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희생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자신이 죄 없다는 것을 담대히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스스로 가지겠다 신념을 가진다고 생각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구원의 담대함에 이르는 것은 오직 하늘의 참 것이 모형인 자기 삶에 하나가 되어 내용과 형식이 하나된 사람,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념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다. 하늘의 변화에 땅이 순종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우리 마음에 뿌림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것이 몸을 씻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몸을 씻었다는 것은 행위가 거룩해졌다는 것이다. 행위를 보니 스스로를 죄 없다 말하지 못하는 신앙이 구원이 없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성소의 휘장이 갈라져서 누구나 지성소 곧 죄사함 없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계획이며 뜻이다. 그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예수님께서 육신을 깨어 그것을 드러내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의 행위에 발목 잡혀 구원은 받았지만 죄는 있다는 말도 안되는 것은 신앙이다, 경건이다 말하고 있다.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가 마음에 뿌림을 받는다면 자신이 육신의 행위를 본질로 보는 존재여서 육신을 보고 자신과 사람을 정죄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깨어 하나님 아들임을 보이셨는데 사람들은 육신의 의로움과 평안을 보존하는 것이 죄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입으로야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알지 못하는 “주여, 주여”라는 외침에 불과하다.


예수님을 믿는 도리는 행함을 본질로 보지 않는 것이다. 행함은 속에 있는 것의 표현이다. 하늘의 참 된 것이 땅의 모형으로 나타난 것과 같은 이치다. 예수님은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 옥합과 같이 깨셨는데 사람들은 왜 자꾸 육신의 경건과 행함의 의로움과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 육신의 부귀영화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는지 알 수 없다. 믿음의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즉 인생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두신 뜻을 보이셨다. 그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지으신 뜻에 순종하고 그 말씀이 나의 육신이 됨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고 믿음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을 붙잡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까지 보이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서 정작 자신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보고 죄를 판단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전하는데 사람은 한결같이 모형과 형식을 본질로 섬긴다.


이런 사람들은 모일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에 대한 기준이 각기 다르므로 모여서 무엇을 도모할 수 없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흩어진 것이 이것이다.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 복선으로 깔려 있으므로 자기 육신이 곤고해지는 의로움에 서로 동참할 수 없다. 그래서 말이 다르다. 같은 ‘민주’라는 말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아래서 다른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말은 서로 공감하는 듯 합격자가 하나 밖에 없는 시험에 서로의 자녀가 응시했다면 복이라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일 수 없다. 말이 달라서가 아니라 말이 주는 의미와 자기 이익이 다르다. 바벨탑을 쌓을 때 말이 달라진 것도 이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이라고 했다. 모일 수 없는 마음이니 그것이 습관이다.


이 습관이 없는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본성을 알기에 당연히 사랑과 권면으로 대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짧은 말로 표현하면 “네가 옳다”이다. 그런 사람들은 얼마든지 모일 수 있다. 모이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이고, 상대가 내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모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이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신 이유다. 몸이 모이라는 것이 아니라, 모일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신이 죄가 없다는 것을 온전하고 담대하게 믿을 수 있으면 쉽게 모이게 된다. 이것이 모이는 것을 폐하는지 모이게 하는지를 결정하는 습관이고 본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