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성경 보기' + 282

코로나로 드러난 교회의 밑천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21. 10. 29. 12:43 Writer : 김홍덕

코로나가 창궐한지 어느새 2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일상은 많은 변화를 겪었고 어떤 변화들은 아예 미래의 생활 방식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런 중에 신앙 공동체라는 교회 역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분명 그런 변화들을 고찰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의외로 크게 공론화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건 아마도 오늘 이 글에서 논하려는 이유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우한 폐렴이라 말하고 싶다.)가 창궐하면서 교회, 아니 교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온라인 예배와 같은 변화에 순응하는 사람들과 지속된 코로나의 위험성 경고를 무시하고 어떻게든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려는 사람들,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부류는 다른 신앙일까? 신앙이 다르다면 그 신앙에 따른 심판과 상급 역시 달라질 것인가?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면 그건 의외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육신의 삶이 도모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건 교인들이 교회에서 어떤 기도를 하는지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인들의 소망의 뿌리는 의외로 두려움이다. 하나님이 명하신 계명을 지키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일상에서의 위험,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다.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육신의 삶이 도모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사람이 가진 두려움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그것을 이용해서 이익을 편취하는 사람들이 늘 있다. 나는 신학자와 교역자들이 그런 부류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늘 성경대로 살지 않거나, 교회에서 명한 것을 하지 않거나, 목사의 말을 듣지 않으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고 위협하고, 심지어 죽어서 천국에 가지 못하거나 가더라도 가난뱅이로 살 것이다.’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온라인 예배에 순응하는 사람이나 모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두려움의 대상과 대응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온라인 예배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헌금을 바쳐가면서까지 잘 되기를 바라는 일상이 코로나 확진으로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지 않는다. 그래서 코로나 이전에 회사가 휴일에 근무하러 좀 나와 달라고 해도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며 악착같이 지키려던 오프라인 예배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온라인 예배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예배는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나뉘었지만 그 뿌리는 결국 두려움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려는 사람들은 또 다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두려움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지 않고 일관적이라는 점에서는 칭찬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것이고, 그 죄로 인하여 일신 상에 원치 않는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즉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이라는 고정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회가 그렇게 우려를 표하면서 심지어 교회를 폐쇄하겠다고 해도 그렇게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물론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철저한 사명감이나 굽히지 않는 충성으로 볼 수도 있다. 그들의 행동 자체로만 보면 분명히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온라인 예배로 태세를 전환한 사람이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는 사람들 모두 앞서 설명한 두려움에 대응하는 모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는 모습을 충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렇듯 교회는 코로나라는 재앙 같은 사회 현상 앞에 두 가지 큰 스탠스를 취했다. 그 중에서 아무래도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쪽이 임시라는 변명을 덧붙인다고 해도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지켜온 예배의 형식에 대한 변화에 대하여 별다른 저항 없이 순응했다는 증거다. 즉 이때까지 예배학이라는 학문까지 만들어가면서 연구하고 고수하면서 지켜온 예배의 형식이 모두 허상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한 것이다.

 

코로나 앞에 휴지처럼 버려진 예배학과 주일 성수

 

그리고 예배학이라는 학문까지 만들어 순서와 격식을 지키려던 노력과 주일 성수라는 성스러운 신앙행위가 코로나라는 사회적 유행 앞에 별것 아닌 것으로 전락했음에도 어떤 회개나 뉘우침이나 반성도 없는 모습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고수해오던 것을 버리거나 왜곡하고 타협했지만 이때까지 지키려던 것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는 고백이나 반대로 이런 순응이 예전에 그렇게 주장했던 것처럼 주일 성수가 아니었다고 회개하고 고백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 교묘한 타협은 모두 앞서 언급한대로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라는 모래성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은 육신의 삶이다. 육신의 삶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떤 불행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신앙이란 것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는 일이 잘 된다가 된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가 이런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버린 것이다.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은 육신이 잘되고 불행이 없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온 것

 

그래서 어떤 이들은 코로나로 인한 육신의 불행을 두려워 온라인 예배로 타협했고, 어떤 이들은 코로나로 인해 하나님께 지키던 습관을 변경하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육신의 삶을 벌할까 두려워 사회적 지탄을 감수하면서 오프라인 예배를 드린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모두 자신들의 신앙이 육신의 삶이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소망이 행여 불행이 될까 두려워하여 어떤 이는 온라인 예배로 어떤 이는 오프라인 예배 강행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자신들이 이때껏 그렇게 지켜온 예배에 대한 신앙이 변질된 것에 대해 회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육신의 안녕을 바라는 신앙을 버리기 전까지.

 

 

그렇다면 끝으로 어떤 신앙이 되어야 하는지 잠깐 생각해보고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분명하게 말씀을 해 두셨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함께 하시겠다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인데,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는 육신의 안녕을 추구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진정한 예배는 육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

 

그렇다면 어떤 예배가 온전한 것인지 분명하다. 육신이 세상 가치 기준으로 평안하고 성공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기만 하면 온라인, 오프라인 구분 없이, 또 코로나 앞에 휴지 조각이 된 예배학과 무관하게 언제나 예배 드리는 사람이고, 코로나 아닌 세상의 어떤 변화에도 늘 예배 드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어떤 형태로 모이든 진정한 예배와 교회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이자 우리가 드릴 예배다.

 

오늘날 교회는 코로나라는 세상 일 앞에 갈팡질팡하고 스스로 자기들의 신학과 신앙을 버렸다. 그렇게 교회가 육신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만 천하에 드러나 버렸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본다면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신앙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매번 기도할 때마다 회개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나,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주셨다고 하셨는데 자기 삶이 평안하지 않다는 것도 그렇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할 것도 없다. 천국은 죄 없는 자가 간다는 것을 알기에 매일 회개하고 후회하는 자신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앞서 열거한 고민들은 일반적이지 않다. 가끔 불연 듯 생각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문제로 알고 해결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경우는 사실 거의 없다. 그나마도 이런 고민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상고가 있는 사람들 중 일부의 이야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그것에 좀 열심을 가져보면 마주하는 많은 의문들이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 의문이 구원이라는 신앙의 근원적 문제인줄 알면서도.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생의 일부나 삶의 한 옵션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을 거는 일이다. 어떤 신이 나의 창조주요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당연히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하는 일이다. 나의 주관자를 대하는데 그것이 내 인생의 일부에 해당하는 일이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인생의 성공을 위해 공부하고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동일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공부하는 것이나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그 격이 같은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한 번은 낯설어야 할지 모른다. 아니 그래야 한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 믿는 믿음은 인생의 성공을 위해 하는 공부와 같은 것이다. 그런 신앙은 당연히 세상에서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낮아지신 예수님은 당연히 이상하게 다가와야 한다. 높은 곳을 지양하는 자신이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자신의 목적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런 자신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염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으로는 예수님과 같아질 수도 없고 성경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오늘날 신앙인들과는 달리 자신들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초라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었던 제자들조차 낯설었던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였다. 그런데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것을 예수님께 구하면서 그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파렴치함 그 자체다. 문제는 파렴치함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멸망이다.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구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자기 암시나 신념일 뿐이다. 낮아지신 그리스도에게 높은 곳으로 이끌어 달라고 기도하면서 스스로 그 모순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착각이 아니면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인생이 걸린 문제를 착각 속에 둘 수는 없다. 말 그대로 이건 인생이 걸린 문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이 걸린 문제

 

육신 가진 인생으로 나서 왜 인생으로 창조했는지 말하는 유일한 존재인 하나님을 삶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하나의 옵션처럼 믿는다는 것은 낭비이자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가 왜 인생으로 사는지에 대한 이유를 가지신 분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그 목적을 말씀하셨다. 이 정도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전부다. 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분명히 높은 곳을 추구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높아지는 것은 끝도, 좌표도 없고 성공했다는 이도 없다. 그러나 낮아지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누구나 알 수 있다. 높아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지만 모두가 추구한다. 하지만 낮아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앙망하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자리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그것이 우리 인생의 본질이고 목적임을 보이셨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것을 모두가 바라는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갔다면 분명히 이상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성경대로 사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구원 없는 사망이다.

 

이 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낮고 낮은 십자가로 가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생경한 모습이었는지 상기하기를 바라는 글이다. 낮아지는 예수님이 낯설게 여겨진다는 것은 자신이 높은 곳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각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한 신앙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시작은 생명의 세계이므로 시작이 곧 온전함이다. 그 생명의 잉태하심을 이끄신 성령께서 온전하게 시작되는 그리스도라는 본성대로 사는 삶을 이끄실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특히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기를 바라는 이들의 이정표다.

 

지금 이전에도 많은 이들이 그 낯선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중요한 것이기에 그것을 전하고 말하며 기록했다. 그와 같은 사람의 노력은 거듭난 사람의 본성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그리스도로 난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 본성에 여러분을 오늘 다시 초대해 본다. 높은 곳만 향해가던 삶에 지친 모두가 낯선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바란다.

 

 

이번 글을 끝으로 <낯선 그리스도>를 마칩니다. 2021년 초에는 다시 성경을 본문으로 하는 글로 만나겠습니다. 

신앙을 반추(反芻)하자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2. 26. 22:12 Writer : 김홍덕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고 믿을 수 없었던 제자들의 모습부터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성경은 내 삶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것까지 설명했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십자가를 지는가?’라는 제자들이 느꼈던 생경스러움이나 어떻게 우리가 성경대로 살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의구심은 동일한 프레임이다. 이 두 가지 의아함을 동일한 프레임으로 연결하는 것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심판을 받아 십자가를 지시므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에서 천대를 받는가에 대한 의문을 몸소 해결하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오시므로 육신을 가진 사람은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이셨다.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시므로 사람이 가졌던 자기들의 생각을 허무셨다.

 

이런 하나님의 법은 사람들의 생각과 방향이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성경을 다 지킬 수는 없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낮은 곳을 보시는데 사람은 낮은 곳을 보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높은 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성경을 다 지킨다는 것은 보통의 사람 이상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생각과 반대라는 증거다.

 

하나님과 사람의 생각이 반대라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방향성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람은 높은 존재라 여기는 반면 하나님은 낮아져서 자기 육신을 높아진 자의 주장 앞에 내어주는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을 지킨다는 것 역시 그렇다. 사람은 성경을 보고 그것대로 행동하면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는 반면 하나님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살면 그 삶이 성경을 이룬 것이라고 여기신다.

 

생명은 본성이 있고 본성은 삶과 행동을 이끈다. 그리스도로 나면 그리스도의 본성이 삶을 이끌고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삶은 예외 없이 행동이 있다. 그 행동, 그 삶을 기록하면 성경이 된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도 사실 그것이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므로 그 의가 이끄는 삶을 산 삶의 이야기, 예수님의 정체성과 말씀과 삶 그리고 예수님을 인하여 거듭난 제자와 사도들의 삶과 생각과 말을 기록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리스도로 거듭난 모든 사람의 이야기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같고, 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의 원본인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듯 예수님을 인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이 된 하나님 아들이니 그들의 모든 것은 당연히 성경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이 당연함이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어색함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예수님이 낯설었던 제자들처럼 그래야 한다. 성경에 분명히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는 동일한 혈통, 동일한 생명, 동일한 본성과 동일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생명이 되는 것이라 하고 있다. 그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심과 같이 스스로가 거듭났다고 믿고 살았다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렇게 된 자신은 모든 것을 이룬 존재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듭난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듭났다는 것은 자기 착각일 뿐이다. 그 착각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임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렇게 괴로웠던 것처럼, 오늘 자기 스스로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자신이 성경을 다 이룬 사람, 성경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이루어진 사람, 성경의 모든 말씀이 자기 본성임이 발견되는 사람,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사람, 자기 삶을 돌아보니 성경에 기록된 것을 발견하는 감동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다면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껴야 한다.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는데 존재하게 되었음에도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살면서 태연하게 교리 문답에 답했다는 것을 구실로 자신이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 믿으며 시계추처럼 교회에 왔다갔다하며 예수님처럼 되려고, 또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며 태연하게 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을 외식으로 기만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자기 육신의 정욕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 가치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을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만한 것이 아니며,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성경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목적이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생으로 사는 목적이 그것이라는 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삶이었듯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 곧 의와 뜻이 내 삶의 목적이고 본질이다.

 

이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이 글의 주제로 삼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높은 존재라 생각한다. 그리스도가 높은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높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추구하면서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이런 착각은 제자들에게도 있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제자들도 용납하기 힘든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인정한다는 정상인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고, 그와 함께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낯설어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목욕한 자로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었다는 증거라는 점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오늘날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이 낯설지 않고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도 모르는 증거임과 동시에 그들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물론 교회나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구속을 믿는다고 생각하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은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으므로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한다. 그것은 육신 가진 사람으로 오셔서 육신 가진 사람이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을, 아니 그것이 그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든 것을 부인한다.

 

그러한 불신은 예수님과 육신 가진 사람의 존재 목적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믿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생명의 본성으로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일부는 되는데 어떤 것은 잘 안된다고 할 수 없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어떤 것은 잘 되는데 어떤 것은 안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을 어불성설이란 말이다. 생명으로 나면 다 되는 것이지 일부만 되는 것은 없다. 사과 열매가 달기만 하고 신맛이 없는 경우는 없다. 육신 가진 자신이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 일부의 결손이 아니라 거듭나지 못한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성경을 지키는 문제도 결을 같이 한다. 성경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은 곧 자신은 거듭난 생명이 아니라는 자백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리스도로 났다면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말씀하시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자신의 이야기여야 합당하다. 즉 자신의 모든 삶은 그저 살 뿐이라도 성경을 지키는 것이 되는 삶이 되었을 때 비로소 거듭난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만나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되려고 성경을 지키면서 노력하는 삶을 산다? 그것은 거듭나지 못했다고 시인하는 것이지 신앙의 태도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육신의 삶은 언뜻 성경대로 살기 힘들어 보인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항상 기쁘지 않다. 모든 일이 감사하지 않다. 언제나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대한다는 것도 꿈같은 이야기 같다. 이런 모든 말씀들을 준행하며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 그리고 가족의 안녕과 더 나아가서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거듭나지 않았다는 증거며,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 없이 성경을 보고 있다. 성경을 읽고 행동으로 지키려는 사람은 심청전을 읽고 효도를 하려면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다.

 

근본적으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먼저 있었다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가 된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자신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는데 성경과 자신의 삶이 다르다? 그것은 모순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면 성경이 다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남은 것은 그 생명대로 살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함까지 자라고 그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지 성경대로 살려는 노력만 하다가 다 이루지도 못한 체 죽으면서 천국에 간다고 스스로를 세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존재가 되면 다 이루어지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나니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성경은 노력하는 계명이 된 것은 그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로 거듭났다면 성경은 자신 안에 다 이루어진 것을 스스로 안다. 이것은 낯선 정도가 아니라 미지의 세계다. 그러나 모두에게는 아니다. 세상에는 성경이 자신의 이야기가 된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이 있기에 사실 세상이 망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증거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삶은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오히려 더 초라하고,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행동이 성경을 어기는 것 같아도 그 존재 자체가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회복된 존재라면 성경은 다 이루어진 사람이고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예수만 믿으면 도둑질해도 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꼭 있다. 놀라울 정도로 항상 그렇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동일성이 아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사람이 도둑질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그것이 놀랍다. 그런 어리석은 반문은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도둑질하는 본성을 가졌다는 말이다.

 

확신하기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곧 성경대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의 삶이 세상의 법과 도덕과 질서를 지키는 삶으로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을 알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성경은 세상의 법과 도덕 그리고 질서나 예의 아래 있는 것이 아니면 성경대로 산다는 것이 그것을 준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너 옳다고 하는 본성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의무감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어이없게도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야!”라는 주장 앞에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한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이다.(그 유대인들의 그리스도가 오늘날 사람들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를 바라며 비는 그리스도다.) 그릇된 것이지만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 앞에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본성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생명이다. 그런 그리스도로 나기만 하면 성경이 이루어진다는데 그리스도로 나면 도둑질해도 된다고 반문하는 것은 정말로 거듭나지 않은 생명임으로 스스로 자인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은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과 본성에 관한 것이므로 그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이다. 그 삶을 책으로 만들면 성경이 된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성경이 되었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것을 전하러 다닌 사도들의 생각과 말과 글과 삶이 또 성경이 되었다. 구약도 그렇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한 이들의 삶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그릇된 안목의 괴리를 기록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표현되었다.

 

이와 같이 성경대로 산다는 것은 자기 밖에 있는 어떤 말씀이나 계명을 준행하려고 애쓰고 신앙적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본성대로 사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에게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 거듭난 생명으로 살기를 바라시며 주신 말씀이니 거듭난 생명으로 나서 그 본성대로 사는 것이 바로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그 삶은 우리가 아는 성경이 원하는 것이므로 그 삶은 언제나 그 성경을 준행하는 것이며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2. 23. 14:31 Writer : 김홍덕

성경에 있는 말씀을 지켜낸다는 것에 있어 성경을 행간을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맞다. 문제는 성경을 행위로 지키느냐 존재로 지키느냐의 문제와,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성경대로 사는 것으로 보느냐의 문제다. 이것은 타협이 아니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이라고 하는 것을 타협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망이라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지 답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하나님의 관점과 생각이 모든 이론과 현실에 우선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생각과 관점이 우선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의 첫 걸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성경을 지키는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을 산다는 것은 분명히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이므로 성경을 지키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거듭났다고 주장해도 헛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신앙적 과정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잠깐 심청전을 이야기 해 보자. 심청전이란 소설은 부모님에 대한 효()를 이야기하는 책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 것이다. 그렇다면 심청전이 이야기 하는 효도는 바다에 빠지는 것인가? 심청전을 읽고 효자, 효녀가 되려고 심청전이 말하는 것을 지킨다는 것이 바다에 빠지는 것인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 것이다. 행여 주군가가 부모님께 효도를 하려면 어딘지 모르는 인당수에 빠져야 한다고 주장하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심청전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당연히 성경도 그런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봐야 한다.

 

성경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또 한 가지 배경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우리가 다 믿고자 하는 대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 그리고 한계에 대하여 명확하게 아신다는 의미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사람에게 할 수 없는 계명을 주고서 어떻게 하나 보고 즐기는 고약한 하나님이 아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배경이다. 이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예수님은 화도 내시고 또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정말로 침울하셨는데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뻐하신다고 하셨다. 율법을 어기신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지켰다고 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과 같이 행위로 성경을 지키는 것을 지키는 것으로 보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내가 기뻐하는 일을 하는 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기뻐하는 자곧 그 존재가 기쁨이 되는 분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에 기인한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의미하는 것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을 퀴즈와 답으로 알 듯 하지만 스스로 있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닌 사람과 세상의 모든 만물의 가치관 너머의 개념이다. 어쨌든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누구를 대할 때 무엇을 했느냐(하느냐)?’가 관점이 아니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외모나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의지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라는 본성을 모든 성경을 통해 늘 보이신다. 대표적으로 아담이 범죄 했을 때를 보자. 하나님의 영을 어긴 아담에게 하나님은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왜 내가 하지 말라는 짓을 했느냐?”라고 물으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당연히 이것은 장소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 그렇게 물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외모와 형식을 보시는 신으로 보는 것에 매몰된 구제불능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변화산에 오르시기 전, 이제 나는 십자가를 지러 간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는 것에서 너는 나에게 어떤 존재며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의로 여기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서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본질로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있다고 설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존재론적인 관점은 거듭남에 대한 뿌리다. 거듭난다는 것은 존재가 바뀌는 것이지 행동이나 방법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기 전 곧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하던 사람이 교회에 다니면서부터는 하나님의 힘을 빌려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존재가 바뀐 것이 아니다. 거듭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런 사람은 겉모습의 하나인 방법만 바꾼 것이다.

 

그런 가치관은 당연히 성경을 지킨다는 개념도 행동으로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존재가 바뀌지 않았는데 존재에 종속된 행동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하면 분명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사람, 성경을 행위로 지키려는 사람에게 성경은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것이 된다. 예수님과 같아 질 수 없으니 예수님 같이 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어떤 존재이기를 바라시는지를 설명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을 지키려면 근본적으로 성경이 의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성경이 다 이루어진다. 성경이 사람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라라고 읽히는 모든 행동들, 그래서 사람이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게 하는 그 표현들은 모두 존재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행동은 존재 이후에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행실을 행하려면 먼저 성경이 원하는 존재, 곧 생명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대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로 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행위 규범이 자신에게서 나온다. 당연히 하나님은 그 행위보다 그 사람의 어떠함을 보신다. 원하는 존재가 된 사람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합당하게 여기신다. 여기서 하나님이 여기신다.’라고 하니 합당하지 않은 것을 합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그런 기만은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온전하게 여기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본성에 맞다는 의미다.

 

근본적으로 성경은 준행하려고 노력하는 말씀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님처럼 되는 매뉴얼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사람들의 일기와 같다. 거듭난 생명이 보여주는 삶의 모양이 어떤지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예수님의 일을 기록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기록해 놓은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을 지키는 법은 다른 것 없다. 예수님과 같이 거듭나는 것뿐이다. 당연히 아직 노력하고 있다면 거듭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