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에 대한 하나님과 사람의 생각 차이
기독교인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우리 육신을 어떤 존재로 보는지에 관한 관점은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다. "육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신앙과 무슨 상관?"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과 사람은 육신을 보는 관점이 극단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 순종하고, 사람이 하나님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과 극단적으로 다르게 생각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가 분명하다.
자기 육신에 관한 사람의 생각은 언제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부족하고, 성경대로 살기에도 부족하며, 자기의 의지를 실천하기에도 연약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목적에 너무나 적합해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만족해하셨다.
사람은 육신을 가진 자기 모습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에 채울 수 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정작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창조 목적에 너무 합당하다고 생각하신다. 이런 엄청난 차이가 있음에도 기독교인들은 육신을 보는 관점을 교정하기는커녕 이걸 문제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육신을 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먼저 사람의 관점을 정리해 보면,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은 육신을 가진 체로는 성경대로 살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성경대로 살 수 없다는 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의미하는데도 육신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람은 이 정도로 육신을 부정하고 연약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더 놀라운 건 이런 분명한 모순과 상충을 알면서도 구원은 또 받았다고 믿는 것이다. 부정하고 연약한 육신으로 살면서 정결하고 죄 없는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 그 자체다.
반면에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하나님은 육신을 연약하게 보시지 않는다. 강하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본다면 연약한 게 명백하지만,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보면 보시기에 심히 만족스러운 게 우리 육신이다. 하나님께서 무능하다고 믿을 게 아니라면 자기가 정한 목적도 달성하지 못할 존재를 창조해 놓고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는 말씀과 자기 생각이 다르다는 걸 유의해야 하는 게 마땅하고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강하고 위대한 하나님 성품을 표현하시려는 게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고자 하는 성품이 강함과 위대함이라면 사람은 분명 연약하며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기에 부정한 존재인 게 틀림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실패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강함과 위대함이라는 하나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그것도 육신을 이용하여 섬기고, 겸손하며, 사랑하며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 하신다.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려는 하나님의 성품은 십자가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런데 사람은 강하고 위대함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육신으로 사는 삶은 부족하고 연약해서 그 뜻을 이루기에 부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성경 전반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갈등하는 주된 이유다. 일단 시작부터 그랬다.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고 보니 자기 육신으로는 하나님처럼 위대하고 강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어 부끄러워 숨었다. 호기롭게 도전장을 냈다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꼬 도망친 격투기 선수와 같은 모양새다. 문제는 하나님은 그걸 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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