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집사의 뜰' + 135

부활 신앙 (3) - 부활과 성령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1. 3. 29. 04:00 Writer : 김홍덕

그렇다면 성령의 강림은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 봐야 한다. 성령의 강림과 부활을 믿을 믿음이 없는 것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성령께서 생물학적으로 남자의 유전자 없이 생명이 되게 하셨다는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정녀 탄생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여자와 신부 같은 사람이 세상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생명이 되게 하심을 설명하시는 사건이고 성령이 잉태케 하신다는 것은 사람 안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생명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 말씀의 본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사람들 앞에 달리신 것은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 안에 모습이 심기게 하심이고, 그것이 농부이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흙으로 지은 사람 안에 심기면 성령이 그것을 생명이 되게 잉태시키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땅과 같은 우리에게 심기면(주기도문) 그것이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며,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심을 성령이 잉태케 하심이고 성령의 강림이다.

 

따라서 제자들에게는 이미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되었다고 만한 것이 있었으나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 여기서 미세하지만 우리가 절대로 간과하면 되는 것은 성경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이 믿지 못하고 있음을 여러 차례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도마가 그렇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없다고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마리아와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을 때도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고 했다.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믿지 않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미 예수님께서 목욕한 자라고 하시고 영화롭게 되었다고 하실 만한 말씀이 심령에 심겨져 있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이라는 말씀을 듣고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확신한 가룟 유다와 달리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를 알지 못함을 인하여 갈등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믿었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이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안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분명하게 심겨져 있었고, 예수님은 약속대로 부활하셨다는 것에는 의심이 없었다. 다만 그들에게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들 자신 역시 부활에 합당한 존재라는 것이 생명이 되게 하시는 성령이 아직 임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지?’, ‘우리는 그러지 말고 부활을 믿어야지!’라고 말할 것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성령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온전한 죽음과 하나님의 안식이 있는 이들이었다. 예수님께서 달리 영화로운 자들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는 것이 제자들과 우리에게 나은 것이 것인데 이는 성령이 오시기 때문이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해 봐야 한다.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늘로 가신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고 제자들 안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미지와 부활로 드러날 새로운 생명들이 온전한 생명이 되고 본성이 그들을 천명이 회개하는 설교를 이끌고 순고하는 자리로 이끌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고 쉽게 타산지석으로 삼고, 쉬운 말로 나는 부활을 믿어야지!’ 것이 아니다. 믿음은 그런 각오나 다짐 혹은 신념으로 되지 않는다. 들은 , 순종함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실 것이 심겼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부활의 절대적 조건인 죽음과 세상의 가치로 이해할 없겠지만 죽음으로 인한 안식이 자기 심령 안에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또한 예수 믿기 ,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믿기 전과 믿은 다음에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의 내용이 전혀 다른 것인지 또한 반추해 봐야 한다. 구하는 것이 같은데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부활했다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새로 살렸는데 이전과 동일한 것을 살리시는 어리석은 분이 아니다. 다시 성경에서 죽었다 살아난 이들을 부활이라 하지 않는 이유를 상기해보면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매년 삶은 계란을 먹으면서 기념하고, 새벽에 운동장에 모여서 예배드리므로 자신이 부활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부활절의 본질인 부활에 대한 가지 관점을 생각해 보았다.

 

부활에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믿지 못함을 보고 우리 안에 그런 믿음이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부활은 신앙의 추가적인 옵션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부활신앙이 없다면, 자신에게 부활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안식으로 여기시는 죽음을 당한 이들을 살리시는 역사하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리시는 존재가 되어야 맛볼 있는 것이 부활이라는 의미다. 오늘 나는 하나님이 살리실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생각해 보는 시절이 부활절이다.

 

부활 신앙 (2) - 제자들은 왜 믿지 못했나?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1. 3. 28. 04:00 Writer : 김홍덕

부활에 관하여 우리가 번째로 깊이 묵상해 봐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했는가?’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두고 오늘날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타산지석으로 삼으려 든다. 자신들은 쉽게 부활을 믿는데 제자들은 믿지 못했을까?’라는 관점으로 쉽게 본다는 점을 묵상해 봐야 한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 봐야 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신앙이 비록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다고 하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는 제자들보다 나은 신앙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다.

 

신앙을 어떤 면으로 비교해도 그날의 제자들에 비하여 오늘 자신의 신앙이 미치지 못하는데 제자들이 믿지 못함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과감한 무례를 범해도 되는지, 역설적으로 그런 제자들이 믿지 못하는 부활을 죽음과 안식이라는 절대적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으면서 쉽게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제대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 부활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느냐는 세례 문답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얻을 있는 것으로 너무 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의로움이 자기 본성이 되면 부활은 너무 쉬운 것이지만 문제는 앞서 설명한 부활의 절대적 조건으로서의 죽음과 안식이 자신의 일이었음을 부인할 없을 정도로 확실해야 한다.

 

특히 부활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나사로와 같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을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죽기 전과 후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신이 부활 신앙을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 자신도 언제인지 모르지만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부활신앙을 가지기 전과 전혀 다른 생명이 되었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 , 교회에 다니기 , 부활을 믿기 전에 자신이 하나님이나 육신의 능력이나 세상의 방법으로 추구하던 것을 죽고 다음, 거듭난 다음에 구하지 않느냐 돌아보면 있다.

 

부활을 믿기 전에도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구했고, 부활을 믿는다는 지금도 동일한 것을 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죽음 전과 후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은 부활의 절대적 전제 조건인 죽음도 아니고 거듭남도 아니며 부활 신앙 역시 거짓이다. 구하는 것이 동일한데 단지 주시는 이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바꾸었다고 죽음으로 전혀 다른 생명이 것이라고 수는 없다.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육신의 평안과 성공이라는 풍요와 다산을 주시는 신은(신도 아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육신이 도모하는 일의 성취와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며, 화려하게 건축된 건축물로서의 교회를 하나님께서 영광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믿는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며, 그들이 말하는 죽음과 거듭남은 죽고 새로 것이 아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여호와 하나님이라 부른다고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되지는 않는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는다고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런 것을 주시는 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신앙을 가진 이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신앙 안에 있는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후에 구하는 것이 동일하다는 (기도 제목이 동일하다는 ) 그것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그런 신앙에 부활이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 부활 신앙을 가졌다고 믿겠지만 호박에 친다고 수박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사람들이 부활을 쉽게 여기는 것은 자신들이 부활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하고 모르는 것은 쉽게 여긴다. 프로 운동선수들의 경기 실수를 보고 먹고 그것만 하면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하냐?’ 비난하는 것은 운동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기에 쉽게 하는 소리인 것과 같다.

 

운동을 아는 사람은 프로선수, 운동이 자기 직업이자 그대로 먹고 그것만 하는 선수들이 실수를 한다는 것은 운동에 재능이 있어 프로 선수가 되었고 그것을 직업으로 삼아 먹고 그것만 해도 어려운 것이라고 본다. 자기 안에 진정한 부활 신앙이 있는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했던 제자들과 같은 때가 자신 안에 있었기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안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가볍지 않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을 두고 오늘 우리는 도마와 같이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설교하는 것은 정말로 부활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부활을 모른다는 것은 자기 안에 부활이 없다는 증거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 부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철저한 죽음을 거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진정으로 믿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므로 부활이 자신의 것이 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미 목욕한 라고도 하셨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하나님께 영화롭게 자들이라고 사람들인데 ? 어떤 믿음이 없다고 하신 것일까?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원초적으로 부재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제자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예수님의 책망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에서 확인할 있다. 차이는 단지 성령의 임하심뿐이다.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나서는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받던 사람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부활 신앙 (1) - 부활의 절대적 조건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1. 3. 27. 13:51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부활에 관한 믿음에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다.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 근거는 성경이 영생을 약속하셨다는 것에 기초를 두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무렵 교회의 대중 앞에서 세례문답으로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했다는 것에 둔다.

 

하지만 부활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오늘은 부활절을 앞두고 부활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 보고자 한다. 부활이 세례문답에서의 고백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객관적 사실로서 믿는 것으로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근거를 가지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 부활에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
  •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

 

가지 관점은 글을 읽는 독자와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과 같이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활 신앙을 반추할 있는 척도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것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먼저는 부활의 조건이다. ‘부활에 무슨 조건?’ 라고 생각하겠지만 부활은 죽음이 절대적인 조건이다. 죽지 않았다면 부활을 이야기 없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 항상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안식 이라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죽음이 있어야 하고, 죽음을 인한 안식이 있어야 한다. 죽음은 변할 수도 타협도 없는 절대적인 부활의 조건이고 죽음은 안식이 되는 죽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이 안식이 된다는 것에서 세상의 모든 죽음과 완전히 구분된다. 죽음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죽음이다. 하나님의 안에서는 살아야 하는 죽음이 부활의 절대적 조건이라는 말이다. 다시 살리신 이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하나님께 필요 없는 것이 완전히 죽은 죽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보실 죄와 사망이 없게 되고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살리실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부활의 전제 조건인 죽음은 세상의 허다한 죽음 중에서 하나님이 보실 생명이 있는 죽음이고 하나님의 의와 생명으로 다시 사는 분명한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안식이 되는 죽음이다. 안식 부활하셨다는 것은 부활 이전에 안식이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안식 부활하셨다는 것은 단지 달력의 시간으로만 본다. 그래서 안식일이 아닌 주일(일요일) 예배의 날로 지키는 명분에 도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식 이란 말씀은 안식 역시 죽음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표현한 말씀이다. 안식이 있고서 부활이 있었다는 것은 부활 전에 안식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안식이 있어야 부활이 있다는 분명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음과 안식이라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어야 비로소 맞이할 있다. 죽음은 세상의 허다한 죽음과는 분명한 구분이 있다. 세상의 가치로 가늠할 없는 죽음이고 조건이다.

 

이는 성경에서 여러가지 일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을 부활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에서 있다. 나사로와 같이 성경에서 선지자, 사도, 예수님이 살리신 사람들은 단지 죽었다 살아났다 하지 부활했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은 부활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부활의 전제 조건인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본질이 아니라 의의 죽음이다. 자신의 옳음과 의가 죽는 죽음이 바로 부활의 절대적인 조건이다. 자신이 가진 의가 죽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안식이 되고 다시 살리는 이유가 되는 죽음인 것은 사람이 가져야 것은 자기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질그릇과 같은 존재로 안에 무엇을 채워야 하는 존재다. 채울 것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있게 하셨으므로 사람들이 자기 선악의 기준을 채우고 자기 의로움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면 당연히 안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바라시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갈 없다. 사람이 주인을 섬길 없다고 하심이 이것을 설명한다.

 

자기 의가 가득한 사람은 세상을 자기 가치관으로 본다. 그것은 사람에게 세상이다. 자신이 가진 의로움으로 보는 세상이 그에게 세상이고 우주며 모든 사회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종말을 맞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세상이 바로 세상이다.

 

여기서도 어떤 죽음이 부활의 전제 조건인지 있다. 자기가 옳다는 의로움과 의로움에서 비롯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세상이 망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자 하나님의 성품인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거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죽음이 또한 하나님 앞에 안식이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거하는 안식은 스스로 정립한 선악의 기준과 의로움이 죽고 하나님의 의와 말씀과 성품이 사람 안에 거하게 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사람을 만드시기까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는 일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을 하나님의 세상으로 보게 된다는 의미다. 사람에게 세상은 자신이 인식하고 규정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의가 죽고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세상을 보고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세상이자 그에게 세상의 전부다. 이것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상이 창조되는 하나님의 천지창조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고 안식은 일이 끝나야 얻을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일하신 목적대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상이 열리는, 자기 의가 죽고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본성이 되면 하나님의 일하심의 목적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사람에게 하나님은 안식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에 안식하시니 사람 역시 안식의 상태가 된다.

 

바로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부활의 절대적인 조건인 죽음을 당한 사람이고 안식을 얻은 사람이다.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부활을 맞이할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안식 부활하셨다는 것에서 부활의 절대적인 조건인 죽음과 안식이라는 것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그런 죽음이 있었는지와 그런 안식이 있었는지를 반추해 보게 한다. 성경에 기록된 이유가 바로 오늘 성경을 대하는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 깨닫게 하려 하심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와 뜻에 어긋난 것이므로 회개하게 하려 하심이다.

 

예수님께서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안식 부활하신 것은 바로 회개를 이끌기 위함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속이고 우리의 구원이며, 예수님의 부활이고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하는 부활 신앙의 기반이다.

복음의 가치와 포지션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1. 3. 16. 14:54 Writer : 김홍덕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많이 부르는 찬양 가사다. 성경말씀 곧 복음은 가사 그대로 세상 가장 귀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치를 부여하는 기준이다. 어떤 가치 기준에 의해 복음이 귀한 것이냐는 것이다. 복음의 가치는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생각하거나 간과한다. 복음이 귀한 이유는 세상적인 가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을 세상적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것이 심각한 것은 그런 상태라면 구원이 없는 것일 수 있고, 아니라면 최소한 믿음이 장성하지 못한 어린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우리가 늘 알고 있고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이 아니라고 늘 비판하는 교회보다 신앙의 깊이가 더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모하고 복음에 대한 깊은 고찰과 나눔이 있는 공동체로 갈수록 복음이 가치를 더 높이 보고 있다는 점이다. 더 사모하고, 더 놀라운 것을 보고 깨닫고 나누기에 더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귀함의 가치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복음의 가치가 온전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성경말씀과 복음을 생각하는 프레임을 도식화하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 그림은 보는 그대로와 같이 피라미드 모양이다. 높이 올라가면 이긴 자가 되고 높이 올라가면 영광스럽고 그 아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는 구조인데 많은 기독교인들, 그 중에서 복음을 귀하고 귀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일수록 저런 구조를 집착한다.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 놓으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상당한 사람들이 복음이 세상의 모든 학문과 도덕과 같은 형이상학적 요소들 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주장한다.

 

신앙인들이 복음을 적선하듯이 전도하고, 교회의 일에 대하여 세상이 간섭하려 하면 하나님의 일을 세상이 범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선을 긋는 것도 복음의 가치를 피라미드 꼭대기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피라미드의 구조는 지극히 세상적인 구조라는 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힘을 빌려 세상에서 성공하고 평안을 도모하는 것도 이것과 궤를 같이 한다. 세상적 가치로 높고 귀하고 좋은 것을 신앙인이나 교회가 얻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굳게 믿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러나 복음의 가치는 세상의 것들과 세상의 기준으로 높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본질만 바로 알아도 그런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죄인 사형수가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낮은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치, 복음이 가치, 하나님의 의의 가치는 세상적인 기준과 같이 높아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에 있다.

 

복음은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근원이자 뿌리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복음의 가치는 가장 낮은 곳에 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복음이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가치관이다. 복음이 귀한 것은 모든 것의 원리이자 근본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9:10)

 

이것을 알지 못하면 신앙을 가졌다는 자긍심 아닌 자긍심으로 교만해지고 복음의 가치를 뒤집게 된다. 신앙의 모든 것이 무너진다. 아래에 있어야 할 뿌리를 뒤집어 꼭대기로 가져간 가치관은 말라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보다 복음이 우선이다’, ‘예수 믿는 것을 핍박하는 가족은 떠나는 것이 좋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면 안 된다. 그것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그렇다면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생명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이 이끄는 존재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의 삶이 된 사람이란 의미며, 그 사람의 모든 가치관과 삶을 이끄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실수도 않으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의 것을 부인하고 멸시하는 것이 정상적인가? 그럴 수 없다. 또 예수만 믿으면 가족도 버리고, 세상의 도덕도 무시하면서 사는 것이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본성은 세상의 도덕과 윤리와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의 근원이다. 오히려 그것을 온전케 한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신 것과 어린 예수님께서 자라시면서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세상과 충돌하지 않는다. 거듭나고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과 충돌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보라. 군병들이 잡으러 왔을 때 충돌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아버지가 경영하시는 세상의 일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예수를, 또 복음을 귀하게 여긴다면 그것을 세상의 가치로 피라미드 꼭대기에 두지 말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치를 부여한 것의 진정한 가치를, 그 가치의 근원을 알게 하기 위하여 낮은 자리로 가야 한다.

 

복음이란 너무 너무 귀한데, 그 귀한 것을 까 보니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더라!”라는 것이 깨우쳐져야 비로소 거듭난 사람이고 진정으로 복음의 가치를 알고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무엇을 먹을까?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1. 1. 3. 20:42 Writer : 김홍덕

새해다.

또 습관처럼 어떻게 한 해를 살 것인지 생각한다.

생각의 속살은 육신의 먹고, 입고, 마시며, 자는 것이다.

 

문득 생각해 봤다.

사람은 '부활'과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 중에 어느 것을 더 믿을까?

 

부활은 당장 현실적이지도 않고 믿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는 늘 걱정하는 것으로 불신이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걱정스럽던 <내일>이 <어제>가 되면

언제나 하나님의 경륜에 놀라고 감사하는 오늘들을 살면서도

내일을 늘 걱정한다.

아직 밥 굶은 적 없으면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