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 47

갈라디아서 마무리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10. 13. 16:50 Writer : 김홍덕

갈라디아서는 바울 사도의 개인적인 일들로 시작해서 믿음과 행함’, ‘복음과 율법이라는 끊이지 않는 논쟁의 주제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특히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에 관하여 성령’, ‘육체’, ‘약속이라는 주제들을 소환하여 설명했고, 마지막에는 육체의 행위가 자신을 의롭게 한다는 생각의 대표로 할례를 들어 육체의 행함은 무익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 당부한다. 이는 율법과 복음’, ‘행함과 믿음이라는 주제, 더 정확히는 육체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라 더는 생각도 말도 하지 말라는 의미라 말할 수 있다.

 

로마서에서는 율법이나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설명함에 있어 종교적 관점보다 일반적인 가치관, 당시의 로마인들의 관점에서 설명했다면 갈라디아서는 많은 부분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율법, 아브라함, 사라와 하갈, 할례와 같은 주제들을 끌어내어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만든다는 것을 설명한다.

 

 

특히 약속을 가지고 설명한 것은 놀라운 관점이다. 어쩌면 갈라디아의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들이 자신들이 할례를 받은 유대인,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빌미로 율법 준수를 많이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갈라디아는 이방인들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들어서 믿음을 설명한 것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에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에 갈라디아서는 아주 좋은 말씀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쨌든 자신을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믿음이 과연 이 갈라디아서가 말씀하고 있는 믿음, 그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드러나게 하는 믿음인지 돌아볼 수 있는 프레임 안에 스스로 자신을 넣어둔 셈이다.

 

하지만 본문 속에서 지나칠 정도로 많이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신앙인들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믿음은 갈라디아서가, 예수님과 사도가 말씀하시는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생각하는 믿음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믿음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어서 얻으려는 결과가 육체의 일이기에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것이라, 주실 것이라 믿는 것이 하나같이 육신의 삶에 종속된 일이라는 것마저 부인하면 말 그대로 양심에 화인 맞은 상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 믿고 바라는 것이 육체의 일인 까닭에 그 반대급부로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드리려 한다. 이런 사람들의 행위를 두고 예수님께서 장사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사도들은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라고 일갈하고 있다. 이런 성경의 권면을 외면하고 자기 생각대로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얻고자 하나님을 믿고, 그런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길 바라며 헌금하고 육체로 성경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신앙이 갈라디아서가 말씀하고 있는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다.

 

이 갈라디아서에 대한 글은 오늘날 신앙인들이 그런 어두움 속에 있는 상황임을 밝히기 위하여 썼다. 오늘이나 어제 그리고 내일 또 하나님 앞에 무엇을 기도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육신의 일과 자녀의 일과 사업이나 세상의 일과 같은 것을 얻으려는 게 가장 근원적인 목적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얻고자 하나님께 순종을 다짐한다면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에 속한 사람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것을 인정하면 바로 믿음의 길로 들어선다는 점이다.

 

 

갈라디아서 마무리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10. 3. 21:14 Writer : 김홍덕

갈라디아서는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사람의 생각에 대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고 권면하는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를 통해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율법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을 위하여 아브라함의 약속을 들어 설명했고, 사라와 하갈을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율법은 범법자를 위한 것이란 말씀과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나셨다는 다소 어려운 말씀도 했다.

 

그리고 필자는 이러한 바울 사도의 말씀에 대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관점에 대하여 많이 언급했다. 오늘날 자신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지 육신이 교회에 다니는 것’, ‘세례 문답에 대답했다는 것같은 육신의 행위를 근거로 자신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임을 과할 정도로 설명했다.

 

이는 먼저 자신을 믿음의 사람으로 여기는 근거가 육체의 행위에 있으므로 거짓이다. 육체가 교회에 다니는 건 명백히 육체의 일이고, 세례 문답은 정형화된 고백이자 형식이지 자기 안에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의 단면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증거는 신앙이 추구하는 바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육신에 어떤 것, 육신이 도모하는 일과 건강이나 혈육의 형통함이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이것이고 믿음은 단지 육신이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주실 것이라 믿는 것이다. 신앙의 관점도 목표도 실체도 모두 육체에 관한 것이다. 그렇게 육신의 것을 구하기에 하나님께 육신의 공로와 수고와 절제와 성경을 지키는 모습을 드리려 한다. 그나마 그 행위들도 마음이나 본성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육신의 것이 잘 되기를 바라는 소망에 얽매인 이유로 행할 뿐이다. 이것을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기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 스스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고 믿지만 정작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든 것이 육신의 일인 사람은 이 갈라디아서를 읽고 자신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며 육체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진 범법자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것이 오히려 이 갈라디아서의 의도다.

 

하나님께 육체의 일을 간구하고, 육체의 어떤 행위나 생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율법 아래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갈라디아서를 바울 사도 당시 할례와 같은 율법을 주장하던 이단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으로 보고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앞으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다시 행위)하는 신앙을 다짐하는 말씀으로 보면 안 된다.

 

사람은 육신의 장막 안에 산다. 그래서 이 육신의 일이 마치 전부인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육신의 삶에 일어나는 변화를 기준으로 어떤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으로 어떤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생각한다. 육신의 일로 하나님의 생각을 판단하는 것이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생각의 뿌리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모습이 이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대부분 신앙인이 가진 신앙이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라는 말이다.

 

행위냐? 믿음이냐?’라는 말씀의 주제는 결국 나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느냐의 문제다. 여러 번 언급한 대로 육체의 일로 하나님의 생각을 가늠하고 있다면 믿음 안에 있지 않으므로 돌이켜야 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긴다는 의미기에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 그러니까 사람의 행위나 육신에 일어나는 일을 보시는 분이 아니다.

 

믿음,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자신을 순종하는 것이지 사람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동안 겪는 일들이 세상 기준으로 형통하게 해 주실 것이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그리고 믿음은 자기 밖의 일, 자신이 손에 쥐지 않은 일,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미래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될 것이라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밖에 있는 일에 대한 기대다.

 

믿음은 자기 안에 있어야 한다. 자기 안에 생명이 있어 부인할 수 없는 본성을 인지하는 게 믿음이다. 성경이 괜히 거듭났다는 표현을 쓰고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고 하신 게 아니다.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하신 말씀이고, 속 심령과 같지 않은 표현과 말을 거짓이라 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서 생명이 되어야 믿음이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육체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진 자들을 할례를 자랑하는 자들로 묶어서 정리한다. 그리고 그들은 할례를 자랑하나 자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고 말씀한다. 특히 그들은 자신이 육체로 의로워진 것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 사도는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권유대로 할례를 받는 사람들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다고 했다. 만약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마음으로 할례를 받는다면 할례를 권하는 자들,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고 성도들을 권면한다.

 

특이한 것은 십자가는 누구를 핍박하는 것은 아닌데 할례를 받게 권하는 자는 십자가로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약간은 특이한 이 말씀은 십자가가 우리의 양심을 찌르는 것임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반면에 죄는 자신의 육신이 범하고 벌은 예수님께서 받았다고 믿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십자가가 핍박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 믿지 않으면 노하시고 벌을 내리시니 강요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 뜻을 보이시고 사람의 선택 곧 순종을 기다리신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믿도록 하거나 강박하지 않으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뜻을 알지 못하고 살았음을 스스로 회개하고 예수님이 보이신 그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모습이고 무엇보다 육신 가진 자신의 운명이자 삶의 목적인 것을 고백하기를 바라신다. 즉 모든 것을 사람이 스스로 양심에 찔려 회개하고 거듭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핍박이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따라서 십자가의 핍박을 피하려는 생각은 하나님 구원의 섭리를 거절하는 것이자 양심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에 화인 맞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것은 양심의 어떠함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 구원의 섭리를 거절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에 기초하여 바울 사도는 할례 곧 육체로 의롭게 되려고 하고 육신의 것을 구하는 신앙을 자랑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외면하는 사람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십자가의 핍박을 받은 사람 즉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섭리에 순종한 사람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악귀를 좇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고 몸에 지니고 있으면 육신의 일이 잘되기 때문도 아니다. 육신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자신이 인식하는 존재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십자가에 있고,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되기에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날 신앙인들이 교회에 다니기에 육신의 일이 잘된다고 믿는 것과 그런 믿음을 인하여 육신의 일이 형통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그 가치관을 전도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일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할례를 자랑하는 일에 불과하다. 당연히 십자가의 핍박을 회피한 것이며 구원의 섭리를 외면한 것에 불과하다.

 

 

(갈 6:11-18) 오늘날의 할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9. 23. 16:13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에게 행위냐 믿음이냐?’는 복음 전파의 일관된 말씀이다. 사도로서의 환경적 요인 중에 이방인도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끊임없이 권면하고 책망했다. 할례를 권한다는 것은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특권 혹은 자랑이나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 생각의 뿌리는 육신의 어떠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 혹은 구원의 증거로 여기는 것에 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행위에 관하여 할 만큼 해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만나지 못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만났다. 그런 그에게 있어 사람의 외모나 행위가 아니라 중심과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전하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은 바울 사도의 개인적 경험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을 특징적으로 집중한 것은 아니다. 사실상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복음의 뼈대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마지막에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할례로 함축시켜 권면하고 있다.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말로 할례로 대변되는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의 무익함을 일갈하고 있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간절한 바울 사도의 권면은 그 당시에 있었던 시대적 상황에 맞춘 말씀이 아니라데 있다. 어느 시대나 사람은 육체의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게 여기실 것이라 믿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교묘해졌다.

 

행위로 의로워질 것이라고 믿는 신앙은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세포에 각인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뿌리 깊다. 그 모습들은 글을 이어오는 중간중간에 많이 설명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그들의 기도와 간구에 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간구는 모두 육신의 평안과 성공 그리고 육신이 사는 세상의 안녕에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게 창조주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지, 피조물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신앙인들의 이런 모습 속에는 초대교회 시절 할례와 같은 자격지심이 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 교회에 나가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애착이나 구분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육신으로 같은 노력을 해도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실 것이라 믿는 마음이 바울 사도의 때에 할례와 같이 자랑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육신의 행위다. 오늘날 믿음은 모두 육신의 행위에 있다는 말이다.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신다고 하는 것,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는 것, 어쩌다가 아프거나 사업이 안 되면 교회에 가 보라고 말하는 것들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지거나 벌을 받는다고 믿는 말임이 분명한데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다.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육신의 일을 형통케 하신다고 믿고 있다. 교회에 다닌다는 자격지심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신이 도모하는 일은 잘 되리라 믿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교회에 다니면 하는 일이 형통할 것이라고 권하는 모양새는 두말할 것 없이 할례를 받아야 의롭게 된다고 권하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책망한 일이 이렇듯 교묘하게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에 숨어 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육체로 행하는 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인생과 삶의 목적과 의미로 믿는 믿음으로 된다. 그런데 성경에는 생각보다 행하라는 명령이 많다. 이것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살았다는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행함은 생명이 가진 본성이 이끄는 행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전하는 갈라디아서 속에 있는 바울 사도의 선을 행하되라는 말씀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물론 여기서는 이 무엇인지도 중요하다. 사람이 생각하는 도덕적인 선함, 행위의 선함이 아님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선은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다. 따라서 선을 행하려면 당연히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별개는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사람에게 칭송받는 것을 안다면 그럴 수 없다. 사람이 생각하는 사회 도덕적인 선함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하나님의 선한 본성 중의 일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비롯되었을 때만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선을 행함에 있어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어떤 일을 행하고 낙심하지 않으려면 결과를 자신이 주관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결과까지 자신의 의도한 대로 되기를 바라고 관철하려 하면 결과에 따라서 낙심한다. 그런 낙심하는 마음이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하지만 결과를 하나님께 맡긴다면 그 어떤 경우에도 낙심할 리 없다. 당연히 피곤하지 않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흔히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속내는 하나님께서 내가 기대하는 대로 하실 것이라는 아전인수적인 기대다. 하지만 이것은 말이 기대지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에 대한 협박에 가깝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그런 기만에 당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 하나님의 행사로 인하여 사람이 자기 생각과 다른 결과를 받으면 피곤해진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든, 어떤 행동을 하든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하신다. 그래서 순종이 중요하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보면 이는 더 확연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본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맏아들이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간절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이 드러난 것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하나님의 선을 행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긴다. 이는 순종의 본성이 이끌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의 본질이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하나님의 선을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는다. 자기 존재의 시작에서부터 거듭난 생명으로 사는 것까지 어느 하나 하나님의 의와 뜻 아닌 게 없음을 아는 사람이 결과를 자기 뜻대로 기획하고 관철하려 할 리 없기 때문이다.

 

선은 사회 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다. 행하라는 말씀이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노력을 원하심도 아니다. 선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고 행함은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삶의 모양이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로 났기에 사는 삶도 하나님의 뜻대로, 삶의 결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에 순종하니 낙심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니 또한 피곤치 않다. 이 모든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난 사람의 삶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