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다윗은 여러 범죄에도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다. 물론 벌은 계속 받았다. 그리고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지 않았다. 벌을 받는 것과 버림을 받는 건 차원이 다르다. 사무엘이 늦어서 제사 먼저 드렸다고, 또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겠다는 좋은 마음으로 양과 소를 살려 두었다는 이유로 후회하시며 사울을 버린 것과는 사뭇 달랐다. 여기서 궁금한 건 그 차이다. 우리에겐 그게 아주 중요하다.
여러 죄에도 다윗을 버리시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대응은 구원을 믿으면서도 자기 행위로 지은 죄로 인하여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그렇다고 막연한 면죄부는 아니다. 다윗에게 그랬듯이 벌이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기가 이걸 믿어야 한다. 이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오랜 걱정인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지은 죄로 인해 혹시 지옥에 가지는 않을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핵심은 이 믿음이 있는 지다.
솔직하다면 기독교인 대부분에게 이 확신이 없다는 걸 인정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생각과 관계없이 자기 혼자 확신에 찬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확신을 가지기 위해, 확신의 증거가 될 만한 신앙적 노력에 전념한다. 그들은 대게 그런 자신의 노력에 구원의 확신을 의지한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건 잠들면 죽는다는 의미다.
신앙인들은 분명 불안하다. 그 이유는 구원받고 하나님을 믿는 생활 속에서 늘 죄를 범한다는 걸 자기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벌을 받고, 심지어 천국에 가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다만 감추고 있을 뿐이다. 사실 더 놀라운 건 그런 불안을 해결하지 않으려는 것이긴 한데, 그건 그들의 몫이고, 이 글은 그런 불안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사실 그 불안을 해결하려 한다는 건 대단한 신앙의 용기다. 자기 추한 모습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받았다고 믿으면서 죄를 염려하는 우리는 많은 죄를 범하고서도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혈통과 조상이 된 다윗이 예사롭지 않다. 아니 예사롭지 않게 보여야 한다. 그저 하나님께 충성한 다윗이 세상에서 여러 고난을 겪으면서도 성공했다는 관점으로만 다윗을 조명하면 그건 행간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윗을 그렇게 조명하는 사람은 대게 성경의 행간을 보지 못한다. 집에서 새는 쪽박은 들에 가서도 새기 때문이다.
먼저 번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다윗이 여러 범죄에도 하나님께서 사울과 달리 버리시지 않은 건 그 존재 정체성의 차이 때문이다. 즉 다윗의 정체성은 하나님께서 목적한 사람의 모습이지 버리시는 정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윗의 삶은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졌다는 예수님 말씀의 표상인 셈이다. 그 증거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 칭함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하셨는데 그 조상은 그 말씀과 달리 버림을 받는 모순이 있을 수는 없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그렇다면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는 다윗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소망을 두어야 하는 모습이다. 답은 다윗의 삶과 행동에 있다.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면서 왜 다윗이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은 정체성의 근거를 행동에서 찾느냐고 의심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행동에 대해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행동이 같아도 본질은 전혀 다를 수 있다. 바리새인도, 오늘날 기복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듯이 기도한다. 그 모양새는 더 경건하다. 행동이나 모양이 같다고 본질까지 같은 건 아니다.
행동은 크게 두 가지다. 행동을 통해 본질을 바꾸려는 목적을 가진 행동이 있고, 본성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행동이 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는 율법을 지키는 행동은 행동으로 의로워지려는 행동이다. 이 행동의 특징은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라는 단서가 항상 붙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서처럼 예외 없이 하지 않는 상황, 성경이 말한 대로 일만번을 지켜왔더라도 10,001번째에 지키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노력하고, 필연적인 실패를 하나님 앞에 달고 와서 매번 회개한다. 교회는 이런 반복에 기생하고 있고, 성도들은 이 반복을 인하여 구원의 확신을 잃어가고 있고 그 상실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반면에 생명이 살아 있어 그 생명이 가진 본성으로 인해 피할 수 없는 행동이 있다. 야고보 사도가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한 행동이 바로 이 행동이다. 이 본성으로 인한 행동은 뚜렷한 특징이 있다. 바로 한결 같다는 것이다. ‘항상’. ‘쉬지 말고’와 같은 빈도부사를 충족시키는 행동이 바로 생명의 본성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다시 말해 일만 번 아니라 영원히 같은 행동을 자아낸다. 때로 모양새가 달라도 여전하다. 생명이 본성에 따라 한결 같지 않다면 동성애자가 그렇듯 그건 병이다.
다윗은 한결 같았고, 그 한결 같은 삶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목숨처럼 여겼다. 골리앗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하는 소리에 겨우 물맷돌 5개로 대적했다. 골리앗의 모욕은 그냥 조롱이나 욕이 아니다. ‘세상의 위대함 앞에 하나님은 뭐 하는 존재냐?’라며 하나님을 모욕한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은 세상 가치관으로 위대함을 논하는 분이 아니라는 게 다윗의 본성이고 믿음이었다. 이는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좋은 소와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하나님의 뜻을 어긴 사울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뿐 아니다. 두 번이나 사울을 살려준 일도 그렇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사람이 헤칠 수 없다는 그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사울이 평생 다윗을 괴롭혔으니 사울을 죽였다고 하면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거짓으로 사울을 죽였다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헤쳤다는 이유로 죽여 버린 다윗이다. 또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궁에서 먹게 했다.
다윗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존재의 신 여호와로 믿었다. 그건 다윗의 본성이었다. 그 본성의 혈통은 그리스도의 혈통이다.
다윗이 이렇게 한결 같을 수 있었던 건 그의 행동과 삶이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알고 믿는 믿음이 본성이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본성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본성이었기에 하나님은 다윗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윗의 삶을 이끈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기를 바라신다. 그 생명이 바로 우리가 거듭났을 때 얻게 되는 생명, ‘그리스도’다. 그래서 다윗이 예수님의 조상이다. 같은 본성을 가진 혈통이란 뜻이다.
본성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한결 같을 수 없다. 구원을 새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고, 구원 얻지 못한 삶을 사망 가운데 있다고 하시는 것도 결이 같다. 노력이나 신념으로 자아낸 행동과 본성에 이끌린 행동은 보기에는 같아도 근원이 다르다. 노력이나 신념으로 하는 행동은 억지로 하는 것이고, 본성에 이끌린 행동은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하는 행동이다.
신념에서 비롯된 행동과 본능에서 비롯된 행동은 같아 보여도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설사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이 노력하면서 애쓰고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지키는 것인 이유도 알 수 있다. 요즘 목사들은 노력으로 공부해서 의무감과 사명감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전하는 게 진정한 복음인지도 검증이 필요하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어 전했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잔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리스도의 본성 때문에 지실 수밖에 없었기에 지셨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믿음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의 차이이자 율법과 복음의 차이며, 사울과 다윗의 차이다. 율법은 만가지를 지키다가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어떤 것도 안 지킨 것과 같다. 사울을 그래서 사울은 버림받았다. 우리가 보기에 다윗의 존재 정체성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 수가 있지만, 역설적으로 여러 범죄에도 하나님께서 버리시지 않았다는 것에서 그 정체성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의 표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이고 조상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다윗을 묵상하는 건 우리가 육신으로는 때로 죄를 범할 수도 있지만 그건 예수님의 말씀처럼 손과 발을 씻는 일인 믿음의 확신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행위로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로 인하여 혹시 지옥에 가는 게 아닐까 염려하면서 자아 밖에 있는 신학적, 교리적 해석을 의지하여 안심하려는 사람에게 다윗은 어두운 터널의 끝에 보이는 밝은 빛이 비취는 출구와 같기에 우리는 다윗을 묵상하고, 다윗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구원의 관점에서 다윗을 조명하면,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조명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아들 이전에는 종이었다. 아들과 종이 함께 나쁜 짓을 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주인인 아버지가 그걸 보게 되었다. 종은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께 혼나겠구나 생각할 것이다. 이게 바로 정체성의 차이다. 다윗은 아들처럼 혼은 나겠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는다. 버릴 수도 없다. 사울은 그 신앙 정체성이 행위와 외모를 중요시하는 종의 신앙이었기에 버림받았다.
여기서 잠깐 사울의 신앙을 더 살펴보자. 사울의 신앙이 왜 종의 신앙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대표적 2가지 사건을 보면 사울의 신앙이 종과 율법의 신앙임을 알 수 있다. 먼저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사무엘이 늦게 오니 자기가 제사를 드린 일이다. 제사를 제 시간에 드리는 형식을 준수해야 전쟁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추어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하나의 사건은 종과 율법적 신앙의 결정체적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사람과 짐승을 다 죽이라고 했는데 사울은 그 중에서 좋은 것은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살려 두었다가 그 유명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책망과 함께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이건 오늘날 교회와 신앙인들도 범하는 죄인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를 전혀 원하지 않는데 좋은 자재와 비싼 시설로 교회를 지으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사울의 모습이다.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좋다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율법적인 신앙이 사울의 유전이고, 신앙이 율법적이란 건 그 사람이 아들이 아니라 종이라는 의미다.
사울의 신앙은 전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았고, 그 눈에 보이는 세상 기준의 가치가 곧 하나님의 기준이라고 믿었다. 오늘날 신앙인들도 이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말은 속사람을 본다고 하면서도 정작 비싸고 좋은 것으로 된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긴다. 교회를 건축하거나 리모델링할 때 보면 속내를 감출 수 없다. 개인 신앙도 다르지 않다. 기왕이면 세상에서 좋은 삶을 살면서 복음을 전해야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좋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우리는 죄를 이야기할 때 극단적으로 행동에 주목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행위나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는 지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너는 누구며, 나를 누구라 하는 존재냐?”로 사람을 심판하시는 존재의 신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뜻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존재의 신임을 드러낸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죄는 모두 행위의 죄다. 이게 구분이 되지 않으면 구원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에서 벗어난 존재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의 모습인 그리스도로 정체성을 회복하는 구원을 베푸시는데 사람이 그 구원의 여부와 확신을 행위에 두고 있으면 당연히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또한 많은 범죄와 허물에도 다윗을 버리시지 않은 이유, 별 게 아닌 것 같은데 사울을 버리신 이유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지 않고, 구원이란 존재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면 거듭났다는 건 거짓말이다. 거듭난다는 건 존재가 바뀌는 일이지 행동이 바뀌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면 본성을 벗어난 죄를 범하지도 않는다. 생명에서 비롯된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낮아지고 섬기고 겸손하고 사랑하는 본성이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거듭났으니 이제 막 살자’라는 본성이 아니다. 다윗의 삶도 그렇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다윗을 보고, 우리의 행동이 주는 죄책감을 어떻게 볼 것인지 명확해졌다. 많은 죄와 허물에도 다윗을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모른다면 계속 행위가 주는 죄책감으로 인해 천국에 못 가는 건 아닐까 염려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물론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는 믿음과 구원이 존재의 전환이라는 것을 모르면서 구원을 받았다며 태연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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