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 68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과 회복을 다루고 있는 구약성경의 선지서들을 읽으면 드는 의문이 있다. "왜 이렇게 타락을 반복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정말로 그렇게 하나님을 매번 배신하는가?" 같은 것이다. 그건 개인적으로도 참 궁금했던 것이다.


선지서들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타락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성전을 훼파하고 다른 성전을 짓고 다른 신을 섬긴 것은 아니다. 그들의 타락은 항상 여호와의 성전에 이방신의 우상을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출애굽 당시에 금송아지를 만들고도 '금송아지'신을 섬긴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숭배했던 것이다.


신앙의 타락은 믿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결합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타락이라는 것이다. 맑은 물에 아주 약간의 더러운 물이나 독이 들어가도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타락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습이다. 그것은 골로새교회에도 있었고 지금도 늘 있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좋아 보이는 것이 더해지면 신앙이 더 좋은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성전에 이방신의 우상을 두는 것이고, 골로새교회처럼 철학과 과학이 겸비되면 더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교회가 더 좋은 건물을 가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장로가 되는 암묵적 조건으로 사회적 지위가 가미되고, 목회자도 신앙고백 보다 학위나 어떤 경력이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 된 것이 바로 그런 타락의 후손인 것이다. 그런 타락을 일갈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라는 한마디가 아닐까 생각된다.


사람들이 이러한 형태를 보이는 것은 노아 홍수 시절에서부터 기원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고 혼인하여 네피림이라는 위대한 자를 낳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사람의 딸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여자(육신의 여자가 아니다.) 즉 사람에게서 난 것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을 골로새교회에서 본다면 과학과 철학이고, 지금의 세대로 보면 세상에서의 성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전에 놓인 우상의 가족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렇게 신앙에 어떤 것을 가미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가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어떤 선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어떤 선의 기준을 가지고 그 선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어떤 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인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그 마음은 선악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스스로 어떤 것에 대하여 선하고 악한 것이라는 결정을 하는 것을 먹었다는 것이다. 먹었다는 것은 자신의 몸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기에 그것이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을 정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었다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어떤 유혹에 이끌린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었다. 즉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에 이끌리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과,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선악과를 먹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수천 년 전의 일을 역사처럼 읽으라고 우리에게 있는 말씀이 아니다.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읽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는 것은 이 육신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에 대하여 태초 이전의 상태와 같이 어둡고, 또한 생명의 기준으로 보면 살았다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육신의 한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달라진다는 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이고 기본 법칙이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기 전과 후의 아담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벗은 몸으로 살던 아담에게 벗었다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신의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도 않고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태도는 달랐다. 자신이 벗었다는 것,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되어 숨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모습이다.


사람이 벌거벗었다는 것은 육신이 벗었다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태어난 상태 그대로를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상태 그대로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그렇지 않고 원래 지으신 모습 그대로가 만족스러운 상태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에덴동산이 만족의 동산이라는 의미임을 생각해보면 더 분명하다.)


사람이 무엇을 어떤 것을 더하는 것은 만족되지 않아서이다. 자동차를 사서 이것저것 치장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원래 만들어진 그대로의 상태가 만족스러운 사람은 그것에 덧붙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모습, 또한 하나님의 말씀 그것으로 만족이 되는 사람은 세상의 철학이나 과학이나 또는 잘살면 좋다거나 세상에서 성공하면 더 좋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골로새교회가 신앙에 다른 것을 접목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깊이 새겨야 하는 말씀이다. 사람은 연약하다. 마음에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악한 것이 많이 나온다. 욕심도 그렇고, 성욕도 그렇고, 시기도 그렇고 질투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사람 스스로가 선한 것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사람 안에 두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만족하는 모습이다.


사람이 그것이 만족이 안 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일일이 제어하고 규제하고 어떻게 해야 선하고 어떻게 하면 악한 것인지를 정하고 그렇게 행동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율법도 필요하고 과학도 필요하고 예의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 하나가 만족이 안 되어서 세상이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 목적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분명해 지는 것이다. 성욕이 나쁜 것인가? 그것을 어떤 목적에 사용하는가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닌가? 시기가 나쁜 것인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것을 시기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 질투가 나쁜 것인가? 하나님을 더 잘 믿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기 위하여 힘쓰는 것이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날카로운 것은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베이지 않아야 만족하는 것이라 여긴다면 뭔가 조치를 취할 것이다. 덮개를 하거나 무디게 만들 것이다. 아니면 버리든지. 하지만 칼에게 날카로움이 없다면 어디에 쓰겠는가? 다만 칼이 목적에 맞게 사용되면 되는 것이다. 그것처럼 사람이 가진 성품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악하고 추해 보이는 것들도 어떤 목적 안에 있으면 다 온전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어진 목적을 알지 못하면 사람이 가진 연약함은 언제나 문제가 있고 이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조치가 바로 신앙에 또한 사람에게 뭔가를 더하는 것이다. 그 원조는 아담이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린 것이고, 시날 광야에서는 흙(사람)을 구워(단련해서) 하늘에 이르게 하려 한 것이고, 골로새교회는 과학과 철학을 더한 것이고, 오늘날의 교회는 세상의 성공과 화려함을 노아의 홍수 때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과 같이 취해서 위대해지고 있는 것이다.


골로새서는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성경이다.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앙이 회복된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마지막에 권면처럼 말씀하고 있는 책이다. 바울사도가 먼저 신앙의 정체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이어서 삶의 모습을 권면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되다. 그것은 삶의 모습은 신앙의 정체성, 즉 생명에서 비롯되는 본성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너무 너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를 감사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인생이 만족스럽지 않고,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 앞에 육신을 부끄럽게 또한 죄악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의 삶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부름 받은 온전한 것임을 아는 마음에서 시작한 신앙은 성경에 기록한 모든 말씀을 행함에 있어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살기만 하면 되는 생명에서 비롯된 본성의 표현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이 신앙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법임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골로새서의 말씀이다.



(골로새서) 4:1-6 소금 같은 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3. 5. 17:22 Writer : 김홍덕

은혜 안에 있다는 것



바울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보낸 서신의 마지막의 인사말을 앞에 두고 끝으로 한 권면은 '너희의 말을 은혜 가운데서 소금과 같이 하라'고 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사람의 말은 정말로 신기한 것이다. 생물학적(?),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유일하게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점은 제쳐두더라도 말이라는 것이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는 것이다. 이는 권력자가 말로 무엇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 하는 말들이 서로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말은 우선 표현이기 때문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와 생각을 대변한다. 정치적인 말은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 그렇듯,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그 사람의 안목이 존재론적인지, 아니면 방법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소유에 관심이 있는지도 다 사람의 말로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말이 삶을 대변하는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면 은혜 가운데서 하는 소금과 같은 말은 어떤 말인가? 그러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말이든 어떤 것이든 사람이 구현하거나 또 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활동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예외 없이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 밖의 일은 없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안에 있는 기능의 어떤 것도 사용자로 하여금 스마트한 정보사용의 목적 이외의 기능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사람을 때리면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도 사람의 존재 목적 안에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외의 것으로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존재 목적이 바로 사람이 은혜 안에 있는 것이고, 사람이 받은 은혜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표현하는 형식으로 낙점을 받았다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어떤 요구에 상관없이 그러니까 이유 없이 거저 주신 것이기 때문에 또한 은혜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은혜가 되려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이 태어나지 않음 보다 육신을 가진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것은 다 같은 궤 안에, 같은 세계의 같은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주신 삶이 감사하지 않은데 이 삶이 은혜로울 수 없는 것이다.


어쩌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더 나아졌다고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사람에게 은혜로 주신 분이 아니다. 그런 것은 다 부수적인 것이다.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 충전하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사람이 어떻게 모든 순간 모든 말을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성경에 있는 말만 하고 또 사람에게 좋은 말만 할 수 있겠는가 하겠지만, 그것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지 않고 하는 말을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집에 키우는 강아지도 귀여운 짓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데나 똥 싸고 오줌 싸는 것 까지 다 강아지를 키우는 재미 안에 혹은 일로 두지 않으면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의 말이나 모든 행동도 언제나 주를 위하여 해야 한다고 하면 모든 말이 다 성경에 있는 말이어야 하고, 또 사람에게 어떤 상황에 무관하게 좋은 말만 하는 그런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존재론적 관점이 아니라 행위 규범에. 형식에 매몰된 관점이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항상 기뻐할 수 도 없고, 범사에 감사할 수 없고,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한 것이 될 수도 없으며,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은혜 안에서 말을 하는 것은 사람이 먼저 은혜 안에 있는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비유컨대 회를 내어도 은혜로운 말이 될 수 있다. 이는 '화내는 것도 은혜다'라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화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왜 화를 내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그 생명의 본성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소금 같은 말



또한 말은 분명한 번지가 있다. 즉 같은 말이라고 해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말이다. 이것을 보면 말은 분명한 주소가 있는 것이다. 주소를 영어로 addr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toward를 의미하는 ad와 direct인 dress가 결합된 단어이다. 즉 주소란 목적지를 두고 그 방향을 향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말이란 것이 바로 그렇다. 말이란 것이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 말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은혜 가운데>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 그런 의미를 알 수 있다.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리에서 자기에게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은혜 안에서 하는 소금 같은 말이다.


알고 보면 사람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사람다운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것이 너무 거룩해서 어떤 순간에도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자기 자리에 맞게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상태대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자리에 맞게 말을 하는 것의 시작과 모든 것은 사람이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자기에게 적합한 말을 하고, 자기에게 적합한 말을 할 정도로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대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영광스런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말을 소금같이 한다. 소금이라는 것이 맛을 내고,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 안에 감동이라는 맛을 내게 하고, 또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리에서 벗어나는 부패함을 방지하는 것에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소금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런 말은 반드시 고운 말이나 부드러운 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엄한 꾸짖음도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욕도 할 수 있을 수 있다.(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듯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말로는 외인들에게 지혜롭게 할 수도 없고, 마치 소금을 너무 많이 쳐서 음식을 버리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말이 얼마나 주소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예를 들어본다면 그것은 죄에 관한 것이다. 죄는 시인하는 것이지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죄는 스스로 깨우쳐서 고백하고 시인할 때 주소가 제대로 된 것이지, 죄가 있다고, 또 그것이 보이고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일일이 시시비비를 따지고, 또 교회 안에서 그것을 책망하는 것을 일삼는 것은 말의 번지가 잘못된 것이다. 즉 소금과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를 시인하게 하는 것은 어떤 교훈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에게 정치적 해방을 기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아셨고, 또 예수님이 잡히시면 다 도망 갈 것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그것을 나무라거나 책망하지 않으셨다. 다만 몸소 십자가를 지심으로 제자들 스스로가 그것에 대한 시인과 고백과 회개가 있게 살아내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말은 참으로 간편한 것이기 때문에 남의 잘못이나 부족한 것을 지적하고 훈계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은 너무 쉬운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시인하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간편하게 말로 그러는 것은 그 말이 아주 좋은 말이라도 소금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은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라는 것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


말도 감사함이나 기도함과 같이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이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생명이 소금 같은 생명이면 어떤 말이라도, 또 어떤 톤의 어떤 감정이 실린 말이라도 다 은혜 안에서 소금 같은 말을 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게 한다면 아무 말이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고 결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육신을 가진 목적을 잘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말이 아니라 사람이 보고 그 마음에 찔림을 받는 사랑의 표현이 동반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 없이 말로만 하는 것은 그냥 소리 나는 꽹과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은혜 안에 있어 소금을 고르게 함과 같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이 삶으로 사랑하고 그와 함께 해 가는 말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바울사도가 권면하는 모든 것은 다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온전히 있으면 일어나고 할 수 있고, 아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 이외에 어떤 것도 그 안에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이 순전하게 표현되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에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으로 신앙을 훼손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사도가 편지를 하고 있는 것이 이 골로새서이다.



(골로새서) 4:1-6 세월을 아끼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3. 4. 10:37 Writer : 김홍덕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에게 있어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대상이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표현하는 것은 일정한 것이다. 이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래가 육지에 올라왔다고 코끼리가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고래가 땅 위에 오면 죽을 수는 있어도 그래도 고래일 뿐이다. 생명이란 주어진 상황이 달라졌다고 다른 생명의 본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리스도인은 그런 존재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를 달리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이다.


바울사도는 이어서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세월이란 것은 아끼려 한다고 아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세월을 시간을 집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집행하지 않는 것을 아낄 방법은 주어진 것에 온전하게 순종하며 사는 것, 그것뿐이다. 


그러니까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내가 집행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나의 운명과 존재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자동차가 세월을 아끼는 것은 고장 나지 않고 운행이 잘 되는 것을 말한다. 자동차의 주인의 시간 계산에 보통은 고장이 나서 수리하는 시간은 포함되지 않는데, 운행 중에 고장이 나서 시간을 소비하면 주인의 목적을 그 만큼 수행하지 못하므로 시간을 낭비한 것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시간 관리를 잘 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목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는 살아가는 모든 것에서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시간에 종속되었기에 시간을 집행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떤 일에서 시간을 아끼는 것은 그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뿐인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에게 있어 시간을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주어진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수험생이라는 신분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 목적이 분명해야 시간이 잘 관리가 되고, 목적에 시간을 잘 소비하는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저축을 하거나 아님 다른 것에 돌려서 사용하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 안에서 시간을 아끼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순종하며 사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시간을 아끼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삶의 목적을 잘 준행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 외에 사람이 세월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는 사람은 자신이 외인을 대할 때나, 또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형제를 대할 때나 동일하게 지혜롭게, 그러니까 사람의 운명과 목적을 보여주어 의문을 해결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것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 또 그리스도인들끼리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있을 때 사람이 살아가는 생각과 모습이 다르다면 이는 세월을 아끼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는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지만, 교회 밖의 생활을 누가 보더라도 교회생활을 위한 재화마련의 수단으로 비치게 살아가는 것 이상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그러니까 외인에게 무심하고 벽을 쌓은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세월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골로새서를 바울사도가 기록한 목적이 교회 안에 세상의 철학과 과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조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철학과 과학에 능통한 사람이 교회 안에서 더 비중이 높아지는 것이야 말로 외인을 잘 대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관점이다.


앞에서 외인들에게 지혜롭게 행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가장 큰 의문인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도록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만 알지 못함 취급 받아 죄인이 되어도,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을 그리스도인의 사는 모양을 보고 그 마음 안에서 깨달을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삶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학교에서는 도덕과 윤리로, 교회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교훈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자를 구제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하는 것들이 그런 것이다. 이것은 언뜻 성경 말씀을 지켜내는 것과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다른 문제이다. 보이는 것이 같다고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밥을 지어주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 자체가 선함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가난한 사람이든 아니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닫도록 수고하는 한 방법으로서 밥을 지어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는 밥을 지어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하나는 그 사람에게 지혜로 대하여 그리스도가 그 사람에게 복음이 되도록 수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두 가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는 선행 자체가 목적이고, 후자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아니 후자는 어떤 목적이라기보다 그것이 본성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행이 목적이니 사람은 그것이 선하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고, 생명으로 표현되는 사람은 금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해도 자기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어쩔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을 이런 저런 이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교회에 다니니까?, 성경에 그렇게 하면 복 준다고 했으니까?, 천국 가면 상급을 준다니까? 하는 것들과 같은 목적을 두고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과,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한 마디로 가공품과 생명체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세월을 아끼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과 같은 일이 여기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의지와 신념과 나름의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하는 사람은 육신을 가졌기에 그 한계로 인하여 세월도 놓칠 때가 있고, 잊어버릴 수 도 있고, 때로 몸이 아프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말씀은 어떤 행위가 본질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임을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와 같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고,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깨닫는다면 말씀이 마음 안에 심겨진 것이고 그 씨가 자라서 열매가 맺혀서 성령의 9가지 열매도, 또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삶도, 그리고 세월도 절대 놓치는 것 없고, 또 자나 깨나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며,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세월은 사람이 집행하는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 통제하고 아끼고 할 수 없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주어진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다. 자동차가 시간을 아끼는 것은 잘 달리는 것이고, 사람이 세월을 아끼는 것은 인생이 주어진 목적대로 사는 것이다. 사는 것은 생명이 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의지를 가지고 살아보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안다. 그러다보니 그런 삶이 자연스럽게 된다고 하면 잘 믿지 않는다. 그렇게 노력해도 말씀대로 살기 어려운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쉽게 여겨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밀이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수 믿는 것이 정말 어려운데 왜 예수님께서는 쉽다고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개가 개로 사는 것이 어렵겠는가?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어렵지 않고, 그 그리스도를 보고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하며 사는 것이니 이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세월을 아끼는 것이다. 개가 개로 사는 데는 죽는 날 까지 단 1초도 허비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에 있어 단 1초도 누락됨이 없는 것이다. 이보다 더 온전하게 세월을 아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아끼는 것이다.


(골로새서) 4:1-6 외인을 향한 지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3. 3. 08:24 Writer : 김홍덕

지혜는 사람들이 가진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다. 지식은 사람의 삶의 형식에 관한 의문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지혜는 삶의 목적과 살아가는 이유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다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모였다.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학교나 학원을 가면 되지만, 왜 사는지를 알고, 또 지식을 통하여 익힌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즉 사람이 왜 하느냐를 아는 것과 밥 짖는 법을 아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지혜와 총명이 함께 하기를 구하였다.(골 1:9) 그리고는 어떤 것이 지혜인지, 즉 무엇이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이고 삶의 의미인지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 끝으로 그리스도를 옷 입고 살아가는 삶이 어떠한 모양인지를 말씀하였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자녀에게 상전에게 종에게 모두에게 또한 어떤 사람이라 해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의 삶의 모양이 어떠한지를 말씀한 것이다.


이제 바울 사도는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기회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또한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외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대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외인들이란, 교회 밖에 곧 신앙 밖에 있는 이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것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별 것 아닌 일로, 또한 심지어는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신앙적 관점에서 무시하는 것으로 더 나아가서는 대적할 대상으로 까지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은 지금도 만연한 생각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바울사도는 다르게 말씀하고 있다.


신앙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사람의 본질이자 내용이 <사람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됨으로 하나님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의를 잊고 형식에 몰입한 신앙을 율법주의라고 했고, 의만 인정하고 삶의 형식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을 영지주의라고 했는데, 율법주의자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는 밥도 같이 먹지 않을 정도였다. 즉 외인을 대하는데 지혜는 물론이고 뭐 제대로 인간취급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육신의 혈통 그 자체만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즉 신앙적 인종차별이라고 할까 뭐 그러했다.


반면에 영지주의자, 곧 의만 있으면 되니 삶의 형식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오판을 한 사람들은 육신의 삶을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므로 외인들, 즉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죽어라 열심인 사회적 요구와 삶의 수고들을 외면하고 그저 하나님을 믿는 의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영지주의적인 관점은 이 시대에서 신앙적 순수성에 몰입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그러한 기류는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것들을 교리나 신앙의 모습으로 선택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조차 이단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한다. 이는 2014년 대한민국의 여름을 달구었던 유병언의 구원파가 바로 그런 것이다.


앞에서도 지속적으로 말해온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생명의 유전자가 본성으로 표현되듯 살아가는 내용과 본질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과 같이 더 알지만, (신앙의 계시가) 더 밝지만 오히려 모르는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보여주심과 같이 사람을 대할 때 그렇게 살아가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나 영지주의와 같은 것은 생명이 본성이 되어 표현되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심겨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는 이 하나님의 법이 소실된 신앙인 것이다. 율법주의는 내용이 없고, 영지주의는 형식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은 외인과 세상에 대하여 온전한 지혜,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의 존재 이유, 삶의 의문을 해결한 지혜가 없는 것이다.


외인에 대한 지혜는 결국 신앙 밖에 있는 사람이 신앙을 가진 사람의 사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지혜가 그 최종 단계이다. 지혜라는 것이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고 사람이 가진 가장 중대하고 크고 어려운 의문이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을 지혜로 대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 의문의 해답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 해답은 그리스도이신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곧 하나님의 의를 삶으로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용과 형식 중 어느 하나가 결여되고 훼손된 신앙으로는 의문을 해결할 지혜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의문이라는 것이 내용과 형식이 연결이 안 되고 그 고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서 생긴 의문인데 율법주의와 같이 내용이 결여되고, 영지주의와 같이 형식이 훼손된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여 삶의 의문을 해결하는 지혜를 보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외인들을 대하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의 교회가 정말로 잘 하지 못하는 문제일지 모른다. 특히나 한국교회는 더더욱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을 문자대로 보고 지키려 하는 신앙들은 형식이 좋아지면 신앙도 좋아질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교회를 화려하게 지어 하나님께 영광이 돌린다 하고, 반면에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사회 사람들이 볼 때 광신도 내지 이단같이 자신들만이 모여서 교회가 절과 같이 산속으로 또 외지로 떠나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려 하는 모양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일련의 모습들은 외인들에게 지혜로 다가갈 수 없다. 그리고 외인들에게 지혜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내용이 되고, 삶이라는 형식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사람들에게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또 언제 찾아가도 평안히 자기 삶을 안식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 외인들을 지혜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교회의 문제 뿐 아니라 개인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씨가 없는 땅에 씨를 뿌리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전도라 하고 그 열매가 나오게 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신앙이 없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먼저는 신앙이 있는 그 어떤 사람도 다 그 자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고, 또한 그런 사람들이 신앙 가진 사람들로 인하여 감동하지 않는다면 또한 의미가 없는 것이다. 꽃이라 이름을 부를 때 꽃이 되는 것처럼, 신앙 없는 사람이 신앙 가진 사람들을 보고 삶의 의문이 해결되는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되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의미가 있어지기를 바라셔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과 성품과 생명이 자신의 내용이요 본질이고 삶의 의미가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하나님을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심으로 하나님이 의미가 있어지셨는데, 신앙이라는 것도 결국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화가에게 캔버스와 같은 것이다. 세상도 그러한 것이다.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표현한 증거를 세상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요 13) 이것이 바로 외인들을 지혜로 대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4:1-6 그리스도의 비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3. 2. 12:18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짧은 편지에서 간단해 보이지만 많은 것을 말씀하고 있다. 성경을 객관적 사실로서 연구하고 공부하고 또 그것을 전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골로새서는 교회 안에서 세상의 학문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 인정받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가정과 사회 생황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 보일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심화시키면서 골로새서의 연구를 해 갈지 모른다.


하지만 골로새서에는 단순히 그런 교회 상황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현상으로서 분명한 것이었지만, 그러한 것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그러니까 세상의 과학과 철학과 같은 것은 다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데, 그것이 신앙의 본질의 자리에 앉는 것은 신앙의 근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러한 것은 다 땅의 것, 곧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의 본질에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땅에 있는 것이 본질이 되는 것은 결국은 남편과 아내, 또한 사회 속의 인간관계와 같은 것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의 생활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의 생활 방식, 곧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되는 삶은 신앙을 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방법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기반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인간 본질의 모습을 보고서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 안에 두고, 또한 다른 모든 사람이 인간이라는 연약함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이 좀 손해보고 수고하고 죄인이 되는 모습인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의인이 죄인 앞에서 죄인이 되는 세계이다. 이것이 정말로 비밀이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더 말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그 비밀이 바로 이 비밀이다. 이 비밀은 곧 십자가의 비밀이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을 온전히 하나님의 안목, 그러니까 심령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볼 수 있게 하는 비밀인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도 할 수 있는 치명적인 것이다. 즉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감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삶의 곤고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중에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정에 두는 물건들도 아무리 멀쩡하고 번듯해도 그 용도가 불분명하면 버려지거나 중고시장에 내다 팔아 버린다. 즉 존재의 목적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삶 안에서 형성하려 한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에서 많은 의미를 찾는다. 또 사회 속의 어떤 분야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수학 선생은 수학을 가르치는 교단에서 그 의미를 찾고, 기술자는 기술로 물건을 만들 때 삶의 의미를 얻은 듯 생각한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들에서도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비밀이다. 왜 비밀인가 하면, 사람들은 어떤 것이라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미를 가질 수 있게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옳은 사람이 되려 한다. 그러니까 수학 박사는 수학에 있어 다른 사람보다 더 박식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려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런 것이 무너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수학 박사, 수학 교수에게 "수학도 잘 못하면서 무슨 소리냐?'라고 한다면 이는 엄청난 일이 될 것이다. 수학 교수에게 있어 그것은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고, 전쟁 도발과 같은 것이다. 세상의 법으로는 그런 것이 용납될 수 없다. 즉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그 가진 것에 대한 세계의 의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수학 박사의 말은 수학이라는 세계에서 옳은 것이 되고, 야구 감독의 말은 야구라는 세계 안에서 옳은 것과 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세계에서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려고 한다. 즉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은 이렇다. 수학에 대하여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잘 구분하고, 선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것이 많을수록 더 의미 있고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법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법은 반대다. 더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에 의하여 심판 받고 죄인이 되는 것에 순종하는 세계가 바로 십자가의 법이다. 세상의 법으로 보면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법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상황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사형수가 된 상황이 아닌가?


십자가의 도는 가지고 더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 앞에서 죄인이 되는 세계이다. 사람들은 단순하게 가진 것을 베풀어 주고 나누어 주는 것이 사랑이고 하나님의 법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신앙인의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대세가 되어 있기 때문에 정말로 안타까운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가지고 있는 것을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으로 인하여 없는 사람 앞에서 죄인이 되고, 종이 되고, 그들을 위하여 수고하고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비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아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인데 예수님보다 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임을 당한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고 십자가의 도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수학 선생이 학생들 앞에서 수학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당한 일이겠는가?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는 아이들이 수학을 배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면 맞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 하지만 수학 선생이 진정으로 아이들에게 수학을 알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자신은 수학을 모르는 사람과 같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흔히들 말하는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즉 수학을 잘 아는 선생이 아니라, 수학을 모르는 아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그런 모습으로 다가갈 때 아이들에게 수학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수학 선생이 자신이 선생이 아니라 학생과 같이 수학을 모르는 사람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면 웃길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그 모양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라면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고, 하나님의 권능을 계속 보여주면 될 텐데,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죄를 주는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사형을 당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잘 하는 영역에서 그것에 도전을 받으면 항거하기 마련이다. 부부가 싸우는 것도 같다. 아내가 남편의 일을 이래라 저래라 하면 남편 입장에서는 남자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이 더 잘 아는데 간섭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자신이 잘하고 또 수고한다는 것을 몰라주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선악과에 뿌리를 둔 생각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상대를 굴복시키는 말 중에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바로 세상의 법을 상징하는 말의 하나이다. 수학 선생이 학생들 앞에서 '잘 몰라서 그러는데'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십자가의 도는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세상 사람들 중 초보적인 사람은 자신이 어떤 세계에서 더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그 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은 그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그리스도의 삶은 가졌다는 이유로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자신과 같이 될 수 있도록 수고하고 목숨을 내어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비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아셨던 유일한 분(독생자)이셨는데 그것으로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으려 하거나 그것을 가르치시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자신은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랑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죄인이 되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과 같이 되게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재물이나 지식과 같은 초보적인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본질과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신앙인들, 소위 말하는 목회자들은 신앙이라는 것, 또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투철한 모습을 보인다. 신앙을 지키기고 외치기 위하여 죽을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하면 항상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세상의 법이다. 


목회자가 진정으로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한다면, 누군가가 자신을 신앙 없는 사람으로 몰고 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찍고, 또 교회가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 때, 그것에 대항하고 그런 사람들을 교회에서 몰아내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죄를 시인할 때 까지 오히려 종과 같이 수고하고, 신앙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같이 수고하고 살아낼 때 바로서 하나님도 전해지고, 신앙도 온전해지며, 교회가 올바로 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인 것이다.


수학 선생은 학생들의 모습에서 자신도 학생들과 같이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자신을 낮추고 비워서 그들과 같이 생각하면서 함께 생각을 공유할 때 온전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교육이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것에 있어 자신이 더 아는 세계에 있어 항상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알지 못하는 종과 같이 살아갈 때 비로소 십자가의 도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될 때 다른 사람에게 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듯 가장 중요하고 존재의 본성에 관한 것에 대하여 그렇게 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삶의 형식에 관한 것에서 어찌 그렇게 하지 못하겠는가?


남편이 아내에게 자신의 가치를 모른다고 생각하고 대접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으로서 귀한 존재이기에 집안일을 감당하고 수고하면 감동이 있지 않겠는가? 또 사회의 어떤 분야에서 더 잘 알지만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수고하고, 또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라 비난할 때 묵묵히 그들이 그것을 잘 할 수 있도록 수고하는 삶을 사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생명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말해 왔다. 그것은 심히 의심스러운 이론이나 논리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진리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절대로 개의 생각이나 개가 물건을 보는 방식을 알 수 없다. 생명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개의 사고와 인지 방식을 이해하려면 개로 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모든 것이 이와 같다. 그래서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거듭남은 어떤 날짜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방언과 같은 어떤 현상이 동반되는 것이 아니다. 이 거듭남의 증거는 자신 스스로 안다. 만일 어떤 날 사람의 정체성과 이 세상의 법에 대한 안목이 바뀌었다면 스스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평소에 도로에 자전거가 얼마나 많이 다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나가거나, '자전거를 하나 살까?' 생각하고 거리를 걸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있는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또한 사람이 거듭나게 되는 과정은 씨가 땅에 심기는 것 같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그것이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땅에 심겨진 씨가 열매가 되는 것과 같고, 여자가 자신과 성씨가 다른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이고 사람은 땅이며, 그리스도는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가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사람 안에 어떤 것이 들어가서 그것이 그 사람의 생명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 어떤 것, 무엇이 들어가느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것이다. 십자가 맡에 있던 백부장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하나님의 이미지가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그 백부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하나님의 법,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기 때문에 존귀케 되고 "목사님! 목사님!"하면서 대접 받는 것과 같은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알기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이 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나온 법으로 죄인이 될지라도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알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은 종과 같이, 또한 십자가에 달리듯 죄인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의 감동으로 이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