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하박국' + 17

(하박국 3:1-19) 하박국의 찬양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하박국 Date : 2021. 3. 9. 10:03 Writer : 김홍덕

(하박국 마지막 글)

 

비단 하박국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면 구구단보다 못하다. 무화과나 포도나무와 같은 말들의 의미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결국 그 모든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을 말씀하시는 도구와 과정이다. 그렇게 다양하게 말씀하시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가 성경을 읽고 듣는 사람의 심령에 심겨서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주는 본성대로 인생을 사는 것이 성경을 주신 이유이자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따라서 하박국의 말씀 역시 어느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든 세상에 악이 관영함에 대한 한탄이나 의문을 가진 상태에서 세상이 존재의 하나님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는 인생과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실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그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경영하신다는 하나님께 세상의 악함을 해결해 달라 기도한다. 그런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이래로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그 기도를 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 세상은 여전하다. 아직도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박국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러나 하박국은 달랐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세상이 어떠하든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세상이 왜 악한지, 왜 이방인을 들어서 세상의 악을 심판하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신 것도 아니다. 하박국에게 하신 말씀은 개괄적으로 보면 다른 선지서에 있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교만한 자, 무고히 피 흘리는 자, 강포한 자와 같은 악한 자를 심판하시겠다는 말씀 그것뿐이다. 한 마디로 성경 전체의 주제에 입각한 말씀들이었다.

 

그런데 하박국은 늘 하시는 똑같아 보이는 말씀을 듣고 세상이 왜 악한지와 또 왜 악한 자가 세상을 심판하는지에 대하여 더 이상 의문스럽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가 옳다는 길을 좇아 살아가지만 자신은 오직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할 것이라고 한다. 하박국이 이 모습이 오늘 나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박국서를 제대로 읽은 것이다.

 

하박국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할 것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자신에게 아멘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것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요나와 같이 끝까지 불만을 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하박국과 달리 하박국서 뿐 아니라 성경의 어떤 말씀을 읽어도 아직도 세상이 악하다고 말한다. 단순히 읽을 뿐 아니라 성경을 연구하고 그것으로 지위를 만들고 그 지위를 입고서 직업으로 살아가는 자칭 성경의 전문가들조차 강단에서 늘 세상이 악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박국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한 깨달음이 없는 것이고 돌아서지 않는 것이며 기쁨을 얻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하박국과 오늘날 신앙인들의 차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 되고 의문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가 자기 안에도 있는 사람이다. 일명 말이 통한다고 하는 것은 서로 가치관이나 의가 같다는 의미다.(그 반대가 바벨탑을 쌓을 때 말이 달라진 것이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의도하심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었다. 하나님과 말이 통한 것이다. 자기 안에 하나님과 같은 안목과 가치관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의가 있었기 때문에 손뼉이 마주치듯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순종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인하여 의문이 없어지고 기쁨이 넘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의와 생명이 같은 사람이라는 증거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이자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자기 본성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런 사람을 성경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게 그리스도이자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구원의 본질이다.

 

정리해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들어가서 보면 이 세상이 참 악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왜 해결이 되지 않는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우리의 생각을 선지자 하박국이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하박국은 그런 문제가 해결된 고백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의 의문과 기쁨 사이에는 우리가 성경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그 일상적인 말씀들을 듣고 세상이 왜 악한지와 또 왜 이방을 들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지를 깨달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의에 순종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되었다는 것은 무엇이 악인지, 이방인이 어떤 사람인지, 또 심판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하나님과 생각이 같은 사람이란 의미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먼저는 하나님의 의이자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 자기 생명 본성이 된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이므로 의에 대하여, 악에 대하여, 세상과 구원과 심판에 대하여 하나님과 같은 의와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곧 구원이고 거듭난 사람이다. 즉 구원 받고 거듭난 사람은 세상이 의문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아직도 세상이 왜 악한지 의문스럽다면 하박국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문에서 시작해서 찬양으로 끝나는 하박국의 모습은 자기 생각에는 구원을 받았고, 또 교회에서 교리로 거듭났다고 세뇌 당해서 자신은 거듭났다고 여기지만 실상 실수도 않으시는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을 늘 악하게 여겨지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짧은 성경 하박국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악한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아니라 십자가와 세상의 모든 것으로 보이신 하나님의 의를 보고도 그것을 선택하여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 그들이 바라보고, 인식하고, 느끼며, 주장하는 그 세계가 악한 것이라는 것과, 그런 이들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지 않았기에 혈통에 무관하게, 믿는 신앙과 종교와도 무관하게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설사 자신이 하나님을 부르고 믿고 있다고 해도, 그 하나님을 믿어서 세상의 가치로 높고 좋은 것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 또한 이방인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하박국의 대화 속에 녹아 있다.

 

그런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보이신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을 좇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려는 이방인이므로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좇음을 인하여 서로를 심판하게 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심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능동적인 조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다르고 반대된 자기 생각을 좇아 사는 그 자체로 스스로 악한 세상이 되고, 또 서로를 심판하며 산다. 이것이 하박국서가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 하박국서를 대하면서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라며 노래나 부르고 있을 것이 아니다. 하박국서를 읽고 들었는데 아직도 자신의 눈에 세상이 악하게 보인다거나, 오늘 자신의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것이라면 자신은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셔도 깨달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시인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런 만남은 자기 세상의 평안과 여호와 하나님을 인한 기쁨으로 사는 삶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박국 3:1-19) 하박국의 찬양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하박국 Date : 2021. 3. 8. 10:59 Writer : 김홍덕

하박국 선지자도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할 즈음에는 이러한 모든 것을 아는 상태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 세상이 왜 이리 악한지?’왜 이방인을 들어서 세상을 심판하시는지의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하박국의 마지막 부분에 오면 그런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3:17-18)

 

중요한 것은 하박국의 이런 변화를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유다. 당연히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심이다. 오늘 이 하박국서를 읽고 묵상하며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는 이들에게 세상에 대한 개념, 악한 세상에 대한 이해, 심판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바라심이다. 즉 오늘 우리에게 하박국의 이 찬양이 있는지, 하박국과 같은 찬양을 할 수밖에 없는 본성이 있는지를 반추해 보는 것이 하박국을 읽는 자세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박국을 성경을 주신 이유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무화과는 율법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지킨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나무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를 저주하신 일을 생각해보면 무화과나무 잎이 말랐다는 것은 율법의 열매는 고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행위마저 없는 것이고, 이를 하박국이 처음 하나님께 한 질문과 연결해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모습조차 없는 세상이라도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겠다는 말이다.

(기뻐할 수 있는 본성을 가진 존재라면 찬양한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포도나무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신 나무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바로 포도나무다. 그러므로 포도열매가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의미다. 이 역시 하박국서를 시작할 때 하박국이 언급한 악한 세상의 한 단면이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성경 속 감람나무는 흔히들 말하는 올리브 나무다. 그 소출은 당연히 기름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의미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러므로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세울 기름이 없다는 의미고 이는 더 이상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밭에 식물이 없으며

밭의 소산은 기본적으로 식재료지만 성경에서 밭의 소산은 제사를 드리는 제물이자 재료다. 성경 미가에서 메뚜기 재앙을 인하여 곡식이 소실되었다는 것이 곧 제사가 없어졌다는 의미로 쓰인 것과 연결된다. 즉 밭에서 식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이 주된 의미다.

 

물론 식물은 사람의 생존에 관한 것이기에 사람의 굶주림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양식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뜻(인생을 주신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신 것에서 이것은 육신의 식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4:34)

 

또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보듯이 성경에서 밭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서 하나님께서 열매로 여기는 소산을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밭과 같은 사람이 내어 놓아야 하는 온전한 소산은 말씀()과 육신(흙으로 지음 받은 육신인 밭)이 하나가 된 소출이다. 생물학적으로도 땅에서 나는 모든 소출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명을 담은 씨와 땅의 성분이 하나가 된 것이다.

 

 

양과 소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제물인 양과 소가 없다는 것은 완전히 제사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궁극적인 제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는 우리 육신이 피를 흘려 하나님께 제물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 안에 거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그 성품을 표현할 형식 곧 육신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보내셔서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께서 보이신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의지를 주셨다. 스스로 제물이 되는 것을 사람 손에 맡기신 것이다. 그래서 청지기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보이신 것을 사람이 선택하고, 자기 인생의 목적과 자신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하나님께 찾고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같이 자기 육신이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는 제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로 이러한 법을 몸소 보이셨기에 예수님이 어린 양이다. 예로부터 양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 이유다. 양이나 소와 같은 제물을 번제로 드릴 때 번제를 드리는 자가 그 머리에 안수한 것도 자신을 드린다는 의미며, 하나님께서 받으시고자 하시는 것은 결국 육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삶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다.

 

(계속)

 

(하박국 3:1-19) 하박국의 찬양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하박국 Date : 2021. 3. 5. 12:00 Writer : 김홍덕

하박국은 세상이 악한데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치를 하시지 않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한탄하면서 시작한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해이하게 만들고 공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이방인을 일으켜서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하박국은 왜 이방인이 심판을 하느냐?’는 새로운 의문을 가진 하박국에게 심판을 한 이방들도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전개된다.

 

그 말씀을 들은 하박국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므로 하박국 선지서가 맺어진다. 기도하고 찬양했다는 것은 하박국이 가졌던 의문들이 해소되었다는 의미다. 오늘날 우리가 이 하박국 선지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사실 하박국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이유가 자신의 것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악 그리고 심판을 하나님의 관점과 의의 기준으로 보는 순종적 이해가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박국이 마지막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속심령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늘 세상은 악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수도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다스리시는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의외로 심각한 문제와 오류를 가지고 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 신앙의 모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먼저 세상에 대한 개념부터 재정립해야 한다. 육신으로 보는 물리적 세상과 사람들의 생각들이 지탱하는 사회가 세상의 본질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본질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서 세상을 인식하므로 자기에게 세상이 열린다. 그렇게 인간 개인의 자아에게 인식되고 형성된 세상이 상호 결합된 것이 우리가 이야기 하는 세상의 본질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의 죽음은 곧 그 자신의 세상이 멸망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 하는 지구나 세상의 멸망보다 개인의 죽음이 더 완전한 세상의 멸망이다.

 

이와 같이 세상은 각 개인의 인식 위에 있다. 자기 생각 밖의 일을 보거나 들었을 때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확인해 준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악한 세상은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정의한 세상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악한 세상>은 물리적 세상과 사회가 아니라 각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자기 기준으로 정의한 세상, 그것이다.

 

세상에 악이 관영한데 하나님께서 방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 왜 하박국에게 하나님 앞에 악한 이방인을 들어 악을 심판하시는지에 대한 이유는 이와 같이 세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생각으로 인식하므로 형성된 세상의 결합인 사회와 물리적 세상은 하나님이 보실 때 분명히 악하다.

 

문제는 그 악함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바탕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일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곧 영광이 나타나는 운동장이나 도화지와 같다. 하얀 색으로 그린 그림이 나타나려면 검은 도화지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두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선악의 기준으로 자기 세상을 살고 자기 기준을 주장하는 세상에서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살아가는 것은 영광 곧 나타나고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했고, 또 한편으로 사람이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빛으로, 영광으로, 의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드러나게 된다고 하신다. 드러나려면 드러나지 않는 것이 바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얼마 되지 않는 구원받은 자를 위하여 세상을 악하게 방치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아바타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무조건 하나님을 찬양하고 순종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다만 사람이 그 자유를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을 선택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가 조성하지 않는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기에 그렇고, 자기 보기에 그것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인생을 자기 것으로 선택하고 자기 세상을 살며 주장하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의를 선택하므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3:6)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로 세상을 형성하는 사람은 악한 세상의 구성원이자 자기의 모든 세상은 악한 사람이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 앞에 온전한 하나님의 의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보이셨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렸을 때 스스로 보는 자는 살았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이 저것이다!’ 깨닫고 순종하는 선택하는 것을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다. 달리 청지기라 하심이 아니다.

 

이러한 원리, 아니 하나님의 법을 알면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의 자기 옳음과 그에서 비롯된 선악에 대한 기준 그리고 가치 기준으로 보는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는 것이 아니기에 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알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으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 역시 너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세상은 모두가 자기 의를 주장하기에 서로가 서로를 각자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대하니 항상 서로를 심판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의는 서로를 용납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자기 주장하는 자에게 종이 되어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조성하지도 않은 자기 인생을 가지 것으로 훔친 자들은 모두 이방인인 것을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므로 성취하려는 높은 곳은 거할 곳이 적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올라가도 하늘 아래에 있으니 설령 가장 높이 오른 자라 할지라도 결국 높이 올라가는 것이 선이라는 자기 가치관으로 자기 스스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계속)

 

우상의 무익함은 성경의 일관된 말씀이다. 문제는 무엇이 우상인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같이 조각한 목상이나 석상 또는 나무와 돌 그리고 바위와 같은 것에 절하고 빌면 그 대상이 우상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우상의 본질은 아니다. 우상의 본질은 사실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이 자신의 문제나 소망을 이루어줄 대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우상의 뿌리고, 그 마음으로 기대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형식과 도구로 육신을 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씀의 본질적 의미다. 형상은 image고 이는 육신 가진 사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사람의 존재 목적, 삶의 의미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인 하나님의 이미지 곧 성품을 표현하는 도구와 형식이지 인생의 본질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목적을 버리고 도구이자 형식인 육신을 본질로 보고, 육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문제로, 그 육신의 평안과 안식을 도모하는 것을 소망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 마음과 소망을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 그것이 우상이다.

 

그러므로 우상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의 마음을 기대는 모든 대상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아닌 것을 바라는 대상은 모두 우상이라는 의미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상대가 다 하나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부르는 것과 기대하는 것은 상호간 본성과 목적이 동일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훈련소 훈련을 마친 아들 면회를 간 부모가 아들 이름을 부르면 자기 아들만 부모의 부름에 화답하는 것과 같다. 설사 아들의 이름이 같아서 돌아볼 수는 있어도 서로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이내 무의미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육신의 일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면 여호와 하나님은 답하지 않으신다. 무엇보다 사람이 육신의 일, 곧 육신의 정욕을 좇아 부르는 하나님은 자기 생각에는 하나님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우상이다. 사람이 이것을 모른다. 하박국에서 새겨 만든 우상에 관한 말씀에 여호와는 성전에 계신다는 말로 답하신 것도 여기에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육신의 일, 곧 육신의 정욕을 좇아 부르는 하나님이 진정한 우상

 

새겨 만든 우상이 무익하다고 말씀하시는 끝에 여호와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하고 있다는 것은 눈에 띄는 말씀이다. 이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상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자 정체성을 자주 언급하신다는 것도 모를 가능성이 크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육신의 정욕을 기대며 새겨서 만든 소유와 공로를 기대하는 우상과는 전혀 다른 존재의 신이다. 존재의 하나님 여호와는 존재의 목적으로 관계가 형성되는 하나님이고,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매개로 관계를 형성하려는 하나님은 육신의 정욕이 새겨 만든 무익한 우상이다.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고 우상은 새겨서 만든다. 성전에 계신다는 것은 내용과 목적과 의미와 영으로 거하신다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며, 유언자가 가진 본성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생명과 같이 속에서 밖으로 나타나는(영광 = 나타나다) 하나님이신 반면에 새겨 만든 우상은 기계와 같이 겉만 조각하여 만든 조각품이다. 속에서 밖으로 나올 것이 없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신다는 것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여호와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지 사람이 조각한 형상에 거하시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낼 형식으로 질그릇과 같은 사람을 지으시고 그 속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순종했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그 사람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의미며, 무엇보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그에게는 우상이란 없다는 의미는 덤이다.

 

너희 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야(고전 3:16)

 

하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을 외면하고 육신이라는 겉모습을 본질로 보는 신앙을 가지고 육신의 일을 구하고, 육신의 일을 구하는 대상인 하나님은 자기 하나님일 뿐이고 조각한 것과 같이 겉모양만 새겨서 만들기에 우상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나 성당을 다니며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은 돌이나 나무로 하나님을 조각하지 않으니 자신들의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계속 설명한 것과 같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기도하고 있다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생각으로 빚고 새긴 우상이다.

 

육신의 일과 세상에서의 성공은 겉모습과 형식에 관한 것이고, 그것을 의탁하고 해결하는 신(해결하지도 못하지만)은 형상의 유무와 무관하게 개념 자체가 낳은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있다. 이것을 부인하면 안 된다. 조각상이 없다고 우상이 아닌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기도가 육신의 문제와 세상의 문제라면 자기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자기 하나님이란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전 안에 계시는데 그들은 오늘날 교회의 겉모습을 화려하게 건축하는 것과 같이 성전의 겉모습, 육신이라는 인생의 겉모습만 보기에 성전 안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이들의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당연히 응답하시지 않는다.

 

하박국에 나오는 하나님 심판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 각각에 대한 능동적인 심판을 하신다는 개별적인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뜻을 벗어난 삶 자체이다. 자기가 옳다는 것을 좇아서 높은 곳에 이르려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겨야 하므로 높이 오르려는 가치관끼리 충돌하고 높이 오려는 가치관 안에서 더 높은 자가 높이 오르려는 가치관을 가진 자를 심판하게 된다.

 

이것이 이방인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이유다. 낮아지는 본성을 나타내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와 반대로 높아지려는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이 이방인이고, 그 이방인들은 서로를 이기기 위하여 서로 심판한다.

 

이러한 이방인 상호간의 심판은 어떤 경우에도 의롭지 않다. 영화에서나 심지어 현실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사회의 불의에 맞서는 헌신적인 투쟁이나 수고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지 않다. 사회 불의에 맞서는 헌신적 투쟁이나 수고의 목적은 사람이 공정하게 높은 곳에 이르고, 공정하게 평안을 얻기 위하여 수고할 수 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공정과 의로움을 이루려고 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의는 모든 사람이 바라는 높은 곳에 이르는 과정이 공정하고 평등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잘못된 생각이다. 높은 곳은 넓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공정하게 혹은 평등하게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분노를 더하여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이웃을 벌거벗겨 수치를 당하게 한다. 사람이 생각이나 상상으로 만든 그 어떤 높은 곳도 하늘 아래 있기에 결국 올라 갈 높은 곳은 없는데도 사람은 높은 곳에 오르려 한다.

 

그러나 사람이 오르려고 하는 높은 곳에는 거할 곳이 적다. 사람이 서로를 이겨야만 하는 이유다. 그래서 상대를 취하게 하고 수치스럽게 한다. 이는 사람이 생각하는 높은 곳에 오르려면 취하거나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2:15)

 

사람의 부끄러움은 선악과을 먹었을 때 나온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서 자신이 벗은 것을 보고 부끄럽고(무화과로 가리려 했다) 두려워 숨었다는 것이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낀 처음 사건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다가 얻은 결과다. 즉 하나님과 같아지지 않는다는 것, 즉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의 본질이란 말이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3:10)

 

따라서 언제나 높은 곳에 오르려는 사람이 이웃을 부끄럽게 한다는 것은 이웃을 낮은 자리로 몰고 자신은 높아졌다는 의미다. 사람은 그렇게 한 단계씩 높아질 때 마다 높아짐을 영광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영광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말은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박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영광이 아니라 수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할례 받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라고 말씀하신다. 할례는 오늘날의 포경수술이다. 껍질을 벗겨내는 의식이고,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외식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생명이 된 백성이라는 증거가 할례다. 그런데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자 이웃을 부끄럽게 하고 얻은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웃을 부끄럽게 하여 영광을 얻으려는 이방인에게 할례 받지 않았음을 드러내라고 하셨다는 것은 이방인으로서 가진 외식과 눈에 보이는 형식을 본질과 생명의 근원이라 여기는 생각을 의로 여기고 있음을 실토하라는 말이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고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 은혜의 척도로 믿는 사람 역시 이 말씀의 대상인 이방인이자 외식하는 자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기도는 모두 길 거리에 서서 외식하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같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으니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8: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은 다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와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이방인이요, 외식하는 자요,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높아지려는 이방인은 언제나 높아지려는 서로를 이겨서 상대를, 이웃을 부끄럽게 하는 사람이기에 자신 역시 그런 다툼 속에 있으므로 언제라도 높아지려는 기준 앞에 자신도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