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4:1-6 세월을 아끼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3. 4. 10:37 Writer : 김홍덕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에게 있어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대상이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표현하는 것은 일정한 것이다. 이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래가 육지에 올라왔다고 코끼리가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고래가 땅 위에 오면 죽을 수는 있어도 그래도 고래일 뿐이다. 생명이란 주어진 상황이 달라졌다고 다른 생명의 본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리스도인은 그런 존재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를 달리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이다.


바울사도는 이어서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세월이란 것은 아끼려 한다고 아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세월을 시간을 집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집행하지 않는 것을 아낄 방법은 주어진 것에 온전하게 순종하며 사는 것, 그것뿐이다. 


그러니까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내가 집행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나의 운명과 존재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자동차가 세월을 아끼는 것은 고장 나지 않고 운행이 잘 되는 것을 말한다. 자동차의 주인의 시간 계산에 보통은 고장이 나서 수리하는 시간은 포함되지 않는데, 운행 중에 고장이 나서 시간을 소비하면 주인의 목적을 그 만큼 수행하지 못하므로 시간을 낭비한 것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시간 관리를 잘 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목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는 살아가는 모든 것에서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시간에 종속되었기에 시간을 집행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떤 일에서 시간을 아끼는 것은 그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뿐인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에게 있어 시간을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주어진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수험생이라는 신분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 목적이 분명해야 시간이 잘 관리가 되고, 목적에 시간을 잘 소비하는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저축을 하거나 아님 다른 것에 돌려서 사용하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 안에서 시간을 아끼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순종하며 사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시간을 아끼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삶의 목적을 잘 준행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 외에 사람이 세월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는 사람은 자신이 외인을 대할 때나, 또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형제를 대할 때나 동일하게 지혜롭게, 그러니까 사람의 운명과 목적을 보여주어 의문을 해결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것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 또 그리스도인들끼리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있을 때 사람이 살아가는 생각과 모습이 다르다면 이는 세월을 아끼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는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지만, 교회 밖의 생활을 누가 보더라도 교회생활을 위한 재화마련의 수단으로 비치게 살아가는 것 이상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그러니까 외인에게 무심하고 벽을 쌓은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세월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골로새서를 바울사도가 기록한 목적이 교회 안에 세상의 철학과 과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조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철학과 과학에 능통한 사람이 교회 안에서 더 비중이 높아지는 것이야 말로 외인을 잘 대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관점이다.


앞에서 외인들에게 지혜롭게 행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가장 큰 의문인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도록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만 알지 못함 취급 받아 죄인이 되어도,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을 그리스도인의 사는 모양을 보고 그 마음 안에서 깨달을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삶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학교에서는 도덕과 윤리로, 교회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교훈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자를 구제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하는 것들이 그런 것이다. 이것은 언뜻 성경 말씀을 지켜내는 것과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다른 문제이다. 보이는 것이 같다고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밥을 지어주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 자체가 선함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가난한 사람이든 아니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닫도록 수고하는 한 방법으로서 밥을 지어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는 밥을 지어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하나는 그 사람에게 지혜로 대하여 그리스도가 그 사람에게 복음이 되도록 수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두 가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는 선행 자체가 목적이고, 후자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아니 후자는 어떤 목적이라기보다 그것이 본성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행이 목적이니 사람은 그것이 선하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고, 생명으로 표현되는 사람은 금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해도 자기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어쩔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을 이런 저런 이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교회에 다니니까?, 성경에 그렇게 하면 복 준다고 했으니까?, 천국 가면 상급을 준다니까? 하는 것들과 같은 목적을 두고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과,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한 마디로 가공품과 생명체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세월을 아끼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과 같은 일이 여기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의지와 신념과 나름의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하는 사람은 육신을 가졌기에 그 한계로 인하여 세월도 놓칠 때가 있고, 잊어버릴 수 도 있고, 때로 몸이 아프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말씀은 어떤 행위가 본질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임을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와 같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고,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깨닫는다면 말씀이 마음 안에 심겨진 것이고 그 씨가 자라서 열매가 맺혀서 성령의 9가지 열매도, 또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삶도, 그리고 세월도 절대 놓치는 것 없고, 또 자나 깨나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며,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세월은 사람이 집행하는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 통제하고 아끼고 할 수 없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주어진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다. 자동차가 시간을 아끼는 것은 잘 달리는 것이고, 사람이 세월을 아끼는 것은 인생이 주어진 목적대로 사는 것이다. 사는 것은 생명이 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의지를 가지고 살아보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안다. 그러다보니 그런 삶이 자연스럽게 된다고 하면 잘 믿지 않는다. 그렇게 노력해도 말씀대로 살기 어려운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쉽게 여겨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밀이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수 믿는 것이 정말 어려운데 왜 예수님께서는 쉽다고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개가 개로 사는 것이 어렵겠는가?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어렵지 않고, 그 그리스도를 보고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하며 사는 것이니 이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세월을 아끼는 것이다. 개가 개로 사는 데는 죽는 날 까지 단 1초도 허비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에 있어 단 1초도 누락됨이 없는 것이다. 이보다 더 온전하게 세월을 아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아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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