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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3-25:27)

바울이 심문받는 동안 유대 지방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뀐다. 이에 베스도는 부임 후 바울 사도의 사건을 해결하려고 한다. 마침 베스도 총독을 찾아온 아그립바 왕 버니게라는 사람과 천부장 등이 모여서 바울 사도를 심판하는 재판을 열었지만, 결론은 죄를 찾지 못했다.

 

이 재판에서 바울 사도는 매우 당당하게 불의를 행하지도, 죽을 만한 죄를 짓지도 않았다고 자신을 변호한다. 사도 바울의 일이라 당연하게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참 놀라운 자세다. 신앙생활의 범주 안에서 성경을 보면서 보면 이게 특별해 보이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 그것도 세상의 권력자 앞에서, 더욱이 자기 행위를 문제 삼은 송사의 재판에서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반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죄 없다고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기독교인들은 사도 바울처럼 '나는 죄 없다'라고 할 수 있을까?

 

종교인들에게 종교의 영역 안에서 죄 사함을 이야기하는 건 어렵지 않은지 교회에서 죄 없다고 말하는 건 어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럼 너는 교통 신호 위반도 한 번도 없었나?"라는 반문을 마주한다면 이야기는 아주 달라진다. 어쩌면 교회 안에는 '우리 서로 그런 시비는 걸지 말자'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어서 아무렇지 않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모른 체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사하신다고 하셨으니, 죄가 없을 것 같은데, 또 막상 '나는 죄 없다'라고 말하려고 하면 자기 행위와 기억이 검사로 돌변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눈도 경계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목사나 장로가 교인들에게 시비 걸리는 이유는 전부 행위 때문이다. '목사가 혹은 장로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는 말로 시비와 지탄이 시작된다.

 

기독교인들은 행위로 지은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끼리는 '나는 죄 없다'라고 말하는 건 양심 불량인 사람처럼 보인다는 걸 서로 안다. 이런 인지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아주 강력한 감시 체제가 된다. 동병상련이라고 서로서로 같은 마음이라는 것도 서로의 입을 다물게 한다. 너나 나나 행위 규범을 모두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행동을 기준으로 죄를 심판하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는다. 정말로 성경을 믿는다면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씀을 믿어야 한다. 말은 믿는다고 하면서 행위를 회개하는 건 모순이다. 행위를 회개한다는 건 행위가 의롭지 않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건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믿음의 동전 뒷면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외모는 행동이고,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중심은 내용 곧 존재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정한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만 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과 다른 죄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

 

사람이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다른 죄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탓이다. 하나님은 존재 정체성을 보시는데 사람은 행위와 외모를 본다. 이 차이는 사람에게 아주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출발이 죄 사함인데, 사해야 할 죄를 하나님과 다르게 생각한다면 내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이 아닌 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근본 목적인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이 사하시는 죄와 내가 사함을 받고자 하는 죄가 다른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님과 관점이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관점이 같을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육신, 곧 삶의 본성과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 그대로의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창조 목적이자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우리는 이 법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계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을 죄인으로 살 이유가 없다. 이건 단순한 논리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온전하면 세상에서 내가 의인이라는 걸 굳이 믿으려고 신학 같은 초등학문을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고 어떤 관계인지만 명확하면 사는 동안 항상 의롭다는 걸 알고 살아간다. 아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바울 사도는 그런 사람이었고, 사람이 그래야 한다는 걸 전한 사도다. 그러니 그가 세상 어디에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사도들의 순교로 전수한 이 복음을 믿는 우리는 어때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나는 불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는데 그가 전한 복음을 믿는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죄 없다고 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바른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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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0 – 복음을 귀하게 여기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26. 07:35 Writer : 김홍덕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소동과 송사 이후에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힘으로 총독에게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로마 황제 앞에서까지 바울 사도의 여정은 험난했다. 다행히 로마 시민권 덕에 자유와 보호를 받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은 대단했고, 결국은 순교 당했다.(순교 기록은 성경에는 없고, 전승된 기록에 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과 달리 바울 사도는 율법과 성전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의 핍박과 살해 협박을 받았다. 복음과 율법의 갈등이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야할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이슈였다. 그런 순교와 위협을 당하면서 전해온 복음을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가치를 바로 알고 있을까?

 

바울 사도를 심문한 총독과 왕의 태도는 율법과 복음의 갈등이란 게 신앙 없는 이들에겐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이건 목숨이 걸린 문제다. 물론 현재는 한국이나 미국 같은 민주화된 국가에서 이 일로 육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지는 않지만, 영적인 생명이 죽고 사느냐는 문제인 걸 비유한다.

 

율법과 복음의 갈등은 영적 생명의 문제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느냐 지옥이라는 끔찍한 곳에 가느냐를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믿는다. 영혼의 실존과 사후 세계의 영원함을 믿는다는 게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을 믿어 천국에 간다는 믿음은 이생 기간과 비교할 수 없는 영생을 결정하는 절대적 요소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귀하고 중요한 믿음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에게 복음과 율법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 낮아…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라는 기독교인들의 찬양과 달리 대부분의 기독교인에게 신앙은 옵션이다. 취미 하나에 빠지기만 해도 모든 게 취미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사람의 삶이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소위 말하는 어떤 분야의 덕후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하다고 느끼기는 힘들다.

 

이는 죄에 관하여, 성령에 관하여. 행위와 율법에 관하여 명백한 모순에도 태연하게 기존 신앙의 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공부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구원이란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전제 아래 있는 것인데 구원받았다면서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자기 모습이 이상하지 않고, 노력한다는 건 분명 이르지 못한 사람의 모습임에도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인 걸 발견하지 못하다.

 

이런 일들은 정말로 하나님을 바로 알고자 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지려고 한다면 절대 방치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이상하게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방 안의 코끼리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이런 상태가 문제가 되는 건 착각에 빠진 상태라는 것이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도 아닌데 자기는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자기 구원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막상 심판대 앞에서 모든 게 헛것이라고 밝혀졌을 때 어떤 대책도 없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인생 자체가 문제인 셈이다.

 

온전한 신앙이 없다면 돌이킬 수 없는 문제에 빠져 있는 것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율법사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답하셨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대충한다. 아니 분명한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자신이 이상해야 하고, 끊임없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데도 계속 실패하는 자신에 대한 대책을 염려해야 하며, 성령과 죄와 구원에 관해 모순된 논리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함에도 그저 다들 대충하니 자신도 대충한다. 습관처럼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졸고 오는 그 하나로 구원도 영생도 얻은 것으로 여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

 

우리가 믿는 복음은 많은 수고와 목숨으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거저 주시는 은혜라고 값어치가 없는 게 아니다. 귀한 걸 거저 주니 은혜지 값어치 없는 걸 주는 걸 은혜라고 하지 않는다. 결국 복음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건 정말로 귀하고 귀한 신앙이다.

 

그러므로 그에 합당한 자세가 필요하다. 신앙에 있는 의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알고자 해야 한다. 알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알기를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그런 간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신다. 그리고 많은 신앙의 의문에 관해 설명하고 전하는 말씀을 만나면 깊이 묵상해야 한다. 나에게 까지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앞선 사람들의 큰 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리스도의 본능에 이끌려 한 수고 끝에 도달한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사도들이 목숨을 바쳤고,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한 간절함으로 구하고 답을 얻어 전해온 사람들이 있어 오늘 나에게 이 말씀이 도달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말씀은 우연히 나에게 온 게 아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귀하게 여기고, 의문을 안은 채 그저 세월을 보낼 게 아니다. 죄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부인할 수 없는 내 본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런저런 신학적 견해와 해석이 필요한 단계에 아직 머물러 있다면 뜻과 목숨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을 구해야 한다. 그렇게 구하면 반드시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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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1-24:23)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다하지 못했던 하나님께서 인도한 여정에 대한 간증을 유대인들의 송사를 받은 자리인 로마 총독 앞에서 다시 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바울 사도가 성전을 더럽히는 이단이라고 송사하고 바울 사도는 자신은 하나님 앞에 양심에 거리낌 없기를 힘쓴다는 걸 호소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공소 제기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자신이 율법을 어겼다는 걸 확증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걸 언급했다. 제대로 본 게 아니라는 뜻이다.

 

바울 사도의 변론 요지는 자기는 유대인들의 송사와 달리 자신은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할례에 대한 바울 사도의 태도는 율법을 어긴 게 분명하다고 확증하고 있는데, 바울 사도가 이방인에게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전하고 다닌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율법을 어긴 것인가? 오늘날 신앙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만 왜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하는 건 다른 일이다. 자기 안에도 바울 사도와 같은 이유와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보기는 힘은 면이 많다.

 

바울 사도는 총독과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는 율법과 선지자의 기록을 다 믿고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기를 힘쓴다고 했다. 이는 유대인들의 송사에 반하는 내용이지만 행위로만 보면 그렇지 않다고 할만한 행적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사도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이 율법을 다 지키고 있다고 말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율법 아닌 복음을 믿는다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바울 사도가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하는 근거를 신앙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 유대인들은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런 그들보다 더 열심이었던 사람이다. 바울 사도는 그 과정을 거쳐 복음에 이른 사람이다. 물론 이건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 인정할 수 있는 것이지 당시 유대인들이 쉽게 인정할 수 있는 관점은 아니다. 그들에게 바울 사도는 어쨌든 변절자다.

 

유대인들은 아직 광야에, 사도 바울은 약속의 땅에 이른 상태

 

유대인과 사도 바울의 이런 차이를 출애굽 과정으로 비교해 본다면 유대인들은 광야에 있는 상태고 사도 바울은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의 약속에 이른 상태다. 유대인들로서는 바울 사도의 지경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상태라는 건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이 비유는 타당하다. 이는 오늘날 신앙인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들 스스로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 말하지만 이르지 못해 노력하고 있는 상태인 건 다르지 않다. 어떻게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건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사람은 간혹 자기가 모르거나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해 경솔하게 대하기도 한다. 청년들이 자기들은 아직 살아보지 못한 노인의 삶을 가볍게 다루듯이. 또 자주 강조하듯이 곤경에 처하는 건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다 안다는 확신 위에서 사도 바울과 복음을 핍박하고 있다. 정작 자기들은 다 지키지 못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주제에.

 

우리는 여기서 사도행전 5장에서 사도들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하나님의 일이면 흥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절로 소멸될 것이라며 만류한 바울의 스승으로 알려진 가말리엘의 태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 정도는 있어야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의 복음 핍박은 신앙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이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비판이라는 어리석은 행태임이 분명하다. 나에게 생소하고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바로 잡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만 대했어도 되는 일인데,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눈에 보이는 세계의 실패에 두려워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복음을 핍박하고 있다.

 

이렇게 복음을 핍박한 유대인들처럼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날 신앙인들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사하신다고 하셨음에도 애굽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면 된다고 하는데 막상 두려워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것처럼, 행위로 범한 죄를 떨칠 수 없어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분명 이르지 못한 세계다.

 

구약이냐, 신약이냐, 유대인의 율법이냐, 복음이냐가 본질이 아니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행위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노력한다는 자체로 아직 복음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성경을 행위로 노력해서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이르지 못한 세계다. 현대 신앙 대다수는 복음을 핍박한 유대인들처럼 아직 복음에 이르지 못한 지경에 머물고 있다. 행동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게 아직 이르지 못한 증거다. 구약이냐, 신약이냐, 유대인의 율법이냐, 복음이냐가 본질이 아니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행위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노력한다는 자체로 아직 복음에 이르지 못한 것이고, 노력하고 있다는 자체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건 상식의 영역이다.

 

육신의 삶이 실패하는 걸 두려워 행위로 성경을 지킨 공로로 축복을 받는 거래를 시도하는 자신도 함께 발견해야 한다. 이런 발견들이 아직 자신이 광야에 머물러 있다는 걸 깨닫게 한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으로 이룬 공로로 두려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는 신앙에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 죄(상태)를 시인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걸 시인하는 그것으로 모든 게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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