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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7장)

사람은 인생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이 자기 삶을 어렵고 힘들게 만든다고 생각하며,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모욕과 수치를 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심지어 그 수치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세상과 사회에서는 그런 자존감과 의지가 때로는 동정을 받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어이없는 일이다. 정작 모욕을 당하는 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창조한 사람이 자기 의를 이루지 못한 것을 모욕과 부끄러움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비유하자면 회사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자기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고 화내고 짜증내며 실패로 여기는 직원과 같다. 회사 입장에서는 정말로 어이없는 상황인 셈이다. 그런데 이 비유와 같은 일은 실제 세상과 기업에 많이 있기도 하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창조한 목적, 인생을 주신 뜻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걸 실패로 여기며 부끄러워한다. 세상의 기준으로 거대한 골리앗의 주눅든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놀랍게도 신앙인들은 성공과 실패, 영광과 수치를 나누는 세상의 기준으로 실패와 수치를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 두려움은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생긴다. 그래도 육신의 삶이 어느 수준은 되어야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긴다. 더 나아가 삶이 세상적인 기준에 미달하는 건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 게 있어 받게 되는 징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바로 골리앗 앞에 주눅든 모습이다.

 

골리앗은 말한다. 나와 겨루자고. 세상에서 성공해야 너희 하나님이 있다는 걸 믿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말한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싸우자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이 말을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으로 분명히 듣고 분개했다. 세상에서 성공한 게 아니라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는 가치관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분개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무기가 아니라 고작 지팡이 하나와 물매에 쓸 강바닥에서 모난 것이 다 깎인 돌 다섯 개를 들고 맞섰다.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삼상 17:40)

 

사울은 다윗에게 세상적인 무기와 방패를 주려 했다. 사울은 세상의 기준으로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사람이다. 따지고 보면 블레셋은 그의 그런 믿음과 가치관으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왕인 자신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심으로 쳐들어왔는데, 여기에 또 세상적의 무기와 방패를 다윗에게 주려 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상황 자체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분개한 사람이었기에 사울의 갑옷과 칼이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사람은 세상적인 방법은 언제나 어색하고 자기 몸에 맞지 않다는 걸 스스로 안다. 성경은 이것을 양심이라고 한다. 이 양심이 화인 맞으면, 곧 이 양심을 상실하면 하나님도 구원하시지 않는다고 하시는 건, 자기 가치관이 세상과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사람에게 세상의 무기는 어색하다.

 

다윗이 들고 간 무기는 지팡이와 양을 지킬 때 쓰던 물매와 돌 다섯개다. 목자의 지팡이는 양이 가야 할 바른 길을 인도하는 이정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목자가 인도하는 바른 길을 의미한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외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가야 할 바른 길,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하나님의 정체성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삶으로 세상을 이기는 존재다. 반면에 골리앗은 세상이 정한 성공과 위대함의 기준 그 자체다.

 

다윗은 물매에 쓰려고 시냇가에서 구한 돌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돌은 법이다. 돌로 사람을 쳐 죽이기도 했는데 그건 법으로 심판한다는 의미다. 사람은 자기가 왕인 자기 인생을 다스리는 법이 있는데 돌에 새긴 것처럼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다. 자기 옳음이 있고, 자기가 옳다는 걸 주장하는데 그건 돌의 모난 부분과 같다. 모난 부분은 돌을 고유하게 만드는데 이는 자아를 분명히 해 독보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는 사람의 마음과 같다.

 

반대로 매끄러운 돌은 곧 말씀 안에서 자기 모난 것, 자기가 옳다는 것과 선명한 자기 정체성이 모두 갈리고 매끄럽게 된 사람이다. 모난 돌처럼 나의 자아가 선명한 게 아니라 그런 자아가 서로 부딪히며 갈려서 매끄럽게 된 사람이다. 즉 하나님의 경영이 함께한 사람이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화평할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대변한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경륜에 순종할 수 있게 된 사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침 그 수도 안식의 희년을 상징하는 다섯이다.

 

골리앗을 이기는 다윗의 이야기는 교훈적 동화에 머물지 않는다. 골리앗과 같은 세상의 위협을 어떻게 이길 것인지를 우리에게 말씀한다. 사람들은 세상의 위협과 시련과 어려움을 이는 이, 눈은 눈으로 갚듯이 더 큰 능력과 세상의 권세와 성공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어서 이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게 아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자기 마음 밭에 있던 옳음과 주장이 다 갈아 엎어져 하나님의 이름 곧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과 뜻을 표현함으로 세상을 이긴다. 이것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을 이긴 이김이다. 다윗은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예수님의 말씀에서 제자들에게 일러 주신 건 바로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말씀이다. 여러 번 언급한 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능력으로 세상의 능력을 이기기를 바라지만, 정작 세상을 이긴 이김은 십자가다. 낮아지고 섬기고 겸손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이긴다.

 

자기 주장이라는 모난 것 다 갈리고 낮아진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고자 사람의 육신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이름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겨야 한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승리는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사건이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과 세상이 주는 시련을 이길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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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7장)

왕에게서 하나님이 떠난 이스라엘에 블레셋이 쳐들어온다. 이때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익히 들어온 골리앗이 등장한다. 사무엘 상 17장에는 골리앗의 키와 갑옷 무게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계량형으로 환산하면 골리앗의 키는 2.8미터, 갑옷의 무게는 57킬로그램, 창날의 무게는 6.8킬로그램 가량이다. 오늘날 골리앗이 있었다면 충분히 기네스북에 오를 체구였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은 오늘날 어린이 주일학교의 재밌는 이야기를 넘어 하나의 사회적 개념이 되었다. 스포츠나 각종 비즈니스에서 항상 인용되는 이야기다. 물론 그 외에도 사회화된 성경의 이야기들은 많다. 그러나 그런 형태가 우리 신앙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드라마나 동화를 보듯이 대하지 말고 언제나 나의 이야기로 받아야 한다. 그러니까 블레셋의 골리앗은 내 삶의 위협과 시련이며, 다윗은 그걸 이기는 믿음이다.

 

골리앗은 우리가 마주하는 인생의 시련

 

블레셋과 골리앗이 우리 인생의 시련이라면 그들의 침공은 우리가 어떤 이유로 삶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각사람은 자기 인생이라는 자기 세계를 다스리는 왕인데, 그 왕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시련을 겪게 된다는 걸 투사하고 있다. 간략하게 말해서 내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면 블레셋으로 대변되는 인생의 시련을 겪는다는 걸 말씀이다.

 

우리는 누구나 삶의 무게를 힘겨워 한다. 골리앗은 인생에서 마주하는 어려움의 크기와 무게를 말한다. 골리앗이라는 이름의 뜻은 분명하진 않지만 대체로 노출된 자’, ‘거대한 자라는 의미와 상통한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인생의 여러 시련들의 무게를 충분히 설명한다고 말하기에 충분한 이름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이 시사하는 대로 늘 큰 어려움을 마주하면서 산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어려움의 원인이 왕, 곧 내 인생을 다스리는 나의 가치관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울이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이 떠나셨다는 말씀에 바로 이어 블레셋이 쳐들어왔다는 게 이를 설명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여러가지 시련을 겪는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아니 그걸 알아야 한다. 세상과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뜻(목적)을 가지고 경영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뜻과 다른 의로 나의 세계를 다스리려고 한다면 저항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사람은 어떤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의 크기보다 큰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00만원의 빚이 있다면 110만원의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듯이 내게 힘겨운 인생의 문제는 같은 성경의 큰 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마주한 문제와 같은 성격의 더 큰 능력을 하나님께 구한다. 아프면 그걸 치료하는 더 큰 능력을, 경제적 어려움을 그걸 해결하는 기적적인 능력을 바란다. 렉스 탈리오니스(lex talionis)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다윗은 골리앗을 힘이나 창이나 칼로 이긴 게 아니다. 다윗은 기본적으로 이 싸움을 보는 관점이 달랐다. 골리앗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존재로 봤다. 군사력으로 싸우는 싸움으로 보지 않았다. 돈 문제는 더 많은 돈으로, 육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은 기적으로 대응하려는 우리의 일반과 다른 모습이다. 그런 다윗의 일을 말씀하신다는 건 우리가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심이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우리가 인생에서 시련과 문제와 어려움을 겪는 근원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의와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골리앗보다 덩치가 작아서 침공을 받은 게 아니라 왕인 사울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시니 이방의 큰 힘이 괴롭히는 것이다. 근원적인 원인을 해결해야 문제가 해소된다. 우리 인생이 저항을 받는 건 세상과 인생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법과 다른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다. 답은 여기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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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6:14-23)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 후 사울은 악한 신()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은 다윗이 사울 가까이, 왕궁에 거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악한 영에 시달리는 사울이 선택한 대책은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통해 음악을 듣는 것이었고, 수금을 잘 타던 다윗이 그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런데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건 악신(악령)을 하나님께서 부리신다는 말씀이다. 일반적 신앙 논리로 조명하면 대적, 즉 적군을 부린다는 말이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귀나 악한 영을 부리신 일이라고 하면 욥을 시험하는 마귀의 일을 떠 올리지만, 굳이 그걸 구분한다면 욥의 일은 하나님이 마귀를 부리셨다기 보다 그냥 자유롭게 두고 관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하므로 사울의 일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비슷한 사례가 몇몇 있는데,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70아들을 죽였을 때 악한 신을 보내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도록 하신 일, 아합 왕의 선지자들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냈다는 등의 사례가 있다.

 

문장으로 보면 이견 없이 하나님께서 악한 영도 다스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종말까지 사탄은 하나님과 대적한다는 기독교 신앙의 근간에 상충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천지의 주관자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마귀든 사탄이든 수천년간 대치관계에 있다는 발상 역시 상식적이지 않다. 그러려면 사탄이나 악령이 하나님과 한 링에 오를 체급이라는 걸 인정하는 게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걸 인정한다면 유일한 전지전능자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은 탄핵된다.

 

사람들은 그냥 앞에 있는 주제에 매몰되곤 하는데, 하나님과 사탄의 관계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세상의 종말에 하나님께서 사탄의 모든 권세를 물리치신다는 확정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신앙은 세상의 종말까지 하나님은 사탄이란 대적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여지를 생성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굳이 예수님 재림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언제나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절대자다.

 

뿐만 아니라 사탄은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하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더 성장하도록 경영하신다. 즉 사탄이 지랄을 해도 하나님께 그건 수단적 상황이 될 뿐 하나님께 대적이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정체성에 관한 이런 지극히 상식도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곤란하다. 그러니까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 중 하나다. 마치 독사의 독을 약으로 활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오히려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유일한 존재는 사람이다.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할 수 있다. 이건 사람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셨기에 순종할 수 있는 선택을 사람에게 맡기셨는데 사람이 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게 불순종이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적하는 게 사탄의 본질이라면 진정한 사탄이 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사람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유일한 존재는 사람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악령과 악신이 든 사람이다. 사울은 바로 이런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굳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악한 영을 보냈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지 않고 자기가 정한 대로 하나님을 믿고, 자기가 보기에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그것이 바로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일이라는 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2)

 

특히 우리가 악령이라고 좋지 않은 이름을 붙이는 건 사람을 괴롭히기 때문인데, 이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떨칠 수 없는 인생의 괴로움, 그것이다. 존재가 자기 목적을 벗어나면 그 자체로 괴롭다. 간첩은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불안하고 괴로우며, 미운 오리새끼는 오리들이 굳이 뭐라하지 않아도 비참하며, 망치가 두부나 야채를 자르는 자리에 있으면 금방 버려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자 나에게 인생을 주신 뜻을 벗어나서 사는 인생은 그 자체로 괴로움이다. 악한 영이 들어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사례에서 귀신 들린 사람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귀신 들렸다는 건 정신을 상실한, 즉 목적을 상실한 사람이며 자기 뜻이 육신 곧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다는 건 하나님의 뜻인 존재 목적을 상실한 사람에게 정신 곧 하나님의 뜻을 회복시키심을 보이시는 일이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이런 불순종, 곧 악한 영의 행사를 하나님의 경륜으로 이용하신다. 악령이 든 사울, 그러니까 불순종하는 사울의 괴로움을 이용해 다윗을 등용하고, 다윗이 궁궐로 들어가는 계기로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불순종한다고 물러서지 않으신다. 사람의 불순종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된다. 타산지석이 되는 것은 물론 불순종하는 사람을 인하여 순종하는 사람이 다윗처럼 거룩하게 구분되고 영광을 얻는다.

 

하나님은 사상 종말의 때까지 밀려서 기회를 엿보시는 분이 아니다. 사탄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대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한 존재며, 오히려 진정한 하나님의 대적은 하나님의 뜻을 자기 뜻으로 불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그는 인생이 괴롭다. 그리고 그런 괴로움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은혜가 된다. 불순종하는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게 하고, 세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룩함의 영광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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