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2장)
신앙인들은 구원받으면, 거듭나면 행동과 능력이 바뀔 것처럼 생각한다. 예를 들면 구원을 받으면 말투가 바뀐다 거나, 화를 내지 않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교회가 시키는 대로 교리문답에 “Yes!”라고 답하고 구원받았다 생각하면서 교회를 다녀도 정작 자기 자신은 여전하는 데 실망한다. 실망이라는 표현이 다소 과장된 것 같아 보여도,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늘 회개하는 죄책감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가 보기에 바뀐 게 없고, 이전에 하던 행실과 죄를 그대로 범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를 내는 것과 같은 자기 본성이 구원과 함께 바뀔 것 같은데 바뀌지 않는 현실에 살짝 당황한다. 이는 구원을 행위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얻었다고 믿는 근거가, 교회에 다니는 것, 예배에 참석하는 것, 세례 받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좀 더 나름의 성경적인 답변이라고 생각하는 건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정신승리를 주장해도 찝찝한 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한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옛사람의 상징인 사울이 죽었다는 건 분명 우리 심령 안에 있는 옛사람의 본성이 죽었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사울이 죽자마자 바로 다윗이 통일된 나라의 왕이 된 건 아니다. 영적으로 조명하면 거듭난다고 바로 인생이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그러니까 구원받으면 바로 그때부터 다시는 화도 내지 않고, 언제나 말도 곱게 하는 사람이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다면 “거듭났다면서 왜 회개하느냐?”와 같은 질문은 그저 시비에 불과한 것인가?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 화를 내면 되나?”, “교회에 다니면 말을 곱게 해야지?”라고 말한다. 그럼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어버린 건 어떻게 봐야 하나? 자기가 예루살렘의 사도들로 부터 복음을 핍박하는 자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던 사도 바울을 교회에 보증한 바나바와 다투는 사도 바울은 어떻게 봐야 할까?
거듭남과 구원은 육신의 본능과 능력을 바꾸는 기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개성과 능력 육신의 본능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지 우리가 스스로 범죄하면서 개척하고 획득한 게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구원과 믿음을 행위 기반으로 생각하고 믿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게 행위의 변화를 말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육체적인 본능이나 각 사람이 가진 개성은 그 자체가 죄인 건 아니다. 그게 어떤 주권 아래에,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되느냐가 핵심이다. 하나님을 표현하라고 주셨는데 자기 의로움을 표현하고 자기 욕심을 위하여 사용하니 죄가 되는 것이다.
사울이 죽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과 동시에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게 아님에도 다윗을 통한 우리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하다. 누가 왕이냐는 건 누가 내 삶과 영혼을 주관하느냐의 문제다. 옛사람을 대표하는 사울이 죽었다는 건 나의 영혼과 자아와 삶을 주관하던 옛사람은 이제 없다는 걸 뜻한다. 그래서 극적으로 표현하면 ‘사울 죽고 난 후에’ 라는 표현은 ‘거듭난 후에’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다.
그리고 다윗이 하나씩 이스라엘을 접수해 가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도 하나씩 하나님의 의가 주관하는 사람이 된다. 여기서 이제 더 이상 옛사람이 나를 주관하는 주권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는 게 달라진 변화다. 이제는 모든 게 다윗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우리가 생각할 때 행동과 형편과 능력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구원을 받았다는 건 옛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점차 나를 주관해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억을 상기하기 위해 ‘옛사람’을 정의한다면 자기가 옳다는 대로 살고, 자기가 보기에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본성이 옛사람이다. 이건 한 마디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 그 자체다. 자기가 옳다는 걸 판단하고 그걸 기준으로 행한다는 건 자기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가졌다는 것이고, 선과 악을 판단한다는 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 지에 관해 자기 안에 정의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선악과를 먹은 상태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았다는 것, 옛사람이 더 이상 주관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선악의 기준이나, 내가 생각할 때 의롭고 좋은 것이 내 삶을 이끌지 않는다는 걸 뜻한다. 이건 행동이나 본능이나 개성의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내 본성과 개성과 육신의 삶을 내가 주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주관하는 상태가 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화를 내는 건 여전한데 이전에는 나의 유익과 내가 옳다는 대로 되지 않아서 화를 내었다면, 거듭난 후에는 하나님의 의가 훼손되는 것에 분노하게 되는 게 거듭남의 변화인 것이다.
구원받았다는 건 내 본능과 개성이 바뀌는 게 아니라 그걸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원받고 거듭난다는 건 육신의 본능이나 능력이 바뀌는 게 아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니까 구원받고 성령이 오시면 암 환자를 안수하여 치유하게 되는 게 아니라 이전에 가졌던 육신의 본능과 능력이 모두 주를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이 되는 걸 말한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 거듭남으로 일어나는 본성의 변화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육신이 가진 삶이 하나님의 의로 바뀐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려고 오신 것이다. 예수님을 본받는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거듭남은 우리를 다른 사람이나 슈퍼맨 혹은 과학적 기준으로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거듭난다는 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생을 주실 때 주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바뀌는 것이다.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분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정욕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정해진 자기 짝을 위하여 또 하나님을 표현할 자녀를 얻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게 대단한 영적 결단이라고 생각하는 건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배척하는 자기 독단일 뿐이다.
다윗은 점차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왕이 된다. 사울이라는 옛사람이 사라졌지만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일부의 왕으로 행세하지만 사울과는 다르다. 어떻게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이스보셋을 인하여 내전이 생기지만 이젠 다윗이 우위다. 우리가 거듭난 초기 어린 생명일 때는 내 안에 옛사람의 잔당이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생명의 본성 곧 내 삶의 주권이 바뀐 상황이 되면 사울에게 쫓기며 위협을 느끼던 것과는 다르다. 이제는 우리가 옛사람을 하나씩 이겨가는 세월을 시작했으므로 하나님의 의가 점점 내 삶을 주관해 간다. 그리고 이건 스스로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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