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가지셨다. 이 자리에서 몇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가장 먼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것, 그리고 포도주와 떡이 예수님의 피와 살이라는 말씀,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제자들과 다시 포도주를 마실 때까지 다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는 말씀들이다.


먼저 제자들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제자들 중에 가룟인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버렸다. 그렇다고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끝까지 지켰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병정들에게 잡혀가시자 다 도망 가버렸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시는 마당을 기웃거렸고, 요한은 십자가 밑에 갔었지만 뭐 일단 시작은 다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것도 배신이라면 배신이다.


가룟 유다에 대한 기록은 의외로 성경에 많지 않다. 그 몇 번 안 되는 가룟 유다의 말에서 예수님을 부른 호칭을 보면 단 한 번도 <주님>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냥 그에게 예수님은 선생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주와 선생은 다르다. 주인은 자신의 존재 자체의 운명을 가진 분이고, 선생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알려주는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사 인생을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라도 주와 선생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호칭은 당연히 상대에 대한 의미를 대변하는 것이다. 원수를 대할 때는 “이 죽일 놈!”이라고 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는 뭐…(너무 많다.)


그에게 예수님은 당시 시대적 난관을 해결할 대안으로 그리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인도할 선생이라는 의미는 있었지만 자신의 운명을 쥔 주님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으니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각이나 계산과 다르게 십자가를 지고 죽겠다고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시니 한 마디로 ‘속았다’ 생각하고 팔아 버린 것이다. 마치 기대를 하고 주문한 물건이 형편없을 때 바로 중고시장에 내다 파는 것처럼.


그런 면에서 다른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 배반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같이 자신인가 예수님께 물어봤다는 것이 그렇다. 다 찔리는 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십자가를 지고 죽겠노라 말씀하시니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나서다가 책망 받은 베드로는 끝내 겟세마네 동산에서 품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어 휘두르면서까지 예수님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도망 가버렸다.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자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것 역시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모든 제자들의 생각이 다 예수님과는 전혀 달랐었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모욕당하는 것을 목숨 걸고 나서서 막으려 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독하지 못하게 결사항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을 자신이 깨닫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애지중지하는 것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자신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제자가 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다는 것은 신앙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의로움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모르는 자들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의로움을 강제시키고 증명하고 주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의롭지만 의롭지 않은 죄인들의 주장에 자신을 내어줌으로 그 의롭지 않은 죄인들이 의인을 십자가에 달고 보니 그곳이 자신의 자리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 주님을 모독하느냐?’고 대 들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분이지, 함부로 모독하면 안 되는 고관대작이 아니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베드로가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또 보이시고자 하신 뜻을 자기 안에서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그것을 그때까지는 몰랐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과 생각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사람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내 팽개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배신이고 배반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가룟 유다와 같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러 가시는데 막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었던 것 같이, 신앙이라는 것이 신앙 없는 자들 앞에서 무시당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언제나 더 가지고, 더 밝고, 더 의로운 이들에게 무시당하고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와 같이 수치를 당하는 것 같은 상황을 인정할 때, 그 모습을 보고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듯이, 계시가 어둡고 덜 가진 체 자신이 옳다고 주장했던 이들이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가룟 유다의 배반은 결국 어디서 해결하였는가 하는 것에서 다른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가룟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든 예수님과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물론 그것은 나타난 것이고 본질은 유다에게 예수님은 그저 선생이었고, 다른 제자들에게는 주님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가룟 유다의 배반은 사뭇 교훈이 되는 사건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구속이 어떤 의미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이라면 가룟 유다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예를 들어 잘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거지가 되면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이 되시기를 바란 유다와 다른 제자들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생 자체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제사장으로 섬기는 것은 우리 존재와 생명의 정체성을 알게 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이시다. 존재하고 있는 것에게 존재의 이유를 가진 분이 주님이 아니면 누가 주님이겠는가? 그리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를 알았는데 그 삶이 어찌 형통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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