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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14일 토요일 오후 서울역에서 만나요!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25. 6. 5. 14:26 Writer : 김홍덕

 

2025년 6월 14일 토요일 만남의 자리를 서울역 옆 카페에 마련했습니다.

장소가 예약된 것은 아니라서, 그냥 오셔서 저를 찾아서 만나야 합니다.

 

저를 아시는 분도 오실지 모르지만, 만약 오신다면 처음인 분이 대부분일 것이라

생소한 분들과의 만남이라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은 원래 그런 것이라 생각하시고

복음에 관해, 믿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들 나누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시각은 오후 1시입니다.

 

인사 나누고, 평소 궁금했던 이야기들과

시간이 주어지면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하심에 관해

<하나님의 인기척>이란 제하의 말씀도

함께 나누면 어떨까 계획 중입니다.

 

모임에 참석하시려면 아마도 용기가 약간 필요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번 시간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그럼 6월 14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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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회색 성경) 이단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6. 5. 08:03 Writer : 김홍덕

신앙인들은 특별히 예수를 열심히 믿지 않아도 이단이라고 하면 심히 경계한다. 이단은 일반적으로 삶을 변형시킨다. 몰입하게 되고,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관계와 요소들을 하찮게 여기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이단은 표면적으로 삶의 평안을 깨기 일쑤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피해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확신이 낭패를 가져오는 어이없는 결과를 신봉하게 된다.

 

이단에 대한 정의는 과히 어렵지는 않다. 일반적으로는 사도신경의 일부 혹은 전부를 부인하면 이단이라고 한다. 여기에 더해 종교와 무관하게 사회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찍히는 경우는 한 개인이 우상화되거나 보편적인 사회의 가치관을 벗어난 공동체 생활이나 규칙 등을 강요하는 경우다. 예를 들면 과도한 헌금이나 모든 재산을 헌금하는 것과 같은. 하지만 포괄적, 아니 상식적으로 이단을 정의한다면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는 것, 하나님의 뜻을 가감하여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가감하여 믿는 모든 건 이단이다.

 

성경은 의외로 분명하고 선명하게 이단을 정의한다. 사도 중 가장 오래 살면서 복음의 순도를 지키기 위해 애쓴 사도 요한은 당시 많은 문제를 일으킨 이단인 영지주의를 경계하는 말씀 속에서 적그리스도, 즉 이단을 구분하는 명료한 기준을 말씀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걸 부인하면 그것이 바로 적그리스도. 곧 이단이라고 정리했다. 이 적그리스도는 사탄과 같은 집합이라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2 1: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걸 부인하거나 가감하는 모든 생각과 믿음은 이단이다. 특히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책이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곧 구원받아 하나님 아들이 된 사람의 모습이다. 즉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할 하나님 아들의 모습,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의 모습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심을 부인하는 게 이단의 본질이다.

 

정통 교단이라는 교회들과 심지어 사회적으로도 이단에 관한 기준으로 제시하고는 있지만, 성경의 기준을 넘어설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게 뭔지만 알면 된다. 예수께서 육신을 오신 걸 부인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려면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걸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육신을 가진 우리와 같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건, 하나님의 뜻은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있다는 의미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가 육신으로 나타내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에서 몸소 보이셨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뜻을 전하기려 하셨기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 계획은 사람에겐 구원의 법이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의 사용법을 보여 주신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보여 주신 모습이 구원받은 사람이자 하나님 아들인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심을 부인하거나 가감하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단에 관해서는 여러 측면으로 정의하고 판단하며 경계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 그래서 육신을 가진 나는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서 구원을 얻어야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뜻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의 어느 하나라도 부인하면 그게 바로 이단이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심을 부인하고 의심한다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반적인 신앙을 살펴보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걸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믿고 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늘 지적하는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모습은 과연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걸 그대로 믿는 신앙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오늘 나 자신이 그런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이단의 생각이라는 걸 반추해야 한다. 그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구원은 없기 때문이다.

 

이단은 분명 인생과 영혼을 망친다. 하나님을 잘못 알고 믿는다는 건 그렇다. 더 큰 위험은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온전하고 정통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신앙에 관한 도전을 받지 않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문둥병에 비유한다. 자기 영혼과 믿음이 병들었다는 데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나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게 이단의 근원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단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병으로 치면 증상이 완전히 드러난 것과 같다. 하지만 신앙인 대부분은 이단 잠복기 상태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걸 바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확신 안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그런 상태가 아니라면 이단 잠복기에 있는 것이다. 빠른 조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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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이 굳게 서면 자신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살 것이라고 위로할 정도로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관계가 깊었다. 이와 같은 마음은 전서 3장 후반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했다. 이번에는 신앙이 자란다는 것과 어떤 사람의 신앙이 자라는지를 이야기해 본다.

 

우리가 모두 인지하고 있듯이 신앙은 더 풍성하고 장성해야 한다. 우리는 풍성 특히 장성한다는 건 생명에 적용하는 말과 표현이라는 걸 주목해야 한다. 즉 신앙이 풍성해지고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란다는 건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며,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장성함보다 거듭이 선행되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장성함에 관해 데살로니가 성도들뿐 아니라 여러 성경을 통해 신앙이 자라야 한다는 걸 권면했고, 자기 자신도 푯대를 잡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부르심의 상을 좇아간다고 말씀했다. (3:14) 특히 바울 사도와 같은 사람이 아직 잡은 걸로 생각하지 않고 더 장성하기를 소망한다는 건 신앙인에게 큰 도전을 주는 말씀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신앙의 장성함은 생명에게만 있는 것이므로 장성함을 소망하려면 먼저 생명으로 나야 한다. 즉 하나님이 살았다는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마도 신앙인 대부분은 자기를 거듭난 생명이라고 여기고 있을 텐데, 과연 정말 그런지는 따지고 봐야 한다. 특히 구원이 신앙의 종착지나 목표인지 아니면 출발로 여기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장성함은 무궁한 미래를 담보하고 있으므로 구원이 시작인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는 세계기 때문이다.

 

장성함은 구원이 신앙의 시작인 사람에게만 열린 세계

 

구원이 목적이냐 시작이냐는 생소한 개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신앙 가치관 전반을 지배할 수 있는 개념이다. 대표적으로 천국에 관한 생각으로, 대부분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걸 신앙의 목적으로 삼는다. 물론 사는 동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신앙인으로서 선을 행하는 일을 장려한다. 하지만 그런 선한 일들도 천국에서 금면류관 같은 상급을 받겠다는 내심이 깔려 있다. 즉 장성한 열매는 천국에서 상급으로 받을 속셈이다.

 

반면에 구원이 신앙의 시작인 사람은 세계관 자체가 다르다. 구원을 받았다는 건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산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임하였다고 하셨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살아서 볼 자가 있다고까지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라면, 육신으로 살 동안 하나님의 의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천국에 속한 삶을 살게 된다.

 

구원은 신앙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에 간다는 건 이 땅에서 고생한 삶의 반전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던 삶의 연장이다. 이런 가치관 안에 장성함은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의 향연이자 장성함과 풍성이다. 그리스도의 풍성함에, 충만에 충만과 같은 모든 표현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간다. 시간이 주어질수록 사람이 나이 먹어 현명해지듯이 영적인 장성함을 더해간다. 이런 삶은 구원을 통해 생명을 얻어야만 가능하다. 생명이 아닌데 장성함이란 있을 수 없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을 아주 칭찬했다. 그들은 지역 성도들의 모범이 됨은 물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그러했다고 칭찬했다. 이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자기가 전한 복음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은 온전히 믿었다는 건 온전히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거듭난 성도들이기에 그 생명의 풍성함을 기원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했다는 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온전히 거듭난 생명들임을 아는 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관점은 나는 어떠한가를 반추해 보는 것이다. 나는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아닌지, 구원을 신앙의 시작으로 보는 온전한 관점이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데살로니가 전서 4장 이후와 같은 삶에 대한 권면은 또다시 노력으로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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