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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3)

사무엘을 만나신 여호와 하나님의 첫 말씀은 엘리 제사장의 집안과 두 아들에게 하신 저주의 말씀이었다.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 존재의 신 여호와로 하나님을 만나서 하신 말씀치곤 좀 어색하다. 처음으로 사무엘을 만나주셨으면 사무엘을 위한 계획을 말씀하시든가, 이스라엘을 위한 계획을 말씀하시든가 하는 게 일반적인데 처음 하시는 말씀이 엘리 제사장에게 이전에 말씀하신 저주를 확정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엘리의 두 아들로 인해 얼마나 진노하시고, 그 진노로 인해 어떤 심판을 하실 것인지는 이미 2장에서 엘리에게 말씀하셨다. 정황상 엘리에겐 모든 걸 바로 잡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아들을 심판하고 징벌할 권한과 능력은 있었다. 당시에는 왕이 없었고 사사가 다스리는 시절인데, 엘리는 사사이자 제사장이었으므로 모든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보다 아들을 선택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삼상 2:29)

 

이 저주의 약속은 추후에 전쟁에서 다 이루어진다. 두 아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고, 이때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기게 되며, 그 소식을 들은 엘리는 넘어져서 죽는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거라는 확인 사살하시듯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게다가 그게 부르신 사무엘에게 하시는 첫 말씀이었다. 그리고 이 일 후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이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로 인정했다.

 

엘리의 집안이 망하게 된 건 두 아들의 악행과 이를 방치한 엘리의 태만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엘리의 두 아들만 특이하게 범한 죄가 아니다. 이들의 죄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범한, 범했던 죄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인데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자기가 주인이 되어 아들을 감싼 엘리처럼 자기 인생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고 하시는 첫 일성으로 엘리와 두 아들에 관한 심판을 말씀하신 건, 사무엘 시대, 하나님께 드려진 아들로서의 삶은 이전 삶의 멸망 위에서 시작한다는 걸 알게 하려 하심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종말이 있고, 새 하늘이 열릴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전개다. 사람은 이전의 삶이 망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삶을 살 수는 없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목적으로 창조된 나실인이다. 그 하나님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명의 본성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생명은 고쳐서 달라지지 않는다. 다시 나야 한다. 그래서 거듭남이다.

 

엘리의 멸망은 오늘 내 안에 있는 옛사람의 멸망이다. 그 멸망이 있어야 사무엘과 같은 새로운 세계가 나에게 열린다.

 

사무엘은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다. 엘리와 두 아들은 옛사람의 모습이다. 옛사람이 망하지 않고 새 생명이 될 수는 없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불러 가장 먼저 엘리에게 경고한 저주의 말씀을 이행할 것이라 말씀부터 하셨다. 우리 안에 엘리와 그 두 아들의 악행과 같은 본성이 망하지 않으면 우리는 거듭난 생명, 하나님께서 뜻하신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었거나 아직도 있는 엘리와 두 아들의 본성이 망해야 한다. 그렇게 되는 걸 소망하고 기뻐해야 하는 게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바로 묵상하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나의 이익을 우선하고,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한 계획보다 자기가 세운 인생의 계획을 중히 여겨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며, 경건과 거룩함을 버린 옛사람의 모습이 모두 망해야 한다. 그렇게 나의 자아가 종말을 맞지 않으면 새 하늘, 그러니까 새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임하지 않는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안에서 선지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대표하는 엘리와 두 아들의 멸망에서부터다. 성경에서 이스라엘로 비유하시는 ''라는 한 자아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보다 나를 우선하며,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아닌 세상의 가치와 짝하는 음란을 모두 버리면서 내 삶이 하나님의 선지자와 같은 삶이 된다. 그게 바로 거듭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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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3)

사무엘 상 3장에 들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이니 당연히 하나님을 알고 만났을 것 같은 사무엘이 아직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건 살짝 의아스러운 부분이다. 어머니 한나의 서원대로 하나님께 드려져서 성전을 섬기며 자란 사무엘인데 여호와를 몰랐다니?

 

이 말씀들을 통해 사무엘에게는 하나님께 드려져서 성전을 섬긴 세월이 있고, 여호와를 만나 사사로,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세월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세월의 구분은 사무엘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다. 사실상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사무엘이 율법에 따라 성전을 섬겼던 것처럼 율법의 세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행위로 지키려는 노력을 신앙으로 아는 세월을 지난다. 이는 출애굽 여정으로 잘 대표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사무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표현이다. 물론 구약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호칭보다 여호와가 자주 사용되기도 하지만, 성경에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특별히 하나님의 정체성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 바로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의 신>이라는 걸 강조할 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된다.

 

성전을 섬기던 사무엘이 존재의 신, 여호와를 만나다.

 

그러니까 성전에서 섬기는 동안 사무엘이 하나님을 아예 몰랐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 존재의 하나님으로 알기보다, 율법과 행위로 섬기는 하나님으로 알았다는 말씀이다. 이는 오늘날 아니 어느 시대의 신앙인들도 예외 없이 그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한다는 말씀도 여기서 나온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해 봐야 행위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은 언제나 죄인이란 걸 알게 된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은 행위로 섬기는 게 아니라 관계, 존재로서 만나야 하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율법적인 신앙생활은 꼭 필요하다. 다만 그게 신앙의 전부거나, 일평생 그렇게만 산다면 그건 아주 불행한 일이 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책망하신 바리새인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광야를 거쳐야 했듯 율법적인 신앙은 복음으로 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삼상 2:26)

 

사무엘은 그 세월을 잘 보냈다는 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렀다는 게 이를 잘 증명한다. 여호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렀다는 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존재가 되었다는 걸 분명하게 증명한다. 비로소 하나님께 드려진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는 자리에 임하게 된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사무엘이나 삼손과 같은 나실인은 특별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나실인은 우리를 상징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누구나 나실인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 삶이 하나님이 뜻대로 살게 되는 걸 말한다.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이게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다. 나실인이 된다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을 예정하셨다는 건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 하나님께 드려지고,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되는 시작은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거치며 행위가 아닌 존재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며, 나는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린 사람이 된다.

 

이 영적 예배, 나를 나실인처럼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건 내 육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관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라고 선명하게 말씀하신다. 내 육신의 생각과 행동 모든 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진정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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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2:12-36)

사무엘이 태어나고 성전에 머무는 동안의 제사장은 엘리였다. 그런데 그의 아들 홉니(Hophni) 비느하스(Phinehas) 행실이 아주 나빴다. 성경은 불량자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불량자로 표현될 정도면 나쁜 행실의 종합세트겠지만 이를 정리하면 4가지 정도로 정리할 있다.

 

먼저, 제사의 제물을 가로채었는데, 이는 제사를 드리고 남은 제물을 제사장이 위하는 규례를 완전히 어긴 것이다. 제사의 규례로 본다면 번제는 남을 없고, 주로 화목제의 제물이 제사장의 것이 되었지만, 성경의 뉘앙스로 엘리의 아들은 제사를 가리지 않고 제물을 취했다고 보는 합당하다.

 

다음으로는 제물의 기름을 태우기 전에 고기를 요구하고 가져간 것인데, 이건 하나님보다 자기가 먼저인 넘어 하나님을 멸시한 행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행동이다. 이런 그들의 교만은 결국 백성들에게 요즘말로 갑질 행하게 했다. 이걸 세번째 행악으로 정리할 있다.

 

많겠지만 정리된 것에서 네번째는 성막에서 섬기는 여자들과 동침한 것인 이는 성전을 정결하게 유지하라는 율법( 15) 제사장의 성적 순결을 요구한 율법( 21) 정면으로 어겼다. 성경을 보면 엘리는 그리 악한 제사장이라고 하기 어려운데 아들들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타락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행은 단지 그래서는 되는 제사장 아들의 악행이 눈에 띄기 때문에 기록한 아니다. 이건 앞으로 전개되는 이스라엘 왕들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범하는 죄악을 대표한다. 물론 왕들에게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의 이야기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무엘상 첫번째 글에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모두 자기 인생의 왕이므로 우리가 범하는 역시 범주에 거의 속한다. 결국 엘리의 아들의 악행은 우리가 어떤 죄를 돌이켜야 하는지를 말한다. 또한, 한나의 기도에 나오는 대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하나님보다 자기가 우선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주신 신분을 자기 것으로 여기며 악행을 일삼고 음란한 삶을 엘리의 아들의 모습은 그들 만의 유니크한 죄악이 아니다. 이건 모든 사람이 범하는 죄다. 특별히 음란은 성적 문란으로만 아니다. 음란은 자기 짝이 아닌 것과 하나되는 모든 행위를 대표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을 자기 가치로 삼고 행하는 모든 음란이다.

 

그런데 주의 깊게 보면 관심을 끄는 있는데 그건 이들의 행위와 사무엘의 성장이 대조적으로 함께 기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묘한 교차의 시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치지 않았다는 말씀까지 하신다. 뭐랄까? 사람이 죄악을 행하는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준비하신다는 말씀하시는 듯하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삼상 3:3)

 

간단하게 정리하면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행은 구원받기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예비하신다. 한나의 간구와 서원으로 태어난 사무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우리를 위한 구원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있다. 성경을 이렇게 보면 은혜롭고, 놀랍다. 이렇게 사무엘의 일생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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