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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교회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6. 11. 12:49 Writer : 김홍덕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교회 중심적이다. 신앙의 시작과 전도를 '교회에 간다'라고 말하는 일반적 표현이 교회가 신앙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준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바울 사도의 말 역시 교회의 중요성을 한껏 강조한다. 그런데 기독교인 대부분은 교회에 크게 만족하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교회에 대한 만족과 신뢰가 부족하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교회에 만족하지 못하는 교인

신앙인들이 교회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선악과를 먹고 만족의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은 이유다. 하나님 나라인 교회에 대한 기준을 사람이 자기가 정하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다. 자기 맘대로 되지 않기에 만족이 없다. 세상이나 교회나 모두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기준을 가지고 있으니 만족스럽지 않고 불평한다.

 

교회에 불만을 가지는 건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교회를 심판하기 때문

 

그럼,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교회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가진 온전하고 제대로 된 교회인가? 아쉽지만 그건 또 아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설교하고, 성도들은 그걸 신앙하면서 모인 곳이 오늘날 교회인데, 각 사람이 바라는 성공과 평안의 기준도 다르고, 교회는 모든 이의 바람을 충족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온전하지 못한 건, 신앙의 지향점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필요로 알아보는 교회 정체성

우리는 교회의 정체성을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성도들이 모임으로 형성되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도들이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두고, 사도들은 그것들을 <필요>에 따라 했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필요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부족한 필요를 뜻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그런 것들은 공중 나는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 사항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교회나 성도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부족한 걸 채우는 것으로 생각한다. 교회는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부자가 되게 하신다고 설교하고, 사람들은 그걸 신앙하면서 모인다. 하지만 그렇게 모인 성도들 각자가 생각하는 평안과 성공의 기준은 모두 다르므로 늘 불만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행 4:28)

 

초대교회 필요는 육신의 필요가 아니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모일 때 온전한 교회다. 교회는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기를 위해 모인 공동체다. 교회의 필요는 오직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필요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겠다는 회칠을 하기 위해 교인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게 교회의 필요가 아니다. 오늘날 교회와 초대교회와의 근원적 정체성 차이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보다 세상에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어떤 처신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낮아지고 겸손하고 사랑하는 일도 그게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외친다. 교인들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평안과 성공을 얻기 위해 교회에 다닌다. 교회와 성도가 서로 상생하는 관계처럼 보이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걸 바라시는 게 아니다.

 

 

온전한 교회의 시작은

이렇게 올바르지 않은 상황은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부터 어긋난 결과다. 마치 천로역정에서 담을 넘어 들어온 순례자처럼 시작이 잘못됐다.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있다고 하셨는데, 예수님 말씀의 의도는 두세 사람이 모이면 나도 가겠다는 게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견해처럼 교회를 세워 사람이 모이면 내가 함께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막 18:20)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내 이름>이다. 그리고 이름은 정체성이다. '사과'라는 이름은 사과라는 과일의 정체성, 유전자, 생명을 말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만남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모여서 교회가 된다. 아울러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복음을 전하는 만남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만나는 만남이다. 이런 만남과 모임이 바로 예수님이 함께 하는 공동체다.

 

이런 만남은 앞서 설명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룬다는 초대교회의 정체성과도 일치한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은 오직 사람이 예수님이 보이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고,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낮아지고 겸손하며 섬기고 사랑하는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며,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보여 주신 우리의 정체성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생명 공동체다. 생명이 있는 사람이 모여 교회가 된다. 목사나 건물보다 그게 먼저다. 거듭난 생명이 만나면 그곳이 어디든 거기가 교회다. 빌립 집사를 태운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장이 탄 마차도 교회고, 바울 일행이 탈출한 줄 알고 목숨을 끊으려던 간수와 바울 사도가 만난 감옥도 교회며, 예수님을 만난 세리 삭개오의 집도 교회며, 베드로를 초청한 고넬료의 집도 교회다. 이들 중에 시험을 쳐서 사도가 된 사람이 없고, 세상의 평안을 구하려 사도를 만난 이도 없다. 무엇이 교회인지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예는 이렇게나 성경에 많이 있다.

 

온전한 교회는 오직 사람이 하나님 말씀이 생명이 되도록 하는 곳이다.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의 만남과 사람에게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걸 유일한 필요로 삼는 공동체가 교회다. 전자 오르간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성가대 가운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 목사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하신 뜻, 그것이 이루어지는 공동체 그곳이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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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전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6. 6. 23:50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당부한 말씀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육신으로 이 땅에서의 마지막 당부가 복음을 전하는 것, 곧 전도다. 굳이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전도라는 중요성을 부각하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시는 것인 만큼 복음을 전하는 건 거듭난 사람의 근본적인 의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이 의무지 사실은 본성이다.

 

우선 기독교인들에게 전도는 하나의 과업 혹은 달란트처럼 인식되고 있다. 거듭났다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본성이 아니라, 특별한 열심과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의 영역으로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다. 전도 성과에 따라 상을 주기도 하는데, 이게 전도를 특별한 달란트로 생각하는 증거다. 하지만 이건 이상하고 잘못된 현상이다.

 

모든 생명은 종족의 번식이 본성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건 본성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걸 재능 취급한다는 건 생명을 모르는 무식과 어두움이다. 생명이 있다면, 또 생명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럴 수 없다. 어떤 생명이 자기 종족의 번성을 상 주는 일이나 재능으로 여기겠는가? 오히려 어떻게든 주체가 되려고 하는 게 생명의 근원적 본성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하나님의 말씀이고 생명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전하는 건 근원적 본성이다. 사람이 성욕을 억제하는 게 힘들 듯,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이 복음을 말하고 외치는 건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다. 전도를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한 성과나 재능으로 여겨 수건이나 치약을 상으로 줄 일이 전혀 아니다.

 

거듭난 사람에게 전도는 본능이고, 욕망이다.

 

이 같은 생명의 법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제 올바른 전도의 개념을 이야기해 볼 것이다. 먼저 복음은 생명을 전하는 것이므로, 전도하려면 생명이 있어야 한다. 있지도 않은 생명을 전할 수는 없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도 여기 있다. 세상에는 빛도 생명도 없었다. 따라서 빛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 했다. 이것 외에 사람에게 생명의 하나님 말씀과 뜻을 전할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전도의 법은 하나뿐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통해 생명을 전해 주신 법 외에 다른 전도는 없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 역시 이 모델을 벗어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신 법 외에 다른 법으로 생명이 전해질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을 전할 방법은 없다. 예수 외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말씀은 이게 유일하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법이 전도의 본질적 모델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음을 강제하지 않으셨다. 그러시면서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다. 이건 모순처럼 보일 수 있지만, 가장 강한 강권은 마음이 동하게 하는 것이므로, 스스로 결정하고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본을 보이는 것보다 강한 강권은 없다. 사람이 보고 "저것이 나의 모습이고 하나님 아들이다"라고 깨닫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의 본을 좇아 사람이 감동하도록 삶을 보이는 것, 이게 전도의 본질이다.

 

삶의 모습이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거듭나게 하는 것, 이것이 전도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보여 주시려고 직접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자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 중에 낮아지고, 겸손하고, 섬기며, 사랑하는 성품을 표현하고자 하셨다. 예수님은 이를 표현하셨는데, 그 총화가 바로 십자가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내 말을 안 들으면 혼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처럼 협박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제자들에게 과히 책망하시지도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본이 되시는 법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표현해 주기를 원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육신으로 그대로 표현하셨다.

 

다윗의 후손이지만 왕궁에서 나지 않았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랐으며, 낮고 천한 자들과 먹고 마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아들이신데 사람들이 "너같이 낮고 천한 신분이 하나님 아들이라니? 그건 신성모독이야!"라는 심판에 자기 육신을 내어주시는 낮아짐을 보이셨다. 이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리심인데,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셨다.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자기의 존재 목적을 발견하도록 본을 보이신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 15)

 

예수님께서는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영생을 얻도록 인자가 놋뱀처럼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모세 당시에 놋은 거울이다. 뱀 모양의 놋을 사람이 본다는 건 자기를 비추어 보니 뱀같이 악하다는 걸 보게 된다는 뜻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 사람이 자기 죄를 깨닫게 되고, 마음을 돌이키게 되는 법을 말씀하심이다.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며 십자가에 못 박은 건 죄라는 걸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전조의 진정한 본질이자 교본이다. 십자가의 도를 벗어난 전도는 없다. 즉 전하는 육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의 도는 전해지지 않는다. 자기 육신을 내어주는 사람이란 낮아지고 겸손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다. 신념이 아니라 거듭난 본성이 그런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도 이 이유 때문이다. 육신을 내어주는, 그러니까 육신으로 수고하고, 낮아지는 본을 보이는 사람 없이 전해지는 복음은 없다. 빌립 집사에게 에디오피아 내시장이 한 말만 들어도 이를 알 수 있다.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행 8:31)

 

복음은 하나님이 살았다는 사람,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이 육신이 된 사람이 있어야 전해진다. 낮아지고, 겸손하며, 섬기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본성이 된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네가 옳다"라며 육신으로 수고하고, 섬기는 본을 보일 때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진다. 이게 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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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14일 토요일 오후 서울역에서 만나요!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25. 6. 5. 14:26 Writer : 김홍덕

 

2025년 6월 14일 토요일 만남의 자리를 서울역 옆 카페에 마련했습니다.

장소가 예약된 것은 아니라서, 그냥 오셔서 저를 찾아서 만나야 합니다.

 

저를 아시는 분도 오실지 모르지만, 만약 오신다면 처음인 분이 대부분일 것이라

생소한 분들과의 만남이라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은 원래 그런 것이라 생각하시고

복음에 관해, 믿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들 나누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시각은 오후 1시입니다.

 

인사 나누고, 평소 궁금했던 이야기들과

시간이 주어지면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하심에 관해

<하나님의 인기척>이란 제하의 말씀도

함께 나누면 어떨까 계획 중입니다.

 

모임에 참석하시려면 아마도 용기가 약간 필요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번 시간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그럼 6월 14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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