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에게 ‘행위냐 믿음이냐?’는 복음 전파의 일관된 말씀이다. 사도로서의 환경적 요인 중에 이방인도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끊임없이 권면하고 책망했다. 할례를 권한다는 것은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특권 혹은 자랑이나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 생각의 뿌리는 육신의 어떠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 혹은 구원의 증거로 여기는 것에 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행위에 관하여 할 만큼 해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만나지 못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만났다. 그런 그에게 있어 사람의 외모나 행위가 아니라 중심과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전하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은 바울 사도의 개인적 경험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을 특징적으로 집중한 것은 아니다. 사실상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복음의 뼈대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마지막에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할례로 함축시켜 권면하고 있다.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말로 할례로 대변되는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의 무익함을 일갈하고 있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간절한 바울 사도의 권면은 그 당시에 있었던 시대적 상황에 맞춘 말씀이 아니라데 있다. 어느 시대나 사람은 육체의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게 여기실 것이라 믿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교묘해졌다.
행위로 의로워질 것이라고 믿는 신앙은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세포에 각인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뿌리 깊다. 그 모습들은 글을 이어오는 중간중간에 많이 설명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그들의 기도와 간구에 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간구는 모두 육신의 평안과 성공 그리고 육신이 사는 세상의 안녕에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게 창조주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지, 피조물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신앙인들의 이런 모습 속에는 초대교회 시절 할례와 같은 자격지심이 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 교회에 나가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애착이나 구분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육신으로 같은 노력을 해도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실 것이라 믿는 마음이 바울 사도의 때에 할례와 같이 자랑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육신의 행위다. 오늘날 믿음은 모두 육신의 행위에 있다는 말이다.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신다고 하는 것,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는 것, 어쩌다가 아프거나 사업이 안 되면 교회에 가 보라고 말하는 것들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지거나 벌을 받는다고 믿는 말임이 분명한데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다.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육신의 일을 형통케 하신다고 믿고 있다. 교회에 다닌다는 자격지심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신이 도모하는 일은 잘 되리라 믿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교회에 다니면 하는 일이 형통할 것이라고 권하는 모양새는 두말할 것 없이 할례를 받아야 의롭게 된다고 권하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책망한 일이 이렇듯 교묘하게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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