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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서는 바울 사도는 성도의 삶에 관하여 권면한다. 1절에서 12절까지 간음하지 말고 성실히 일하라 권면한다. 이러한 말씀은 앞서 많은 칭찬을 한 믿음에 관하여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살전 3:10) 간음하지 말고 거룩하며 성실함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모범이 되기를 권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을 바울 사도가 칭찬했다는 건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의 핵심인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임이 분명하다.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그간 행동을 경건하게 하여 애쓰던 노력을 그치게 되기 일쑤다. 이건 경험해 봐야만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받는 고난과 환난은 소망을 지치게 하고 남다른 삶을 유지하는 의미를 흐릿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여러모로 복음의 수고와 예수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하기에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신앙인 대부분은 처음에 율법적인 신앙으로 시작한다. 이는 우리 신앙 여정을 보여주는 출애굽 여정에 광야를 거친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시간 속에서는 어떻게든 행위를 경건하게 하려한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경건을 위해 헌금으로 드릴 신권을 준비하고, 새로 산 옷은 가장 먼저 예배에 갈 때 입는 것과 같은 노력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느 날 복음을 바로 듣고 하나님은 그런 행위를 보고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그간의 노력이 무의미해지고, 괜한 짓 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광야를 거치지 않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듯이 신앙 여정에서 그 과정은 생략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복음은 방종이 아니므로 복음을 알고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고 갑자기 행위의 경건을 다 내팽개치면 사람들에게 복음은 좋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수밖에 없다.

 

바울 사도가 간음을 경계하라는 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고린도 교회처럼 간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간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세대 속에서 믿음을 잃지 말고 자신을 거룩하게 하라는 뜻이다. 또한 복음이 자유하지만 그 자유로움으로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열심히 또 성실히 일하기를 권면한다.

 

이는 복음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일에 관한 권면으로, 행위가 아니라 아들이란 존재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은 언뜻 세상에서 성실을 등한시해도 될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복음을 바로 만난 사람은 한 번쯤 경험하는 일이다. 삶의 목적을 회복한 성취감도 일면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은 구원이 종점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게 아주 중요하다. 죽어서 천국가는 게 믿음의 목표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기쁘고 즐거운 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삶을 살기 위한 시작이 구원이다. 이건 아주 중요하다. 성경이 명하시는 모든 삶에 관한 말씀은 구원, 곧 거듭난 생명으로서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이는 죄와 회개와도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한 번의 회개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고 말하면 구원파가 아니냐? 그럼 구원받았다면 막살아도 되느냐며 따진다. 그건 어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회를 상실할까 염려함인데, 그걸 염려한다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거듭남을 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걸 실토하는 것이다.

 

거듭난다는 건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의미다. 하나님 아들은 생명이고, 생명이라면 본성이 있어 그 본성대로 산다. 따라서 하나님 아들로 거듭났다면 하나님 아들의 본성으로 산다. 그 본성은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칭찬받는 본성이다. 이걸 모른다면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바울 사도의 권면은 이 맥락이다. 복음을 온전히 받아 다른 지역의 성도들에게 본이 되고 칭찬받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거듭난 생명으로서 그 생명다움을 지키고 따르라는 권면이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전한 복음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나,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따라 경건하고, 순결하며, 성실한 삶을 사는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는 복음의 당연한 본분으로, 생명으로 났으니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건 당연하다.

 

복음은 물과 성령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고, 삶의 목적을 회복하는 복된 소식이다. 이 소식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노력은 그치나 경건하고 순결하고 성실한 삶은 변하지 않고 더 장성한다. 노력으로 하는 게 아니라 본성에 따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기가 전한 복음이 이런 것임을 상기시키고 세상 사람이 보기에도 성실하고 순결한 삶을 권면한다. 복음 안에 있는 사람 안에는 그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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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결론은 거듭남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6. 24. 05:47 Writer : 김홍덕

회색 성경이라는 아주 생소한 단어로 제목을 정하고, 그래도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 도전을 받았던 주제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어왔다. 대충 정리하면 선악과와 천지창조에서 재림과 부활까지 다루었다. 굳이 말하자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이야기한 셈이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성경 전부를 깔끔하게 설명했다는 뜻은 아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 언급한 세 가지 말이 있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 <방 안의 코끼리>, <낭패를 당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은 우리가 성경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흐릿하게 믿고, 큰 문제인 줄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괜찮을 거라고 믿고 기대하는 신앙은 나중에 큰 낭패를 당할 것임을 경고하는 말들이다.

 

실제로는 더 많은 해결되지 않은 의문과 흐릿하고 경계가 없거나 경계가 허물어진 교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다 다룰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다룬 주제 모두를 관통하는 교리 혹은 개념 아니 신앙이 있다는 그건 바로 <거듭남>이다. 말씀대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여기서 다루지 않았고, 또 지금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시대에 따라 어떤 게 새로운 문제가 된다고 해도 생명으로 난 이상 더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야 성경을 온전하다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생명이 되기를 바라시는지를 분명하게 알면 성경은 참 단순하고 명료하다. 세부적으로 우리가 알기 힘든 성경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사람 창조의 목적,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의 설명과 표현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면 그 하나님의 모든 의도가 이루어진 사람이 된다. 이게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은 이게 거듭남이고 구원이며 복음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많은 의문과 불확실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건 분명 정상이 아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뜻은 단 하나고 그 하나는 복잡하지도 않으며 예수님께서는 그 짐이 쉽고 가볍다고 하셨으며 또한 인생의 길과 빛이며 생명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분명한 복음을 들고 신학이다 교리다 하며 어려워하는 건 섭리나 이치에 전혀 맞지 않다.

 

성경이 이렇게 복잡하고 의문투성이가 된 건 성경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어렵다거나, 하나님께서 뜻을 숨기시고 사람이 하기에 따라 조금씩 적선하듯이 알려 주시는 구조가 전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성경을 어려워한다.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이 성경과 하나가 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경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고 하니 별스러운 거 같지만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게 바로 이 말이다.

 

우리의 표상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건 우리 역시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게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이다. 이렇게 거듭난 새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수처럼 흘러넘치는 사람이다. 의문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성경대로 살지 못하는 자기를 인하여 고민하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거듭난 사람은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기 신앙에 모순적인 요소가 있다면, 예를 들어 거듭났다면서 끊임없이 회개한다거나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된다고 하신 성경을 학문으로 공부하고 있다면 거듭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렇지만 이걸 인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예수를 오래 믿었을수록 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오랜 시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안고 살았다는 걸 돌아봐야 할지 모른다. 아니 그게 정상이다.

 

우리는 거듭남을 교회에 출석하면 얻는 것으로 여기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거듭남은 교리문답 시간에 ""라고 대답한다고, 초신자 교육 때 머리로 이해했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렇게 거듭났다고 믿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행여 자기 구원이 없어질까 염려하기도 하고, 자기의 어떤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하는 일이 어려움을 겪지나 않을지 염려한다. 그러니까 확신이 부족하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생명이 바뀌었다면 염려하지 않는 것들이다. 자기 생명이 바뀌어 이전과 다른 본성으로 살아가는데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노력하고 공로를 쌓고 그런 노력의 실패로 인한 징계를 두려워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생명이 바뀌었다면 이전 것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자주 비유한 대로 늑대가 양으로 거듭나면 고기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건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이 명확한 상식적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 새 생명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고, 의문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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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부활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6. 23. 08:26 Writer : 김홍덕

부활은 정말로 다른 종교나 신앙에는 없는 아주 독특한 섭리다. 기독교라는 종교 전체로 보면 자부심을 자랑하기도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건 내가 부활할 수 있는지, 나에게 확고한 부활 신앙이 있는지일 것이다. 이런 흐릿함을 해결하기 위해 이 장에서는 부활은 필연적인 섭리라는 걸 이야기할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아주 특이하고 명료하게 말씀하시는데, 특히 부활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설명하듯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무덤에 가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어서 살리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활은 부활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기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4) (feat. 시 16:8-11)

 

성경의 이런 말씀은 부활이란 독립된 기적이나 섭리가 아니라 죽을 수 없는 생명을 대하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걸 알 수 있다. 생각해보면 구원을 얻는다는 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기도 한데, 어떤 이유로 사망에 머물게 둘 수는 없는 게 맞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천국에 가는 것도 같은 이치인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산 사람이어야 천국에 가는 이치를 말한다.

 

우리는 부활을 생각함에 있어 거듭남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거듭남은 하나님이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섭리고, 부활은 그 영원한 생명은 다른 존재나 이유로 죽음이나 사망 가운에 거할 수 없다는 걸 증명하는 섭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듭남과 부활을 연결하고 관통하는 하나의 열쇠가 있는데 바로 <생명>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거듭남과 부활은 모두 <생명>에게 일어나는 일로 거듭난다는 건 생명이 바뀌는 일이고,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육신의 호흡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자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생명이 있는 것이고, 그게 아니면 육신이 멀쩡해도 죽은 것이다. 거듭남과 부활은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주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는 데 바로 생명의 본성이다. 생명은 고유하고 거스를 수 없는 본성이 있다. 이 본성이 생명의 정체성을 정의한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DNA가 이를 설명할 수 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주는 고유한 본성이 있는 생명이다. 이 생명의 정체성이 바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준으로 보시는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곧 이 생명의 본성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 하나님의 뜻인 목적대로 사는 삶이다. 성경대로 사는 삶은 노력으로 성취되는 게 아니라 거듭난 생명으로 날 때 본성으로 타고 난다. 거듭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나는 것이다.

 

거듭남을 생명이 바뀌는 것으로 안다면 성경대로 산다는 건 생명의 본성대로 산다는 것도 알 것

 

그리고 오늘의 주제 '부활'은 거듭난 생명은 하나님께서 사망에 두시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적인 섭리다. 특별히 죽은 사람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으로 하나님의 우월성을 표현하시려는 게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아 있는 생명을 사망 가운데 두실 하등의 이유가 없으므로 배고프면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살리시니 그게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맥락 없는 기적이 아니다. 부활은 살아 있는 생명에 관한 자연스럽고 적절한 대처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생명은 사망 가운데 있을 수 없기에 일어난 일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생명이 되면 부활하기 싫다고 해도 부활하게 된다. 여긴 마음의 의심을 물리치려 힘쓰며 부활을 믿겠다는 신념이나 노력 같은 건 없다. 생명의 본성, 생명 정체성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 그게 부활이다.

 

부활은 거듭나는 순간 확정된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목적, 그 목적이 삶이 된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순간 영생을 얻고, 그렇게 하나님의 영생을 사는 존재는 사망 가운데 있을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고, 권능이자 섭리다. 그리고 우리에겐 은혜와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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