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 6

(갈라디아서) 요약 Ⅱ (4-6장)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5. 5. 11:30 Writer : 김홍덕

4:1-7

순서적 흐름을 기준으로 율법 이전에는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있다.

 

율법 다음의 순서인 복음이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다.(아들은 여자에게서 나고 율법 아래에서 난다.)

 

율법 이후의 (순서적, 카이로스적) 시간 개념

 

 

4:8-11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앙적 회귀에 대한 염려

 

율법의 시간에서 복음의 시간으로 가는 말씀을 듣고 다시 율법과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회귀하는 것을 염려하다.

 

 

4:12-20

율법을 강요하는 이들의 열심히 무익함을 경고하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수고한다는 바울 사도의 마음,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해산하는 수고 =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생명의 세계라는 것을 말한다.

 

 

4:21-31, 5:1

율법 안에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 있음을 하갈과 사라를 통해 설명하다.

 

율법-하갈-이스마엘 vs. 약속-사라-이삭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육체의 계획에 의한 아들이다.

 

햄함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이 육체의 계획이다.

 

육체의 계획으로 난 아들은 종에게서 난 아들이다.

 

종은 육신의 신분과 형식에 종속된 존재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난 아들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약속에 의한 아들은 육체의 계획에 의한 아들이 아니므로 자유자인 사라에게서 났다.

 

약속은 남편과 같다.

 

아들은 남편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다.

 

 

5:2-12

할례와 성령의 역사를 대비하여 설명하다.

 

할례는 육신에 행하는 의로움(사람이 의롭다고 여기는)의 증거이므로 할례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할례나 무할례나 모두 무익하다.

 

할례를 기준으로 의를 논하고 그에 따라 할례를 받는다면 육신이 의의 증거이므로 육신이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되심과 같이 성령이 믿음을 의롭게 하신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

 

사랑은 존재의 의미를 주는 것이다.

 

존재에게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진정한 자유다.

 

 

5:13-15

자유를 얻으면 그 자유로 종노릇을 하라.(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릇이다.)

 

자유하나 종노릇을 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예수님이 그렇다.)

 

 

5:16-24

육체로 의에 이른다는 것은 육체의 욕심이다.(성경은 이것을 육신의 정욕이라 말한다.)

 

육체로 의로워지겠다는 육체의 욕심은 성령의 욕심에 반한다.

 

육신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성령과 대적하므로 둘 다 얻지 못하게 된다.

 

믿음을 의롭게 하는 성령(5:5)은 열매가 있다.

 

열매가 있다는 것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생명은 그 본성으로 열매(의로워지는 결과)를 얻는다.

 

생명의 법은 행위와 형태로(열매로) 나타난다.(행함은 믿음의 결과다.)

 

 

6:1-5

서로 짐을 지라.(5:13절에 나오는 것처럼 자유로 종노릇 하라는 것과 같다.)

 

서로 짐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다.(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다.)

 

자신의 짐 = 자기 십자가 = 자유인인데 종노릇하는 수고 = 사랑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십자가를 지신 모습이 사람들에게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심과 같이 자유인인데 종노릇하는 모습을 보는 이들에게 존재 목적을 알게 한다.

 

존재의 의미가 되는 것이 사랑이다.(하나님이 우리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계시므로 사랑이신 것과 같다.)

 

 

6:6-10

가르친다는 것은 학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종노릇하는 자유인의 솔선수범이다.

 

자유인이 종노릇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정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아는 것이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목적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육체는 종노릇하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일로 소비되는 소비재인데 그 육신의 평안과 안식과 소욕을 얻기 위하여 육체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이다.

 

육체는 후일에 썩으므로 의로워지기 위하여 말씀을 행함으로 지키는 것이 육체에 심는 것이다.

 

육체의 행함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썩어질 육체에 심는 것이다.

 

 

6:11-16

할례는 의로워지려고 육신에 행하는 의식이므로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모든 생각과 행위의 대표적 행위다.

 

신학이나 금식과 같이 육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이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고 할례를 자랑함이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을 전하는 바울에게 자랑은 십자가다.

 

십자가는 믿음의 상징이다.

의인이신데 죄인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을 수동적으로 온전히 받고 그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지신 것이므로 우리 육신의 공로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나의 존재 목적임을 믿는 것에 능동성이나 공로는 없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할례나 무할례나 무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새 생명으로 거듭난 것이기 때문이다.

 

 

6:17-18

문안인사

 

은혜가 심령에 있으면 그것이 육신으로 드러난다.

 

(갈라디아서) 요약 Ⅰ (1-3장)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5. 4. 14:38 Writer : 김홍덕

갈라디아서는 행위가 아닌 믿음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한다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 주제 하에 바울 사도는 몇 가지를 도입하여 행함이 아닌 믿음이 의롭게 한다는 것을 설명한다바울 사도가 도입한 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1. 바울 사도의 개인적 입장과 경험의 관점에서

2. 육신의 관점에서의 율법

3. 율법과 믿음 그리고 성령

4. 약속과 믿음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율법

- 순서적인 흐름에 있어 율법 이후의 시간

5. 사라와 하갈로 보는 두 언약

6. 율법의 완성과 성령으로 사는 삶

7. 할례와 그리스도

 

이렇게 주제별로 갈라디아서를 조명해보기 전에 먼저 간략하게 갈라디아서의 장절별 구성을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1:1-5

바울 사도 자신의 사도로서의 정당성과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 대한 축원

 

1:6-10

바울이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자신이라도 다시 와서 이전에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1:11-17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한다는 것은 바울 사도 자신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람으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닌 계시를 전하는 것이므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 육신의 혈육과 상의하지 않았다.

 

1:18-24

베드로를 만나 사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자신이 전하고 있는 것, 곧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사도들도 동의한 내용이다.

 

2:1-10

자신이 전한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것이 헛되지 않은 것임을 알게 하려고 다시(14년 후)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디도와 함께 했는데 바울 사도가 헬라인인 디도에게는 할례를 권하지 않았다.(반대로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권했다. 16)

 

베드로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은 이가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바울 사도 자신과 또 자신과 함께한 바나바와 악수하고 자신들은 이방인에게로 가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할례자에게로 갔다.

 

2:11-21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유대인들(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난 일로 바나바도 그렇게 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바울은 바나바의 그런 모습을 유혹을 받은 것이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14) 베드로가 이방인과 같이 있는 자신의 모습(행함)을 책망할까 유대인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육신의 행위를 의의 기준으로 보는 이방인의 가치관이기에 베드로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안목을 좇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바울은 베드로의 모습은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이방인들의 가치관 아래 있는 일이 이 일을 도입하여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갈라디아서의 주제를 부각시켰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는데 이방인 앞에 죄인이 되면(이방인을 두려워하여 피한다면) 그리스도가 죄인이 되는 것인데 그럴 수는 없다.

 

3:1-14 성령과 믿음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일이다.

 

자신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는데 육체(행위)로 마무리 할 수는 없다.(생명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세계에 있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으면 아브라함의 아들(자손) 곧 하나님의 백성이다.(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된 믿음을 생명으로 여기신다.)

 

3:15-22 약속 율법 - 믿음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전적으로 믿음에 관한 약속이고 율법은 약속을 거스를 수 없다.

 

율법은 범법을 인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유효하다.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범법으로 인하여 들어 온 율법이 유효하다는 것은 약속은 죄를 속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약속을 받은 믿음’, ‘증거를 받은 믿음이 나오는 히브리서 11(믿음장)과 연결되어 있다.

 

3:23-29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율법은 몽학선생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자 아브라함이 보인 믿음인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의 세계다.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오신 시점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시점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과 동일한 목적을 인하여 동일한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믿음이 생명이 되는 것이다.(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다른 존재이므로 거듭난 존재가 아니다.)

 

거듭나지 않았다면 육신이 AD 시대를 살고 있어도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석사 학위 다음에는 박사 학위가 있는 것처럼 율법 아래 있는 시간 다음에는 약속 하신 그리스도의 시간(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율법은 그리스도로 인도한다.

 

율법의 인도는 모범적으로 앞장서서 인도함이 아니라 혹독한 훈련의 결과로 믿음으로 가게 하는 인도다.(몽학선생이라고 한 이유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세례가 물(율법을 행함으로 지키는 것) 속에 살 수 없다는 고백을 이끌어 내어 거듭나게 하는 것과 같다.

 

 

 

행함과 믿음은 일반적으로 연관성이 크게 없는 단어지만 의롭게 된다는 것에서 하나의 대조군으로 묶어 두는 것은 의로워지는 주체와 방향에 있어 완전히 상반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과정 어느 한 절에라도 의로워져야하는 사람의 능동적 기여가 일말이라도 있다면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인 반면, 의롭게 여기는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행사 외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는 수동적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은혜를 구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앞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설사 신약성경에 있는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게 해야 의로워진다거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여긴다면 신약성경의 말씀이 아니라 지금 당장 예수님께서 눈앞에 나타나셔서 하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해도 그 말씀은 율법이 되고 그 말씀을 준행하는 것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행한 어떤 기여가 의롭게 되는 것에 영향을 1%라도 미치기(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의롭게 되는 일에 사람이 능동적 기여가 있으면 모두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믿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에 있어 자신의 어떤 기여도 무의미할 뿐 아니라, 기여하려는 그 자체가 불의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더욱이 성경을 지켜서 답보 받고자 하는 것이 육신의 평안이자 세상 살 동안의 성공적 성취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사실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믿는다는 것에 있어 믿어야 하는 자의 어떠함은 중요하지 않다. 믿어야 할 내용이나 믿을 대상의 존재성, 그 어느 것에도 믿어야 하는 자가 기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믿어야 하는 상대가 어떻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는 설사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믿는 자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을 알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하여 얼마나 그릇된 안목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깨달으면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의의 정의도, 의롭게 하는 주권도 모두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엿장수 맘대로 한다고 해도 나는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기도하고 봉사하고 성경 읽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게 여기는 것에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성을 보실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할 것이 아니다. 더욱이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은 의로워지는 방법이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의로운 이들의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의에 관하여, 믿음을 가지는 것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리실 마음을 가지시도록 사람이 어떤 것이라도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목적으로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의지와 주권을 가지고 행하는 모든 것이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든, 봉사든, 헌신이든 상관없다. 심지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준다고 해도 그런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모두 불의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진 믿음은 모두 이 범주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반대로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정작 자신이 의로워져야 하는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의의 정의도, 의에 이르는 법도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나는 순종할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이다. 기도나 헌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의롭게 되는 믿음의 시작이다. 이것은 평범하게 상용화된 교리 같지만 돌아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사를 도우시기를 바라며 늘 능동적이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의로워지는 법에 관하여 하나의 대조군으로 묶여 있는 행함과 믿음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어려운 문제다.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에 대하여 헷갈리기도 하고 어려워한다. 그 뿐 아니라 신약 성경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식으로 자기 맘대로 정의한다. 어쩌면 능동적인지 혹은 수동적인 것인지로 이러한 혼돈을 정리하고 의롭게 되기 위하여 자신이 어떤 법을 좇고 있는지 간단하게 구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양심이 있다면.

 

여기까지 본격적으로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무엇인지 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리해 보았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신앙인들이 자기 육신이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시대를 살면서 신약 성경의 말씀을 준행하고 있다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설명한 바와 같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삶의 형통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믿고 준행하는 것은 믿음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것과 신약성경이든 구약성경이든 성경대로 사는 자신의 능동적 노력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자기 신앙에 한 절이라도 있다면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신앙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래본다. 믿음은 지극히 수동적이라는 것과 성경말씀은 의롭게 된 자,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의 모습이지 의롭게 되는 매뉴얼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로워질 것인지에 대한 것, 행위냐? 믿음이냐?’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실상은 거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앞서서 이것이 시대적 관점에 대한 착각 때문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설명했다. 예수님이 오신 시점은 2,000년 전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동일하게 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생각지 않는다는 것까지 설명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것은 구원의 다른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존재 정체성이 된 존재라는 의미다. 성경은 거듭나므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의로운 생명으로 나는 것이라는 의미다. 생명으로 나는 것은 자기 행위로 인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누구도 자기의 행위로 태어난 것이 아니듯 의로워지는 것 역시 자기 행위가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다.

 

생명으로 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태어난 생명은 그 유전자에 의한 고유한 행동이 있다는 점이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대로 살고, 생명대로 산다는 것은 그 생명 본성에 따른 행동이 반드시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생명으로 나는 것이라는 것만 분명하게 자신의 말씀이 되면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과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이 같은 법을 따르는 말씀이라는 것이 이렇게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생명의 법이 자신의 본성이 되었다면 성경을 대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기도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봉사를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거듭나지 않고 외식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려고 노력하고 봉사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여기서,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분명하게 할 것이 있는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기도나 봉사와 같은 것이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가르치신 기도 어디에도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에 관하여 구하라는 말이 없다. 자식의 문제, 건강의 문제, 사업의 문제, 나라와 세계 평화와 같은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아니라 모두 육신의 정욕에 관한 것이라 말씀하신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것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다.

 

봉사나 헌신 역시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일갈하셨다. 육신의 일로서 구제와 봉사는 그리스도의 직임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하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그것 역시 직임이 아니라는 말이다. 육신의 일인 자식이나 건강이나 사업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나, 육신의 삶의 평안을 척도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가(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면 세상에서 잘 살 기회가 있어도 버리고, 가난한 자를 외면하는 사람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사실은 이런 반문은 기독교 안에 더 많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기만 하면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게 된다고 전하면 거듭나기만 하면 도둑질해도 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과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도둑질하는 생명이라면 그리스도가 도둑질하는 존재라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본성 그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역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어리석음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신 분이 아닌가? 세상을 창조하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하나님의 경영 아래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십자가에 죽이고자 할 때 순종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이다. 죄인을 위하여 의인이 죽임을 당하므로 죄인을 구하신 분이 그리스도이고, 그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인데 그가 도둑질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진정한 어두움일 수밖에 없다.

 

이 어두움은 육신을 본질로 보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놀랍게도 눈에 보이는 육신을 본질로 본다는 것이 율법적인 신앙의 뿌리다. 즉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믿음의 근원이다. 성경을 지켜서 얻으려고 하는 모든 것이 육신의 일이고 육신과 세상을 본질로 보니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된다. 즉 육신을 본질로 보는 사람에게는 성경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히 보시므로 주시는 은혜가 육신의 일, 곧 본질적인 일이며 인생의 목적, 신앙의 목적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지켜야 하는 것(have to)’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에게 성경 말씀은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으로 났다면 그 본성을 거스를 수 없고 성경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설명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남자로 났다면 그 모든 본성이 남자의 유전자를 따르는 것과 같다. 행여 성전환을 한다고 해도 보이는 것만 바뀔 뿐 유전자와 염색체는 어떻게 할 수 없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것은 성경을 어기면서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에게 성경은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살아도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며, 살다가 성경을 펼치면 자신의 삶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 행함과 믿음의 차이는 무엇을 본질로 보느냐의 차이다그리고 그 차이는 성경 말씀과의 관계로 나타난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육신에게 해로운 일이 생길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추스르고 독력하면서 성경대로 살려고 애쓴다. 육신과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기에 육신이나 세상의 일이 그릇되면 안 된다는 강박 아래 산다. 그런 사람은 신약이든 구약이든 상관없이 율법이며, 서기 30,000년에 태어났다고 해도 율법의 시대를 사는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사람이다.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육신이 되는 말씀이 본질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만 이것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육신과 세상의 일을 본질로 보는 것은 요한 사도가 말씀한 것과 같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한 세상의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와 반대가 되는 것이기에 적그리스도에 속한 것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그러므로 율법적인 신앙이 무엇인지,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이 무엇인지는 연구하고 지식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경대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며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신앙이다. 특히 성경대로 살아야 육신의 일이 잘되고 복을 받고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육신이 바라지 않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는 것이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라면 두말할 것 없이 율법적인 신앙이요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이다.

 

성경대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며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신앙이다.

 

 

갈라디아 지방에 있던 교회들(이하 갈라디아 교회로 통일)은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교회들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상이 들어왔다. 이것을 전해들은 바울은 크게 경계하며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은 믿음뿐이라는 것을 간절하게 설명한다. 바울의 간절함은 자신이라도 다시 가서 이전에 전한 것과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 말할 정도다.

 

그러나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1:8)

 

사실 이런 문제는 갈라디아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에게 전도를 한 사도이기 때문에 그가 세운 교회 성도들 대부분은 혈통으로 이방인이었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어떤 유대인들이나 세상의 유력한 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가서 복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바울 사도의 많은 서신들 속에는 그렇게 불의하게 교회에 들어온 것에 대한 경계와 그것에 현혹된 자들에 대한 책망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갈라디아교회가 겪은 문제는 그 시절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한 문제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들 역시 갈라디아 교회가 겪은 율법에 관한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오늘날의 문제는 구약성경의 시대는 율법의 시대이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 신약성경의 시대는 복음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달력을 기준으로 예수님이 오신 다음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스스로를 복음의 시대, 곧 믿음으로 의로워진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뜻 보기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예수님 육신으로 오신 시점을 기준으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나타난 것으로만 보면 이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봤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먼저일 뿐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다고 하심을 알 수 있다.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 오시기 전이 아니라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다는 말이다. 따라서 달력의 시간으로 예수님이 오신 시점을 기준으로 성경을 신약과 구약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고 어리석다. 당연히 자신이 달력으로 신약시대를 산다고 복음의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고 믿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8:58)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오시므로 모든 말씀이 복음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2,000년 전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오심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을 예수님이 오신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된 것을 예수님의 오심으로 보느냐의 문제다. 당연히 예수님이 보여주신 육신 가진 인생의 존재 목적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이 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오심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이들에게는 구약 신약 가릴 것 없이 모두 복음이 된다는 의미다. 이는 동일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졌느니라라는 말씀을 세례 요한이 외칠 때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한 반면 예수님께서 외치실 때는 <복음>이라고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이 하면 복음이 되고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세계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진정한 복음의 시대를 살려면 달력의 날짜는 무의하고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그게 구원이고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객관적 사실과 시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태초부터 계셨다고 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천지창조가 나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듯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 역시 내 안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 것으로 예수님이 자기 안에 오신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귀신 들린 자가 바리새인들보다 더 정확하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 봤다는 것(3:11)이 그 증거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복음의 시대를 산다는 것은 단순한 시대적 개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때가 나에게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인생을 구원하신다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분명하므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자신이 온전하게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다. 그것이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오심이 자신의 사건이 된 이후의 삶을 산다는 의미다. 즉 신약시대를 산다는 것은 구원을 받아 죄 없는 삶을 산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삶이라고 믿는 것이 온전한 믿음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뿐 아니라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스스로를 죄 없다 말하지 못하고 또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다며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고 있을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인데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자신의 것이 되는 예수님의 오심이 자기의 사건이라 말하면서 왜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자기 신앙에 대한 완벽한 착각이다.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므로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달리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