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57-68 예수님의 죄목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26. 11:47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결국 유다에게 팔려서 제사장의 하속들에게 잡혀서 심문을 받으신다. 하지만 예수님의 죄목은 뚜렷하지 않았다. 그들의 법이라는 것이 행동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행동이 죄가 되느냐 하는 것인데, 언뜻 생각하면 바리새인들과 무수히 갈등을 빚은 예수님께서 행동에 관한 죄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이나 생명이 종교적인 행동에 우선한다는 내용을 사람들이 접하면 약속이나 한 듯 반문하는 것이 바로 “그럼 행동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이냐?”라든가, “선한 행동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냐?”라며 반문한다. 가끔씩은 어떻게 그렇게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그토록 동일한 우문을 해 오는지 놀랍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주신 복음은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본성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 본성으로 인한 삶을 사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이기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마음에 있는 것이 표현된 것이다. 거지를 보고 동냥을 하는 행동도 사람 마음 안에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아니면 원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라도 있어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 있어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고 할 수 밖에 없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의롭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의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증거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종교적인 행위가 본성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인하여 행동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막상 예수님을 붙잡아 와서 심문하니 예수님의 행동에서 아무런 문제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실로 아이러니한 것이다. 예수님은 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의 외식을 책망하셨고, 그런 예수님의 말에 분개한 그들이 예수님을 잡아왔는데 예수님의 행동에 대하여 죄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행위가 더 온전한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위는 안식일도 어기고,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죄를 사한다고 하는 등 당시의 유대문화권에서 도저히 수용하기 힘든 예수님의 모습이 반대로 안식일도 지키고 모든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려 힘쓴 이들의 삶보다 더 온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본성이고 그 본성으로 인한 삶의 모습이 율법을 신념을 가지고 억지로 지키고 범하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의 노력보다 온전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지금도 이것은 같다. 성경말씀을 지켜내기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 안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있어서 그렇게 사는 것과, 그렇게 행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아무리 바보라도 자기 안에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이 표현되는 것과 그것을 모방하고 가공한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리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강아지로 태어난 개가 개의 모양을 하고 개로 사는 것과, 정교한 기술로 만든 강아지 인형이나 로봇 중에 어느 것이 온전한가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은 율법을 어기는 것 같지만, 율법의 목적이자 본질인 하나님의 생명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니 그 모든 행동과 삶과 말씀은 설사 거짓말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몸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율법적인 기준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책잡으려 하니 책잡을 것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자 심문하는 제사장들은 다급해졌다. 잡아는 왔는데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거짓 증인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인데 그 증인의 증거는 사형의 죄목도 아니고, 더욱이 로마 통치 아래 있는 그들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으니 더 큰 죄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그런 거짓 증거나 다른 죄에 대하여는 일절 대답을 않으시니 제사장들은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는 그 말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하였노라.” 즉 “그렇다.”고 대답을 하신 것이다. 심문하는 그들에게는 횡재와 같은 것이지만 정작 예수님의 대답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죄목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그것도 나사렛이라는 천한 동네 목수의 아들 주제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지은 죄이든 아니든 간에 시인해봤자 사형에 이르지 않는 사소한 송사에는 전혀 대답을 하지 않으시다가 시인하면 죽게 되는 심문에는 시인을 하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성전을 헐면 사흘 안에 짓겠다는 것은 사기는 될 수 있지만 죽을죄는 아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억지긴 하지만 그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는데 답변 않으시다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하니 “그렇다.”라고 답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간단하다. 다만 그 결과 대가가 너무 엄청난 것이어서 문제긴 하지만. 그것은 먼저 정말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지금 예수님의 상황과 같이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 그것을 표현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 없이 노력과 신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외시하는 자들의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된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대신 벌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그 정체성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 육신 가진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십자가는 인간의 틀(mold)이다. 십자가가 인간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죄목이 무엇인가 하면 “유대인의 왕 예수”이다. 그것이 죄패였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스스로를 유대인의 왕이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심으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무엇이 왕 같은 삶이냐에 대하여 세상의 견해가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본성이신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형틀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견해가 극명하게 다르다. 특히 하나님과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고 심히 좋았는데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부끄러운 존재였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견해차이다. 문제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은 하나님과 다르게 사람을 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다. 그래서 선악과가 원죄다. 선악과를 먹고 보니 사람이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감추려 한다.


하지만 십자가는 그 부끄러운 것을 드러낸 자리다. 사람이 사람의 정체성을 숨기려 하는 것을 선으로 여기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셨을 때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하신다. 이것을 발가벗고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로 무식한 것이다. 분명히 정체성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사람에 대한 가치관이 변했을 때 그가 한 것은 숨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린 것이다. 이것이 성기를 가렸다는 것이 아니다. 무화과는 유대인의 나무다. 즉 율법으로 자신이 볼 때 부끄러운 인간의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그 부끄러운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에는 부끄러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다.


그 죄가 있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덮으려 한다. 하나님과 같이 되기에 부족한 부분을 감추려 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과 같이 보이는 것은 모두 대단하고 신령하며 신비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방언을 한다거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을 할 수 있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그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러기를 바라셔서 만드신 것이 아니다.


일본에는 신조라는 야구 선수가 있다. 그는 야구기록이 우수하지는 않지만 온갖 재밌고 다소 기행적인 행동들을 많이 해서 일본의 야구팬들이 좋아한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늘 비판 받는다. 그런 그가 한마디 한 적이 있다. <“(야구의) 기록에 관한 것은 이치로에게 맡기고, 기억은 나에게 맡겨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와 같이 기적과 신비한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로 살면 되는 것인데 이것을 벗어나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니 모든 것이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묻는 것에 죽는다는 것을 아시면서 “그렇다.”고 하신 것은 제사장과 같이 인간의 연약함이나 감추고 싶은 것을 율법의 행위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사람, 그것을 감추지 않고 사람이 보기에는 부끄러워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을 아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운명이고 본성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러셨다면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이들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 본성이 잡으러 제사장의 하속들을 천사로 물리치지 않음이고, 죽을 줄 알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없다고 하는 것에 무리가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 또는 예수님께 “주여! 주여!” 외친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한들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구주시고, 그 생명의 본성으로 살아가길 원한다면 사람의 존재를 죄로 여기지 않는 마음,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악으로 여기지 않는 본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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