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말씀은 물론이고 어떤 책이나 문화 매체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의도다. 즉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말이다. 성경도 같다. 그러므로 세부적인 행동 지침과 같은 말씀이라도 다 의도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성경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그런 단편적 이해는 많은 경우 서로 상충되거나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여 이해를 어렵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말씀에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지만 또 어떤 말씀은 누가 너의 부모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으라는 말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장 근간을 이해하지 않고 하나씩 분리하여 각개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특히나 교리라는 것이 그렇다. 교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잘 요약한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표현된 것을 잘 연구하여 함축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이야기 한다면 과정이 농축된 결과를 짧게 표현한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리가 틀리거나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교리가 왜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 자체에 매몰되면 본질을 알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런 관점에서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또 다른 서신서에서 어떻게 보면 행동 강령과 같은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런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이 표현되는 형태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면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즉 존재가 늘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만 본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지, 밥도 안 먹고 회사일도 뒷전으로 한 체 기도만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또 이 세상의 모든 것의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도 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 즉 삶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그것을 위하여 사는 삶이 곧 항상 기도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삶은 또한 삶의 모든 요소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 곧 하나님께서 인생의 삶을 통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구하고 갈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바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은 결국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마음 안에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성령의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바로 사랑이다. 그런 마음이 들도록 수고하는 삶은 모든 것에 있어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모습을 두고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다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 곧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는 생명의 본성이 이 모든 것을 표현하고 감당하고 통일시키며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없는 상태에서 성경 말씀을 조각 조각 지켜내려 하는 것은 언제나 한계와 많은 의문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하고, 그러하기에 큰 신념이 필요한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신념을 지키고 관철시키기 위하여 투철하고 사람들 아파에 거저 신앙으로 강직한 사람으로 살아가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는 심한 두려움이 바탕으로 깔려 있다. 즉 말씀을 조각으로 지키는 사람은 하나라도 지키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두려움이 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양은 바로 유대인들, 곧 율법으로 행함으로 지키려한 이들의 모습이 바로 그 조상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나,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나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상황 상황에서 또한 단편적인 사건과 일을 그렇게 하려 하는 것은 정말로 힘든 것이다. 나도 고등학생 시절에 1,000일 동안 빠트리지 않고 기도해 보겠다고 작정하고 해 봤는데 그만한 중노동이 없었다. 숙제하듯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몰랐던 것이다. 하여간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근간, 곧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주제이자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다. 즉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란 누구신가?>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념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즉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만드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말씀의 주제이자 하나님의 의가 씨와 같이 자기 마음 밭 안에 들어와서 그것이 싹이 나고 생명이 되고 나서 열리는 열매들이 바로 성경의 모든 행위 규범에 관한 말씀이고 사도들의 권면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이 성경 말씀을 지키려 하면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다 행함으로 믿는 신앙, 곧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의 신앙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없는 사람은 자기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어 표현하는 세계가 아니기에 그것을 이루어 내는 것에 늘 한계가 있고, 그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이르지 못하는 원인을 말씀을 다 지켜낼 수 없는 육신의 한계에 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이 육신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이런 모양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듯 생명이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켜내고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 듯 성경 말씀을 지켜내는 사람을 가공하고 제조하는 사람들의 안목으로는 모든 것에 신념과 열심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육신으로 부족한 것을 계속 채우려 하는데 초대 교회 당시에는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에 능통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것이 채워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런 것은 잘못된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항상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무릎 꿇고 앉아서 밥 달라 돈 달라 배우자 달라 명예를 달라 기도하거나 또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나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금욕적인 신념을 이루는 것에 능통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삶의 모든 요소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 관계 안에서도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또한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들 앞에서 죄인이 되는 자리까지 섬기고,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도 내어주는 그런 사랑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골로새서의 행간을 읽는 것이고 기도하기를 계속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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