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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2)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제비를 뽑고 기름을 부어 사울을 왕으로 삼았지만, 백성들은 정작 암몬이 쳐들어왔음에도 사울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울과 함께 대승을 거두자 비로소 사울을 왕으로 인정했다. 이에 사무엘은 모든 백성 앞에서 사울과 왕에 관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전한다. 이때는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성경에서는 밀을 베는 때)인데 우레와 비를 내려 왕을 원하지 않는 하나님의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불편한 마음을 나타내실 정도로 왕이 반갑지 않았는데 왜 왕을 허락하셨을까?

 

우리는 여기서 흔히들 말하는 자유의지라는 걸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주셨다는 말인데, 결국은 우리 인생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사무엘 상을 시작할 때 이야기한 우리는 우리 인생과 자기 세계의 왕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과 삶에 관하여 마치 왕처럼 스스로 결정할 뿐 아니라 자기 가치관에 대한 침범에 적국에 대항하듯이 대항하고 저항한다. 전형적인 왕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자유의지를 주신 건 피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고 하나님께 순종만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진노하실 일도 없고, 사람이 심판을 걱정할 일도 없다. 하지만 그런 존재를 굳이 창조할 이유는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것 역시 우리가 선택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자기 인생을 왕처럼 주관할 수 있도록 맡기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맡은 자', '청지기', ''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인생을 왕처럼 주관할 수 있도록 맡기신 건 사람이 자기 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사무엘과 사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게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인생을 주관하도록 하신 것과 이스라엘에 왕을 허락하신 건 결이 같다. 왕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보다 좋을 수 없다. 목숨도 취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왕이 전심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사무엘이 이스라엘과 변론하면서 전한 말씀도 이것이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삼상 12:20)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셨을 뿐인 인생이 자기 것인 양 살아간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의 근본이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자기 것으로 삼는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들이 마치 나라가 자기 것인 양 하나님의 뜻은 구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한 것처럼 우리도 자기 인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더 심각한 건 그런 사람의 뜻이 열방, 곧 세상과 이방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처음에 '열방과 같은 왕'을 구한 게 이를 투사한다.

 

하나님께서는 후에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걸 후회한다고 하신다.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고 하신 다른 사건이 있는데 바로 노아 홍수 이전에 사람의 타락을 보시고 사람을 만드신 걸 후회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이런 말씀은 사람에게, 또 왕에게 하나님께 순종하여 번성할 권한을 주었는데 그걸로 자기가 주인이 되고 열방과 이방의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내키지 않는 듯하지만, 왕을 허락하신 이유와 마음은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왕과 같은 인생의 주권으로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며 순종하기를 바라심이다. 이게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바요, 계획하신 시나리오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왕을 주신 마음처럼 각 사람의 인생과 세계를 하나님께 드리고, 순종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 하나님께 순종하니까.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삼상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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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1)

성경의 흐름으로 사무엘 상 10장에서 사무엘이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다. 그런데 11장에 보면 암몬이 쳐들어왔을 때 왕인 사울은 밭에서 소를 몰고 있었다. 기름 부음을 받긴 했지만 아직은 백성들이 사울이 왕이라는 데 크게 동의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10장 마지막에 보면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이방 민족인 암몬사람 나하스가 쳐들어온다. 나하스는 이름의 뜻이 '' 또는 '독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데,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복하겠다고 했을 때, "너희들 오른 눈을 다 뽑으면 항복을 받아 주겠다고"라고 할 정도로 악하고 독한 사람이었다.

 

이 소식은 사울에게 전해졌다.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고 백성이나 관료가 가서 보고한 게 아니라, 나하스의 협박과 모욕에 우는 백성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백성들은 "누가 우리를 구원할까?"라며 울었다. 자기들이 왕을 원해서 하나님께서 왕을 세웠는데, 왕에게 가서 자기 안녕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이 원하는 왕이 아니라 열방의 왕을 구했다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생각에 사울은 나하스를 세상 가치나 기준으로 이길 수 있는 왕이 아니었다.

 

백성의 울음을 들은 사울은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한 겨리의 소, 그러니까 소 두 마리를 잡아 각을 떠서 이스라엘 각 지경에 보내면서,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않으면 이 꼴로 만들겠다"라고 했고, 이에 백성들은 두려워 유다 족속이 삼만,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사울에게로 모였다. 그리고 전쟁은 사울과 함께한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난다. 성경은 암몬 사람이 두 명이 함께 도망가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의 군사력으로 사울이 암몬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들이 원해서 세운 왕에게 전쟁을 의지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언약궤를 빼앗길 때 자기들끼리 전쟁에 임했다 크게 패했었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결국 전쟁은 사울이 나서서 크게 이기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자기들이 원했던 왕도 의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함께 하시니 전쟁은 아주 쉬운 일이 되었고,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모든 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지, 아닌지로 결정된다는 걸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암몬 자손의 조상을 소환해 봄 직하다. 암몬은 소돔이 멸망할 때 피한 롯의 두 딸이 이제 자기들에게 아들을 낳게 해 줄 남자가 아버지밖에 없다며 아버지를 술 취하게 한 후 얻은 아들 중 둘째 딸의 아들 벤함미의 후손이다. 암몬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주관하려는 마음이다. 암몬이 쳐들어왔다는 건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앞서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고 주관하겠다는 생각이 생겼다는 뜻이다.

 

암몬의 침략은 하나님의 일을 내가 책임지고 하겠다는 우리 안에 생기는 교만한 마음을 대변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간혹 자기가 하나님보다 앞서서 하나님께 열정을 다하면 아주 독하고 무서워진다. 대표적인 게 전 재산을 헌금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이런 건 극단적인 모양이긴 한데, 사람이 하나님 섬기는 일에 자기가 앞장서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게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일반적이지 않은 일을 행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 일을 해야 한다면 공부를 등한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마음은 정말 단호하다. 오른눈을 다 뽑아야 화평하겠다는 나하스의 마음이 투사된 듯한 모습을 일상에서 보인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이 보실 땐 이방인의 마음이지만 신앙인들이 이걸 이기지 못한다. 또한 이스라엘이 암몬과 화친을 시도한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보다 앞서 행하는 일에 스스로 명분을 주고, 괜찮다고 타협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우리 안에 있는 이방인의 마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마음을 이기려면 사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과 시간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하고 살아가는 법을 깨달아야 한다. 사울이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암몬을 이겼다는 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앞서 행하실 때 이기게 된다는 교훈을 준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남다른 능력이나, 남에게 미치지 못하는 연약함과 무관하게 나를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암몬을 물리친 사울은 비로소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인정받게 된다. 의미가 있는 건 하나님의 영이 함께했을 때,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승리를 이루어냈을 때, 백성들이 사울을 왕으로 인정한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행하시도록 순종할 때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씀하심이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위하는 간절하고 투철한 마음으로 하나님보다 더 열심을 내어 섬기는 건, 일면 충성스럽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누구보다 하나님이 잘 아시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가장 잘하신다. 우리에게 남다른 능력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일하실 때를 대비한 것이다. 그건 하나님이 일하실 때 사용되어야 하는 거지 나의 열정으로 앞서 행할 일은 아니다. 그건 암몬으로 투사된 우리 마음의 교만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 14:13)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해결하겠다는 암몬 같은 마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이 아니다. 이건 물리쳐야 하고,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마음이다.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힘든 일은 <가만히 서서 주의 행하심을 보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은 하나님이 하셔야 일이 제대로 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자기 뜻을 위하여 창조하시고,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곳이다. 결국 하나님의 일이든 나의 일이든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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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는 않았으나 백성들의 요구를 듣고 왕을 세우셨는데, 우리가 잘 아는 사울이다. '사울'(히브리어: שָׁאוּל)이라는 이름의 뜻도 '구하다', '간구하여 얻은 자'. 말 그대로 백성들이 구해서 얻은 왕이 바로 사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울은 선한 왕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반면교사의 교훈을 많이 남긴 왕이다.

 

그는 우선 화려하게 왕으로 세워지고, 예언도 하고 암몬, 블레셋 등의 이방 민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사무엘이 도착하기 전에 성급하게 제사를 드리고, 모두 죽이라고 한 양과 소를 취하여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큰 질책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울을 세울 때 하나님은 하나부터 열까지 관여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셨다. 자기 손으로 세운 왕을 버리신 것이다.

 

사울 왕은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주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왜 이 사람이 그런 교훈을 주는지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분명한 교훈을 주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기름 부은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사무엘 상 9장부터 나오는 사울이 왕이 되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정말 세밀한 부분까지 관여하셨는데, 그런 사울의 타락에 대해 경고나 용서나 미리 알려 주시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다윗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신 일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 하시니라 (삼상 9:17)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과 많은 사건은 분명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선한 교훈을 주는 일과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 조화롭게 섞여 있다. 우리가 사울이나 솔로몬 같은 인물에게 의구심을 가지는 건 그 사람 전체의 인생에 나 혹은 어떤 사람의 인생을 대입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사울이나 솔로몬을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선택받고서 타락하는 일을 투사하는 것으로만 보기 때문이란 뜻이다.

 

그러나 아담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모든 인물과 사건은 오늘 우리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기까지 겪게 되는 자기 내면과 영혼의 조각들이다. 각 사람의 인생 전체에 속한 일이다. 그러니까 사울의 일생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기까지 여정 속 내 안에 있는 한 모습이고, 반면교사로 삼을 하나의 일이며,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위해서 비워내어야 할 우리 자아 중 하나의 모습인 셈이다.

 

성경의 인물과 사건은 내 인생과 자아 속이 있는 작은 부분 부분들이다.

 

사울이 왕이 되었다는 건 성경의 기본적인 기조와 온도가 다른데, 이건 우리 안에 사울의 월등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낮은 자를 부르고 선택하여 높이시는 분인데, 이미 남들보다 어깨가 하나 더 있을 정도로 남다른 조건을 갖춘 사울을 부르심은 우리 안에 남보다 잘한다 싶은 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에 관한 교훈이다. 물론 사울이 주는 교훈이 이뿐만은 아니겠지만, 왕으로서 사울의 모습은 자기 세계의 왕으로 살아가는 우리 안에 그런 마음, 일면 교만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을 다스리는 교훈이고 거울이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과정을 이야기할 때 더 자세히 나누겠지만, 사울은 하나님보다 앞서 하나님을 섬기려 했다. 말년에 악령에 시달릴 때 무당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하기는 하지만 타락한 왕들처럼 하나님 아닌 이방신을 섬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좋게 해석하면 사울은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을 위했다고 미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은 은근히 우리 신앙인들 안에도 있다. 살아가면서 알게 된 남들보다 잘하는 일에 의를 가지게 된다. 찬양을 잘하는 사람들은 찬양이 하나님 섬기는 일에 최고봉인 양 행동한다. 물론 말은 그와 다르게 하지만, 태도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알 수 있게 행동한다. 물론 찬양하는 사람만 그런 건 아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교사대로, 주차나 주방 봉사하는 사람은 또 그 일로. 다른 것 볼 거 없이 교회 예산 배정할 때 보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사울 왕은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을 위할 것 같은 나의 경쟁력에 대한 거울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기가 잘하는 일로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보다 더 열심일 때가 많다. 이런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걸 사울 왕의 일생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 안엔 이런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이런 마음을 비워내야 한다. 우리 인생의 한 마디에 사울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걸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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