 사람의 육신이 먹고 입는 것을 풍족하도록 하실 목적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차를 사는 것은 기름을 넣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차를 통하여 나의 의도(이동)를 이루기 위함이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도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도대로 삶으로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인생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행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어 그것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현이 어떤 것인지를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조법이나 그리스도가 되는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설명,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설명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또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인생의 정체성이고 삶의 이유와 목적임을 아는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의가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이 표현되어 행동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하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무엇 무엇을 하라는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는 그런 행동을 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마치 심청전은 효도할 마음이 있으면 바다에도 빠질 수 있다는 것이지 바다에 빠지는 것이 효도라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운명과 정체성이 자기 삶의 운명과 정체성이 된 사람의 삶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의 삶은 이러나저러나 또 사나 죽으나 그 삶의 모양이 어떠해도 늘 율법과 복음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고양이가 배타고 바다에 간다고 상어가 되지 않듯,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 사람의 삶은 삶 전체가 온전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율법과 모든 계명이 이루어진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도 율법을 완성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있어 율법으로 표현되는 행함이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당연히 율법을 완성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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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17. 09:46 Writer : 김홍덕

많은 사람들은 율법이란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복음으로 대치된 것과 같이 생각합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죄를 알게 되었는데 그 죄를 예수님께서 대속하셨으니 이제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 곧 복음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은연중에 ‘율법은 이제 적용되지 않고 폐기된 하나님의 법’이라는 인상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율법은 온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온전하지 않다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도 온전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과 사도들은 율법에 대하여 ‘지나간 법’으로 여기거나 터부시해야할 것으로 여길만한 말씀들을 하셨는가가 궁금해집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율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율법은 온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온전하다는 것 외에도,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을 인함입니다. 그런 율법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듯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리고 사도들이 율법을 오해한 율법주의자들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곧 율법을 오해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마치 생명의 본성이 그 생명이 살아가는 모양과 삶의 형태를 정한 법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유전자는 그 유전자의 법이 있습니다. 그 법에 의하면 사람은 날아다닐 수 없고, 물속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반대로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직립보행을 하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다 생명의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고 물에 빠지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래서 행여 사람이 물속에서 견디는 수영을 하게 될 때는 ‘수영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날게 된다면 그 역시도 ‘나는 법’이 될 것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란 언뜻 보기에 다 ‘이렇게 해라’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율법을 주실 때는 분명히 그 앞에 <누가> 그렇게 하여야 하는지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예로 들면 출애굽기 20장을 시작하실 때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건져낸 여호와라”고 선언을 하신 다음에 다시 모든 계명 앞에 <너>는 이것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이렇게 하라고 하신 것은 어떤 존재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먼저 그 율법을 행할 존재가 정립되고서 그 존재가 어떤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행동을 하면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먼저고 그 존재는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그 존재의 본성은 이런 행동을 할 것이니 너는 그런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뜻입니다.


특히나 하나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이는 모든 생명의 주관자시라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생명의 법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계명도 생명의 하나님의 본성에 따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의 본성대로 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생명이 되면 율법은 지켜질 것이니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의 본질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죽자는 뜻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이듯, ‘무엇 무엇을 하라’는 율법과 계명도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인(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대부분의 종교)이나 율법과 성경의 본질적인 방향성과는 반대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율법도 분명히 <너>라는 정체성이 정립되고 난 다음에 그 <너>가 생명으로서 어떤 행동을 하여야 한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율법과 계명과 성경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율법은 비유컨대 생명이 가진 본성과 행동의 모습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물속에서 살찌어다.’라고 하셨다는 것은 너는 물고기라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 본성대로 정체성의 자리를 지키고 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의가 있는 사람의 삶이 율법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물속에서 생활하면 물고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어이없는 짓을 하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행동이 부족할까 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본성마저 극복하여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기 마음에 있는 본성은 감추고 겉으로는 고상하게, 또 열심히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양은 번듯하나 생명이 없고 죽음만 있다는 것입니다. 선덕여왕이 당태종이 보낸 모란 꽃 그림이 화려했지만 향기가 없다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율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반대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반대로 생각하니 당연히 의롭지 않기도 하지만, 하나님과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닌데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에 대한 의를 알지 못하고 반대로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관점과 가치관과 믿음과 신앙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왼나사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이나 계명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그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법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육신의 행동이 따라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엉뚱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릇과 같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으로 잉태되어 그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의 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의 모습과 모양과 행함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행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 것은 율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율법이나 계명이나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그것을 읽고 듣고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저란 삶을 사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효도를 하면 되는 것이지 바다에 빠지는 것이 심청전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부모가 자식을 잃는 불효가 되지 않겠습니까?


행함과 행동은 어디까지나 생명이 있는 존재의 생명본성의 증거입니다. 생명이 없는데 행동을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십계명을 지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의 가치관에서 건져내신 신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된 사람은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같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고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이신 십자가의 삶이 자기 안에 씨와 같이 심기고 그것이 성령으로 인하여 생명이 되고 그 생명으로 삶이 거듭남으로 자기의 모든 삶이 그 생명으로 표현이 되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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