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어느 교회 할 거 없이 거의 모든 교회가 주일 예배 이후 오후 예배 사이에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마치 점심을 제공하지 않으면 다른 교회에 교인들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며 경쟁하는 듯한 모양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누군가는 식당에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해야 하고, 만국 공통 해법처럼 교회의 기관별로 돌아가며 순번제로 주방 봉사를 하고 있다. 아예 교회 수첩 등 조직에 버젓이 주방 봉사 조직이 구성된 경우도 허다하다.
이렇게 되자 주방봉사자의 예배 참석이 또 문제가 되었다.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교회 주방에 스피커를 설치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건 유아들을 돌보는 엄마들을 위한 모자실과는 전혀 다르다. 일반적인 말로 비디오가 제공되지 않는다. 대규모 인원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많은 시간과 노동이 필요한 일일뿐 아니라 다소간 위험 요소도 있는 일이므로 집중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예배 참석이나 대안은 완전 무쓸모의 삽질에 불과하다. 교회에 왔지만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예배 참석은 거의 구원의 유지 조건이다. 기독교인들은 무심코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을 구원의 증거로 말한다. 교회 출석은 예배 참석이라는 등식 또한 공통의 교리다. 그런데 주방 봉사는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에 온 게 아니다. 그냥 일하러 온 것일 뿐이다. 그걸 봉사라고 치장한다고 예배 참석이나 봉사가 되지 않는다. 그건 공산주의 국가 농장에서 일하는 걸 인민을 위한 것이라고 치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주방 봉사는 주일 성수가 아니라 착취 당하는 노동일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주방 봉사가 주일 성수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더 근원적으로 ‘교회가 꼭 점심을 줘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자. 자기가 나름 보수적이고, 복음을 잘 지킨다는 교단들 대부분은 예전에 주일날 돈 쓰는 것도 터부시했었다. 그래서 “주일날 짜장면 먹어도 되느냐?”는 마치 “교인이 술 마셔도 되느냐?”와 동급의 질문인 때도 있었다. 이런 교리는 성경에 나오는 안식일에 땀 흘리지 말라는 율법을 답습한 것이다. 신약도 아니고 구약의 율법을 지킨다고 주일날 재정 지출도 하지 않던 교회들이 이젠 아예 교회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노동을 하고 있는데 그걸 또 봉사라고 회칠을 한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자기 모순은 모두 주일날 점심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 다시 주일날 점심을 줘야 할까? 답은 사실 간단하다 ‘주면 좋지!’다. 주면 좋다는 건 점심을 제공하는 것이 다른 피해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좋다는 의미다. 하지만 지금의 방법은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아예 주방 봉사를 예배시간에 광고로 알리고, 교회 수첩에 그 조직을 명시하는 정도는 특정 성도의 주일 성수를 망치는 도를 아주 많이 넘은 불량한 짓거리지 봉사가 아니다.
80년대 초만 해도 점심을 주는 교회는 거의 없었다. 그때는 주일날 2번째 예배는 거의 저녁 예배였다.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하루 종일 교회에서 성가대, 교사 등으로 봉사하는 사람은 있었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힘들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쉬는 일요일에 교회 와서 직장보다 더 빡센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점심을 해결하는 게 과제가 되었고, 아무래도 교회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그들의 의견들이 모여 저녁 예배가 오후 예배가 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이 변화를 아주 반대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교회는 어느덧 주일 저녁예배는 없어지고 모든 교회가 오후예배를 드리는 지경이 되었고, 그러자 점심은 교회 유지의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결국 각 교회는 점심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제도화되었고, 교회를 새로 건축이라도 할 때는 아예 시설을 마련했다. 재 건축이 아니어도 개조는 다 했다. 그렇게 이제는 모든 교회가 주일날 점심을 제공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는 뻔뻔하게 그걸 봉사라고 치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밥을 굶는 사회가 아니다. 물론 절대적 빈곤층이 없지는 않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의 도움이 필요하고, 교회는 그런 일을 하기에 마땅한 공동체다. 만약 그들을 위해서 식사를 제공한다면 좋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일날 점심은 그런 이유가 아니다. 어떻게든 편하게 주일 성수를 하겠다는 잔꾀의 산물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중요한 제도로서 도입된 게 아니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주일날 “오늘 주방 봉사는 X여전도회입니다”라는 광고 아래 우리는 주일 성수를 막은 노동 착취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 문제는 제도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마 주일날 점심을 제공하지 않거나 배달 음식을 시키지 않는다면 방법이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그만해야 한다. 그냥 이때까지 주일날 돈 쓰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일을 봉사라고 해 왔으니 주일날 짜장면 사 먹으면 안 된다는 교리는 스스로 발로 차 버린 지 오래되었으니 점심 이후에 교회에 볼 일이 있는 사람은 교회 주변 식당을 이용하는 게 지역 사회에 기여하기도 하니 더 나은 방법임이 분명하다. 그러다 보면 주변 식당 사장들 중 누가 교회에 오는 일도 있지 않겠는가?
교회는 사람이 구원을 받고 믿음이 자라도록 자기를 희생하는 공동체다. 이걸 부인한다면 그건 교회가 아니라 사이비 집단일 뿐이다. 그런데 주방 봉사는 사람들의 예배 참석을 근원적으로 봉쇄하는 나쁜 짓이다. 더 나쁜 건 그걸 봉사라고 포장한 일이다. 교회가 성도의 주일 성수를 방해하고 신앙 성장을 차단하고 있는 아주 흉악한 짓이다. 하루라도 빨리 멈추는 것이 여러 가지로 교회에 유익하다. 주일날 주방 봉사는 예수 편리하게 믿으려는 잔꾀를 충족하는 것 외에 어떤 유익도 없고 백해 무익한 짓거리다. 무엇보다 봉사가 아니라 노동 착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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