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집사의 뜰' + 109

구원의 주님이시자,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앞서서 구원이 어렵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앞서서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깨닫고 그것에 순종하며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삶의 본성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이 쉽고 가벼운 것은 어떤 존재든지 자신의 존재 목적 안에서 목적대로 사는 것이 가장 쉽고 편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먼저는 다시 한 번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의 모순이자 허구성을 짚어 보면, 세례 문답에 답하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신앙 등 여러 가지로 구원과 무관함을 말할 수 있겠으나 가장 확실한 증거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을 죄 없다 하지 못하는 그것이다.(물론 그것은 증거로 나타난 것이고, 본질은 그들의 생명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기도할 때 마다 회개로 시작한다. 죄가 있다는 것을 늘 자인하고 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자신이 받지도 못한 구원을 아주 쉬운 것이라고 여긴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쉽다고 말씀하신 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존재 목적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이 존재하게 된 목적대로 쓰이고 살아갈 때 가장 쉽게 사는 것이다. 자동차 브레이크는 자동차를 세우느라 엄청난 열이 날 뿐 아니라, 자신이 닳아 없어지지만 그것이 브레이크의 존재 이유고 살아가는 삶이기에 브레이크에게 그것보다 쉬운 것은 세상에 없다. 만약 브레이크가 자동차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게 하려 한다면 그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고 시도한다면 완전한 하나의 공학과 공장과 산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인생들에게 보이시려 하신 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은 십자가가 우리 존재의 목적이란 말씀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쉬운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짐이 가볍단 말씀은 사람이란 존재가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존재하는 목적대로 사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 구원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 만드신 목적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자신이 생각할 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좇아 사는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존재하는 것은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이기에 사람에게 가장 쉬운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을 온전히 알면 예수님께서 쉽다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녀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간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에게 좋은 결과는 쉬운 일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쉽고 가벼운 일이다. 문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쉬운 일이고 가벼운 짐인데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구원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거듭남도 말로 되는 것으로 안다. 성경에서 거듭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 말만 인정하면 거듭나고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듭남”이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자. 다른 생명으로 났다는 뜻이다. 생명이 달라졌다면 삶이 달라지고 무엇보다 본성이 달라져야 한다. 본성이 달라지면 가치관과 안목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전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거듭남이다.


그런데 구원 받기 전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바랐는데 구원을 받았다는 다음에도 동일한 것을 구하는데 그것을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기 전에는 자기 힘을 믿고, 또 세상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한다. 필요하면 불법적인 것을 도모하기도 한다. 그러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다음에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육신의 평안과 안녕과 같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의 주관자로 믿는다. 구원을 받았으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한다고 한다.


이런 상황, 이런 변화를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느냐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이런 신앙과 믿음은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것이 아니다. 구원 받기 전, 교회에 다니기 전, 하나님을 믿기 전이나 구원 받은 다음이나 원하는 목표는 같으니 거듭난 것도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다. 썩은 고기를 좋아하고 먹는 늑대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변화 다음에도 썩은 고기를 좋아한다면 그것을 두고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과 거듭남은 이렇게 엉터리다.


공부하면 좋은 미래를 보장 받는 것은 쉬운 것이나 공부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을 진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사람이다. 예수님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과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육신의 삶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다. 존재로서 존재 목적대로 사는 것이므로 쉽고 가볍다. 문제는 공부하는 것이 힘들 듯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 힘들다.


육신의 정욕, 곧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늘 소망하는 사람이 육신의 정욕이 아니라 육신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형식이자 도구며 하나님의 성품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자신이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사하신다는 것이 약속이다. 


그러므로 돌이킴은 행위에 대한 반성과 돌이킴이 아니다. 행위에서 돌이키고 회개하고서 또 다시 행위로 범한 죄를 회개하는 반복이 사함 받고 구원 받았다면서 죄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더욱이 행위는 본질도 아니다. 행위는 속에 있는 의와 생각과 가치와 철학의 표현이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인 삶의 목적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구원 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되겠지만, 스스로 알지 못하는 인생의 존재 목적, 삶의 의미를 하나님께 찾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알려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것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다.


구원은 엄청 어렵지만 구원 받은 삶은 너무 쉽다. 현재의 삶을 늘 곤고하다, 인생은 힘들다, 괴로운 인생길이라 말하며 사는 인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존재가 존재 목적 아닌 것을 좇아 사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힘들다. 반대로 존재가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은 다른 존재가 보기에 힘들 것 같아도 편안하다. 브레이크가 항상 열나고 마찰을 받아도 차를 세우는 것에 사용되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는 것과 같다. 바로 이것을 믿고 알고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구원은 방향을 바꾸는 것이고 목표를 바꾸는 것이다. 높은 곳을 앙망하다 뒤로 돌아서는 것과 같다. 돌아서는 것은 하등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높은 곳을 사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돌아 설 수 없다. 그럴 수 없다면 구원은 한 없이 어렵다. 그러나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모든 것을 주신다. 사람이 육신의 가치를 앙망하면 구원은 하염없이 어렵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낮은 곳을 앙망하면 쉬운 것이다.


애초에 이 ‘구원에 대한 담론’이란 글을 쓰게 된 동기? 이유는 사람들이 구원을 너무 쉽고 간단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구원을 쉽게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 안에 있는 일상적 비판의 일환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이 성경을 대하는 상식적 논리로만 봐도 완연한 모순임에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 시키고자 함이다. 구원에 대하여 모순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구원이 없음에도 있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신앙이다. 그 신앙에는 분명히 경각심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이 구원이 아닌 이유는 아주 많다.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곧 Identity를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다. 성경 속 대표적 우상이자 이방 신(神)인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의 신이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서 인생의 풍요와 번영을 얻겠다는 의미다. 육신의 삶의 풍요와 번영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섬기는 신이 바로 바알과 아세라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구원이 아닌 첫 번째 이유 –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 그 어디에서도 사람의 겉모습에 해당하는 육신의 일이나 외모를 중히 여기지 않으신다. 육신의 겉모습을 가지고 판단하시지도 않고, 육신의 평안과 삶의 번영과 성공을 복과 은혜라고 말씀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그것이라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준다는 것이야 말로 완전한 모순이다.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라는 정체성이 무너진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이 명백한 신앙의 핵심 하나 만으로도 하나님은 어떤 행위나 겉모습을 인하여 형식인 육신의 평안을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며, 육신의 일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분도 아니며, 보이는 세상의 일이 세상의 가치로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께, 하나님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으시는 것을 늘 구하고, 하나님이 전혀 의로 삼지 않는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서 하나님을 믿는다. 육신의 평안이나 세상에서의 성공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며, 평안과 성공을 얻고자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의로 보시지 않는 분인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늘 하나님을 바알과 아세라 취급을 한다. 그러면서 또 구원은 하나님께 받았다고 한다.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존재의 신 여호와가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이라 부를 뿐인데 하나님께서 구원과 복과 은혜를 주신다고 여기고 있다.


이것에서부터 사람들이 가진 신앙 안에는 구원이 없음이 명백하다. 결론적인, 최종적이고 쉬운 표현으로 말을 하면,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고, 그 구하는 바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믿으며 성경을 행동으로 지킨 공로와 바꾸는 장사를 하는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 존재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도 아니고 은혜도 아니며 복도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구하는 것이 이것이라는 것에서, 또 교회에 가지 않고, 성경을 어긴 행동 다음에 어떤 불행이나 예기치 않은 일을 당했을 때 ‘벌 받은 것인가?’ 걱정하는 것이나, 그렇게 벌 받을까봐 노력해서 성경을 지키려는 신앙 안에 있다는 점에서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받았다고 믿는 아니 정확히는 믿고 싶어 하는 구원은 허구며 망상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며, 그 구하는 바를 얻거나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신앙은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이라 믿는 것이기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은 없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구원이 아닌 두 번째 이유 – 무엇으로부터 구원 받았는지 모른다.


다음으로는 구원이라는 정체성이다. 앞선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구원을 받았다면 어디서 구원을 받았는지, 무엇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는지가 명확해야 한다. 자신이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고, 무엇에서 해방되었는지도 모르는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성경이나 신앙을 떠나 말 자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은 하지만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순 속에서도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이며 허망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런 구원은 없다.


구원을 받았다면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 알아야 하고, 무엇에서부터 해방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면 죄는 무엇이며, 사망은 또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자신이 구원 받은 죄와 사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구원이 무엇인지 알 리 없다.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정체성도 모르는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단지 괴변일 뿐 신앙도 믿음도 아니며 심지어 지식도 아니며 상식적이지도 않다. 몰상식을 믿음이라 믿지 않는 이상 그런 구원은 없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죄도 사망도 무엇인지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죄와 사망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육신의 행위가 어떠함을 가지고 죄를 판단한다. 사망은 육신의 호흡과 생명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모르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이라 믿고 있으니 행동을 죄라 여기고, 육신의 일이 풍요롭지 않고 번성하지 못하면 벌과 재난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죄와 사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앞선 글 혹은 블로그의 다른 글들을 참조)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구원이 아닌 세 번째 이유 – 십자가를 모른다.


사람들이 구원을 아주 쉽게 생각하는 이유는 어이없게도 십자가에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혹은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말을 곡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십자가의 대속은 한 마디로 “죄는 사람이, 벌은 예수님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죄를 범했는데 예수님이 대신 벌을 받았다는 것이 십자가에 대해 사람들이 굳게 믿는 생각이다. 그렇다보니 구원은 너무 쉬운 것이 되 버렸다. 오래 전 영화 ‘밀양’에 묘사된 유괴범의 논리가 사실 그것이다. 유괴하여 살인한 아들의 엄마에게 사과할 것이 없다고 한 이유가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사했기 때문이라는 유괴범의 논리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벌을 받았으니 나는 구원 받았다는 논리는 같은 것이다.


십자가가 ‘죄는 내가, 벌은 예수가’가 아닌 이유는 사실 명확하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십자가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내가 가야하는데 가지 않는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이신 것이다. 누구나 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한 자리고 인생의 목적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외면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오셔서 몸소 십자가를 지시면서 우리가 갈 바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첫 열매라 하고 맏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모르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을 얻음으로서 얻는 영생의 본질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모르면 죄도 사망도 성경도 십자가도 모른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 모든 세계는 그 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무나 당연하게 하나님이 존재의 신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구원은 없다.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담을 그릇이자,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삼기 위함이다. 그렇게 표현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끌려가면서 보이셨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인 우리의 운명이고 존재 정체성이며 우리가 존재하게 된 목적이자 의미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골고다 언덕의 사건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과 이유까지 다 포함한 것이다. 


사람을 향한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인 창조주 하나님께서 가지신 의와 뜻이 육신이 된 모습이 아들이고 그 첫 아들인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였을 때 사람들은 그 모습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크고 위대하며 놀라운 원세와 능력과 지위를 가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예수님을 보니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할 수 없는데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니 모독이라며 십자가에 못 박았다. 세상에서의 평안과 번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과 같이 초라한 모습이 하나님 아들이면 안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십자가는 ‘의인이 죄인의 주장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의로운 아들인데 하나님의 의에 반하는 세상의 가치로 심판하는 심판 앞에 자신을 내어 주므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의인인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주장과 심판 앞에 자신을 죄인으로 내어 주신 십자가다. 그 십자가를 우리보고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 즉 의인이 죄인에게 심판 받아 죄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고, 그 성품을 표현하는 도구로 육신을 인생에게 주셨으니 그 육신으로 예수님이 보이신 것과 같이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런 삶이 바로 구원 받은 삶이고 구원의 증거라는 의미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을 보전하고 평안하고, 육신이 도모하는 일이 잘 된다고 생각하고 믿기에 그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이라고 자기 맘대로 믿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육신의 정욕’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을 심판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가치관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치관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기는 것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가치관에 의해 심판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며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게 도무지 무슨 괴변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구원이 아닌 네 번째 이유 - 아직도 노력하고 있기 때문


이와 같이 구원은 간단하지 않다. 구원을 받았다면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의 주장 앞에 나의 주장을 내려놓는 삶을 사는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다.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생명이 거듭난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았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거듭났다면 본성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가? 어제도 오늘도 분명히 내일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본성이 노력으로 되는 것인가? 


거듭났다는 것은 아무리 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본성이 바뀐 생명으로 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그것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다.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다시 구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이와 같이 어려운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 교회에 가서 세례문답에 고백했다는 것으로 얻는 것이라고 여기는 구원, 죄는 재가 범했는데 벌은 예수님이 받았기에 사함 받았다고 여기지만 정작 자신은 죄 없다 말하지 못하는 구원, 생명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리스도와 같아지기 위해서 노력한다면서 이미 받았다고 말하는 구원은 다 허상이다. 그런 것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본성이 바뀐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로 살지 않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본성과 삶이 있을 때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시작이다. 구원은 종착지가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나는 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듯, 거듭났다면 거듭난 생명으로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는 것이다. 이런 이치가 자기 안에 생수와 같이 넘치지 않는다면 구원 받은 것이 아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천국에 가지 못한다. 쉬운 말로 지옥에 가는 것이다. 이렇듯 구원은 어렵고 희소한 것이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의 수가 적다고 하였겠는가? 당신의 구원은 본성이 이끌고 있는지 돌아 볼 때다.



사람들이 죄의 근원이자 시작이라고 말하는 선악과의 사건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죄로 보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 물론 하나님은 언제나 행위를 보시지 않는다고 하시고 예수님과 사도들도 행위로 의로워지거나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거나 아니면 “왜 불순종하였느냐?”를 묻지 않으셨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담이 어느 장소에 숨었는지를 몰라서 그렇게 물으셨을까? 전후 문맥으로 보면 아담이 숨었으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다는 것은 숨바꼭질 술래가 묻는 것과 같이 물으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어렵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절대적인 기초인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상기해 보면 알 수 있다. 머리카락까지 세신다는 하나님, 전지(모든 것을 알고) 전능(모든 것이 능한)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숨었는지 모를 리 없는 것에서 성경을 봐야 한다. 즉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으시는 “어디(where)’는 장소가 아니다. 성경은 이렇게 보는 것이다.


그럼 그 “어디”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의 존재 정체성이다. 이것이 존재 정체성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 믿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목적도 없이 사람을 만들었다면 하나님은 개념 없는 신이고, 만들기는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존재의 목적은 다른 존재가 부여한다면 하나님은 무능한 하나님이거나 더 상급자가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믿음이 바로 이것이다. 이 믿음이 없다면 구원은 논제조차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어디에 있는지 물으셨다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이 정한 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의 죄, 하나님 앞에 모든 인생의 죄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탈한 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죄다.


그럼 사람의 존재 목적을 이탈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거꾸로 반문해보자. 자신은 인생의 목적, 육신을 가지고 삶을 살게 된 목적을 알고 있는지. TV 연예 프로그램에서 한 엉뚱한 만화가에게 “태어난 김에 사는 사람”이라고 놀리는 것을 봤는데, 실상은 모든 사람이 태어난 김에, 태어났으니 삶을 살아갈 뿐 자신이 왜 사는지를 모르고 있다. 왜 사는지를 모른다는 것은 존재의 목적을 이탈했다는 것이다. 이탈한 것이 죄고, 그것을 모르는 것이 죄다. 스스로 이탈하지 않았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정당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인생의 존재 목적을 보이셨으니 이제는 소용없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창조주가 분명하게 보이셨는데 피조물이 선택하지 않고서 어떤 변명이 죄를 면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명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이유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면서까지 인생의 목적을 말씀하셨는데, 피조물인 인생이 그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무슨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모두가 다 죄인인 이유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이렇듯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죄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인생의 목적, 육신을 가진 삶을 사는 목적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은 자기 인생을 창조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구원은 쟁취한 것이 아니라 얻는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 인생의 목적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보이셨기에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셨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삶을 주신 목적을 아는가? ‘아! 구원은 그런 것이구나!’라고 머리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자기 본성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 안에 인생의 존재 목적이 있다는 것이 보이고, 십자가라는 인생 세상 가장 낮은 자리와 그 자리로 가지 않아도 되는 능력과 권세가 있음에도 끌려가는 본성이 자신의 본성이 되어야 구원 받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삶을 주신 목적을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너무 분명하게 자신의 본성이 되어 있어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언컨대 당신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이와 같이 구원은 교회에 다닌다고, 세례문답 했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했다는 것은 결론적 표현일 뿐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본성이 전혀 다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자 인생의 목적을 말씀하셨음도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 받았다 할 수는 없다.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사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인생에 대하여 가지신 가장 근원적인 창조의 목적,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데 어떻게 구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있고, 존재의 목적을 상실하면 죽은 것이다. 목적 안에서 보면 목적을 달성한 죽음이 있고, 반대로 목적을 알지 못하고, 목적대로 사용되지 못한 것이 있다. 구원 받기 전 상태를 사망의 자리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이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와 사망의 자리는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 구함을 받는다는 의미다. 


사람이 만드는 모든 것도 목적이 있다. 목적이 없다면 하나 같이 쓰레기통으로 간다. 컴퓨터 파일조차 그렇다. 그렇게 모든 것을 목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의 존재 목적은 모른다. 심지어 모른다는 것을 개의치도 않는다. 분명한 것은 자기가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존재의 목적과 존재하게 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 분명한 명제 앞에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그 성품을 표현할 형식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또한 목적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는지, 아닌지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고 근원적인 정체성이다. 창조주의 창조 목적에 맞는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그 목적 밖에 있다면 그것은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자릴 벗어난 것? 그것이 바로 죄다. 조의 어원인 하말티어가 그 의미다.


그렇다면, 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리를 떠난 것이기에 구원은 그 자리로 회복되는 것이다. 목적을 상실한 자리에서의 회복은 당연히 목적이 회복된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회복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께서 오셔서 보여 주셨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회복된 육신 가진 인생의 모습을 보이셨기에 모든 인생은 심판을 받은 것이 되었다. 기준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기준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이신 삶이 되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구원인 이유다.


이와 같이 구원은 간단하지 않다. 기준도 분명하다. 그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아주 가혹하고 어려운 기준이다. 세상의 가치를 신앙에 접목한 자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기에 하나님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하나님을 조각하여 우상을 만들고, 자신들의 바람대로 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세상 가장 낮은 자리로 가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기준이다. 그리고 오늘날 스스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다. 이런데 구원이 쉬운 것인가?


구원은 인생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표상과 기준은 예수님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목적이 회복된 삶이 무엇인지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세상에서 왕이 되고 성공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가 되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족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의 가치 앞에 자신을 내어 주는 종과 죄인이 되는 것이 그 목적으로 사는 존재임을 보이셨다. 


따라서 이것에 어떤 가치가 더해진 것도 구원이 아니고, 모자란 것도 아니고, 반대로 세상의 가치를 좇아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좋아 세상을 이긴 자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구원은 오히려 그런 가치와 삶을 떠나는 것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당신은 어디서 구원을 받았느냐고 물어오면 하나님께서 나를 조성하신 목적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를 좇아 애굽의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는 것을 평안과 성공, 의와 가치, 은혜와 축복으로 알던 삶에서 하나님이 나를 조성하신 목적대로 사는 삶으로 이끌림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구원을 얻은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문제다. 그 절대성에 비하면 사람들은 의외로 구원을 간단하게 생각한다. 아니 그냥 교회에 출석하고 등록하면 당연히 구원은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생각 아니 질문을 해 보자. 구원을 받았다면 어디서,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며, 구원 받기 전과 지금 무엇이 다른가?


구원은 죽을 자리,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서 은혜를 입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구원을 쟁취했다고 하지 않고, ‘얻었다’,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힘으로 죽을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자기의 노력이나 공로 없이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다. 


자기 힘이 아닌 은혜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구원은 명백히 죽을 자리,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원은 도무지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인가? 이것을 분명하게 정의하지 못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고 말장난에 불과하다.


물론 상투적인 표현으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러면 또 죄의 자리는 어디며 사망의 자리는 어디인가?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려면 자신의 과거 어떤 자리가 죄의 자리인지, 어떤 상태가 사망이었는지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을 구원한 이를 믿고, 감사하고, 그가 지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진심일 수 있을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려면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는 알아야…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니 상투적으로 죄와 사망에서부터라고 하는 것 때문이다. 어떤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제 그 자리와 무관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아무리 양보해도 자신이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이제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있어야 할 텐데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이 과연 그럴까?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구원을 받았다면서 기도할 때 마다 ‘회개’와 죄를 뉘우침으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 그렇지만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이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은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 말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엄청난 모순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 것은 큰 문제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의 이면을 살펴보자. 이를 위하여 이 모순을 다시 생각해보자.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죄 없는 사람이 되지 못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믿는 모순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것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에 있다. 그리고 죄를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어긴 것이 죄고,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 죄의 자리에서 건져내시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모순에 빠졌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의미다. 안다는 것은 모순이 없다. 모든 것을 막는 방패와 모든 것을 찌르는 창, 어느 것이 이기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모순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는 무엇인가? 죄의 시작은 선악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은 불순종이 죄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또한 순종을 지극히 강조하고 있으니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려운 선악과가 어려우니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접근하고서 그것을 선악과의 문제 전부라고 보는 것이다. 불순종을 죄의 시작이라고 보기에 죄는 성경이 명한 것을 순종하지 않고 그릇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신학과 생각과 신앙은 결국 죄를 <행위>로 본다. 성경을 지키지 않는 <행위>를 죄로 본다. 


죄를 행위로 보는 것은 죄에 대한 아주 간편한 해석이고 접근이다. 물론 죄는 결국 불순종이라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행위는 언제나 본질이 아니다.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생각이 나타난 것이고, 그 생각은 그 사람의 본성과 정체성(Identity)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죄의 개념이 가진 더 큰 문제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행위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는데 있다. 이것은 도저히 메울 수도, 분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 말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죄의 주체, 개념을 <행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죄라는 것은 행위가 주체이고 본질이라고 여겨서 구원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행위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거나 범하는 불순종의 자리가 구원을 받아야할 죄의 자리였고, 구원은 죄가 없어진다는 것이니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는 성경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면 죄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 않은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신호위반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보니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작 자신은 여전히 죄를 짓고 있으니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면서 죄 없다고는 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나마 자신이 이런 모순에 있다는 것을 인지라도 하고 있으면 다행이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모순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으려니 변명이 필요하다. 자기 상태, 자기 신앙의 모순을 감출 변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변명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집단이 있는데 바로 신학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변명들을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라며 저주하셨고, 회 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그 대표적인 변명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경 읽고, 기도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깨어 있어서 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런 노력을 효율적으로 할 것인지 연구하고 서로 나눈다. 심지어 그것을 나눔이라고 한다. 점점 수렁으로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달궈지는 냄비 안에 있는 개구리마냥 자신이 더 깊은 수렁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더 열심히 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수렁과 늪에서는 열심일수록 더 빠져든다. 이런 어리석음을 신학이 이끌고 있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죄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죄의 정의가 잘못된 것은 행위를 죄의 주체로 보기 때문이다. 행위를 기준으로 죄를 판단한다는 것은 행위의 주체인 육신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나타난 것이 본질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믿는다는 의미다. 성경도 문자 그대로 보고, 성경에 있는 기사도 기사 속의 사람들의 행위를 기준으로 본다. 그렇게 나타난 것을 행위로 보니 구원 받은 사람이 천국에 가면 금은보화로 치장하고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살 것이라고 말한다. 천국에서 금은은 도대체 어디다 쓸 것인가? 배고프지 않고 항상 기쁜 곳이 천국이라고 하면서 금 면류관에 큰 기와집은 도대체 왜 필요한가? 이렇게 모순이 끊이지 않는 신앙을 하나님 믿는 신앙으로 여기고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죄에 대한 시각을 교정하든지 아니면 구원을 받지 않은 것임을 자백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다.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힘을 빌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기 때문이지, 정말로 하나님의 의와 뜻과 생각이 무엇인지, 그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결정적으로 그것이 자신과 어떤 상관인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이 제 아무리 자기 입으로 또 신학적 논리나 교회의 증서로 구원을 주장해도 그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 구원은 없다.


(계속)

구원에 대한 담론 - 나는 구원 받았을까?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0. 8. 31. 11:20 Writer : 김홍덕

예수를 믿을수록 구원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깊어진다. 구원의 기준은 생각보다 엄격한 것이라는 것을 점점 믿게 된다. 그리고 구원의 기준이 엄격하다고 할 때 그 엄격함이란 우리가 흔히 보는 교회들, 어느 날 어떤 이유로 출석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세례문답 교육을 마치고 부활절 혹은 추수감사절 언저리의 어떤 주일에 받는 세례를 구원의 기준으로 여기는 것보다 좀 더 엄격한 것일 수도 있고, 그런 형식적이고 율법적이며 하나님께 삶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목적인 일반 종교적 신앙 안에서는 생각해보지도 못하는 세계에서도 범접하기 힘든 엄격함일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구원의 기준이나 자격에 대한 사설, 구원이 무엇이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무엇을 담보하는지에 대한 담론은 1+1=2라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를 산수 이상의 논리로 끌고 가려는 시도 같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을 한 번만 사는 인생의 목적과 희망사항에 가깝다고 해도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의 문제로서 여기거나 신앙하는 사람에게 구원은 사실 유일하고 절대적인 문제이다. 구원을 유일하고 절대적인 문제로 심각하게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고, 설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자기 입으로 믿는다고 해도 다 회칠한 무덤과 같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은 너무 쉽고 단순하며 그야말로 길가다 줍는 돈과 같이 쉽게 얻어지는 것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교회에서 말하고 심지어 강요하다시피 전하는 구원이 어떻게 베풀어지게 되었는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국한해서 봐도 그 절대적인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아버지가 지은 피조물의 손에 죽임을 당하므로 베풀게 된 구원이다. 그것도 당시 최고 극형인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말이다. 설사 그 덕에 구원이 쉬워졌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구원이라는 개념의 성립을 위해서 지불한 값은 지금 기독교인들이 의미도 모른 체 세례문답식에서 몇 개의 답에 형식적인 답으로 얻을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은 아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신앙인들이 구주로 믿고 심지어 자기 목숨을 바쳐 따르겠다고 하는 예수께서 자신이 지신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는 점이다. 십자가를 지므로 구원을 얻게 될 사람들에게 자기 십자가가 있으니 그것을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구원을 베푸시면서 그 대가처럼 말씀하신 그 말씀은 한 편으로 생각하면 진정한 구원의 자격, 구원의 기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구원을 베푸니 너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는 자들을 위하여 내가 십자가를 지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가는 삶이 구원 받았다는 증거와 자격과 기준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를 져야 얻을 수 있는 구원이 쉬운 것인가?


그렇다면 과연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삶이 그러한가? 무엇보다 받았다는 구원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가서 받은 것인지, 아니면 세례문답에 정해진 답을 공개석상에서 인정하면 되는 더할 나위 없는 간편한 방법으로 받은 것인지 반추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구원에 대하여 이와 같이 깊이 있는 상고가 필요함에도 그냥 구원은 받은 것이라 여기면서 구원의 증거나 확신에 대한 묵상은 그냥 덮고 넘어가려니 성경을 깊이 알 필요도 함께 덮여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구원은 너무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것이라 다시 들먹이는 것은 괜한 분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모든 기초와 출발이 구원이라는 것은 불변이다. 그렇기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신앙에 있어, 성경이 의도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 의문을 없게 하는 것이다. 행여 의문이 생겨도 자기 삶으로 또 묵상함으로 속에서 생수가 넘쳐듯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구원 받은 증거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줄 알면 그 속에서 생수가 넘쳐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와 그 보내신 목적과 그 목적대로 사는 것에 있어 의문이 해결되지 않고 마냥 노력만하고, 예수님과 자신은 다른 존재이기에 노력하는 것으로 모든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구원이 없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삶의 목적과 살면서 마주하는 일들의 의미들을 깨우칠 본성이 없다면 그건 구원이 없다는 증거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경을 공부하는 신학은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그의 보내신 자에 대하여 또 그 보내신 목적과 의에 대하여 알지 못함을 자인하는 집단의 허울이다. 행여 신학교를 졸업하면 그것을 깨우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은 다 아는 바 아닌가?


구원은 기초 같지만 뿌리고 신앙의 시작이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구원은 신앙의 종착지나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살 동안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죄 없다고 확신하지 못하고 있고, 자신의 행위가 자신을 정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죄함에 자신이 반복적으로 뉘우치는 것은 신앙의 경건이고 예수님과 같이 되려는 노력으로 믿고 있다면 구원받은 삶이 아니다. 어쩌면 신앙은 바로 이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라는 생각을 지나노라면 구원의 자격이라 할까? 아니 구원의 기준이라 할까? 그 자격과 기준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분명한 것은 세례문답으로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생명을 얻는 것인데, 생명을 얻었다면 그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삶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도 본성도 그 본성이 이끄는 삶도 없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아니 도리어 더 위험하다. 없는 것을 가졌다고 착각하고 있으면 구원을 얻으려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삶이 없는데 어떻게 구원 받았다 할 수 있나?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또 성경에 대하여 더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먼저 돌아봄이 바람직하다.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는 것이 먼저라는 말이다. 어떻게 돌아 볼것이냐고? 



먼저 당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돌아보라. 

자신과 자신의 가족 또 사랑하는 이들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다. 왜냐고? 하나님은 그런 것을 본질로 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 곧 존재의 신이시며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 축복이 아니고, 또한 환난과 실패가 하나님의 벌이 아니다. 그게 벌이라면 사도들은 어떻하라고? 십자가를 진 예수님은?



또 당신의 말을 들어보라. 

주변의 어떤 이의 세상 일이 잘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지, 또 자신이나 사랑하는 이가 속한 사회에서 터부시하는 일을 당했을 때 ‘내가(그가) 하나님께 무언가 잘못한 것은 없나?’ 돌아보거나 걱정하는 말과 생각을 하는지. 그렇다면 그 또한 구원받은 삶이 아니다. 하나님은 행위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 답하지 못한다면 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구원도 없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죄를 어떻게 사함을 받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이 죄를 사했다는 구원을 받았다면서 아직도 스스로 죄 없다 말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중 어느 하나라도 해당한다면 구원은 없다. 단언코. 다시 시작해야 한다. 구원의 자격을 사람의 말과 문장으로 정의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적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그분의 구원을 알 것인데, 앞서 열거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들춤에도 자신의 구원을 외면한다? 그게 바로 성령을 훼방하고 양심에 화인 맞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