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 89

(히브리서 13:18-25) 마지막 인사-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5. 25. 13:12 Writer : 김홍덕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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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신다고 시작한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가자는 말씀으로 마무리 된다. 그리고 영문 밖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로 인도함을 받은 히브리서의 저자, 그리고 함께한 사도들의 삶이 히브리서를 수신하는 사람들의 인도함이므로 이에 순종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인도한다는 것은 더 나은 것을 가지고 이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군이나 지휘관과 같이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종과 같이 섬기고 더 의롭지만 죄인이 되는 낮아지는 삶을 사는 것이 히브리서가 말씀하시는 인도함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히브리서만의 주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포한 본질적인 의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고, 그 더 높고 나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오순절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 제자들마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 이김의 기준이 위로 올라가고 세상이 영광으로 여기는 것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하여 세상이 평안이라고 여기는 안식과 성공이라고 여기는 것을 얻으려 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인도함이란 바로 그 문제의 인도함이지만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인도함은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성경의 인도함은 종이 되고 낮아지는 것이 삶이 되어 사는 것이다. 그 삶의 모습이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알게 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 하나님 아들이심이 드러난 것과 같은 법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법이다.


이것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는 것과 연결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도는 필요를 구하여 하나님께 얻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예수님이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은 그렇지 않다. 사람이 세상이나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여 기도하고 그것을 계기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기도는 말 그대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와 뜻이 땅과 같은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수용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는 하나님께서 보이시고 말씀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인도하심과 관련하여 본다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종이 되는 삶을 살아 하나님의 의를 보여 인도하는 사람의 삶이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기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도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는 것은 당연히 그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의 삶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신약 속의 레위기라고 불리기도 하는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희생, 곧 십자가가 사람의 모든 죄를 사하는 가장 온전한 제사라는 것을 아주 강조한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아들로 말씀하신다고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이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즉 완결판으로 말씀하시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히브리서를 오늘날 읽고 묵상하고 설교하고 듣는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모든 사람의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을 믿는 믿음 안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있는 “더 이상 사함을 위한 제사는 없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구원은 받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느냐?”는 말과 그 겸손한 듯한 말의 기반 위에서 “기도할 때는 회개부터 하는 것”이라는 신학적 논리를 부인하는 것임을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있다. 만약 히브리서를 읽고 묵상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 늘 회개하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히브리서에 반한다. 그리고 그것은 구원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종결하는 온전한 제사, 단 번에 드리심으로 더 이상 죄를 사하는 제사가 없는 마지막 제사로 십자가의 희생을 드리셨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는 마지막 말씀인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임을 이렇게 분명하게 선언하였는데, 회개해야 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도리라고 하면 예수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이것은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서를 묵상하고 그 뜻을 헤아리려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람을 다시 사할 것이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이 히브리서가 권면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히브리서의 권면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본질적 문제의 해결이라는 절대적 사안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히브리서가 독자들에게 더 이상 죄 사함을 논하지 않는 삶을 확신하게 되게 하시기를 바라며 히브리서의 연재를 마감합니다.



(히브리서 13:18-25) 마지막 인사-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5. 22. 04:00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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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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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를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저자와 함께 한 사람들이 모든 일에 선한 행동을 하려 하니 속심령에 선한 양심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먼저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볼 때 자신들이 늘 그리고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을 보니 자기들 안에 선한 양심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여기서 말하는 ‘선함’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쉽게 도덕적이고 선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숙자에게 밥을 퍼주고, 기부하고, 교통법규 잘 지키고, 사람에게 선한 말을 하며, 화가 나도 잘 참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 부른 사람이 가진 “선”의 개념이지 이 히브리서가 말씀하시는 선이 아니다.


정말로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선함이 그것이라면 13장에 이르는 긴 서신 속에 그것이 정말 많이 내포되어 있어야 하지만 그런 논제의 내용은 13장 시작 부분에 얼마 정도일 뿐 전반적인 주제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희생이 우리에게 온전한 구속임을 믿고 그에게 나아가자는 것이 히브리서의 주제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선함은 그 주제와 맥락을 같이해야 한다. 긴 편지를 그리스도에 대하여 권면하다가 갑자기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덕적이고 선량한 행동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선함은 세상의 가치, 행위의 선을 규정하는 규범이나 기준이 아니다. 이 선함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오직 하나님만 선하다고 하신 말씀 속의 선(善), 그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도와 그가 우리라고 설명한 함께한 사람들 심령에 있는 선함의 기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준이다. 하나님이 선의 기준이라는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가지신 선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목적에 뿌리를 둔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만들거나 구매한 물건이 의도하고 목적한 대로 작동되면 선하다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버리거나 고친다. 버리거나 고친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 곧 악하다는 의미다. 


따라서 사람도 세상도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 안에 있으면 선하고 그렇지 않으면 악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하나님만이 선하다고 하신 것이다.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있어 선과 악은 하나님만이 정의를 내리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와 또 함께한 사람들의 속심령에 선한 양심이 있고 그것이 선한 행동을 자아낸다는 것은 속심령에 하나님께서 선으로 여기시는 것이 있고 그것이 자기 육신의 행동과 삶을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끌고 있으며 자신들은 바로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의미다. 특별히 속심령에 선한 양심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표현했다는 것은 자기 의도와 무관하게 속에 있는 선함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그냥 속심령이 이끄는 대로 살 뿐인데 성경을 보니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함을 알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끄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그 노력이 부족하다고 겸허한 척 회개하며 다시 노력하는 일반적인 신앙과는 그 세계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따라서 노력하는 신앙은 선한 행함도, 선한 양심도 아니라는 확증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마지막 인사에 나오는 선한 양심에 관한 말씀은 이렇듯 두 가지 측면에서 깊은 묵상을 요구한다. 하나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선함”은 히브리서 전반에 녹아 있는 예수님의 희생, 하나님은 아들로 말씀하신다는 기반 위에서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선함이라는 것이고, 다음으로 이 선함은 거듭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인지할 수 있듯 생명에 관한 것이고, 이 선함은 생명이 그 본성대로 살아가듯 속심령에 거하면 그것이 선한 행동으로 이끌어 낸다는 점을 저자가 자신의 삶으로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로 보여주고 있다.



(히브리서 13:18-25) 마지막 인사-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5. 21. 08:17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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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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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도 여느 서신서와 같이 문안과 기도의 부탁 그리고 동역자들에 대한 소식과 문안 등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한 가지 특이점은 마무리 인사의 끝까지 ‘인도하는 자’를 공경하는 것을 권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신앙을 권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이 가진 복음의 선하고 유익한 것을 권면하는 입장에서 그 권면을 잘 순종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서가 가진 특징을 고려하면 이는 묵상할 가치가 충분한 특이점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신다며 시작한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단번에 드린 것이며 더 이상 사함을 위한 제사가 없다는 말로 그 또한 마지막이라는 것을 강조에서부터 묵상해보자는 것이다. 이 마지막은 기회나 시간적 개념으로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완성의 의미라는 점이 단초가 된다. 그것이 어떤 세계이든 목적이 완성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 세계의 목적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온전한 인도함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희생이 마지막, 아니 온전한 완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설명한 히브리서의 마지막에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한 구속으로 인도하는 사람에 대한 순종과 복종의 권면은 예수님이 단번에 이루시고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는 온전한 구속으로의 인도함이다. 


그리고 특별히, 아니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인도함, 죄사함을 위한 다른 제사가 필요 없는 온전한 제사로 이룬 구속의 세계는 이기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알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낮아지는 것이라는 아이러니 같은 반전이 복음의 비밀이다.


예수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가자고 하는 권면이 이것을 설명한다. 예수님의 능욕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자기 맘대로 정한 하나님 아들이란 기준과 다르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다. 그 능욕을 지자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의로움은 의롭지 않은 자들에게 자기 육신과 그 수고를 내어주자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말로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라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옳은 것을 추구하고 나타내며 그것을 위하여 죽고 살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의는 의로운 것이기에 사람들의 그런 생각대로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는데 문제는 그 내용이 의로운데 죄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로서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염려나 의문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일 뿐,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이것은 하등의 의문이나 염려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그 생명의 본성이 바로 의로운데 죄인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본성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인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모양으로 보니 의인이 죄인들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죄인을 구원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는 의로움을 가진 이가, 더 많은 것을 아는 이가, 더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자와 세계의 주장 앞에 죄인이 되고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하여 자기 육신과 그 수고와 가진 것을 내어주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능욕이고, 우리가 지고 갈 바인 동시에 우리를 인도한 인도함의 본질이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전도의 본질이다. 세상에서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기 교회에 있는 성공한 사람, 성공한 기독교인들의 사례 등을 소개하면서 예수 믿었더니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된다는 것을 미끼로 교회에 와서 네가 바라는 성공을 빌어보라고 전하는 것이 전도가 아니라,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고, 삶의 의미가 되기 위하여 육신과 그 수고를 내어주는 삶을 살아 “너의 그 모습이 하나님의 의였구나!”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 전도고 인도함이다. 


인도함이 이것이고, 이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 사이에 전해진 권면의 말씀이 이 히브리서다. 물론 확대해 보면 비단 히브리서 뿐 아니라 대부분의 서신서가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히브리서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인도함’은 전적으로 종이 되는 본성에 이끌린 삶의 모범이다. 예수님이 본이 되시고 표상이 되신다는 것은 그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열매고 맏아들이신 것이기도 하다.


인도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이에 순종하기를 권면하는 것이다. 인도함의 성격은 종이 되는 모범이고, 의로운데 죄인이 되어 육신과 그 수고를 내어주는 것은 본성을 인함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존재의 존재 목적에 수렴한다.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육신이라는 형식을 부여받은 존재다. 육신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그 의는 앞서 많은 설명을 한 것과 같이 의로운데 불의한데 육신과 그 수고를 내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아들이다. 그리고 아들이 나타났다면 아버지를 증거하고 그 성품을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 영광이고, 높은 곳을 사무하는 세상과 달리 낮아지는 것을 의로 여기는 구분이 있으니 거룩이다. 


결국 이 모든 법이 사람의 존재 목적에 관한 것이니 이것을 보이는 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사람이 그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목적도 모르는 삶, 그것은 바로 사망의 자리다. 우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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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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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마지막 인사에 앞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에게 순종하여 복종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것은 단언컨데 목사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 이유는 목사는 높이 올라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인도함>은 예수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먼저 간 사람들이다. 이때까지 끊임없이 설명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능욕, 십자가의 희생, 예수님의 제사, 그리스도의 본성,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 이 모든 것은 남에게 나를 내어주는 것이다.


그것도 상대가 옳고 나는 악하기 때문에 나를 내어주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인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죽이려는 주장 앞에 육신을 내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고,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나타내고자한 하나님의 성품이다. 


즉 내가 옳고 선하고 맞는데 그른 상대의 뜻에 나를 내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성품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하면, 그 옳고 선한 것의 내용이자 본질이 의인이 죄인을 위해 죄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십자가고, 그것이 예수님의 희생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인도하는 사람, 곧 먼저 간 사람들은 바로 그 본성에 이끌려 간 사람들이다.


그런 이유로 성경이라는 것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이겨 높이 가고, 교회 목회의 공로를 비교하여 이겨 높이 올라간 목사들이 이 인도하는 사람에 해당될 수가 없다. 만약 그렇다고 우긴다면 그것은 진정한 기만이다. 하나님께 책망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반대 방향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종교 지도자나 신학을 전공한 자칭 목회자나 신비한 능력을 간헐적으로 선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가장 먼저 그 자리는 높이 있고, 피라미드는 높이 갈수록 면적이 좁고 자리가 협소하듯 그 자리로 모두가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인도함을 따라 갈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라는 의미다. 그것만으로 이미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누구나 이를 수 있는 자리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히브리서가, 또 성경이 말씀하시는 인도함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같다. 육신을 세상이 옳다고 하는 것에 내어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인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자신을 내어주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 히브리서가, 성경이 말씀하는 인도함이라는 것이다.


이는 지금 히브리서가 이를 읽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사람을 권면하는 것에서 확증된다. 저자가 누구인지 확증하긴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목적이고, 자신의 정체성이며, 십자가를 지신 그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삶이 자기 삶의 본성이 된 사람이고, 그 삶을 삶의 의미로 삼은 사람이다. 정리해보면 인도한다는 것이 손 붙잡고 끌고 간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거듭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먼저 살았다는 의미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다. 그렇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회복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예수님 같이 세상의 주장 앞에 자신을 내어주는 모습은 말 그대로 죄인이 되는 모습이다. 죄인이 되는 것에 순종하는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는 회개하는 사람의 모습과 같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자기가 회개할 자 같이 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의로운 예수님께서 죄인인 것처럼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다. 그것은 분명히 같은 것이다. 같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이 예수님과 같아지지 않을 것이라면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다.


그런 이유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즐거움으로 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것이 세상의 가치로 보면 즐겁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다. 당장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고 할 때 말린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제자들의 그 모습이 인도하는 자들이 즐겁게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하도록 하게 하는 모습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을 보고 근심하고 즐거운 것이 아니니 그러지 말라고 만류한다는 것은 이미 그 인도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그 속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다는 것이다. 즉 거듭남도 구원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당연히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그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냥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정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자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다. 그 삶이 우리를 인도한다. 그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우리를 인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에 순종하고 복종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살아내고 있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이끄는 삶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구분하여 볼 수 있으면 이 인도함을 즐겁게 하게 할 것이다. 성경이 순종하라고 했으니 순종하는 세계가 아니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자기 안에도 그 본성이 있고,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것이 근심스럽게 보이면 자기 안에 그것이 근심스러운 사람이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는 것이다. 생명은 누구나 본성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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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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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은 결국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셨다. 주의할 것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동일한 모양과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람이 그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개과천선하여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 사람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이고,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나타낼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니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아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아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인지를 예수님이 보이셨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도하신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존재하게 된 목적이자 이유며 우리 삶의 의미이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육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기반이고 전부다. 


그렇다고 육신을 드린다는 것은 제단에 각을 떠서 불 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이 아니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한 형식으로, 그리고 그 육신의 삶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이루어 낼 기회와 도구로 주신 것으로 그 하나님의 계획대로 내 삶을 내어드리는 것이 바로 제사다. 즉 하나님의 의가 내 삶의 내용이고, 목적이고 의미가 되도록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나를 제물로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의 정수다. 하나님의 말씀 곧 의가 육신이 되신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 그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이끄는 대로 십자가를 지는 것에 육신을 드린 것이 바로 온전한 제사다.


히브리서가 예수님의 제사를 단번에 드린 제사라고 하고 또 이 제사로 인하여 더 이상 죄를 사하는 제사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시고 또 달리신 모습으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뜻, 그 자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제사가 삶의 찬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생을 주신 목적을 보이는 제사이자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이 정한 목적 안으로 들어가는 제사의 삶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을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이를 위하여 사람을 지으셨는데 사람이 그 지은 목적의 삶인 십자가를 지는 제사를 드리는데 기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 진정한 찬미의 내용이다. 죄인이 되어 십자가로 가고, 육신과 그 수고를 종과 같이 내어주는 것이 어떻게 찬양하고 찬미할 것이냐고 반문하겠지만 이 세상이 누구의 주관 아래 있는지를 인정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사는 세상을 지은 하나님의 의와 내 삶이 일치하도록 하나님께서 성실하시고 아들을 보내셨는데 세상의 가치로 낮아지는 것이니 찬미할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것이 되면, 즉 말씀이 육신이 되면, 예수님이 당하신 능욕의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이라는 세상의 가치 앞에 나를 내어주는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아버지의 존재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이름, 곧 성품이 육신의 삶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이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삶이 어떠한가? 그 삶은 선한 삶이자 서로 나누어 주는 삶이다. 그리고 세상의 ‘선(善)’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이 만들고 경영하시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될 때 선이다. 그것 외에 세상의 선은 없다. 사람이 정립한 어떤 기준에 입각한 선행이나 선함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육신의 호흡을 주신 이유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행한 것이면 하나님 앞에 선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영문 밖, 곧 세상의 가치 앞에 종과 같이 자기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사람의 삶은 선하다. 아니 그것 만이 선하다. 밥 퍼주고, 말을 곱게 한다고 선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영문 밖, 곧 세상의 가치 앞에 자신을 내어주는 예수로 말미암은 삶이 선이라는 말이다. 이는 곧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에 자신의 삶을 내어주는 것이니 제사다.


그리고 그 선의 본질이 바로 다른 사람에게 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영문 밖에 있는 사람, 곧 세상의 가치를 좇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장 앞에 자신을 내어주는 삶은 자신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자신을 나누어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눌 법은 없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선이다.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대로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