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46

하나님의 부르심(사명, Calling)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5. 8. 18. 20:45 Writer : 김홍덕

기독교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는 사역으로 인지한다. 선교사, 목사, 교사, 찬양 인도자 등 남다른 달란트와 소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대게 자기 일을 하나님의 사명이라 여기며 충성한다. 물론 이건 귀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냥 성도인 우리는 어떤 부르심이 있을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약 곧 약속과 함께한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면 바닷가 모래보다 많은 자손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모세를 부르실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무엇보다 <영생>을 약속하셨다. (19:29)

 

하나님의 부르심은 곧 약속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사람을 향한 약속이다. 따라서 선교사나 순교자의 사명도 이 약속 위에 특별한 소명이 더해진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되어야 한다. 땅이 되어야 한다는 건 사람이 곧 땅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 사명은 바로 하나님이 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사명이 기초다. 따라서 어떤 사명도 이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는 무용지물인 셈이다.

 

사명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과 순종이다.

 

정리하면, 사명은 언약과 함께 한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은 하나님이 정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보여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와 제자로서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선교나 목회나 찬양 인도자와 같은 사명은 그 위에 있다. 사람을 부르신 사명에 순종하지 않은 체 선교 같은 사명을 논할 수 없다.

 

모든 사명과 사역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대로의 사람이 되는 것 위에 세워진다.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먼 타국에 선교하러 가는 사람도 있고, 가까이는 목회자가 되는 걸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일들은 분명 숭고한 일이지만 그 모든 사명은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에 순종하는 순종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이 땅에 보내신 뜻에 순종하지도 않는데, 먼 나라에 가서 선교한다는 건 모래성을 쌓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그건 사람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시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 각 사람은 모두 사명이 있다. 선교사나 목회자가 아니어도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이 있다.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 순종의 여정이 어떤 이에게는 선교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에게는 목회가 된다. 하지만 사람으로 인생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명을 외면해서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짓말  (2) 2025.08.26
하나님의 음성  (1) 2025.08.20
벌레만도 못한 나를 위해 …  (0) 2025.07.23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지 않는다.  (0) 2025.07.07
신앙을 바꿀 용기, 그것이 믿음  (6) 2025.06.15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사무엘 상) 16. 제사에 합당한 사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무엘상 Date : 2025. 8. 18. 12:41 Writer : 김홍덕

(삼상 13장)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은 사울은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을 공격하는 바람에 블레셋과의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수비대가 공격받자 반격하는 블레셋의 기세에 2,000명이던 사울의 군대는 600명만 남고 다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이 벌어진다. 바로 사무엘이 도착하기 전에 사울이 번제를 드린 일이다. 사무엘은 7일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먼저 제사를 드린 일이다.

 

이 일로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의 날이 길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새로운 왕을 구하실 것"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책망한다. 다행히도 전쟁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믿음과 용기로 이기게 된다. 요나단이 자기 칼을 든 병사와 둘이 블레셋 군사 20명을 죽이니 블레셋은 공포를 느끼고, 하나님께서는 지진을 일으키시니 두려워하는 블레셋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여 패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중요한 건 전쟁의 승패보다 사울이 성급함으로 번제를 드린 일로 하나님께서 그를 떠난 것이다. 이 일은 제사장 신분도 아닌 사울이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는 표면적 사실이 교훈의 본질이 아니다. 다윗도 법궤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제사를 직접 드렸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사장이라는 <신분>이 제사의 자격이라는 식의 문제가 아니다.

 

사울이 버림받은 건 제사장이 아닌데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제사에 합당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상태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

 

핵심은 신분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상태다. 사울은 전쟁이 불리해지자 초조해졌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제사라는 형식을 믿었다. 제사를 드리고 전쟁해야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상태였다. 이는 제사장 엘리의 때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으면 전쟁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언약궤마저 빼앗기는 큰 실패와 같은 구조, 같은 상태다.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게 목적인 사람이 아니라 전쟁에 이기는 게 목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사울의 모습을 두고 오늘날 신앙인들은 "제사장도 아닌데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을 진노케 했다"라고 하거나,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에게 순종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라고 쉽게 말하지만, 이 사건은 예배를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는 제물이 되는 제사가 아니라 육신의 일이 자기가 기대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걸 목적으로 예배드리고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 성공을 보상으로 바라는 사람의 마음을 보여준다.

 

사울의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이 되는 게 아니라 자기 목적을 위해 예배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모습

 

대표적으로 <개업 예배>가 여기 속한다. 아무리 포장해도 개업 예배의 목적은 사업 성공이지 예배 자체가 아니다. 사업이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거나 사업에 성공해서 교회와 선교사업에 힘을 보탠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기도 하지만 헌금이나 선교헌금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처럼 드리는 거지 하나님께서 사업을 성공하게 해 주시면 내겠다는 건 하나님을 기만하는 일일 뿐 예배가 아니다. (사실 이런 건 미신적 신앙이다)

 

성급하게 제사를 드린 유명한 사울의 일은 제사,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누구냐에 관한 교훈이다. 제사로 드리는 제물인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목적에 합당한 사람으로 드려지느냐가 제사와 예배의 핵심이다. 우리 각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이 목적을 두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아야 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려지는 것이다.

 

순전하게 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내 삶을 드린다면 신분이 제사장이나 목사가 아니어도 온전하다. 매 주일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예배도 중요하나 내가 온전한 제물이 되었다면 제사의 시각이 특정되지 않아도 괜찮다. 오히려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 된 사람은 삶의 모든 순간이 제사요 예배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삼상 12)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제비를 뽑고 기름을 부어 사울을 왕으로 삼았지만, 백성들은 정작 암몬이 쳐들어왔음에도 사울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울과 함께 대승을 거두자 비로소 사울을 왕으로 인정했다. 이에 사무엘은 모든 백성 앞에서 사울과 왕에 관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전한다. 이때는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성경에서는 밀을 베는 때)인데 우레와 비를 내려 왕을 원하지 않는 하나님의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불편한 마음을 나타내실 정도로 왕이 반갑지 않았는데 왜 왕을 허락하셨을까?

 

우리는 여기서 흔히들 말하는 자유의지라는 걸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주셨다는 말인데, 결국은 우리 인생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사무엘 상을 시작할 때 이야기한 우리는 우리 인생과 자기 세계의 왕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과 삶에 관하여 마치 왕처럼 스스로 결정할 뿐 아니라 자기 가치관에 대한 침범에 적국에 대항하듯이 대항하고 저항한다. 전형적인 왕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자유의지를 주신 건 피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고 하나님께 순종만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진노하실 일도 없고, 사람이 심판을 걱정할 일도 없다. 하지만 그런 존재를 굳이 창조할 이유는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것 역시 우리가 선택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자기 인생을 왕처럼 주관할 수 있도록 맡기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맡은 자', '청지기', ''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인생을 왕처럼 주관할 수 있도록 맡기신 건 사람이 자기 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사무엘과 사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게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인생을 주관하도록 하신 것과 이스라엘에 왕을 허락하신 건 결이 같다. 왕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보다 좋을 수 없다. 목숨도 취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왕이 전심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사무엘이 이스라엘과 변론하면서 전한 말씀도 이것이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삼상 12:20)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셨을 뿐인 인생이 자기 것인 양 살아간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의 근본이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자기 것으로 삼는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들이 마치 나라가 자기 것인 양 하나님의 뜻은 구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한 것처럼 우리도 자기 인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더 심각한 건 그런 사람의 뜻이 열방, 곧 세상과 이방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처음에 '열방과 같은 왕'을 구한 게 이를 투사한다.

 

하나님께서는 후에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걸 후회한다고 하신다.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고 하신 다른 사건이 있는데 바로 노아 홍수 이전에 사람의 타락을 보시고 사람을 만드신 걸 후회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이런 말씀은 사람에게, 또 왕에게 하나님께 순종하여 번성할 권한을 주었는데 그걸로 자기가 주인이 되고 열방과 이방의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내키지 않는 듯하지만, 왕을 허락하신 이유와 마음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왕과 같은 인생의 주권으로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며 순종하기를 바라심이다. 이게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바요, 계획하신 시나리오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왕을 주신 마음처럼 각 사람의 인생과 세계를 하나님께 드리고, 순종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 하나님께 순종하니까.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삼상 12:22)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