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대로 사는 삶을 바란다면 육신을 보는 관점의 교정부터 …
우리가 인생을 영위하며 거하는 이 육신은 부정하거나 부족하지 않다. 다른 동물이나 자연에 대비해 상대적인 연약함은 분명하지만, 그건 강함을 판단하는 기준의 문제일 뿐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이룰 때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강하고 위대하다. 전능하신 하나님 성품의 한 측면인 낮아짐과 겸손과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이 육신보다 더 좋고 온전한 건 이 우주에 없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 안에서 가장 우수하다.
하지만 사람은 이 육신을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서 보지 않고, 선악과를 먹은 자기 선악의 기준으로 본다. 강하고 위대할 때 이기고, 이긴 것이 선함이라는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심판한다. 그 판결은 연약하고 부정함이다.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래서 육신을 정화하고, 행동을 경건하게 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한다. 이게 바로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의 본질이다.
율법주의나 영지주의 둘 다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관점의 뿌리는 같다.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사람의 관점은 두 가지 방향으로 방법을 모색한다. 바로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다. 율법주의는 앞에서 말한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육신이 연약하고 부정하니 육신의 행동을 정화하고 경건하게 유지하여 의에 이르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심령과 마음과 의도의 부정함은 어떻게 하지 못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부정함은 사람의 판결에 따른 부정함이다.
정말로 깨우치기 힘들고 어려운 게 오늘날 신앙인들의 생각이다. 달력으로 신약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자기들의 신앙이 그저 복음인 줄 안다. 분명 자신이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어 노력할 뿐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 생각을 어떻게 하기 힘들다. 신약성경, 아니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행위로 지켜내려고 하면 그게 율법이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부터 시도된 실패한 노력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렸다고 했는데, 이게 신체의 일부를 가렸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부끄러워 숨었다고 했으니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을 감추려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화과는 율법으로 의로워지려는 유대인의 나무다.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상통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무화과 곧 율법으로 육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다.
이처럼 사람들이 육신의 행위를 경건하게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시도의 뿌리는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주신 목적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가 정한 기준으로 육신을 심판한 결과다. 하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게 하나 있는데, 사람의 그런 노력은 아담의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육신은 어떻게 해도 정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영지주의자들이다. 영지주의는 율법주의와 완전히 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뿌리는 같다. 육신을 부정하게 보니 육신과 영혼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한 게 영지주의다. 그나마 노력이라는 소모적인 요소가 없다는 측면으로 보면 율법주의보다 나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을 근원적으로 배제했다는 점에서 구원의 실체를 부인하고 있다.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관점은 모든 신앙 문제의 뿌리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관점은 신앙의 모든 문제를 초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육신을 부정하게 보게 되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이야기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표현해야 하는 근본 창조 목적을 외면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의 기능도 상실하게 되고, 향유 없는 옥합처럼 육신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으므로 육신의 어떤 노력이나 삶의 태도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낼 수 없다. 육신 안에 하나님 말씀과 뜻이 없어 목숨을 내어주어도 나타낼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그래서 소용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으로 나아가려면 가장 먼저 우리 육신에 관한 관점을 교정해야 한다. 사람을 통해 그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너무 합당한 육신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런 깨달음은 낮고 겸손하고 섬기며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육신이라는 이해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바로 알아야 육신을 바로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려면 육신을 보는 관점부터 교정해야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바로 안다면, 선악과를 먹은 자신을 회개하게 된다. 사람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건 거듭나는 방법 외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건 창조 목적을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뜻과 의가 육신이 된 존재로 다시 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유전자가 된 사람의 판단은 하나님 뜻대로 할 수밖에 없다.
새롭게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이 육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데 얼마나 온전한지를 본성으로 알고 살아간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이 육신은 보기에, 살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너무 온전하고 보기에 좋은 존재라는 걸 알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거듭난 삶이다.
육신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과 같아지면,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이 삶은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지 않는다. 노력은 이루지 못한 자의 정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온전함을 아는 거듭난 사람은 거저 살아갈 뿐인데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사는데 그렇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사는 걸 구원이라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라고 한다. 이 삶을 소망한다면 육신을 온전하게 보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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