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 166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는 마태, 마가복음보다는 누가복음이나 특히 요한복음에 많이 기록되어 있고, 누가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사도행전의 시작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이나 특별한 내용 없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분부가 짧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모든 족속이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모든 성경의 말씀이 그렇지만, 정말로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성경은 무조건 의미만 새기고 문자는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으니 세례를 주면 예수님의 말씀을 준행한 것이라고 하면서 논산 훈련소에서 급수차를 가져다 놓고 세례를 주는 것이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라도 세례를 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 지킨 것이라고 생각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준행한 것이 되려면 왜 세례를 주라고 했는지, 또한 세례를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복음을 전한 사람이 세례를 받음으로 어떤 사람, 어떤 존재가 되도록 하는지를 알고 그것에 이르기까지 전할 때 그 사람이 자기가 받은 복음의 증거로 세례를 받고자 하는 고백이 있어 세례를 줄 때 비로소 세례를 주는 것이 되는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 (마태복음) 3:13-17 세례를 받으심.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과정 속의 그리스도 (9)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셋째 날 (1) - 바다에서 드러난 땅의 의미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 (골로새서) 2:8-15 세례로 죽고 살아남



그렇지 않고 세례라는 의식만 치렀다고 예수님의 분부를 준행한 것이고 여기듯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면 된다고 한다면, 세상 끝날 까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으니, 그렇게 세례를 베풀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세상 끝날 까지 죽지 않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문자의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하신 의도에 있다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제자 삼으신 방법대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의와 법이 아닌 것으로 따로 제자를 삼으려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새로운 교주가 되는 것이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라고 하신 것과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분부한 것,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이고 가르치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이 성경을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고 해석하여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이시심으로 가르치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의를 가지고, 그 의를 전하므로 사람들이 그 의로 인하여 제자로, 또한 세례를 받은 새 생명으로 살게 하라는 말씀이다.


세례는 물에 잠기는 것이다. 말의 어원인 ‘밥티스마’이 그 의미이고, 예식의 모양이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이 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온다고 세례를 받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했든 어디서 했든 마찬가지다. 물에 수 천 번 들어갔다가 나와도 세례를 베푸신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례 예식의 방식을 가지고 교단이 갈라졌다는 것은 정말로 우스운 것이다. 세례의 본질이 예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럴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경까지 구분한답시고 침례로 바꾸는 발상은 오히려 경이롭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은 사람이 물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이 당연히 물속에 못살지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사람의 육신이 물에 들어가서 숨을 쉴 수 없어서 그 밖으로 나오는 것은 물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듯,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도 어떤 세계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할 때 구원이 있는 것을 세례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 고백이 주목적이고, 그 증거로 예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에 들어갔다 오고 세례증서가 있어야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은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가 아닌 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물속에서 살 수 없는 육신이 물에 들어가 보면 물속에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듯이 깨닫고 인정하는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세례를 받은 것이 되는 것이다.


물은 성경에서 많은 부분 말씀으로 의미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물은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것이고, 그렇지 않고 사람의 몸이 잠기는 큰물과 바다는 세상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창세기에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섞이어 홍수가 났다고 했는데, 이는 궁창 위의 물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수도와 같이 사람이 먹는 물, 곧 사람이 먹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말하고, 궁창 아래의 물은 하수도와 바다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이 모였으나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는 물, 곧 사람이 자기 정체성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세상의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물에 잠기면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세례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물이 아니라 세상의 물이나,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것이 섞여진 혼합되고 변질된 것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을 먹거나 그 안에 있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물속에 잠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셔서 죽게 되심과 같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몸소 보이신 분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예수님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이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 곧 그 분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신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라고 하신 것은 예식으로서 세례나 준다고 제자가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하면 사람들이 세례 받은 고백을 하고 스스로 세례를 받고자 할 것이며, 또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너희가 제자가 되었듯, 너희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를 본 제자들, 그리고 또 그 제자를 본 제자들에게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일이 세상이 끝날 때 까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제자가 되고, 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시면서 인간의 정체성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의를 보이심으로 자신들이 그것을 보고 제자가 되었듯이 제자들도 그렇게 십자가를 지듯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어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 살리신 예수님과 같이 그들을 본 사람들의 심령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이들로 거듭나고 부활하는 그런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지속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전하신 복음의 본질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마태가 보았고 자기 안에 감동이 있어 기록한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인 것이다.


<끝>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다르다는 차별적인 기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물론 그 정도로만 여기는 사람들이야 별로 없겠지만, 부활이 가진 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지금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 그것이다. 단순히 육신이 죽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한다는 것만 믿고 있다면, ‘화장한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와 같은 기막힌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자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였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다 도망갔고, 대제사장들은 행여 예수님께서 살아나실까 하여 무덤을 돌로 막고 또 파수꾼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제자들보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 가장 기대한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들이었다.


여자들은 예수님 당시에 사람의 수에도 세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이것은 육신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성경을 문자대로만 본다면, 그러니까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기는 신앙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성경을 문자대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여자에 대하여 수에도 세지 않은 것은 여자가 관점이 아니라, 남자가 관점이라서 그렇다. 이 역시 육신으로 남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가문은 남자의 성을 따르는데, 그것은 남자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의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육신의 남자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이 육신으로 볼 때 남자와 같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반대로 여자는 아들을 얻는 존재다. 여자는 자신의 성을 바꿀 수 있는 존재이다. 동양에서는 아니지만 서양에서 결혼을 하면 여자의 성이 남자의 성을 따르는 것이 종속된 것 같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여자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지 않지만,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모두 여자이고, 그리스도 앞에서 신부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바꾸어 낼 수 있는 가능성과 여지와 역량을 가진 존재가 바로 여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기대하고 무덤에 갔다는 것은 아주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그것은 여자들이 아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수 있는 거듭남과 부활을 소망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되고,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은혜를 입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한 가지를 더 본다면, 여자들이 찾아 간 곳은 무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무덤 근처에도 오지 않았는데, 여자들, 곧 남자를 만나 자신의 정체성이 변해야 하는 간절함이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궁전이나 성전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다는 것이다.


무덤을 찾아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 자리가 무덤이라는 것이다. 이 무덤은 그냥 무덤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고 죽임을 당하여 묻힌 무덤이다. 즉 이 무덤은 그리스도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설명하는 무덤이 바로 예수님의 무덤이다.


그 무덤에 예수님을 만나러 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곳에 있다는 것은 그 장소와 존재가 같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마음은 곧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 것이 인정이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들의 신앙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반면에 제자들은 무덤에 오지 않았다.(나중에 오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것에 동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제사장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그렇게 죽였으니 이건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다.


여자들은 이런 신앙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은 이런 신앙이 있어야 한다. 즉 세상의 가치관 앞에 자신이 죄인이 되고 죽어 장사지내게 될 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주님은 거룩한 곳에 계시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이들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심판하여야 한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외면 받고 손가락질 받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사람들인데 신앙도 없고, 지옥 갈 죄인들이 자신들에게 도전한다며, 그들의 소리를 듣지 않고 오히려 죄인 취급하고 심판하는 뻔뻔함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 문제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거룩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인데 세상의 가치관으로 그 분을 죄인 삼을 때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히시고, 죽으셔서 장사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신앙인들은 완전히 그와 반대다. 교회 세습에 대하여 여론이 들끓으면 ‘하나님의 일을 몰라서 그렇다’고 하고, 종교인 과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의 일은 세상일과 다르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들을 물리치는 모습이지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모습들은 다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들과 같이 자기의 의가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예수님을 만들어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이들이 아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데 있다. 여자들이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으려고 갔는데 정작 예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고, 정말로 부활하셔서 무덤에서 나가시고 천사가 그 자리에서 여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찾아 무덤에 온 여자들의 신앙이 부활신앙으로 바뀌는 것이다. 무덤에서 만나려 한 예수님을 부활한 주님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한 예수님과 만난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이 여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만나려는 사람, 그 사람이 육신으로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려 한 사람들,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어 죽게 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예수님을 만나려 한 사람들, 그들이 가진 그 마음과 신앙이어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부활이 자기 자신의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여자이고, 그리스도 앞에 신부인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심령이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부활이 자신의 신앙이 되는 것이고,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15 부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9. 5. 13:28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되심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것이야 죽었으니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싶겠지만, 사실 예수님은 죽으심 자체가 큰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렇기 때문에 장사되심 역시 그렇다. 죄인으로 죽이심이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십자가를 보면서 서울을 보듯, 놋 뱀을 보듯 그것이 죄인 된 나의 모습이요, 그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표상이었듯, 주검으로 무덤에 뉘었다는 것 역시,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고 죽임 당한 자와 같은 삶을 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에 대하여 죽은 자들, 또한 사망 가운데 있는 자라고 하신다. 이는 물론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표현들이 육신적으로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지 않는 피조물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가지 않는 멀쩡한 시계를 보고 죽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반대로 육신이 살았다고 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살아있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영원에 관한 것이다.(영원은 지금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고 다음에.) 그런 관점에서 무덤에 장사 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산 생명인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을 가진 인생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나타내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나타내신 예수님은 그 몸이 설사 무덤에 죽은 자로 누워 있다고 해도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 안에 사람의 유전자와 본성이 있어서 육신의 모든 삶과 행동이 사람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정체성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정한 생명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인 것이다. 그러니까 부활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시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부활이라는 것이 별게 아닌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정체성을 가진 인생을 부활시키는 것인지에 대한 기준으로서의 명확성은 분명하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살리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이 살아있다고 하나,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이들이 사는 법 역시 같은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는 것, 곧 구원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거듭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거듭남과 부활은 그 법이 같다. 그래서 죽어서 믿는 자는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거듭남이든, 부활이든 어쨌든 살았다고 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상태에서 믿는 자는 산자와 같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믿어 산 자는 육신을 죽인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정말로 분명하게 짚고 갈 것은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기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정체성이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생명의 주관자이시다. 그것은 어떤 행동이나 공로나 소유의 드림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어떤 생명을 가진 존재인지가 분명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 가서 청소하고 봉사하며 또한 세상에서 아주 도덕적으로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것이 중요하나, 그 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생명이 그 안에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산 자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기도도, 봉사도, 도덕적인 삶도 그 생명에서 비롯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사람 지으신 목적이자 사람의 존재 목적인 사람의 정체성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부끄러워하는 인간의 모습이고 실패자요 죄인인 인간의 연약한 모습, 사람이라면 다 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감추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들, 그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는 죄인이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자 중에서 살리실 수밖에 없는 살아 있는 생명이요,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된 존재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또 하나의 그리스도(a christ)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통하여 그런 생명을 가진 이를 살리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니 그것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십자가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됨과 그리고 부시 살리시는 부활로 보여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인생의 운명이고 그것이 사람을 지은 목적을 아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의며, 인생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고 보이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장사되신 예수님을 무덤에 두고, 예수님을 그렇게 죽인 자들이 돌로 무덤을 막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안에 두실 수 없다는 것이다. 돌로 막았다는 것은 율법으로 막았다는 것이다. 즉 형식으로 의에 이른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가치관으로 막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서 말씀하시기를 그(예수님)는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신다.


부활은 정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 것도 기적이지만, 그것이 이 기적의 본질이 아니다. 이 기적의 진정한 본질은 인간의 정체성을 인정하므로 죄인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고 살리신다는 것, 그것이 기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람의 연약한 모습을 감출수록 세상에서 성공하고, 심지어 교회나 신앙 안에서도 그렇게 고상해지고 유력해져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고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인간의 연약함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발견하고 인정할 때 죄인이 되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죽은 자와 같이 되어 버린바 되고 외면 받는데, 바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심으로 오히려 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것이 부활의 기적인 것이다.



(마태복음) 27:57-66 무덤에 묻히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9. 4. 15:0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 해서 받아와서 자신이 죽으면 묻히려고 예비했던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내었다. 그런데 제사장과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이 혹시나 실제로 일어날까 싶어 무덤을 봉하고 그것마저 안심이 안 되어서 병사들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이때까지 줄곧 이 마태복음의 말씀이 오늘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해 왔는데, 그렇다면 무덤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오늘 예수님을 믿고, 그의 제자가 되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또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기독교신앙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죄를 시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시인하는 것은 그 죄로 인한 처우를 인정하고 수용하겠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안 되면 신앙에 갈등이 생긴다. 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자신들이 의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죄를 시인하면 의롭게 된다는 말씀을 문자대로 읽고서 스스로 그 말씀으로 자신을 의롭게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죄를 시인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의롭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하게는 의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로워지는 것은 아주 수동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내가 죄를 시인했으니 이제 나는 의롭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것이다. 그러니까 분명하게 죽었고, 그 죽음이 순종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신 것이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지 말라는 행실의 교훈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이유를 알면 그렇게 하진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신바 된 것은 사람이 자기의 정체성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닫고 나면 그때까지 자신이 가졌던 신앙이 철저히 죽고 나와야 한다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무덤에 주검을 장사 지낸다는 것은 정말로 확실한 죽음의 결과이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지낸바 된 것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에 의하여 살던 자아와, 또한 그런 가치관 앞에서는 철저히 죄인이 되고 장사지내는 것과 같이 확실한 죽음의 과정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죽음은 예수님을 죽인 가치관이 무덤의 입구를 막고 지킬 정도로 확실하게 하고 싶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죽음을 당한 이들을 살리신다. 그런 죽음의 과정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전의 가치관이 아닌 그리스도의 가치관, 하나님의 의, 하나님 나라의 법,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언젠가 교회의 집사님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돕게 되었는데, 산에 안장하는 것 까지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 시아버지는 유교에 속한 분이었는데 살아생전에 다른 이가 죽으면 묘 터를 점지하고, 관을 놓는 방향 등을 봐 주시던 그런 분이었다고 했다. 어쨌든 그런 분이 돌아가셨으니 남아 있는 이들 중에서 또 그렇게 관의 방향을 정하고 묘 터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자 그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아내, 곧 시어머니가 그것을 보면서 한마디 하시는 것을 가까이서 우연히 듣게 되었다.


“영감 살아 있었으면,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 할 텐데, 자기가 죽어 있으니 아무 말도 않네!”라고


그것이 죽음이다. 죽었다는 것은 어떤 시비,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도 무덤에 장사되셨다는 것이 바로 그런 상태다. 유대인과 로마인의 가치관에서 죄인이 되고, 그런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인 우리 모습을 대속하시며 보이신 예수님은 명백히 그들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었고, 또한 그들의 가치관으로 장사될 정도로 분명한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을 죄인 만들고 죽인 그 법 앞에서 시체와 같이 아무런 것도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죽어졌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죽은 자로 여기시는 것이다. 그래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의 제자로 또한 그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가치관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 무덤에 장사지내는데 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상이 자기를 맘대로 하도록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삶을 포기한 듯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또한 언제나 영원토록 세상을 경영하시고, 또한 실수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경영하는 세상을 살면서 그 안에서 세상이 이러네, 저러네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덤에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치관에 대하여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심판 받아 죄인이 되고 죽임 당하신 분이요, 사람은 그렇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부끄럽고 죄인 같아도 그것을 자신의 모습이라고 들린 놋 뱀과 같이 십자가에 죄인이 되어 달리신 예수님의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도 그 신앙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되려면 당연히 그 분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과정을 일점일획도 남김없이 다 거쳐 내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일점일획도 남김없이 지켜야 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모든 삶이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하라는 것이 아니다. 따라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다 지켜내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자기 안에 본성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본성대로 살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의 옆으로 걷는 걸음처럼.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은 생명을 만들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명은 생명이 낳는 것인데, 생명을 만들려고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그것은 성경을 믿으면 산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속에 불어 넣어져서 그 생기가 생령이 되고, 사람의 본성이 되면 다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방법이 아니라, 성경을 조각내고 각 부분별로 연구해서 마치 인형이나 마네킹을 만들고 그 안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는 것과 같이 성경을 지켜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세상을 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잘 경영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면서 살면 되는데, 그것을 역행하려 하니 힘든 것이다. 남들처럼 살아야겠다고? 누가 당신은 그래야 한다고 정해 주었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으로 지으신 뜻대로 사는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그럴 때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창조주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베드로와 같이 세상에 대항하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언제나 우리 모습이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런데 신앙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이기려 하고 바로 잡으려 하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고 죽임을 당하면, 그렇게 자신이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수용하고 순종하면 무덤에 장사지낸 자와 같이 될 것이로되, 그 때 하나님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법이 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무슨 권세나 마패쯤으로 알고 세상을 사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굳이 살릴 이유가 없는 존재들이다. 자기 스스로 살았다고 설치며, 더욱이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칼과 성경의 말씀을 조각으로 휘두르면서 사는 사람은 무덤에 있는 이가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살리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이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법 안에서 죽은 자로 보시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살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생명과 연결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요 죽은 자와 같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스스로 죄인이라면 할 말이 없을 것이요, 죽은 자는 반응이 없을 것이다. 능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의 법과 가치관 앞에서 죽은 자요, 무덤에 장사된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바로 그것을 보이시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하늘의 해가 그 빛을 잃었고,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져서 성소와 지성소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덤이 열리고 많은 성도의 몸이 일어났고 그들이 거룩한 성(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은 다 놀라운 것이지만 그것이 아무리 놀라워도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인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놀랍긴 하지만 나에겐 의미가 없는 그냥 사실에 불과한 것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일어난 사건이 나에게 일어나느냐 하니냐 하는 것이 정말로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게 없으면 내가 왜 예수를 믿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과 함께 일어난 일들이 어떤 것인지 볼 필요가 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치신 것이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가상에서는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마태복음은 하나만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렸나이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신 것인가? 그리고서 다시 찾으신 것인가?


예수님께서 죽으시게 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정해 놓은 사람의 정체성을 떠나서 살고 있다는 것과, 그런 자리에서 돌아오기를 바라시면서 원래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를 떠난 모든 인생들, 그들의 모습을 보이시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유대인과 로마인의 가치관에서 볼 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세상의 법 앞에서 실패자로 또 죄인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가진 메시아의 개념에 미치지 못하고 로마인이 가진 왕의 모습을 가지지 않으시듯, 우리도 종교적인 경건을 유지하여 의인에 이르려고 하다가 늘 실패하여 죄인이 되고, 세상의 경쟁력에서 언제나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앞에서 패배자로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유대인과 로마인은 그런 모습을 죄인으로 여겨 십자가에 처형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그런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다른 것이다. 그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신 모습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려서 부르는 “나의 하나님”, 예수님을 버린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가진 자기 하나님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 하나님이란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듯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을 말한다.(그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나의 하나님”은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신분이 죄인인데, 예수님의 신분을 죄인으로 만든 가치관의 하나님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자기 하나님을 좇는 사람들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보이시는 것이다. 그 모습은 죄인이다. 이 죄인이라는 것은 이중성이 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죄인이고,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죄인이라는 것이기도 한 동시에 유대인의 가치관과, 정말로 왕이 되리라 기대한 제자들의 가치관과, 능력과 공로에서 이겨야 왕이 되는 로마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던 인간들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이 공존하는 모습이다.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광야에서 들린 놋 뱀에 비유하시면서 자신이 들려야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놋은 거울이고 그 거울의 모양은 뱀이었다. 그것을 보는 이는 살았고, 그것을 보지 않은 자는 죽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뱀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는 살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는 죽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역시 거울이고, 또한 죄인이다.


즉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던 그런 죄인이라는 것을 거울과 같이 비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 기준에 예수님이 죄인이었지만, 달리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거울과 같이 비춰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가 비춰질 때 그 때, 그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 제자들로 치면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왕이 되리라 믿었던 예수님, 유대인으로 치면 똥도 누지 않을 거룩한 모습을 가진 메시아, 그리고 세상에서 돈이 자기 하나님이었던 사람의 돈, 능력이 최고라며 내 주먹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람의 주먹과 같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외치신 “나의 하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라는 이 외침은 시편 22편 1절의 말씀이기도 하다. 시편 22편의 1-2절은 나의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하고 있고, 3절에 들어가면 영어 성경은 <But>이라고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사람이 스스로 만든 “나의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 곧 구분되는 여호와와는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모습은 부끄럽게 여기고 세상적인 것으로 성공하여 인간의 연약함을 감출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스스로 만든 그 하나님, 하지만 그 가치관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또한 그 하나님의 힘의 근원인 머리의 생각이나 손과 발의 행동이나 옷과 같은 신분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나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함을 보여주시는 자리에서 외치신 것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우리 스스로 만든 하나님이요 우상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우리는 놋 뱀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우리 스스로가 만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이 우리를 뱀과 같이 죄인으로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를 바로 아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십자가를 볼 때 자신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또한 사람을 규정하고 믿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믿던 하나님, 유대인의 하나님, 로마인의 신과 같은 그 가치관은 오히려 나를 늘 죄인으로 드러나게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십자가가 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이 되는 것이다.


  1. BlogIcon sky 2015.11.15 16:32

    필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너무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르신 "나의 하나님"이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인가요? 그런 하나님을 왜 예수님께서 간절히 부르셨나요? 십자가위에 달린 예수님이 내 자신인것은 이해되지만 세상법의 정죄를 씻기위한 십자가는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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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vicon of https://www.elphis.or.kr BlogIcon 김홍덕 2015.11.15 16:41 신고

      글이 어려웠다니 죄송합니다. 이 부분은 제 표현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좀 어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모습을 대신한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인데,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는 과정과 이유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우리의 어떤 모습과 과정이라는 의미겠지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정체성과 다른 하나님을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심을 '여호와'라는 이름에서 그 정체성을 분명히 하셨지요.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다"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관계인지를 원하시는 분이시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면(Do), 무엇을 드리면(Have) 반응하시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신으로 보는 유대인들의 법과 가치기준에서 볼 때 십자가에 죽어야할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나의 하나님"의 법으로 죽으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이 우리의 모습이듯,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을 때는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는 것,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글이 짧아서 도움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 궁금한 것은 계속 올려 주십시오. 성실하게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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