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 58

(요엘 2:28-32) 구원은 남은 자들의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20. 7. 17. 12:09 Writer : 김홍덕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에서 ‘누구든지’는 ‘아무나’가 아니라 엄격한 자격이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앞선 글에서 설명하였다.


그 자격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을 좇아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하나님께 구하는 신앙이 자신에게 재앙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회복과 성령의 임하심을 경험하고, 성령의 임재로 인하여 그 날까지 자기 삶의 해와 달과 같았던 자신의 의로움과 가치가 지배하는 자아의 세상이 망한 사람이 자격자라는 말씀이 요엘서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를 확증이라도 하듯이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하)”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예루살렘에 피하는 자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자는 <남은 자> 중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는 ‘아무나’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키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단지 세례문답이나 교회의 예식에 참석했다는 것 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믿고 있다. 더욱이 그것이 성경을 학문화 한 신학을 육신의 노력으로 공부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교리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은 더 기가 막히는 일이다.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나 알도록 주신 성경을 학문으로 성역화하고, 그 학문을 이수한 사람들이 종교 안에서 육신으로 이룬 업적으로 설교하는 권리를 얻어서 떠드는 말에 행위나 업적을 의로 여기시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을 의탁하는 도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은 결코 쉽거나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너무 쉽고 상식적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것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어렵다. 그것은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면 너무 쉬운 것인데 사람들에게 구원이 쉽지 않고 어려운 것은 그 단순한 순종을 등지고 있어서다.


하나님 의에 온전히 순종하기로 하면 쉬운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사람이 자기의 의를 좇아 살다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기 위해서 겪는 과정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물론 그 과정은 사람에 따라 다르고, 성품이나 겪은 세월에 따라 다르겠지만 삶의 여정이 순탄하거나 아니면 험난하거나 자기의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런 과정을 지나지 않았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아무리 가르치고 믿어도 그것은 착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기 전에도 바라는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이었는데 교회에 다니면서 동일한 것을 바라면서 단지 그 성공과 평안을 하나님이 주시면 다르고, 성공과 평안의 세월을 하나님을 위해서 쓰겠다고 다짐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거듭났다면 이전과 다른 생명과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교회에 다니기 전, 하나님을 믿기 전이나 믿고 난 다음이나 귀한 것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생명을 거듭났다고,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속이는 것이다.


세상이 크고 비싼 자재로 지은 건물을 좋은 건물이라고 하듯이 교회를 크고 비싼 자재로 건축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 말하는 것은 전혀 가치가 변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도 시험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를 얻는 것을 복 받은 일이라 생각했는데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라고 생각하는 생각 어디에 거듭난 변화가 있는가? 그런 것은 거듭난 것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성경 이전에 상식적 논리로도 말이 안 되는데, 그것을 성경을 채색하여 말한다고 상식 넘어 신앙이 된다고 가르치고 믿으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만인가? 


더욱이 그런 기만적 신앙은 단순하게 구원을 얻지 못했는데 얻었다고 착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지극히 모독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은혜와 복과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복과 영광으로 여긴다고 하나님도 그것을 복과 영광으로 여기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도 세상과 동일한,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과 동일한 가치관을 가진 신으로 치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하나님도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영광과 복으로 여기신다면 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말구유에 나고, 세상 가장 천하고 저주 받은 사형수로 십자가에 못박히게 두셨을까?


이 하나만 양심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나님이 사람들과 동일한가치관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생각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은 내려놓지 않고 거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니 자신들도 믿고 있으니 그것이 진정한 재앙인 것이다.


구원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수에 의지하여 믿고 있는 대중적 신앙이 자기 영혼의 재앙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님께, 교회에 가서 세상이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 이름으로 구하고,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 쓰겠다고 부도 수표 발행하는 신앙이 구원 받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행할 사람, 하나님을 위한 능동적인 사람이 필요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사람, 수동적인 사람이 필요한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서 파생된 가치를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금과 은, 그리고 피조물인 사람에게서 나온 사상적, 철학적, 도덕적 가치를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그 가치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규정한 신앙이 구원 받은 신앙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신학도 뭐도 아닌 그저 피조물인 사람이면 아는 상식적 논리다.


구원은 남은 자들의 것이다.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의로 여기고, 가치로 여기고, 신앙으로 여기나 하나님의 정체성에 반하고,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맞지 않고 사람들의 상식에도 위배되는 신앙이라는 재앙에서 남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메뚜기 떼의 재앙에서 남은 자는 대중적인 가치와 신앙이 하나님 앞에 자기 영혼의 재앙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대중적 신앙이 망한 신앙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믿음의 여정을 출발한 사람들 중에서 남은 자들에게 있다는 말씀이 이 요엘서의 말씀이다.


남은 자들은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적 신앙이 자신에게 재앙이라는 것을 인정하므로 매우 어둡고 캄캄한 날을 맞이했던 사람이고, 그 어둡고 캄캄했던 날이 여호와의 날임을 체휼한 사람이며, 그 여호와의 날을 인하여 자신의 가치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기준으로 회복된 사람이며, 그 회복을 인하여 임하신 하나님의 영이 일으킨 이적을 보고 그날까지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가치와 의와 선과 악의 기준과 같은 해와 달이 모두 어두워져 그날까지 자기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길고 긴 여정을 지난 사람이다.


구원은 그 여정을 지나기까지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회복이자 은혜와 생명이다. 그런 여정이 자기 삶에 없다? 그럼 당연히 구원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함부로 자신을 구원 받았다 여길 일이 아니다.


욥기를 마치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4. 21. 09:18 Writer : 김홍덕

일반적으로 욥기는, 욥이라는 의인을 사탄이 시험하려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가하시므로 욥이라는 의인이 잘못한 것 없이 엄청난 고난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을 잘 이겨내므로 하나님께서 고난 이전보다 더 큰 복을 주신 것을 말씀하시므로 욥기를 읽는 사람들에게 인생에 원치 않게 닥친 고난을 잘 이겨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욥기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는 인생에서 사람들이 고난이라 여기는 일이 왜 있는지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견해가 다릅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힘들어 하는 것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에 이른다는 말씀이 여기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자기 맘대로 해보고자 하는 그 욕심이 사망에 이르게 하여 모든 사람이 죄와 사망에 빠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욥의 세 친구들의 말 속에 녹아 있습니다. 세 친구들은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은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말 속에는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신다는 뿌리 깊고 잘못된 신앙관이 굳건하게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행위로 죄를 범하면 인생이 바라지 않는 고난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기에도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고난은 사람에게 있어 벌을 받는 것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즉 사람은 육신의 삶에 고난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이 바라는 것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이 꾸준히 말씀하시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엘리후가 하나님께서는 때로 사람을 아프게도 하신다는 말에서 육신의 고난은 벌이 아니며, 더 나아가서 육신의 소망이 육신의 평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좀 더 나은 고난에 대한 견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개념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더 나은 삶을 주시기 전에 그 사람이 그 삶에 합당한 역량을 가졌는지, 신앙을 가졌는지 시험하시고 또 합당하게 되도록 연단하신다는 개념입니다. 이것도 세 친구들의 말 속에 있습니다. 욥이 회개하면 더 나은 복을 주실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욥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고난이란 하나님의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위로 죄를 범한 것에 대한 벌이나 응징도 아니고, 고난이라는 것을 도구로 하여 인생의 업그레이드하시고자 함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위로 죄를 범한 것에 대한 벌로 고난을 주신다면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사라집니다. 존재의 신이 행위를 의로 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것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조차 않으십니다. 그것은 욥이 그것에 대하여 분명한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이 세 친구들과 끝이 없을 것 같은 논쟁을 한 대부분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고난을 도구로 사람을 업그레이드하시려 했다면 그것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만약 고난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업그레이드 하는 수단이라면 하나님의 창조는 온전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고 큰 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명제에도 완전히 어긋날 뿐 아니라,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도 단순한 립서비스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고난은 무엇인가?

욥이 겪은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신으로 알다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며,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무엇이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난 다음에 겪는 영적 갈등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욥의 고난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러니까 육신의 삶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겪는 것을 고난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결과 받는 벌이나 값이 고난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이라는 것이 죄의 결과로 여겨지거나 아니면 육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고난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것이 시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고난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욥의 고난이 무엇인지, 욥기가 어떤 내용인지 알려면 적어도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며 창조주이신 것이 온전히 자기 안에 있어야 비로소 이해할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의 고난을 이해하는 것은 단지 욥기를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욥의 고난에 관심이 간다는 것은 그 생명이 거듭났다는 것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단지 범죄에 대한 벌이나, 연단의 수단으로 욥의 고난을 본다는 것은 거듭난 생명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욥이 겪은 고난은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을 알게 된 다음 직면하게 되는 영적인 갈등이 본질이고, 그 고난이 어떻게 해결되는지는 엘리후와 하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설교자들이 욥기를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그 주제는 고난을 이기면 더 큰 복을 주신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세 친구들의 견해에 대한 설교도 듣기 힘듭니다. 그것은 무지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신들의 설교가 세상에서 육신이 평안하고 성공하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그렇지 않는 것을 고난이라 정의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것도 아닌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난 생명이 되면 처음에는 그 기쁨이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마치 머리 속에 사이다를 부은 것 같이 성경이 자기 안에서 명쾌해지고 욥기 처음에 설명된 욥의 모습처럼 자신의 영혼이 너무 풍족하게 보입니다. 바울 사도가 아라비아에서 3년을 보낸 것이 그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풍족해질 것 같았는데 그렇게 온전히 알려고 했던 하나님을 바로 알았는데 인생의 형편이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이 누적되면 그것은 정말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곤고한 시간이 됩니다. “위로함이여 만족이 되라!” 외치게 되고, “이 복음을 괜히 알았노라!”한탄도 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겪은 사람은 욥의 모든 한탄이 자신의 이야기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옵션이 아니라 온전한 생명이 되어가는 필수적 과정입니다. 경부선을 타고 부산에서 서울을 가려면 대구, 대전을 반드시 거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또 육신의 문제를 의탁하는 하나님으로 아는 것은 신앙도 아닙니다. 그것은 무당에게 가서 굿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굿보다 싸고 간편하게, 아니 공짜로 신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는 것이 교회가 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값없이 육신의 문제를 의지할 신이 되어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닌데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기도하는 것은 신앙도 아니며, 그런 신앙은 욥의 고난을 바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에서 떠나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육신의 문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치관과 안목이 달라지는 것으로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이 주는 안목이 없으면 그렇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바뀐 안목으로 세상과 육신의 삶을 보면 우선 자신이 몰랐던 세계가 밝아진 기쁨이 너무 크지만 세상에서 자신이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신의 일상은 숨 쉬는 동안 끊이질 않는데, 그런 일상이 가져온 각양의 문제들, 사람들과의 갈등, 경제활동과 같이 살아가면서 뗄 수 없는 문제들이 이전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며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면 하나님께 그것을 기도하거나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정말로 난감한 상황이 됩니다. 인생이 겪고 있는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이 왜 있는 것이며 어떻게 마주해야하는지 모르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한탄하고 항의하며 죽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이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온전한 존재의 신으로 알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마음이 가득한 세월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땐 아마 ‘하나님을 괜히 알았다.’ 싶은 마음이 넘쳐나고, 욥과 같이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필연적인 과정일지 모릅니다.


이 여정은 심히 곤고한 여정입니다. 이전에는 육신의 삶이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면 적어도 위로는 되었지만 이젠 하나님은 그것을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분명히 알기에 무엇을 먹을지 마실지 입을지를 기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는데 육신은 여전히 그 문제와 하루도 빠짐없이 씨름을 해야 하는 현실을 벗을 수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진퇴양난에 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알면 욥이 왜 죽기를 바랐는지 충분히 알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우리에게 이 곤고하게 여겨지는 육신의 삶이 주어진 이유를 깨닫는 것으로 이끕니다. 육신의 삶 그 안에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육신에게 반영된 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상과 벌을 가늠하고, 상을 받는 인생이 되기 위해 육신의 수고를 감수하며 그것을 현재의 고난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그 자체가 목적도 아니며, 그 상태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지표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육신이란 진정한 하나님의 도구이며, 그 도구로서 너무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많은 질문들은 하나 같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을 위하여 얼마나 온전한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이란 존재도 오직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 안에서 소비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단지 하나님의 도구라면 그것을 인간 존엄성의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그건 자윱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택할 수 있는 마음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그 인간 존엄성은 인간이 존재함으로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 이전에 왜, 누가 존재하게 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면 누구라서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마다하겠습니까?


욥기는 바로 이것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인생이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그 목적 아래 있는 것으로 그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 보기에는 곤고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온전히 알고 보면 욥의 최후 고백과 같이 하나님께 고백하게 되고, 그것은 진정 인생의 감사함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욥의 최후 고백과 같은 말씀이 성경에 너무나도 많은데 특히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면서 하신 말씀이 대표적이며, 고린도후서에서 육신의 장막(고난)은 벗는 것이 아니라 덧입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고후 5:4)이 그것이며,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육신의 곤고한 삶을 포함)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심이 그것이며, 끝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안(고난을 이기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는 말씀도 그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욥기를 통하여 우리가 그토록 힘들어하는 이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목적 아래 온전한 것이며, 육신도 세상도 삶도 모든 것이 온전하기에 그 주신 목적만 온전히 알면 욥의 마지막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고 바울 사도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신 평안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욥기를 통해서 우리가 교훈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욥기 속에 나오는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은 하나님께 욥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의의 기준이라는 가치관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욥이 의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의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가치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기준이 육신의 행위에 있다고 여기기에 그 의의 보상인 복과 벌도 육신에게 임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이 겪은 고난은 단순하게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모르는데 친구들의 그 많은 책망에 꿋꿋이 소신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고 그것을 성경에 기록할 하등의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듯 육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거나 벌을 받아 고난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 욥이란 사람이 당한 고난이기에 이것은 행위에 기인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욥의 고난이 행위에 기인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은 사업이 망하거나 어려운 사람에게 ‘교회에 가야 해결된다.’는 식의 사고를 가지지 않은 이에게 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뭔가를 잘못한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천벌 받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당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하여 받게 된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욥이 당한 고난은 욥의 육신의 복을 몇 배나 더하여 주시기 위하여 시험하신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힘든 일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혹은 복)를 주시려고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가?’라는 식의 말을 하는데 욥기에서 욥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고난의 정의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욥기를 포스팅하는 내내 강조한 것 같습니다.


욥의 고난은 지속적으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로 의로움을 판단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너무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 겪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그 과정의 끝에 고난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도구나 수단이나 연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람을 경영하시므로 사람이 겪는 일을 사람이 자기 뜻과 맞지 않아서 힘듦으로 스스로 고난으로 여기는 것일 뿐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히 경영하시는 것의 증거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자 하심입니다.


앞서 몇 번의 글에서 욥의 신앙 여정에 이르지 않았다면 이 욥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고난을 바로 앞서 설명한 고난이 하나님 경영의 증거라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욥이 당한 고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체성과 무엇을 의로 삼으시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나서 육신을 가진 인생의 방향에 대한 분명하지 않음이 신앙 여정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아 그런 고통이 없었다면 아직은 하나님을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이 생기면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라고 반문하거나, 행사가 형통치 않은 사람을 보면서 ‘교회에 가서 예수 믿어야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거나, ‘기도하고 성경 읽으면(행위) 좋은 신앙이 되고 그래야 육신의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고난은 육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갈등의 범주에서 보는 것일 뿐, 욥이 겪는 고난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 욥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기 육신에게 임한 일들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안 된다니?”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도하는 행위나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고, 성경을 보며, 교회 봉사에 빠지지 않고 수고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의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라는 막막함이 주는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욥의 고난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와 성경 읽는 것, 그리고 봉사와 같은 것을 부인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행하므로 의로워진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고, 그 생명의 본성에 이끌리어 본능처럼 하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왼나사와 오른나사의 차이와 같이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즉 욥의 고난은 왼나사가 오른쪽으로 돌려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자기 손에는 왼나사 밖에 없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는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그 의를 인하여 복을 주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문제는 받으려고 하는 복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해결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이 바로 욥기에 나오는 사탄과 세 친구의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고난 역시 하나님께 자신이 행동으로 죄를 범함을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너무 괴로운 상태였습니다. 그의 고난은 그렇게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있는데 왜 육신의 삶이 이리도 곤고한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던 것이고 그것이 너무 곤고하여 하나님께 죽기를 바라며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원망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양심이 있다면 그 원망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들어주시지 않았기에 한 원망이지, 하나님의 경영하심과 자기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여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던 것이 아니며, 예수님의 십자가와도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행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면 주신다고 성경에 약속하셨으니 그것을 믿었는데 주시지 않으니 원망할만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 안에 있는 사람, 즉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것을 육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일을 말씀하신 것이지 그것을 한다고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군인(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서 군복(기도하고 성경 보며 성경대로 살게 되는 것)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욥의 과정과 같이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서 육신의 삶을 다시 보면 처음에 그 막막함과 참혹함은 정말로 욥의 형편에 비할 만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정체성을 괜히 알았다 싶으며, 복음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괜스레 알았다 싶은지 정말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날 까지 자신의 의에서 비롯된 자식 곧 자신의 의가 형식으로 표현된 모든 것이 욥의 자식들이 죽듯 사라지고, 자신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던 모든 것이 욥의 재산이 날아가 버리듯 무가치한 것이 되고, 자신의 아내, 곧 자신이 가신 삶의 형식은 오히려 자신을 저주하며, 자신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여기는 친구들이 이단이다, 남들처럼 믿지 않더니 ‘꼴좋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것을 홀로 당하고 있는 것 같은 그 허망한 세월은 정말로 욥이 하나님께 죽기를 구한 것과 동일한 마음이 듭니다.


바로 이 여정이 욥이 겪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분명하게 알아서, 인생이라는 것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고, 육신의 곤고함도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분명하게 알기에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완전한 무능의 상태의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그 시절이 바로 욥의 고난이고, 바울 사도가 말한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한탄한 세월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믿기에 기도하면 얻을 것이라고 하여 기도하려 하니 육신이 너무 안 따라주고 직장이나 혈육이 원하는 것을 하느라 메여 있어 마음은 하나님께 있지만 육신은 세상에 종살이 하는 것 같은 것이 욥의 고난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 친구들의 가치관에 뿌리를 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도 성경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곤고함의 세월, 정말로 무능해서 아무 것도 자기 힘으로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정말로 복음을 괜히 알았다고 탄식하고, 하나님께서 목숨을 취하셨으면 차라리 좋을 것이라 한탄하는 세월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목적 아래 자신이 경영되고 있다는 그 하나 만으로 감사하게 되어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셨음을 감사하게 되는 전과정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극적인 변화를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면서 이야기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을 인하여 감사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 이유를 보이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인하여 사망의 몸이 벗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덧입을 것임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받으면 고난이라 할지라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전하였습니다.


그 바울 사도의 반전과 같이 욥 또한 하나님의 질문들을 들으면서 세상의 모든 것,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영하심 아래 있고, 그 경영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귀속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렇게 곤고하게 여겼던 그 고난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었듯 사람의 행위에 대한 심판의 결과를 인함이 아니라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생을 경영하시는데 그것을 사람이 자기 육신을 귀하게 여기는 기준으로 보니 고난이었을 뿐 그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욥기가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고난으로 여기는 육신의 삶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할 때는 하나님께 뭔가 죄를 범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거듭난 생명이 된 처음에 육신의 삶을 보면 하나님을 바로 안다고 달라질 것 없고, 오히려 이전에 성경을 몸으로 지키면 된다고 생각으로나마 위로 받던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겪는 갈등의 세월 속에서 하나님도 복음도 괜히 알았다 싶은 그 괴로운 시절이 고난으로 여겨지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고난은 사람을 심판하심을 인함도 아니요, 성장시키시기 위함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자기 생명이 되는 삶으로 경영하심을 사람이 고난으로 여길 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 존귀한 목적 안에서 생명의 빛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욥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끝)

어떤 이들은 욥의 고난이라는 것이 그저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일부이고, 하나님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경영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에 불과한 것이냐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만하게 보일 수 있는 그 일 하나를 사람이 못합니다. 그것을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을 기도하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모든 스포츠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몸에 힘을 빼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잘하려고 몸에 힘을 주면 몸이 굳어져서 제 기량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 아니 아마추어 동호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도 다 아는 몸에 힘을 빼는 그 하나가 안 되어서 기량이 늘지 않고 발휘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성경을 가지고 씨름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은 철저히 믿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주라는 그 하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전히 은혜로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고 뛰어 내리는 사람들과 같이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인데, 살아가면서 각종 문제들 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삶의 전반을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교회에서 아니면 집에서 기도하는 내용을 돌아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나라와 세상 걱정을 하고, 삶의 파편들을 하나씩 하나님께 해결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좋은 믿음인 것 같지만 솔직하게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맡겼다면 ‘하나님께 맡긴다.’는 기도나 다짐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각종 일들 하나하나를 하나님께 기도하여 해결하려고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맡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고 완벽한 착각이며 불신입니다. 전투만 이기려하고 전쟁의 결과는 생각지 않는 바보 같은 지휘관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삶을 세상을 살기에 적합하게 주셨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가진 육신의 역량과 사회와 세상의 제도와 법질서 안에서 살고 있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그렇게 살면 되는데 살아가는 문제까지 일일이 하나님께 맡긴다면서 기도하고 그것으로 안 되면 돈 싸들고 기도원이나 목사에게 가서 기도해 달라고 하는 이런 망나니 같은 짓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경영하시는 것을 믿지 않는 증거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 살아가는 순간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 또 무엇을 할 것인지와 같은 것은 하나님께 물어볼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사건건 하나님과 다투는 것입니다. 정말로 알아야 하는 것은 왜 이 삶을 주셨는지에 대한 목적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살게 하셨다면 온전히 경영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그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에 대하여 인생의 고난이라는 삶의 한 파편을 가지고 하나님께 이유를 알고자 했습니다. 요즘 말로 큰 그림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고난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온전히 세상을 그리고 욥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고자 하시는 경영에 수반된 한 과정에 불과한 것인데 욥은 그것을 아는 것에 인생을 걸고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나님께 항변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욥이 참 신앙 없는 사람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사실 더합니다. 아니 욥에게 비할 바도 못됩니다. 욥은 비록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듯 대든 것 같아 보여도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어떠함을 가지고 의로 삼거나 그것을 복으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정도는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살 ‘그 정도’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매개는 육신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볼 때 고난이라는 한 명제는 자신에게 참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큰 그림이 안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들은 하나님께서 말 그대로 세상을 온전히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욥에게 분명하게 각인을 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영은 언제나 온전한 것이며, 그 경영 아래 있는 피조물들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도 하나님께 자기 삶의 문제를 기도하고 의지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공부해서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전히 경영하시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 그런 신앙,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답답함은 정말로 말할 길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한 번도 웃으셨다고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될 지경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자기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경영에 속한 것임을 알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될 대로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존 본능을 주셨으니 물에 빠지면 살려고 하고,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경제활동이 요구되면 치열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고 그것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서 어떻게 하면 물에 빠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빠지면 수영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하고, 육신이 평안하면 교회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회 칠한 무던 속의 생각은 어떻게든 경제생활을 편하게 하면서 돈을 벌까 궁리하면서 그 각각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순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고 하심이 바로 이런 사람들의 생각에 응하시지 않겠다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육신으로 살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삶의 작은 파편들 하나하나를 하나님께 의지하며 이겨가는 것을 신앙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이며 믿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들을 듣고서 욥이 이전에 알지 못한 것을 말하였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결 같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피조물 최대의 영광인 목적대로 사용되는 생명과 빛으로 인도하시고 그 안(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바라시고 인도하시는데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겪는 일들을 해결하려고 하나님께 기도하니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불신과 어두움과 생명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욥이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청조 목적을 모르는 삶이라는 것은 재와 티끌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수많은 질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창조하신 목적대로 온전히 경영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고, 그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가 겪는 고난이나 또 모든 일상들은 그 하나님의 경영하심에 수반된 것임을 알게 될 것이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을 경영하시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되며, 항상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니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영하시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사람을 단련시키거나, 아니면 큰 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 자격을 갖추는 과정으로서 고난을 사용하시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이 생각은 사실 욥의 친구들이나 욥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세 친구는 하나님께 죄를 지은 이유로 인하여 그 죄를 돌이키도록 사람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을 한 반면, 욥은 도무지 그 이유가 있을 것인데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고난 자체가 어떤 목적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후의 말에서 고난은 그 자체가 어떤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경영하시는 과정에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바울 사도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이 겪는 모든 일은 그 존재의 목적 범주 안에 있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성경 한 권의 이야기를 가지고 주제로 부각된 논제를 정하여 이야기하다보면 신앙이라는 것이 다양한 분야에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성경은 보기에 66권의 책이 엮여져 있지만 사실은 한 권의 책이고 무엇보다 주제 역시 하나인 책이기 때문에 그 주제를 알고서 보면 모든 성경이 청색실과 홍색실과 자색실이 잘 엮어져서 제사장의 옷이 되는 것과 같이 성경이 속사람 안에서 엮이고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것으로 모자라서 아들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전하고자 하신 것은 우리 인생들의 존재 목적 그 하나입니다. 인생이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조물주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알고자 하는 것이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르신 것은 아버지는 아들의 의를 가진 분이고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그 뜻이 흙으로 지어진 우리 자신에게 임하여서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죽음과 죄의 자리에서 떠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할 유일한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하나를 안다면,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며, 어떻게든 그것을 사람에게 알게 하시고자 하시며,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며, 존재의 목적을 아는 생명을 가진 자가 되는 밝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안다면 최소한 성경의 어떤 말씀이라도 어떤 이유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씀하시는지는 알고 성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존재 목적의 세계에서 만나고 알게 되면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 일어나는 일들, 사람들이 그렇게 그 각각의 일들과 다투어 이기려 하고 원인을 알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맹인이 눈을 뜨는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존재의 목적을 알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 뜬 사람이 보지 못하여 몸이 상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고난이라고 여겼던 것들(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여기는 것)이 사실은 고난 자체가 하나님이 의도한 것이거나 고난을 매개로 하여 다른 목적을 이루시려고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려고, 그러니까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시고 또 목적대로 경영하시는 일련의 일들일 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을 이긴 것입니다. 고난을 이겼다는 것은 고난과 다투지 않는 것입니다. 삶을 고난이나 곤고한 것으로 여기는 삶, 죽어서 천국 가서 평안을 누리겠다는 생각하는 이면에 깔린 이생의 곤고함과 매일 싸우는 사람은 고난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고난이라 여기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목적대로 경영하심 아래 있다는 증거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다투는 것을 그칠 수 있어야 비로소 고난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다투다가 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환도 뼈가 부러지고 나니 오히려 그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겠다고 하신 것도 이것을 말씀하심이며,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하는 의와 다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장하는 것에 육신을 내어 주심으로 고난을 이기셨다고 하심이 이것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아울러 바울 사도가 우리가 육신의 장막에 거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라 덧입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신앙의 한 과제로 볼 것이 아닙니다. 좀 쉬게 설명한다면 표현이 좀 어색하긴 해도 하나님의 경영에 육신의 소비를 불가피한 것이고 그 소비되는 과정을 우리가 이때껏 고난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받는 것은 욕심에 이끌린 것일 뿐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욕심은 다름 아닌 육신을 소비하지 않고 평안히 하나님을 믿고자 하고 그것을 복과 영광으로 아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스스로를 고난에 처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라마단이나 중이나 수녀나 신부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하는 것이므로 겸손하고 수도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인간 타락의 원조인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경영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육신이 소비되는 것이지 사람이 나서서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변론하겠느냐는 것이 바로 같은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이란 우리에게 존재의 목적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우리의 삶이란, 또 고난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대로 경영하심을 인하여 우리가 겪는 일의 일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 많은 질문을 욥에게 하시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심으로 나타나고 보이게 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그 질문들을 통하여 자신에게 임한 고난이라는 것이 고난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경영 속에 있는 일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